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영적 세계에서는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다 가진 자 같으나 주님 보시기에는 하나도 가지지 않은 자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건강을 가졌는가 아니면 지식을 가졌는가? 권력을 가졌는가 아니면 물질을 가졌는가?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서만 얻을 수가 있다. 자, 지금 나는 어떠한 영적 상태에 있는지 라오디게아를 통해서 주님이 내리신 처방전을 보라! 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1. 들어가며

  병원을 찾아간 환자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사가 진단을 잘못 내린 처방전 때문에 병은 낫지 않고 더 고생만 하는 것이다. 특히 수술을 해서 배를 갈랐는데 오진 때문에 다시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의사는 정확한 진단이 생명이다. 이것은 영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영혼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는데도 그 진단을 믿고 살고 있다면 그의 영혼의 문제는 더욱 더 악화될 것이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교회 곧 과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이사아 일곱교회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도 흡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과연 나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진단을 받아보고, 주님의 올바른 처방전에 따라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메시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실 요한계시록의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은 설교를 차지하는 본문이 있다면 오늘 본문일 것이다. "뜨뜻미지근한 교회"요, "물질이 주인된 교회"라는 주제로 많은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 더 알려진 본문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계3:20의 말씀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그림에서 특별한 것은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문은 밖으로만 열리는 문이기에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 수 없는 문이다. 그런데 문밖에서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 믿는 사람들에게 영접기도를 할 때에 이 말씀을 들려주면서 영접기도를 하곤 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이는 처음 예수믿는 자들을 위한 말씀은 아니며,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데도 어느샌가 자기도 모르고 예수님을 밖에 내놓고 자 곧 자기가 추구하는 것들로서 물질이나 명예와 인기 등이 주인되어 살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잘못된 정보는 무엇인가?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 가운데 잘못 알려진 정보가 최소 2가지 있다. 하나는 잘못된 예화 사용이요 또 하나는 이 교회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먼저, 이 교회가 뜨뜻미지근한 것은 이 도시에 흘러들어오고 있는 두 곳의 식수가 뜨뜻미지근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예화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이 도시에 오면서 뜨뜻미지근하게 되고고,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골로새의 차가운 냉수가 이 도시에 오면서 데워져서 뜨뜻미지근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팩트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의 식수는 이 도시로부터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니즐리"에서 직경 90cm되는 돌관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의미는 맞으나 예화가 좀 와전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이 교회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보통은 이 교회에는 황제숭배나 수호신숭배와 같은 우상숭배 강요가 없었으며, 그래서 고난과 핍박도 없었고 평온한 교회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 교회는 우상숭배와 황제숭배가 아주 만연된 교회였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도 그것이 우상숭배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가증한 행위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그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조금 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4.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처방전은 무엇인가?

  그래서 주님께서 내리신 최종적인 결론은 이 교회를 입에서 토해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16절). 더이상 이 교회를 품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 교회를 버릴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예수님은 문바깥에 서 게셨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처방전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것은 3가지였다. 

  첫째, 불로 연단된 금을 주님에게서 사라고 하셨다(18a절). 그래서 자신을 부요하게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회를 영적으로 진단해보면 매우 가난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가진단은 달랐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교회 성도들은 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이 도시에 있는 3가지 특징 때문이다. 그 첫번째 특징은 이 도시가 동서양의 무역로에 위치해 있어서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융업이 발달하였고 그러다보니 은행의 금고에 금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금 부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부자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지만 믿음이 큰 서머나교회가 부요하다고 선언하셨다(계2:8~9).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다보니, 자기들의 부자로 살게 된 것마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어떻게 되어서 부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이들도 다른 시민들과 똑같이 상업조직에서 수호신들을 경배하고 있었고, 제사에 바쳐진 음식을 같이 나눠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정금같은 신앙을 다시 소유해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그들이 우상 앞에 절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단지 "도시문화"라고 생각했고, "친교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순결하고 순수한 믿음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믿음은 주 예수님 이외에 신이 없다고 하는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 신도 있고 우리 신도 있는데, 다 자기 신을 잘 섬기면 되는거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믿음을 가진 자에게 우상은 없는 것과 같기에 그것에 절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잘못된 우상숭배의 교뢰가 교회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금같은 정련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자로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떨어져서 결국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께서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도록 흰 옷을 사라고 명령하셨다(18b절). 주님 보시기에 그들은 겉옷조차 입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옷들을 잘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 도시의 2번째 특징인 "모직 직물" 산업 때문이었다. 라오디게아가 위치한 메안더강 상류인 리쿠스 계곡에는 풀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양떼가 많았다. 그것도 검은 양떼가 많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흑양모산업이 발달하였고 그것으로 고가의 옷을 만들어 팔아서 수입을 올리고 있었으니, 당시 소아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부티나는 옷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걸치고 있었던 사람이 이 도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그랬다. 그러므로 자기 딴에는 자기들이 옷을 잘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드에서 가서 수호신을 경배할 때 예수님의 옷을 벗어놓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랬다. 영적으로 음란한 짓을 하기 위해 그들은 주님의 옷을 벗어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회개하여 검은 털옷을 벗고 예수님만이 구세주인 것을 믿어 흰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순결한 믿음을 얻으려면, 그들의 신앙의 열정을 타올라야 한다고 권면하셨고, 그들의 회개는 냉철하게 하여 단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계속해서] 열심을 내라. 그리고 [단호하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계3:19).

  셋째, 이제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멀어버린 눈에 바를 수 있도록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다(18c절). 이것은 이 도시의 세번째 특징과 관련이 있다. 이 도시는 의료기술이 매우 뛰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안과 의료기술이 뛰어났다. 왜냐하면 당시 이 도시에 "멘 카루"라는 신전이 있었고, 의료학교(오늘날로 치자면 단과대학과 같은 것이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치료의 신을 숭배하는 학교로서, 당시에 이 학교에 유명한 대학교수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드향료를 가지고 "안연고"를 만들었고, 히에라볼리에서 가져온 것으로 "부르기아 가루 안약"을 만들었으며, 기름을 섞어 "안약"을 제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몰라도 라오디게아 성도는 눈의 건강에 대해서만큼은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안약을 주님으로부터 사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영적인 것을 도무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았던 바울도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하나님에게 원수처럼 행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부자로 살고 있었고 부족함 없었으니, 자기들은 영적으로부터 부요한 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눈이 멀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말씀을 들어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이기는 자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영혼에 대한 진단다운 진단을 받고 정련된 믿음을 갖기 위해서 열심을 내면서 회개하여 다시 흰 옷을 입는 자들은 어떤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2가지 축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는 현재적인 축복이요, 또 하나는 미래적인 축복이 그것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다시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0절). 왜냐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주인으로 맞아들인 자들은 다시 주님과 교제가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적은 축복으고서, 주님께서는 장차 주님이 오실 때에는, 이기는 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21절).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이기고 승리하여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처럼, 이제는 그들이 이기는 자들이 된다면 주님의 보좌에 그들을 앉혀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요, "통치의 보좌"이기 때문이요, 주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위임하시고 또한 왕노릇할 것을 위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실행하셨으니, 지금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들을 위하여 심판과 통치의 보좌 24개를 더 만들어 하나님의 보좌 좌우 뒤편에 배치해놓으시고 계신다(마19:28, 계4:4, 딤후2:11~12). 그렇다. 뜨뜻미지근한 신앙에서 벗어나 순전한 믿음과 회개의 흰 옷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러한 축복이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6. 나오며

  주님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자신을 "아멘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다(14a절). 이는 예수께서 "아멘" 곧 "진실하시고 참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동안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허상을 진짜인 줄 알고 좇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육적으로 부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부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적인 부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것이며, 죽어서는 죄값에 따라 불못에 들어가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무나 오래동안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온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라고 소개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시면서 말이다. 말세에 과연 우리는 어떤 교회를 찾아가야 하는가? 첫째는 불순물이 하나도 들어가지 아니한 순전한 말씀을 전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둘째, 회개를 외침으로 흰 옷을 입게 해주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셋째, 영적 분별력을 길러주고 키워주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한다. 만약 그런 교회가 내 교회가 아니라면 그러한 교회가 되어지도록 날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않으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그 교회를 밖으로 토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10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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