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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다시 쓰는 일기장

 

[제목] 야곱의 일기장

[찬송] 338장 내 주를 가까이

 

[말씀] 47:1~12(구약 75)

2011.9.1()

1. 서론

여러분은 언제 일기를 써보셨습니까? 이제는 통신수단의 발달로 인해 편지를 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대방에게 직접 전화를 걸기보다는 핸드폰의 문자메시지 기능을 사용하여 글을 써서 보내는 일이 참 많아졌습니다.

 

2. 일기(日記)란 무엇인가?

1)일기란 하루일과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일기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요? 하루의 일과를 그냥 나열하듯이 그렇게 써 내려가는 것이 일기일까요? 그것은 일기가 아닙니다. 일기란 하루의 모든 일과를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가장 재미있었거나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자기만의 심경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복음서를 일기의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십시다. 사복음서는 모든 일과를 시간적으로 나열하여 기록하지도 않았으며,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들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화장실에 가셨다는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 사택에서 매일 아침 무슨 반찬에 무슨 식사를 했었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기의 고향을 떠나 가버나움의 어느 집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처음에는 줄곧 혼자서 사셨기에 분명 혼자서 음식을 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혼자 자취생활을 하셨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빵을 굽고 그리고 반찬을 마련하셨는지 전혀 성경은 기록하지않고 있습니다. 또한 조금 지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 그때도 누가 도와주었는지 아니면 제자들이 식사 당번을 정해서 식사를 준비했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과는 하루의 삶에 어떤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일기란 하루의 일과는 다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 그날에 가장 인상 깊었고 행복했거나 슬펐던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의미 있게 기록하는 것이 바로 일기인 것입니다.

2)그런데, 일기란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는 대목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혹 일기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반성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루의 삶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사실 우리는 더 좋은 내일을 기약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기를 쓰는 것의 장점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부족했었나 혹은 무엇이 지나쳤나를 돌아보고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오늘과 같은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그것은 일기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번 특별새벽집회의 주제를 다시 쓰는 일기장으로 주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생활에 지쳐,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제대로 가고는 있는지, 지금쯤 어디에 와 있는지는 조금이나마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특별새벽집회가 여러분의 삶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성경에서 자기자신을 가장 많이 돌아본 사람들

일기의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살펴봅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돌아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저는 세 사람을 정해보았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통일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약의 인물로서 사도바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으며, 야곱은 12명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 외에도 자기 자신을 돌아본 사람이 훨씬 더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모레까지 우리는 이 세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우리의 인생도 같이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 130세에 깨달은 야곱의 인생 드라마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나안의 기근 때문에 자기의 아들들을 애굽 땅으로 보내 양식을 구해오게 하던 야곱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열 한 번째 아들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야곱은 요셉에 의해 애굽왕 바로에게 인사하러 갑니다. 요셉은 먼저 형들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입니다. 그러자 바로는 요셉의 형들을 청원을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양떼를 치면서 살 수 있는 좋은 목초지의 땅인 고센 땅에서 선물로 줍니다. 그러자 요셉은 이제 자기 아버지를 인도하여 바로 왕 앞에 서게 합니다. 그때 바로가 묻습니다. 당신의 나이가 얼마나 됐소?” 야곱이 말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입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이는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합니다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조금은 다를 수는 있어도 야곱의 고백과는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 여깁니다. 우리에게는 첫째, 야곱처럼 욕심도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아브라함의 언약의 계승자가 되지 못하고 버려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 장자권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간교한 방법을 동원하였습니까?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은 정든 고향산천을 떠난 타향살이를 무려 20년 동안이나 하게 되었고, 살아 생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둘째, 야곱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서 하나님께 떼를 쓰며 철야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에 벌써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얍복 강가에 남아 밤이 새도록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기도에 매달렸든지 자신의 환도뼈가 뒤틀린 줄도 잘 몰랐습니다. 또한 셋째로, 자식 때문에 속도 썩었습니다. 늦게 낳은 아들 요셉을 아끼고 사랑하였지만, 그 아들이 사자에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요.

그런데 이제 애굽땅에 들어와 보니, 자기가 그처럼 매달리고 힘썼던 모든 것들이 다 자기의 욕심 때문에 더 꼬이고 꼬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장자권은 이미 어머니가 태중에 잉태하고 있었을 때 이미 자신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었으며(25:23), 형의 분노 때문에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철야기도를 해서 형 에서의 마음이 봄 눈 녹듯이 녹은 줄 알았더니,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군대인 천사들을 보내어 형 에서의 마음을 녹여놓았던 것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32:1~2). 또한 자기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잘 키워보겠다던 요셉이었지만 결코 그를 지켜주지도 못했으며,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으로 미리 보내, 자신의 모든 가족들을 부양할 준비를 해 둔 것임을 애굽땅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45:7~8).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나이가 13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인생관이 바뀌게 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인생에서 남을 축복하고 베푸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몸부림치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도록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생역정을 통한 숱한 체험을 통해 야곱의 심령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30세부터 향년 147세까지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심을 믿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즉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 위탁하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으로 그 인생을 바꿔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을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가 빼앗고 움켜쥔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까? 내게 소중한 것들을 우리가 지키려 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지켜지는 것이었습니까?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전심으로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의 뜻대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살아갑시다. 남을 축복하는 인생, 그것이 곧 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고, 남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011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다시 쓰는 일기장

 

[제목] 다윗의 일기장

[찬송]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말씀] 삼상17:41~49(구약 438)

2011.9.2()

1. 서론

어제 우리는 일기(日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일기란 일과를 마치고 난 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나 사건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기는 때로는 자기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하나의 예로서, 나이가 1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자신을 회고하는 야곱의 일기장을 한 번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소년이었던 시절에 다윗이 기록한 어느 일기장을 한 번 들여다 보기로 하겠습니다.

 

2. 엘라골짜기 전투

때는 바야흐로 B.C.1048년경, 이제 이스라엘에도 드디어 왕이 생겼습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습니다. 가끔씩 사사들이 일어나 그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주변국들은 다 왕이 있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겸손하면서도 키가 크고 용감한 사울을 왕으로 세우도록 허락하셨고 사울도 서서히 왕권을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숙적은 바로 블레셋 족속이었습니다. 지중해 해안가를 중심으로 길다란 영토를 소유한 블레셋 민족은 늘 호시탐탐 남유다를 노렸고 또한 남유다지역을 집중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라 골짜기의 전투도 그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투입니다.

이때 블레셋진영과 이스라엘사람들은 상수리나무가 가득한 엘라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진영을 벌이고 있었는데, 블레셋 진영에서는 싸움돋우는 어떤 자가 나타나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라는 친구였는데, 그는 기골이 장대하여 키가 여섯규빗 한 뼘(2m90cm)이었고, 입은 갑옷의 무게만도 57Kg이나 되었으며, 그의 어개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며, 그의 창자루의 모습은 마치 베틀채와 같았고, 창날의 무게도 6.9kg이나 나가는 아주 무시무시한 장수였습니다. 그는 사실 어려서부터 전쟁훈련을 받은 용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감히 그 앞에 나아가 싸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을 위시로 하여 부하장수들, 그리고 온 군인들 모두가 다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골리앗은 40일동안 날마다 이스라엘 앞에 나아와 하나님과 군인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러자 심한 낙담이 석양의 노을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리워졌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나타났습니다. 그에게는 3명이나 되는 형들이 그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으로부터 약 27Km 정도 떨어져 있던 유다산악지역의 베들레헴에서 형들의 안부소식을 위해 보냄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형들에게 음식을 전하는 그 시간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와 맞서 싸우려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어찌 할례도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왕이시여, 그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마십시오. 제가 나가서 그 블레셋사람과 한 번 싸워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면 그는 진정 하나님의 백성들이 맞는 것입니까? 적이 크고 무서워 두렵다고 떨고만 있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최종모습이어야 할까요?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가당한 싸움입니까? 다윗은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형들 3명은 이미 20세가 넘어 전쟁터에 징병되어 나간 상태였고, 자신이 막내아들이었던 것을 계산해 보면 그의 나이는 많아야 15살이고, 고작 12살 정도였을 것입니다. 왕이 그에게 자신의 갑옷을 벗어주었지만 그는 갑옷이 커서 입을 수도 없는 체구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가진 신체적 조건만으로는 절대 골리앗을 이길 수가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의 형들도 말렸고, 사울왕도 처음에는 말렸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전쟁터로 나아갔습니다.

 

3. 믿음이란 무엇인가?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할 만 하니까 덤비는 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이란 적의 크기에 상관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부족하고 약해도 나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내가 비록 작지만 내가 양치기로 있을 때 저는 단 한 번도 내 양을 곰과 사자들에게 빼앗겨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사자나 곰이 내 양을 물어가면 달려가 막대기를 그놈들을 후려쳤고 그놈들의 수염을 붙잡고 쳐서 죽였습니다. 내가 사자나 곰과 맞딱뜨렸어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찬양을 받아주시던 여호와께서 나를 붙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장수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무시하니, 제가 나가서 저 골리앗을 그 짐승의 하나같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군인이라면 반드시 착용해야 할 군복도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시내로 내려가 매끄러운 물맷돌 다섯 개를 주워 양떼를 칠 때 자신이 차고 있던 주머니에 넣었으며, 물매를 들고 손에 막대기를 쥔 채, 목동의 복장으로 그 블레셋 장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적의 장수가 말합니다. “,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왔구나하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말했습니다.

삼상17:45-47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달려가면서 다윗이 던진 물매는 적장의 이마에 정확히 꽂혔으며 적장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손에 무기라고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다윗은 적장의 목을 밟았고, 그의 칼을 꺼내 그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스라엘의 사기는 하늘에 가득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적들을 노략하였는데, 블레셋 군인들은 자기들이 사는 동네까지 도망치다가 다 엎드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4. 다윗이 받은 복

그렇다면 왜 그 무시무시한 엘라 골짜기 전투에서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이 골리앗보다 신체조건이 좋아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평소 때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매우 하찮고 궂은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것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목자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맡겨진 양 한 마리라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곰과 사자와 맞서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웠으며, 날마다 물매를 던지는 연습을 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평소 때의 믿음과 자신의 습관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로 하여금 큰 힘을 발휘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다윗은 이 하나의 사건으로 인하여 왕의 가장 총애 받는 군대장관이 되었으며, 백성들과 군인들이 우러러보는 덕망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자기 아버지의 집은 부역과 세금에서 면제를 받았으며, 부상품으로 많은 재물을 하사받았고, 나중에는 사울의 딸까지 아내로 맞이하여 왕의 사위가 되고 결국에는 왕까지 되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2011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다시 쓰는 일기장

 

[제목] 바울의 일기장

[찬송] 311장 내 너를 위하여

 

[말씀] 딤후4:6~8(신약 346)

2011.9.3()

1. 서론

성도 여러분,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누가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첫째는, 뭐니뭐니해도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16:31)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원래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고후4:4)을 모신 자들이 가장 확실히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엄청난 권력을 가졌던 자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 산 사람은 빈 껍데기 인생을 산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고후4:7).

오늘 우리는 인생을 살아보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때까지 살다간 인물 중에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에 모시고 일평생을 살다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도바울의 마지막 일기장을 살펴봄으로서, 훗날 내 인생의 일기장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 바울의 첫 여정

바울의 생애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순간은 그가 한 서른 몇 살쯤 되던 해에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었지만 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갖춘 로마인으로서 로마제국 길리기아성의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부유했던 가정 덕택에 당시 최고의 학문들을 섭렵한 다음, 어느 정도 커서는 예루살렘에 유학을 하게 되었고, 당시 가장 유명했던 랍비(유대인 종교교육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모세의 율법까지 공부한 자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수업을 받던 어느 날 그는 예루살렘을 휩쓸고 지나간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갈릴리 나사렛출신의 한 청년이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분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들이 따랐던 그분이 다시 3일만에 살아났다느니,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을 보고서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자기 딴에는 오직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어떤 사람을 믿어서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잡아다가 옥에 넘겼고 때로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전하던 스데반집사를 죽이는 데 찬성표를 던지며 증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3. 바울이 달려간 경주코스

그날도 그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미치광이들을 잡아다가 옥에 넘기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대낮 정오시간이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햇빛보다 더 강력한 빛이 자기 동행들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바울은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바울의 원이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일어나라. 그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나타난 것은 네가 나를 본 이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보여줄 일에 너로 종와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6:16~18)”

사람은 누구나 언제가 한 번쯤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직접 그 음성을 듣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이 보낸 가족이나 친구 혹은 그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낸 이유가 대부분 자신이 부름받았을 때의 상황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다가 예수님을 만났기에 대중적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으며, 요한과 야고보는 그물을 깁다가 주님을 만났기에 베드로와 사도바울이 말한 것들을 보완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핍박하다가 주님을 만나서인지, 예수믿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인 것을 밝히 보게 되었고, 이방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상황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까? 아파 본 사람은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잘 알기에 대부분 아픈 사람들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저는 뭔가를 가르치려는 사람이 되려다가 주님을 만나서인지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며, 처음엔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서인지 고난받는 자들을 도와주는 일들을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노래를 잘 하는 자는 노래로서, 사람과 잘 교제하는 사람은 교제하는 일로서, 남 앞에 서서 연설을 잘 하는 사람은 연설을 하는 일로 주님께 쓰임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에게 전혀 없거나 전혀 관심없는 영역에 우리는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경주는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더욱 높아질 뿐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바로 그 영역 또한 남들도 내가 잘 한다고 인정하는 바로 그 영역을 개척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고, 더 연구하여, 새로운 장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사도바울은 과연 몇 명 목회를 했는지 말입니다. 교회사 가운데에서 사도바울만큼 유명한 사람은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의 목회 최대인원은 고작 12명 내지는 수 십 명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는 수 십 명을 놓고서 밤낮 3년동안 눈물 흘리면서 그들을 양육했던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바울의 정성과 모든 눈물이 점철된 바로 그 교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대중연설전문가입니다. 그가 일어나서 설교했다고 하면 수 천 명의 군중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요바울은 결코 베드로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또한 결코 사도바울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작은 셀 모임같은 곳에 사람을 모아놓고 그들을 양육하는 셀모임 전문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평가한 잣대로서 나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내가 내 삶의 영역에서(그것이 직업이 되었든, 달란트나 은사가 되었든)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사명대로 살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날이 임박해오자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었는지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심판자)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바울은 비록 수 천 명의 목회를 하지는 않았어도 그가 가야할 길을 잘 달려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수 천 명의 목회를 했지만 이방인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는 앞장 서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명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열쇠를 받아서 하나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용하였고 또 하나는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사용했지만, 결국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것, 그것 한 가지는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베드로처럼 대중연설을 잘하여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도록 사명을 주시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소그룹양육과 글(성경)을 쓰고 율법을 재해석하는 데 은사와 달란트를 받았지만 대중집회를 잘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영적 싸움을 싸웠다. 그리고 내가 달려가야 할 경주코스를 다 마쳤다. 그리고 나는 어떠한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그것을 지켰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끝 날이 되 봐야 사실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만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혹시 주님께서 여러분만이 걸어갈 수 있도록 안배한 그 길을 벗어나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돌이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경주를 새로 시작하십시오.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을 재정립하십시오. 내게 주신 사명을 위해 떨쳐 일어나십시오. 곧 있으면 오실 이가 우리를 맞이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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