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309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2009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제목] 아브라함의 처음으로

[찬송]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말씀] 12:1~4(구약14)

2009.9.1()

1. 서론

우리는 지난 주일날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던 사람의 두 가지 공통점에 대해 들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다 하나같이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부르심과 소명에 끝까지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들은 다 하나같이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겸손함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다윗이 그랬으며,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베드로가 그랬고, 사도요한이 그랬으며,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는 이 중에서 모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 소명을 부여받았는지를 살펴보았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그가 어떠한 축복들을 받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첫 소명의 모습 즉 하나님과의 첫 만남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축복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첫 번째 말씀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당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에 첫째, 그의 나이가 75세였으며, 둘째, 그에게 부인 사라가 함께 했지만 아직 자식이 없는 상태였으며, 셋째, 자기의 아버지와 친족들이 다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11:30,12:4,24:2). 하지만 그가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통해 주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늘의 별처럼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커다란 히브리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그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게까지 크게 되었으며,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어 자기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출산함으로써, 땅의 모든 민족들까지 하늘의 축복을 받게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가 순종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오는 본문 1절에 나와 있는데, 2가지입니다.

첫째,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보다 더 적극적인 명령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한 가지 면에서는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심히 걱정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받았던 말씀은 떠나라 그리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복을 받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고 그리고 가야 합니다. 성도들의 축복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취해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 성도의 바른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를 떠나야 하고, 또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1)그는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왜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을까요? 그것은 우선, 아브라함이 위치해 있는 그곳은 우상이 가득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좋은 이유에서입니다.

24:2-3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7:2-4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살고 있던 지역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이었는데(9:7, 7:2-4), 그때는 아카드인이 통치하는 우르 제3왕조의 시기로서,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은 약 4,000여종의 이방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그곳에 거주하다보니, 아버지조차도 거기서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이방신들까지 같이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자손들이 그곳에 계속 있다가는 하나님도 잊어버린 채 완전히 그 우상을 섬기는 데에 동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선 그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어디에나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가 그곳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오히려 그들에게 우리의 믿음이 빼앗기게 될 때에는 그 장소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장소가 있다면, 즉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이나 도박하는 데에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그런 장소는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버려야 할 것은 분명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거주하였던 제2의 고향인 하란조차도 하나님을 섬기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갈대아 우르에서 장가를 들었는데, 이복누이인 사라와 결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아버지 데라의 셋째아들이었습니다. 데라는 70세에 맏아들 하란을 낳았고, 120세에 나홀을 낳았으며,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습니다. 그때 데라의 맏아들 하란은 밀가이스가을 차례로 낳았으며, 데라의 둘째아들 나홀은 50년 먼저 태어난 자기 형 즉 하란이 낳은 첫째딸 밀가와 결혼한 뒤, 아람사람의 땅(=하란)으로 이동하여 거기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란은 롯을 낳은 뒤, 그만 갈대아 우르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데라는 손자 롯과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자기의 둘째아들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이동하였던 것입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 하란이 데라의 면전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자, 아버지 데라는 더 이상 그곳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데라 역시 하란 즉 밧단아람에 있던 나홀의 성으로 이동한 뒤 약 5년이 지날 무렵 205세의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제 자신의 조카 롯을 데리고 제2의 고향인 하란을 떠났습니다. 거기에 있다가는 그도 자신의 형인 나홀처럼 여러 신들을 섬길 위험이 거기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란은 팔레스타인과 갈대아 지방을 연결시켜 주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교통의 요충지요, 상업의 중심지였기에 그곳 역시 우상숭배지로서 월신(月神)을 섬기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나홀의 손자 라반은 드라빔이라는 가신(家神)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는 아람사람들이 결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신론자들이었음을 가르쳐줍니다(31:30~34). 그래서 아브라함은 친족들이 살고 있는 하란지역도 떠나야 했습니다.

2)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야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브라함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지역과 가족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물론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이방신들을 섬기고 있는 지역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살고 있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다 몰아낸 다음에 그 땅을 주시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바로 그 땅으로 이동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 그동안 자기 몸에 배어있는 모든 것 즉 문화, 관습, () 등을 바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서 자라온 환경은 갈대아 지역으로서 농경문화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브라함은 농경문화를 떠나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반유목민의 생활로 접어들어야 했습니다. 농경문화에서는 한 정착지에서 집을 짓고 거기서 농사를 짓고 일평생 살면 되지만, 이제 떠나야 할 곳은 반유목민 지역으로서 대부분의 생활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장막 안에서 양과 염소를 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을 믿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이제는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믿고 따르되,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꼭 보는 것처럼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요청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종적인 믿음에는 항상 복이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한 엄청난 것들을 하나님은 미리 다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더러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떠나야 할 곳은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주실 미지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번 특별새벽집회시에는 날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모든 복이 여러분이 것이 되길 축원합니다.

동탄명성교회

2009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제목] 다윗의 처음으로

[찬송]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말씀] 삼상16:6~13(구약434)

2009.9.2()

1. 서론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사모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쓰임받는 것도 어떤 사람은 한 가문을 일으키는 데 쓰임받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의 민족이나 국가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로서 쓰임받기도 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은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받은 인물들이지만, 아브라함은 한 가문의 족장과 먼 미래에 대한 씨앗으로서 쓰임받았다고 한다면, 모세와 다윗은 한 민족과 한 왕국의 지도자와 왕으로서 쓰임받은 인물들입니다.

그렇다면 통일이스라엘의 왕국의 2대왕이었던 다윗은 처음에 어떠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고, 그로 인해 그가 받은 축복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통해 여러분도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다윗이 화목제사에서 제외된 이유

다윗이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그의 나이가 약 15세되던 해에, 베들레헴 광야에서 그의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을 때였습니다(삼상16:11,17:15). 그때 그는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장차 왕이 될 선택받은 자로서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데, 그로부터 그가 왕으로 등극하기까지는 약 15년이 흐른 다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장차 왕이 될 사람으로 일찌감치 선택받은 것일까요? 사실 처음에 다윗은 왕으로 기름붓기 위해 찾아나선 사무엘 선지자의 화목제사에 초대되지도 못한 채, 선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장차 기름부음을 받을 왕의 후보에도 끼지 못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온 가족이 참여하는 그 화목제사에 초대받지 못했을까요?

첫째, 그의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아서 처음부터 화목제사에 초대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11).

삼상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당시 갑작스러운 사무엘 선지자의 베들레헴 방문은 그 마을의 장로들을 심히 걱정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평강을 위해 왔다는 사무엘의 말을 듣고 어느정도 안심은 되었지만, 화목제사에 초대받은 이새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 자란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 그 제사에 참여하였고 한 명씩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찾던 사람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이새에게 또 다른 아들이 없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새는 말하기를 아직 막내가 남아있기는 한데, 그가 별 볼 일 있겠습니까? 겨우 양이나 치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막내라는 단어는 원어상 가장 어린 자, 가장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연령과 신장에 있어서 형들에 비해 어렸고 좀 더 작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않고 중심(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1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보기에는 밖의 외모나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어떠한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면의 아름다움, 마음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갖추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좀 천히 여기는 직업을 갖고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11, 참고/46:34).

다윗이 살던 시대는 12지파를 중심으로 한 지파체제에서 벗어나 사울왕을 중심으로 한 왕정체제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아울러 양과 염소를 치던 목축문화에서 점차 농사를 짓는 농경문화가 혼합되어 가는 시대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유랑생활에서 벗어나 점차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착생활로 넘어가는 사회적인 대격변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농경문화의 주된 신()은 바알신이었는데, 그동안 이스라엘의 조상대대로 지켜온 목축문화와 그들이 섬긴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가 상호충돌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목축문화는 농경문화에 비해 다소 뒤떨어진 후진민족의 문화로 취급받고 있었고, 농경문화로 꽃을 피우고 있던 애굽사람들은 양을 치는 일을 변방의 오랑케들이나 하는 일로서, 가증히 여기는 경향이 아주 짙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새는 양이나 치고 있는 어린 자가 어찌 이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3. 다윗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진짜 이유

그렇다면 다윗이 하나님께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은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이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의 선을 보던 때에, 하나님께서 바로 그 아이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이미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하기 이전에 벌써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삼상16:1).

삼상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걔역한글:예선하였느니라) 하시는지라

그렇다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사무엘의 베들레헴 방문 이전부터 선택받은 것이었을까요?

첫째,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남들이 싫어하는 것조차 좋은 것으로 바꾸어 놓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총 8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중에서 7명의 자식은 농사를 짓는 일을 하도록 했지만, 오직 다윗은 가장 어렸기에 당시 좀 더 천히 여기는 양떼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축의 일은 사양산업으로서, 앞으로 장래가 총망되는 아들들에게는 절대 시켜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시키신 목축의 일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자신의 평생의 업()으로 알고 그것을 기쁘게 감당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치고 남들이 천히 여기고 앞으로 비전이 없다고 여기고 있는 그러한 일을 감당하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귀히 여겼습니다.

다윗은 그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점차 도시화되어 농경문화에 익숙해지는 것만큼 농경신인 바알신을 섬기기 십상이지만, 다윗은 양과 염소를 침으로서, 장막에 거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더 잘 섬길 수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좀 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일반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조차 기꺼이 감당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할만하지 않습니까?(13:22)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둘째, 그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각오하고 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줄 아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한 가지 일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어떤 모습일 거라는 대체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삼상16:34-35).

삼상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삼상17:37)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은 우리들이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양떼를 누가 지켜 냈습니까? 누가 양떼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영원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4. 다윗의 받은 축복

오늘날 우리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좋겠지만 우리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곳에는 쉽게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선을 보지 못해도, 남들이 좋아하지 않아도, 남들이 천히 여기는 직업이라도, 그 일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좋은 것이라면 기꺼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고픈 다윗의 마음을 알고는 첫째, 땅의 축복으로는 다윗의 자손에게 왕권을 대대로 허락해 주셨으며 둘째, 하늘의 축복으로서 하나님의 처소가 들어서는 성전자리를 다윗이 정한 예루살렘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셋째, 메시야가 오실 길로서 유다지파를 지명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번 집회를 통해 이러한 귀한 축복을 여러분의 소유로 취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2009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제목] 다니엘의 처음으로

[찬송]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말씀] 1:8~16(구약1231)

2009.9.3()

1. 서론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한 부류는 같은 혈통과 문화와 종교 공동체 가운데서 크게 쓰임받은 인물들입니다. 그러한 인물들로는 아브라함모세다윗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한 부류는 전혀 다른 혈통과 문화와 종교 공동체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크게 쓰임받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로는 요셉다니엘등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인물은 전혀 다른 혈통과 문화와 종교의 상황 속에서도 크게 쓰임받은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이방제국의 언어와 문화와 학문을 배워 거기서 고위관리를 지냈지만, 그가 가진 신앙까지 올곧게 지킨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다니엘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니엘의 삶을 통해, 불신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이방제국 바벨론에서 왕궁자문위원 후보로 선택받은 다니엘

다니엘은 분명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는 언약의 자손으로서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매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며,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심한 부패로 말미암아 나라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침략을 당할 때(B.C.605), 첫번째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은 이스라엘의 포로민 가운데 왕족과 귀족 중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을 갖추고 학문에 익숙하여 왕 앞에 모셔설만한 소년을 선발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피정복민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그들을 따라오게 하려는 정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여러 포로민들 중에서 왕궁 자문위원 후보로서 선발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3. 다니엘의 고민

그런데 그들이 바벨론의 왕 앞에 서기 위해서는 3년동안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당시 바벨론의 모든 학문과 언어를 익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왕이 지정해준 음식과 포도주를 마셔야 했습니다(1:5). 왕의 자문위원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바벨론의 모든 학문과 언어를 익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 왕이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는 심각한 종교적 충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음식규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말씀과 저촉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일반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겪게 되는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꼭 오늘날 우리가 회사생활을 할 때, 회사의 업무를 배우는데 있어서 더욱 열심을 내야 하겠지만, 2차 회식과 같이 춤추고 술마시는 파티에 과연 참석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절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문제입니다. 이때 다니엘은 어떻게 했을까요?

4. 다니엘의 현명한 대처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가 그 후보의 대열에 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 아닌가 하면서, 왕의 정책에 무조건 순종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입신양명 및 부귀영화를 택할 것인지에 대해 그는 심사숙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왕이 먹는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인해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1:8).

여기까지는 정말 잘 한 일입니다. 하지만 항상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을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무조건 과감히 그만둔다고 말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신앙을 지키면서도 세상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심사숙고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고민이 아니라 사실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과감히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기로 마음 먹었으나, 후보직을 무조건 그만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그가 안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해 정황을 다시 파악하길 원했습니다. 왜 왕이 그러한 규정을 만들어 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것이 결코 자신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 있는 문제가 아니라, 왕이 자신의 자문위원이 될 사람에 대한 건강상의 배려 차원에서 비롯되었음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방면의 책임자(환관장)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왕궁자문위원이 될 수 있는 길이 없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랬더니 어찌 되었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책임맡은 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1:9)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문제 앞에 신앙을 지킨다고 무턱대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연유된 것인지 지혜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이 과연 어떠해야 할 지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그것을 선택하지 않게 된다면 정말 신앙을 지킬 수 없어 때로는 그것을 그만 두거나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 3장에 나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금신상 숭배사건 같은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 두라평지에 세운 왕의 금신상에 과연 절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 같은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호히 우상숭배를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설령 그것 때문에 고난이 자신에게 닥쳐오고 죽음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딪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판단해 본다면, 얼마든지 그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수고는 전혀 하지 않은 채, 그냥 막무가내식으로 결정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늘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세상을 떠나 산중으로 들어가던지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17:14-15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살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살면서 그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할 자들입니다(5:13~14). 세상에서의 삶은 무조건 악한 것이며 그리고 무조건 사탄적이니 그것을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에 있어서 왕의 음식과 포도주의 문제는 다니엘의 신앙을 테스트해 보려는 문제가 아니라, 왕 앞에 서게 될 때, 남들보다 못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즉 건강상의 이유였던 것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1:10). 그래서 다니엘은 제안하기를, 자기와 자기의 세 친구들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는 10일동안 채소와 물을 먹게 한 다음, 다른 소년들과 비교하여 보아서, 그들보다 건강이 나빠지게 되면 모든 것을 환관장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어느덧 10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의 얼굴은 더욱 더 아름답게 되었고 살은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욱 더 좋아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음식을 맡은 자는 이제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는 왕의 지정된 음식과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먹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의 고민이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이처럼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5. 다니엘의 지혜로운 대처에 대한 하나님이 베푸신 추가적인 은혜와 그 결과

이로 인해,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는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까지 깨달을 수 있는 더욱 더 큰 지혜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는 왕궁자문위원으로서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환상과 꿈까지 해석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해주셨습니다.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이것으로 인해 다니엘은 첫째,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의 꾼 어려운 꿈들을 해석해 줌으로써, 일약 바벨론의 최고의 왕궁자문위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2:48). 그리고 둘째,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모든 신 중의 신이요, 모든 왕중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2:47). 즉 그는 한낱 이방제국의 포로민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제국에서 왕의 가장 신뢰받는 신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은혜받으면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직업을 때려치우고 주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회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까? 다니엘처럼 살면 안 되는 것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모세와 다윗같은 인물들을 찾고 있지만, 오늘도 세상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을 더 찾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지역과 회사에서 다니엘이 되어보십시오.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신앙을 지켜 나가는 자,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인정받고 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가 되어보십시오. 하나님은 다니엘처럼 뜻을 정한 인생에게,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여 기도하며 간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기회와 지혜를 반드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2009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제목] 베드로의 처음으로

[찬송] 519장 구주께서 부르되

 

[말씀] 5:1~11(신약 96)

2009.9.4()

1. 서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첫 제자로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을까요?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첫째, 자신의 조상의 계보를 파악할 수 없는 무명지파의 사람으로서, 왕을 배출해 낸 유다지파나 베냐민지파 사람은 정녕 아니었습니다. 둘째, 그는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고 장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던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자였을 것입니다. 셋째, 그는 갈릴리바다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습니다. 그의 본 고향이 벳새다(1:44, ‘고기잡이의 집’)로 나오는데, 이는 그가 전문적인 고기잡이 마을출신임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어부라는 직업이 당시 그리 결코 좋은 직업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의 백성이었기에 예로부터 바다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만 모여 있으면, 그것이 호수이건 바다이건 간에 무조건 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다는 신 즉 바다괴물이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결혼식을 대부분은 2번의 축복이 들어있는 셋째날(오늘날의 화요일)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셋째날에 바다 가운데서 뭍이 드러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처럼 혈통상, 신분상, 직업상 변변치 않은 그를 그리고 한 집안의 책임맡은 가장인 그를 왜 당신의 첫 제자이자 수제자로 부르셨을까요?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첫만남을 통해 그 비밀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행하신 첫 번째 사역은 먼저 요단강으로 가시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류의 모든 죄를 전가받기 위한 것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회당으로 가시어, 이제는 당신자신이 주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며, 눈 먼 자를 보게 하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하기로 예정된 바로 그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갈릴리 가시어 당시 베드로가 살고 있던 가버나움에서 집을 얻어놓고 거기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 율법을 가르치셨으며, 회당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고, 이어 시몬의 집에 들어가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도록 한 가지 묘책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무리들은 바닷가에 쭉 앉도록 하고 자신은 바다에 배를 띄워 그 배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해변가를 거니시던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정박되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때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씻으면서 다음날 고기잡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부들은 장차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될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두 척의 배 가운데 일부러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더러 배를 육지에게 조금 떼기를 청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아무런 군말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한참 말씀을 전하시더니, 이번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는 주님의 말씀(레마)에 의지하여 그물을 다시 한 번 내려보겠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3. 베드로의 처지와 그의 순종

하지만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러한 명령을 들어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는 지난 밤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 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매우 지쳐 있었으며 또한 낙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는 이제 막 고기잡이를 끝내고 그물 손질까지 다 해 놓은 상태였기에 다시 배를 띄워 깊은 데로 다시 간다는 것은 좀처럼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갈릴리바다는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2km나 되는 커다란 호수였기에, 자기가 있는 현재의 위치 즉 가버나움에서 다시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려면 한참을 다시 바다 가운데로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더군다나 이미 날이 밝아 낮시간이 되었는데, 갈릴리 바다의 지형과 고기를 잡는 시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전문어부로서 그는 신사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여간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기는 낮시간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까지 그물은 다 흰색 그물이어서 만약 낮시간에 그물을 내린다면 고기들이 알고 다 도망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항상 밤에 나가 고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인데도 베드로는 의아하게 예수님의 말씀에 겸허히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까요? 첫째, 그는 일전에 한 번 자신의 동생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베드로라는 바꾸어주시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안드레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시켜 주었을까요? 바로 메시야입니다.(1:35~42). 둘째, 그후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느날은 일부러 자신의 집에 들어가 열병을 앓고 있는 자기의 장모를 고쳐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4:38-41). 셋째, 그날에는 메시야라 일컬어지던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배려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미 범상치 않은 인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배도 기꺼이 빌려줄 수 있었고, 피곤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훤한 낮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던 것입니다.

4.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한 이유

그런데 이게 어찌된 것입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가 그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무게로 따지자면 3/4톤 정도이며, 분량으로 따지자면 어부들이 2주동안 잡아야 잡을 수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배까지 불러다가 두 배에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는 상식 이상의 행동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예수님께서 고맙다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절을 하든지 사례했을텐데, 그러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다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더니, 주님, 나를 떠나주세요. 나는 죄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고백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첫째, 신분상 아무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주님께서 몇 번이고 찾아주셨지만 그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선생님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바닷속까지 훤히 꿰뚫어보시는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니신 분이자 메시야이심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베드로를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의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5:10-11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주님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시어 그를 주님의 첫제자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5. 결론

이처럼 죄많은 사람이 처음부터 주님을 그저 따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는, 자기에게 의미심장한 새 이름까지 지어주며 관심을 가져주신 주님을 뒤로한 채,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일부러 자기의 동네에 오시어, 열병으로 누워있는 자신의 장모를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은 일부러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와 고기잡이의 기적을 통해 그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주저함과 무능력을 보시고도 또다시 찾아와 다시 우리를 격려해주시고 괜찮다 하시며 주님의 제자로 불러주시는 그러한 분입니다. 지난 날에 실패했습니까? 주님을 모른채 살아왔습니까? 괜찮습니다. 이제 다시 베드로처럼 시작해보십시다. 이제 여러분도 위대한 주님의 제자로 쓰임받을 수가 있습니다.

2009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제목] 사도바울의 처음으로

[찬송] 469장 내 주 하나님

 

[말씀] 9:13~19(신약 202)

2009.9.5()

1. 서론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어제까지 구약의 네 사람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니엘과 신약의 한 사람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으며, 어떻게 쓰임을 받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상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언제 주님을 만났는가보다는 그가 어떠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났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첫 만남이 일생의 그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했고, 또한 그들의 사역의 한계를 결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 광야에서 목자로서 훈련을 받았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베드로 사도는 또한 어떻습니까? 그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이자 한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부름받은 이후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12사도 중에서 대표사도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떠한 상태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그의 사역은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었을까요?

2. 사도바울은 어떻게 쓰임받았을까?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것으로 쓰임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던 것들이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져 그것으로 쓰임받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사와 달란트 그리고 자신이 경험들까지 주님 안에서 새롭게 되어 고스란히 쓰여졌습니다.

왜 우리 어린아이들과 학생 때에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때로는 아주 어릴 적부터 전공분야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어느날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받게 되었을 때,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주님께 그대로 쓰임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사울이 사도바울로 부름받았을 때 그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리고 그후 그는 과연 어떻게 쓰임을 받았습니까?

첫째, 율법을 엄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히 있는 유대인 율법 학자이자 율법 연구인이었습니다(22:3, 고후11:22, 3:5~6, 1:14).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예루살렘)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사도바울은 당시 베냐민지파출신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베냐민지파사람이라 함은 지조있는 혈통과 가문출신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그가 바리새인이라 함은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은 자임을 가르쳐줍니다. 사도바울은 당시의 유명한 교법사 즉 율법선생인 가말리엘로부터 사사를 받고 있던 그의 제자였습니다(5:34). 성경학자에 의하면 당시 가말리엘은 유대인들로부터 라반(우리의 랍비)’이라고 하는 최고의 칭호로 불리어진, 일곱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웠다는 것은 그 누구에 못지않게 율법에 정통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그가 배웠던 율법교육은 예수님을 메시야이자 구약에 약속된 자손으로서 재해석하는 데에 고스란히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의 율법말씀에서 과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으며,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는가를 정확히 밝혀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깨달은 말씀들은 고스란히 성경의 기록으로 남겨졌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3개 언어 즉 로마어인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구사할 줄 아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21:37-40, 22:25~28).

21:37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22:27-28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그가 태어난 곳은 로마의 한 도시인 다소(tarsus)’였고, 그의 부모님은 그를 언제부턴가 예루살렘에 유학을 보내어, 율법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태어나면서 당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 세계에 다니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방인에게까지 주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로 쓰임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는 무할례자의 사도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2:8).

셋째, 그의 보조직업은 길리기아 다소의 출신답게 장막만드는 일 즉 텐트제조업을 하고 있었습니다(18:2~3, 21:39). 그가 태어난 길리기아 성의 다소라는 도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중심지로서 학문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시리아와 중앙 소아시아 사이의 중요한 상업 지역으로서 특히 양모와 가죽같은 피혁제품의 가공무역도시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그곳에서 생활함으로써 부모에게 자연스럽게 장막만드는 일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막만드는 기술은 사실 유목민이었던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던 기술로서, 이제 사도바울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직업이 아니라 텐트를 제조하는 업을 가짐으로서 그가 앞으로 하나님의 장막이라 일컬어질 교회가 과연 어떤 존재이며, 그 교회가 제대로 건축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그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 그리고 교회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글로써 표현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본 교회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천사들도 절대 살펴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3:2-11).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려면 사도바울이 기록한 신약성경을 꼭 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넷째, 바울은 부름받을 당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핍박하는 데에 최전방에서 진두지휘했던 인물로서, 자기 딴에는 하나님 섬기는 일에 매우 열심을 내었던 인물이었습니다(9:1~2,15~16).

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그는 한 번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일에는 목숨을 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 일어난, 자기 딴에는 이단이라 생각하는 그리스도교회를 핍박하고 잔멸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로 인해 생겨진 대표적인 희생양이 바로 스데반집사의 순교사건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핍박의 행위는 결국 자신에게도 엄청난 고난과 핍박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죽음을 각오하며 복음을 전하던 그의 열정도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얼마나 죽을 위험에 처했는지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고후11:23-27).

3. 결론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 주님 앞에 쓰임 받을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 앞에 쓰임받게 되기까지 얼마나 준비를 했는가가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역량의 문제인 것입니다.

당신은 주님 앞에 쓰임받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준비하고 있습니까? 마치 예수님께서 공중에 임하실 때에, 언제 주님이 올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에 그때 들림받을 수 있는 성도로 준비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듯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실 날마다 준비하는 훈련생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인격을 준비하고, 전할 말씀을 준비하고, 기름등불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준비되지 않은만큼 쓰임받게 됩니다. 다시 표현하자면, 사람은 준비된 그릇만큼 쓰임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율법에 따라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열쇠들을 주셨기에 그는 유대인들을 회개시켜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세우는 데에 크게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 대해서는 인색했습니다. 머리로서는 깨달아지는데, 가슴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열려진 사고를 가진 사도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사도바울 중에 누가 더 유대인 중의 유대인답다고 생각하십니까? 신분상, 혈통상, 종교적으로도 보더라도 그것은 아마 사도바울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처음으로 불러주던 다메섹도상의 신비체험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우주적인 것으로서 시대를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하며, 인종을 초월하고, 남녀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전파하게 되었고, 또한 이방인들에게까지 기꺼이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사도바울은 베드로에 비해 사람을 회개시켜 구원얻게 하는 데에 숫자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베드로는 한 번에 3천명, 5천명도 회개시켰지만, 바울은 고작 12명 정도 구원시킨 것이 가장 많이 전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역자들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 모양대로 쓰임을 받고 저 사람은 저 모양대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어떤 분량만큼 쓰임받기를 원합니까? 크게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의 역량을 키워 나가십시오. 그리고 훈련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준비되어 가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2009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제목] 사도요한의 처음으로

[찬송] 542장 구주예수 의지함이

 

[말씀] 4:17~22(신약 5)

2009.9.6()

1. 서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가는 데 있어서 굳이 한 사람만을 고집하며 사용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방면에서 일해 줄 또 다른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탄생시키는 데에는 천국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필요했지만,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까지도 다 포용할 수 있는 열린 사고를 가진 자이자, 율법의 전문가인 사도바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들에게는 교회사역의 최종완성품이자 새예루살렘성의 거주자들에 관한 하늘의 이상이 부족했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사역의 완성을 위한 사역자가 또 한 명 더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다름 아닌 사도요한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제 오늘은 베드로와 함께 사역을 시작했지만, 교회사역의 최종완성을 위해 부름받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요한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2. 사도요한은 그물을 깁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여러 사역자들과 신약의 사역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께 부름받을 당시 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가 그들의 사역과 사역의 방향까지 결정지어 주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과 사회의 우상 숭배 문화 속에서 괴로워하던 아브라함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으며,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치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근 40년간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까지 이끄는 지도자로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았던 사도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해줄 수 있었으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자로 쓰여졌습니다.

엊그제 새벽 우리는 베드로가 어떠한 상태에 있다가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그물을 던지다가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5:1~11,4:18). 그러므로 그의 주된 사역은 사람을 낚는 즉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같이 어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성격이 다른 측면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상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4:21-22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는 아버지의 배에서 그물을 깁다가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깁다라는 말은 원문상 부서지거나 찢어진 것을 본래의 용도에 맞게 고치거나 수선하거나 준비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의 사역은 누군가를 돕되,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여 보충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해 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래에서처럼 3가지 측면에서 그물을 수선하고 보충하는 사역자로서 크게 쓰임받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예수님의 사촌동생으로서, 예수님께서 다하지 못한 부모공경의 자리를 떼우고 보충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3명의 제자들을 더욱 더 가까이 하셨는데, 그들은 베드로야고보요한이었습니다(8:51,9:28, 14:33). 특별히 이 세 사람이 더욱 더 주님 곁에 가까이 있게 된 이유는 아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일부러 찾아가 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세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1:35~42). 이중에서 야고보(‘발꿈치를 잡다’)와 요한(‘여호와의 은혜’)은 형제간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세베대(’여호와의 선물‘)’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잘 알려진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서, 마태복음서의 독자(讀者)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왜냐하면 세베대만 가버나움 뿐만 아니라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 따로 집을 갖고 있었으며(19:27), 휘하에 품꾼들까지 거느리고 있었던 부자였기 때문입니다(1:20). 그리고 어머니는 살로메였는데, 그녀는 아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동생일 가능성이 매우 큰 인물로서, 예수님 곁에서 늘 예수님을 돕던 여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27:55~56, 19:25, 15:40,16:1). 그녀는 때로는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자기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주기를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도요한은 그의 아버지가 예루살렘과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제사장가문과도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18:15). 그것으로 인해 사도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제자였지만 사촌형제였기에 모든 제자들이 버리고 떠난 십자가의 그 자리를 유일하게 지킬 수 있었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인 자신의 이모인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다른 제자보다도 먼저 십자가를 경험한 자였기에, 마리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봉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목회지는 에베소라고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도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실 때 주님께 가장 걸리는 문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홀로 남겨진 예수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의 부친은 이미 돌아가시고 없었기에, 어머니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을 것에 뻔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두고 떠나가야 하는 자식의 찢어지는 마음을 과연 누가 대신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아래에 있던 사도요한은 아들의 빈 자리를 메워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모든 사도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어 사라지고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무려 반세기정도 이 세상에서 더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항상 베드로 사도 곁에 있으면서 그의 전도사역을 보충하고 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했는데, 그는 주님께서 천국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 위치에 서서 성령의 인도하에서 교회를 세우는 베드로의 일에 매우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는 다락방에서 동심합의로 기도했으며, 오순절날에는 함께 일어나 복음을 전파했고, 성전미문입구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도왔으며, 백성들에게 부활의 간증을 했습니다. 후에 함께 감옥에도 갇히기도 했고,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함께 가서 성령받기를 위해 기도로 협력했습니다.

셋째, 다른 성경저자들이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였으며, 특히 베드로와 사도바울도 언급을 했지만 많이 혼란을 초래했던 종말에 관한 부분을 완전히 떼우고 보충하였습니다.

그의 보충하는 사역 가운데 가장 하이라이트는 신약성경에 대한 보충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시며 믿는 자의 생명의 양식이 되심을 아는데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복음서들로서 그들은 예수님을 이며 이자 사람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보여진 하나님이시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 삼위의 한 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요한의 글은 사실 땅에 있는 예수님을 그분이 원래 있던 하늘로 안내했던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요한은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했으며, 이 생명을 가진 자들의 교통에 대해 더욱 더 전진된 빛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일1:2-3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는 요한서신서를 통해, ‘거듭남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명이 씨의 형태로서 우리들 마음속에 분배되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3:5,요일3:9), 우리가 습관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도 하나님의 신성한 씨가 우리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씨 때문에 아무리 악한 자라도 도무지 우리를 만질 수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요일5:4).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는 사도요한을 통해 교회의 궁극적인 완성은 결국 새예루살렘의 주인이자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 알게 되었으며(21,19:7~8), 종말에 나타날 모든 일들 즉 자연적인 재난과 666을 통한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그의 멸망(13~18) 그리고 천년왕국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었으며(20:1~10),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살 자가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21~22). 이는 그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루살렘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우리의 모든 삶이 주님의 사역을 위한 귀한 재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드릴 것이 없다고 너무 좌절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주된 사역자가 아니라 협력자라고 너무 자기를 비하시키지 마십시오.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심지어 사도요한은 인척관계와 친분관계마저도 거룩히 쓰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특히 사도요한과 야고보와 베드로가 주님의 첫 제자로서 그리고 주님께 더 가까이 서 있는 제자로 쓰임받게 된 이유가 그들이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자 하여 그분을 찾아간 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도 잊지마십시오. 우리의 조그마한 정성까지도 주님은 모른채 하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찾아와 주시어 우리를 주님나라의 중요한 사람으로 쓰시는 그분 앞에 여러분 자신을 드리십시오. 여러분도 거룩한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2009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제목] 그러나 갈렙처럼

[찬송]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말씀] 14:4~10(구약 218)

2009.9.7()

1. 서론

우리는 지난 일주일동안 구약의 인물 4명과 신약의 인물 3명을 통해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받은 인물의 처음과 그들의 삶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특히 처음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으며, 그때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갔을 때 그들은 과연 어떻게 크게 쓰임받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다윗와 다니엘. 또한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이들은 때로는 나이 차이도 있었으며, 직업도 달랐고, 부름받은 환경도 달랐지만 공통점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끝까지 충실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에 끝까지 겸손히 임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둘째, 이들이 주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이들이 살았던 과거의 모든 환경들 즉 그들의 가진 재능과 은사와 신분, 직업, 성격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귀중한 도구로 쓰여졌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셋째, 무엇보다도 이들은 모두 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왕국 즉 천국을 건설하는 데에 귀하게 쓰임받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다 이들처럼 그렇게 크게 쓰임받을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오늘 만나게 될 갈렙처럼은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제일의 지도자나 왕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유대인의 혈통을 지닌 자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그것도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았던 헤브론에 기업을 분배받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갈렙,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과연 어떻게 했길래,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에게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었고, 또 하나는 실천적 믿음 즉 행함이 그것입니다.

2. 이방인인 그가 유대인과 정탐꾼이 되기까지

그의 이름은 민13장에, 12정탐꾼의 한 사람으로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는 과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해서는 민13장 이후의 기록들 가운데 비로소 찾아볼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결코 순수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13:3,6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사람이라 6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32: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그는 그나스(the Kenezite) 족속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럼, 그나스 족속이란 어떤 족속이었을까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창세기 15장의 기록에 따르면, 그나스 족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원래 살고 있는 한 족속으로 나옵니다(15:18-21). 하지만 그나스 족속이었던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유다지파의 족장이 되어 바란광야 가데스바네아에서 장차 그들이 차지할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12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대체 그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기에 이방인이었던 그가 유다지파의 사람이 되었고, 유다지파의 대표로서 정탐꾼이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가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탐꾼의 대열에 참여했다고 한다면, 우선 우리는 그가 얼마다 성실한 자였으며, 충성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신앙이 과연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하는 고백들 속에서, 그의 믿음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기서 그가 한 말 중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즉 창세기에는 아예 그러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낼 때에 호렙산 떨기나무 가운데서 처음으로 사용하신 단어입니다(3:8). 즉 갈렙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던 자였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해, 오늘날 누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인 천국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에 속한다해도 별로 상관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는가가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갈렙이 얼마나 믿음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정탐 보고 속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정탐꾼들이 올라가서 40일동안 정탐하고 온 땅은 이스라엘의 최남단 아래쪽에 위치한 바란광야의 가데스 바네아로부터 중앙산지를 따라 네게브로 올라가서, 헤브론과 예루살렘, 세겜과 하솔을 따라 갈릴리 북서쪽에 위치한 하맛 어귀인 르홉까지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그들은 중앙산지의 좌우인 지중해 해변과 요르단까지 살펴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들이 발견한 가장 큰 걸림돌은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당시에 거인족에 속하는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에 비하면 자기들은 스스로가 메뚜기와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고하기로는 땅과 나무와 성읍은 참 좋지만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주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절대 그들을 쳐서 정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13:31~33)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보고는 백성들을 낙심케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심지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때 갈렙은 분연히 일어나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을 주실 것이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보호자가 이미 그들에게 떠나갔고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믿음의 보고자 갈렙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4:22-24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3. 그가 약속의 땅을 받기까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실제 그 땅에 들어가서 기업을 분배받는 것은 믿음에 따른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갈렙이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갔던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될 것을 약속받은 때는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14:7). 이제 그가 여호수아의 인도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그 땅 전체를 하나씩 하나씩 빼앗게 되었을 때, 그가 발로 밟고 온 헤브론 땅은 아직까지 난공불락의 요새로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에 여전히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85세의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헤브론산지를 자신에게 약속대로 분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땅을 분배받았으며, 실제로 그곳에 쳐들어가 그땅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들을 쫓아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실천적 믿음입니까?

14:10,1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그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부여받은지 무려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는 여전히 그 땅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땅에 대한 그의 소망은 과연 누가 꺾어놓을 수 있었을까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령의 그의 나이도 그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4. 결론

그렇습니다. 그는 평생 2인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들려준 말씀을 신실하게 믿고 받아들였으며, 여호와께서 그의 나이 40세에 했던 약속을 85세가 되기까지 붙잡고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그는 그 약속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의 순결한 믿음과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는 그의 열정과 그의 변함없는 실천적 믿음은 그로 하여금 약속의 땅의 기업을 차지하게 해 준 요인이 되었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지난주간에 살펴본 크게 쓰임받은 7명의 지도자들은 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갈렙처럼은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갈렙처럼 해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과 행동하는 믿음을 우리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어디 한 번 해 봅시다. 2학기 때에 여러분의 믿음이 한층 더 성장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동탄명성교회

< 축복기도와 축사 >

이제 제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와 축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관련사항을 이야기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서주십시오. 순종할 때 복이 임합니다.

 

1. 육체의 약함이 있는 분들 - 약한 부분에 성령이 함께하시는 자기의 손을 얹으십시오.

하나님 우리 육체의 약한 부분에 손을 얹었습니다. 주의 손이 내 손이 되어 이 약한 부분을 고쳐주시옵소서.” “제가 이제 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모든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해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1)두통, 치통, 생리통은 고쳐질지어다.

2)머리와 뇌와 목과 관련된 모든 질병은 깨끗이 고쳐질지어다.

3)각종 암덩어리는 쪼그라들고 없어질지어다. 기억상실증은 회복되고, 어눌함은 고쳐질지어다.

4)축농증은 사라지고, 아토피는 깨끗해질지어다.

5)허리 디스크는 재생되며 뼈는 제 위치로 돌아갈지어다.

6)여자의 자궁과 남자의 요도와 방광과 그리고 심장혈관계 질환은 고쳐질지어다.

7)고혈압은 내려가고 저혈압은 정상을 되찾을지어다.

8)피는 맑아지고 통증은 감소되며 심장박동은 정상이 될지어다.

9)무릎과 관절과 허리와 목뼈에 있는 물렁뼈는 재생되고, 통증은 사라질지어다.

10)육체의 질병을 일으키는 모든 귀신들아, 우리 성도들에게서 떠나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11)정신적 육체적 심리적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모든 요인들은, 우리 성도들에게 떠나갈지어다.

12)시력은 좋아지고, 시신경이 회복되며, 눈은 밝아지며, 평행감각은 회복될지어다.

13)당뇨와 합병증은 치료되고, 신부전증은 고쳐질어다. 이제 병에서 완전히 놓여 건강할지어다.

 

2. 자녀와 가정에 문제가 있는 분

오 하나님, 우리 자녀들과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 손에 있을 때에는 내 맘대로 했으나 이제는 우리 자녀가 내 것이 아니오니, 주여, 우리 자녀들을 맡아주시옵서. 또한 상처로 얼룩진 우리 가정을 치료해 주시옵소서.”

내가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1)부모의 마음과 멀어진 자녀는 그 마음이 가정으로 돌아올지어다.

2)깨어진 가정은 하나되고, 불협화음은 제거되며, 시기와 미움은 사라질어다.

3)불화를 일으키고 불신을 조장하는 모든 악한 영들은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서 떠나갈지어다.

4)자녀들은, 날마다 하늘의 지혜와 명철이 임할지어다.

5)자식들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해야할 도리를 깨닫고 주님께 헌신할지어다.

6)자녀들에게는 좋은 친구가 붙고, 훌륭한 선생님을 만날지어다.

7)결혼 못한 자녀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할지어다.

8)우리 교회 자녀 중에서 세계를 움직일 지도자가 배출될지어다.

 

3. 사업장이나 물질에 기도제목을 갖고 있으신 분

1)세상에 흩어진 모든 물질에게 내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성도들 사업장으로 몰려올지어다.

2)하늘의 천사들아, 물질을 모아 우리 성도들의 사업장에 쏟아부을지어다.

3)성도들에게 물질의 궁핍함은 사라지고, 재물의 풍성한 축복이 임할지어다.

4)거래처는 늘어나고 일감은 생겨지며, 지금의 십일조는 배로 늘어날지어다.

5)기업의 황충은 사라지고, 좀먹는 악령은 떠나가며, 날마다 돕는 손길은 붙을지어다.

, 주님 나의 육체적 약함을 고쳐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가정에 화목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사업장에 물질에 넉넉함에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말씀대로 믿고 살겠사오니, 역사해 주시옵소서.”


  1. No Image 18Dec
    by 갈렙
    2014/12/18 by 갈렙
    Views 3253 

    당신의 높이 곧 자존감을 조정하라(엡2:1~10)_2010년 9월 특별새벽집회 설교원고(전체)

  2. No Image 18Dec
    by 갈렙
    2014/12/18 by 갈렙
    Views 3104 

    우상숭배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라(고전10:14)_2014년 9월 특별새벽집회 설교원고(전체)

  3. No Image 18Dec
    by 갈렙
    2014/12/18 by 갈렙
    Views 3178 

    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설교원고_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4. No Image 18Dec
    by 갈렙
    2014/12/18 by 갈렙
    Views 2911 

    2012년 9월 특별새벽집회 설교원고_회복 변화 그리고 도전(II)(요4:21~24)

  5. No Image 18Dec
    by 갈렙
    2014/12/18 by 갈렙
    Views 3066 

    2011년 9월 특별새벽집회 설교원고_다시 쓰는 일기장(창47:1~12)

  6. No Image 18Dec
    by 갈렙
    2014/12/18 by 갈렙
    Views 3099 

    2009년 9월 특별새벽집회 설교원고_처음으로 돌아가자(창12:1~4)

  7. No Image 17Dec
    by 갈렙
    2014/12/17 by 갈렙
    Views 3383 

    2008년 9월 특별새벽집회 설교원고_주여 우리를 도우소서(스1:1~4)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방문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