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당신의 높이 곧 자존감을 조정하라”

[제목]당신의 가치를 누가 평가할 수 있는가?

[찬송] 490장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말씀]엡2:1~10(신약 311면)

2010.9.1(수)

1. 자존감(自尊感=self-esteem)이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이나 남에 대해 “나는 이러한 사람이지만 저는 저러한 사람이다.”라고 자기와 남을 평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평가를 내리되, 자기를 존중하여 평가하는 느낌을 일컬어 우리는 ‘자존감(自尊感)’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내린 평가가 아주 낮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들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매우 불행하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며, 하루라도 자신의 힘겹고 고달픈 인생이 더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이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은 끝내는 자기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게 될 것이고, 무슨 일 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그래, 그럴 줄 알았어.”하며 금새 자기를 비하(卑下)하고 자신을 학대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감 속에 빠져 허우적대가, 심지어는 미래에 대한 모든 도전까지 다 포기하는 상황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를 올바로 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 즉 자존감이야말로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을 기쁘고 행복하게도 만들 수 있겠지만, 또한 매우 불행하고 고달프게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누가 자존감을 매겨야 하는가?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감은 과연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점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매김의 환경은 나 혼자만이 살아가는 환경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모 그리고 형제자매와 어떤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게 되며, 또 조금만 더 성장하게 되면 또래집단 즉 유치원이나 학교생활을 통해 만난 다른 친구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자존감은 분명 타인에 의해서 즉 타인에 의한 비교와 평가 속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어떤 일을 수행한 결과들에 의해서 형성되곤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해 준 사람들은 전부가 다 완전한 사람들이었을까요? 또한 그들에게는 어떤 상처가 하나라도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거의 다 아픈 상처들을 가지고 있고, 또한 여러 가지 실패의 사건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평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우리가 확인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과연 나 자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으며, 나의 가치를 제대로 계산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온 우주 만물을 기쁘신 뜻대로 창조하시되, 나와 같은 인간들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그분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바로 그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평가를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맨 처음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2가지 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는 땅의 흙이었으며 또 하나는 생기 즉 생명의 숨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2:7). 비록 사람의 몸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영혼만큼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 즉 영(spirit)이 들어와 생명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영혼을 지닌 존재가 되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귀한가?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나의 가치와 존재 목적 그리고 계획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작가라면 누구든지 아무런 의도와 계획없이 작품을 만들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도 아무런 생각없이 우리 인생을 만드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닮은 오직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고, 하나님처럼 말할 수 있으며, 하나님처럼 자유롭게 자기의 미래를 개획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복의 생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2:20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 안에서 걸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원문에서 직역한 것임)

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이 가치가 매겨질 수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만든 옷은 그분처럼 가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싸구려가 아닌 것입니다. 그분의 손에 의해 특별히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그분에 대한 가치가 곧 우리가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가 하나님을 평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또한 다른 누군가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평가받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2절 말씀을 보니, 과거에 우리들은 어두움을 지배하고 있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즉 마귀 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였는지 도무지 짐작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바다에 가라앉아 뻘 속에 묻혀 있어서,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아니한 고려청자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둠 속에 있으면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밝은 빛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요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가 어둠의 세상 주관자 밑에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비로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파송된 하나님의 대사이자 사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지음받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치있게 쓰임받을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될 것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오늘도 우리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의 종이 되어, 온갖 종류의 죄악을 저지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신의 인생까지 저주하면서 어둠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가치있는 보화인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사실 고려시대로 치자면 상감청자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찾아야하고, 찾았다면 그대로 믿고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질 때만이, 우리가 원래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받을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주일동안, 우리의 가치 즉 자존감을 다시 발견하십시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시고 창조해 나가십시오. 이제부터는 우리의 인생을 타인이 함부로 평가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 아멘.

 

 

2010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당신의 높이 곧 자존감을 조정하라”

[제목] 건강한 자아상으로 자신을 바꾸라

[찬송]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말씀]사사기6:11~18(구약 370면)

2010.9.2(목)

1. 지금은 자존감을 회복할 때

우리는 어제 ‘자존감’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자존감’이란 건강한 자기애(自己愛)를 지칭하는 말로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존감이 약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무시할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살고 있기에, 늘 자기는 불행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늘 자기 자신을 비하(卑下)하면서 사는 자가 어찌 세상 일이라도 자신있게 행할 수 있겠으며,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지어진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세상을 바꾸어 나갈 큰 용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기드온’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그도 여느 사람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좋지 않게 가지도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B.C. 1169년경 북이스라엘의 땅의 므낫세 지파에 속한 ‘오브라’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려 7년동안이나 미디안 족속들의 침입을 받아, 먹을 것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해 마치 거지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서쪽 끝인 블레셋 지경까지 쫓아와서 토지소산을 모조리 빼앗아 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웅덩이나 그리고 굴을 파고 거기 들어가 숨어 살아야 했으며, 산이나 산 속에 들어가서 힘겹게 살고 있었습니다.

기드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 그는 미디안 사람들 몰래 타작을 하려고, 상수리 나무 아래에 있는 포도주 틀에서 조심스럽게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삿6:12,14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큰 용사” 즉 “능력있는 용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자신이 그러한 사람으로 지음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러한 사람으로 쓰임받을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삿6: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그는 자신을 극히 약하고 자기 집안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그 무시무시한 메뚜기 떼와 같은 미디안의 손에서 어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순간 기드온은 과연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요? 천사가 가르쳐준 ‘큰 용사’였습니까? 아니면 ‘극히 약하고 자기 집안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는 자신의 신념을 선택했습니까? 그가 천사 앞에서 말한 것은 일평생 살아오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내린 평가였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너무나 약한 자이기에, 자기 힘을 가지고서는 절대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손에서 구원해낼 수가 없다.”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삿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너는 원래 내가 이스라엘 민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일찌감치 빚어서 이 세상에 보낸 나의 그릇이다. 그러니 내가 네게 말한 너의 가치와 능력을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너는 메뚜기같이 많은 미디안 사람이지만 그들을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존재로서 쓰임받을 것인지를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큰 용사로 보십니다. 어쩌면 우리의 잠재력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굳게 믿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큰 계획이 있으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자아상이 약한 탓에 늘 김빠지는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저 말고 능력이 많고 배운 것도 많은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저에겐 그런 용기와 능력이 없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드온이 자신을 보는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이 전혀 달랐다고 하는 점입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두려움에 맞서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강하고 용감한 자로 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강한 자로 보신 것입니다. 기드온의 눈에 자신은 부족하고 결단력이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강한 자로 지으셨기에,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능하고 대담한 지도자로 보신 것입니다. 나중에 기드온은 300명의 적은 군사들을 가지고서도 그 거대한 미디안을 가볍게 물리치는 큰 용사로 쓰임받게 됩니다. 할렐루야!

3. 표징, 그것은 확증의 도구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과연 자신이 만세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큰 용사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러한 자인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항상 준비해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표징(sign)’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도 있고, 우리를 믿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실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은 그 표징을 두 번씩이나 경험했으며, 심지어 적군이 하는 꿈 이야기 속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원래 어떤 존재로 지음받았는지 알게 하기 위해,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예언으로, 때로는 천사로, 때로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적적인 일들로 말입니다.

4. 건강한 자아상으로 자신을 바꾸자.

우리들 대부분은 누구나 구겨진 자아상을 가진 채, 힘든 인생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건강한 자아상으로 우리를 새롭게 바꾸어 나갈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서 하시려는 말씀의 요지입니다. “넌 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너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을른지 몰라도, 나는 너를 그렇게 짓지 않았단다. 너를 너답게 새롭게 보렴. 그럼 내가 너와 함께 할 테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건강한 자아상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 의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큰 영광과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보셨다면 우리 자신은 그런 사람인 것을 믿으십시오. 기드온 한 사람의 새로운 자아상은 한 집안 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구원해 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안에 엄청난 잠재력과 재능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나에게 그러한 능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게서 그러한 능력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노력조차 해보지 않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진 보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까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녀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 보화를 캐내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드온처럼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그 능력을 찾아서 활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도 없는 자에게 나타나서, “너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으니 그냥 믿고 나가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미 우리에게도 그런 능력을 우리 안에 심어 놓았기에 우리더러 그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위대한 결단에 도전하십시오. 그러한 여러분에게 주님이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2010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당신의 높이 곧 자존감을 조정하라”

[제목] 낮은 자존감을 파쇄하라

[찬송] 찬597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말씀] 마25:24~30(신약 44면)

2010.9.3(금)

낮은 자존감을 파쇄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경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탄의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놀라운 교묘함과 술수와 속임수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2:11).

고후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탄은 영리한 꾀와 묘안과 전략과 계획을 사용하는데, 그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망과 낙담과 실수와 포기를 하게끔 우리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으며 배회하고 있습니다(벧전5:8).

사탄의 병기창고에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에 일부는 심리적인 무기입니다. ‘두려움’이 그 중에 하나이며 ‘의심’도 거기에 속합니다. 또한 ‘분노’, ‘악심’, ‘걱정’ 그리고 ‘죄책감’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것들 중에서 사탄의 가장 무서운 심리적 무기는 ‘열등감’과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과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들’입니다. 심지어 놀라운 영적 경험과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위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열등감에 의해 꽁꽁 묶여져 깊은 무가치함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다음의 네 가지 방법으로 모든 정서적, 심리적인 무기 중 가장 치명적인 무기인 ‘낮은 자존감’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을 패배와 실패로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은 자존감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우리에게 떼어내어 버려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4가지 이유에서입니다.

1.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은 인간의 잠재력이 새나가게 하는 통로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아기 침대에서부터 갖기 시작하여 유치원 시절까지 연결되고 십대에 들어서는 더욱 심해집니다. 성년이 되면 이러한 문제는 자욱한 안개가 뒤덮이는 것과 같이 그들 마음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어떤 때는 안개가 조금 걷히는 것 같으나 다시 돌이켜 안개가 그를 삼켜 버리고 그는 안개 속에 다시 푹 빠지게 됩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여성들의 상당수는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감추어놓은 잠재적 능력을 꺼내보지도 못한 채 인생을 마감하게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그의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그냥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주인으로부터의 거부감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투자를 하는 다른 두 사람과의 비교 의식에 따른 두려움, 그리고 모험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의 마음엔 낮은 자존감이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마25:24-25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 그리스도인인 당신을 향해 소원하는 일인데도 말이죠. 사탄은 지금도 우리의 그러한 감정으로 묶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고정시키고 마비시켜서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배후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꿈(이상)들을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상과 자신을 스스로 열등하고 무엇이든지 잘 못하는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성취되는 것을 막는 주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향하여 아름다운 이상을 가지고 계십니다. 민수기 13~14장에 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이상을 갖게 해 주시고 그 땅을 그들이 차지할 것에 대해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메뚜기같이 여기는 자들 즉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을 정탐하고 난 다음에 울기 시작했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두 사람도 사실은 그들과 꼭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꿈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갈렙에게는 자신이 벌레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 사람들이 거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지켜주는 그들의 신은 그들의 곁을 떠났지만 우리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군들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 땅을 악평했고 끝내는 그 땅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들 같아.”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전사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능력을 망각해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대인관계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와 우리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열등하거나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긴다면 아마 우리는 대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돌보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의문과 원망의 감정을 가지게 합니다.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나를 봐, 진정 하나님은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거야” 이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나쁜 생각이 우리의 머리 속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금새 금이 가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낮은 자존감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해를 끼칩니다. 사탄은 우리가 계속 열등감을 갖고 부족하게 느끼도록 하여,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사탄은 대개 사람들이 열등감을 처리하는 수단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위축시키고 가능한 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하려 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위축시키어 지나치게 자신에만 몰두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낮은 자존감이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대인 관계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4.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이유가 항상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팔방미인이 되라고 말씀하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자존감을 가지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바꾸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의 밑에서 태어나게 된 것. 남자나 혹은 여자로 태어나게 된 것. 학벌이 낮은 것. 부모가 없거나 편모슬하에서 자란 것 등등. 하지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에 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일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역을 위해 하나님은 각자에게 적합한 은사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고전12:11).

고전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존감 때문에 자신이 받은 은사와 달란트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천국이란 그가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은사와 달란트를 받았다고 해서 더 높은 영광의 반열에 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각자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일을 위해서 슈퍼스타들만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약점과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할 일을 주시며,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은사와 은혜를 공급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약점들을 통해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놀라운 기회가 우리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유실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할 때에 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약함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더 사모하게 되지 않습니까? 마20장에 보면, 비록 오후 5시에 들어와서 1시간만 일을 했어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때, 주인은 그에게도 하루의 품삯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은사와 달란트가 주어졌느냐보다 우리가 받은 그 은사와 달란트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했느냐가 주님의 평가의 기준이었음을 우리는 평생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10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당신의 높이 곧 자존감을 조정하라”

[제목]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려면

[찬송] 찬99장 주님 앞에 떨며 서서

[말씀] 눅1:26~38(신약87면)

2010.9.4(토)

우리는 어제 새벽집회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낮은 자존감이 얼마나 자기 인생과 자기의 미래를 망가뜨려놓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으며, 또한 낮은 자존감의 문제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배후에는 줄곧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가 숨어 있다는 사실까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배후에서 우리들이 가진 약점과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을 이용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죄를 짓게 하며, 우리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사탄을 대적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존감의 문제를 보고만 있거나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문제 앞에서도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거기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고, 또한 믿음으로 도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한 여인의 삶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녀가 그토록 만대에 복이 있다 일컬음을 받는 여인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인생의 커다란 문제 앞에 선 마리아

모든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 한다면 그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와 맞물려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뜻이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한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빨리 발견하고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너무 늦게 발견하여, 인생 속에 감추어둔 보화를 얻지 못한 채, 오늘도 아무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은 과연 어떠한 사람에 속합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렛의 시골처녀 마리아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곧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되,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천사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2. 마리아는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그렇다면 마리아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갔을까요?

첫째, 마리아는 자신 앞에 펼쳐진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들어 있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난 것은 수 천 년부터 예언되어온 메시야를 낳을 사명이 그녀에게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그녀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통해 만세전에 작정된 메시야를 낳을 것에 대한 계획 하에 이 세상에 보내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 세상에 태어났던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구약에 예언된 모든 예언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자신이 메시야를 낳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자, 놀라서 말하길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천사로부터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들은 마리아는 자신이 이뤄야할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불어닥친 인생 문제 속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에게 터무니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또한 말도 안 되는 것을 왜 나에게 요구하실까 하고 의구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앞에 놓인 문제는 자신을 복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불어닥친 어려운 일이 있다면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거기에는 분명 나를 복있게 만들어줄 하나님의 선한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결코 우리를 망가뜨리기 위한 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천사의 고지를 다 들은 후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둘째,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눅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천사는 이미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녀만이 메시야를 낳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메시야를 낳으려면 먼저 그 여자는 처녀여야 합니다(사7:14). 그것이 메시야를 낳을 수 있는 여인의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의 남편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가문 사람이어야 합니다(창22:17~18, 삼하7:12~14).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마리아는 처녀인 상태였고 그녀와 약혼한 청년 요셉은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 사람이었습니다(미5:2, 마1:20). 뿐만 아니라 마리아 자신도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눅4:23~31). 즉 마리아는 처녀로서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기에, 법적으로는 이미 결혼과 똑같은 효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낳을 자식은 당연히 요셉의 아들 즉 다윗의 후손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처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낳을 가장 온전한 사람은 발견하기 드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그녀가 꼭 해야 할 일을 일려 준 것입니다.

셋째, 마리아는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일이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즉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면 충분히 그 일들도 이뤄질 것으로 믿었습니다.

눅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사실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났고,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초자연적인 일이 이미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에게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자, 그녀 자신만으로는 할 수 없을지라도, 성령이 그녀 위에 내려오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와 함께 한다면, 얼마든지 처녀가 자식을 낳을 수 있을 것임도 믿었던 것입니다.

천사는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가 잉태한 후에는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인데, 태어난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야 할 것도 일러주었습니다. 또한 그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습니다(눅1:31~33).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눅1:46~49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녀를 메시야를 낳을 어머니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때가 되어 그녀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녀에게 일어날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안 되는 일도 되게 하실 것을 그녀는 믿은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뜻은 때로는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그녀가 처녀로서 아이를 낳게 될 경우, 어떤 일이 자기에게 닥칠지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아기를 낳는다 해도, 그 아기를 낳은 자신을 일컬어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약혼한 남편 요셉은 그것을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 이미 요셉과 약혼한 상태인데, 앞으로 양가의 부모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하지만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한 것들은 모두 다 좋은 것들이요 축복이 될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선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비해 놓으신 축복들이 내 것이 되는 데에 어떤 댓가가 지불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그 땅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광야의 혹독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 시련을 이겨내는 자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를 향해 계획해 놓은 축복들을 받기 위해서는 마리아처럼 어떠한 댓가를 지불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 매우 힘든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것이기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준비되셨습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2010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당신의 높이 곧 자존감을 조정하라”

[제목]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려면

[찬송] 찬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말씀] 고후2:14~17(신약287면)

2010.9.6(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아주 주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존감은 극복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몰래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4가지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1. 과거의 실패의 망령에서 벗어나라(출14:13~14).

누구든지 자기 마음에 쌓아 놓은 장벽은 쉽게 허물어뜨리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제로도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마음 속에서 이미 패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여지없이 패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다면, 과거에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때문에 번번이 앞 길이 가로막혔었다 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과거야 어찌되었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오늘은 새로운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고후5:17).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 계획을 세워놓고 계시므로, 우리는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판단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 땅에서 불러내실 때,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곳은 엄청난 풍요와 완벽한 자유가 있는 땅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압제자의 그늘에 있었기에 그들은 과거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그냥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평생을 이용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왔기에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새로운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마음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나 고통,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더 큰 복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눈 앞에는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공과 초자연적인 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장벽을 부숴버리십시오. 이러한 과거의 망령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들 대신 저주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 위로와 용서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자기가 자기를 위로할 줄도 알라(고후1:3-4).

고후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뭐니 뭐니 해도 자기가 자기에게 해 주는 말일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자기가 자기에게 부정적인 말을 계속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왕이면 자기가 자기에게도 위로하는 말, 칭찬하는 사람, 격려하는 말을 해 주십시오.

사람이라면 저마다 자기 속에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기 비난기능’이며, 또 하나 ‘자기 위로기능’입니다. 사람이 물론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그것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용기도 필요합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정죄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면 마귀는 분명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그와같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자기 비난의 기능을 사용하여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이미 주님 안에 들어와 있으며,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용서 안에 있음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위로의 하나님이요, 우리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21:1~17). 우리 주 예수님께서 엄청난 과오를 저지른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를 책망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면, 너의 과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위로하는 말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 맞아 분명 내가 잘못하긴 했어. 하지만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이 완전히 구겨진 것은 아니야. 나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라고 말입니다.

3. 자신은 지금 훈련 중이라고 생각하라(빌3:12-14).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누구든지 자기를 온전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그는 넘어질까를 조심해야 합니다(고전10:12).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온전함은 사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요일3:2).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세상에 발을 내딛고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실수할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이 혹 잘못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나는 지금 훈련 훈련중이다. 아직도 공사중인 걸.” 정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도 훈련중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생은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만 오늘에 다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혹 내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살아왔고, 잘못 알고 사용한 것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그것이 바뀌어질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훈련생이 왜 훈련생입니까? 뭔가를 잘못한다 할지라도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 때문에 훈련생이라 불리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우리 자신에게서 어떤 잘못이나 실수가 나오게 되면, “지금 훈련중이니, 곧 좋아질 거야.”라고 긍정적인 마음자세를 견지하십시오. 당신은 지금 제대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4. 마귀는 예수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우리를 이길 힘이 없다는 사실을 늘 선포하라(고후2:14).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개선행진하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그것을 가지고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성령님의 지혜와 영적인 능력과 권세는 우리에게 부여된 목적 곧 사명을 이루는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산다면, 우리는 마귀를 어거할 수 있는 하늘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악한 영들을 대적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일하실 것입니다(약4:7).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서 불편한 일이 발생했을 때 가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대적을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대적이 우리 주변에, 우리의 생각 속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예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대적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은 분명히 마귀가 그 어떤 그리스도의 지체들도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괴하며(고후10:4), 대적이 훔쳐간 것을 되찾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는 것을 막는 마귀의 어떠한 방해 공작도 무너뜨릴 능력과 권세로 우리를 이미 무장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고, 마귀가 빼앗아간 영역을 향해 위엄있는 목소리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영원히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2010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당신의 높이 곧 자존감을 조정하라”

[제목]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려면(Ⅱ)

[찬송] 찬360장 행군 나팔 소리에

[말씀] 딤후4:6~8(신약346면)

2010.9.7(화)

5.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위치와 가치를 확인하라.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가운데 가장 달콤한 비유는 눅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거기에서만큼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위치가 분명하게 드러난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위치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우리(울타리)에 있는 안전한 양들은 맏아들로, 목자를 떠나 멀리 나가서 길을 잃어버린 양은 둘째아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아버지는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하다가 돌아온 둘째아들을 어떻게 맞이하였습니까? 아버지(하나님)는 종들(천사들)을 시켜, 다시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게 하였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게 하였으며, 발에 신을 신기게 한 다음, 배고픈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눅15:22~23). 여기에 나오는 ‘겉옷’은 그의 아들로서의 신분의 회복을, ‘반지’는 상속자로서의 권리의 회복을, ‘신발’은 주인으로서의 위치의 회복을, ‘살진 송아지’는 탕자였지만 그를 귀한 존재로서 다시 대우해 주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다면 우리는 이제 아들이자 상속자이며, 주인이자 귀빈의 위치를 가진 고귀한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었습니다(엡2:10). 그후 잠시 옛 뱀에 의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피의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제는 떳떳이 하나님의 아들로 입적된 것입니다. 한편, 천사도 우리 인간처럼 영물이자 능력있는 존재로 지어졌지만, 천사는 원래 종으로 지어졌기에 아무리 그가 뛰어난 존재라 할지라도 그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자 상속자가 될 수 없으며, 주인이자 귀한 손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히1:5). 오직 하나님은 우리 인간만을 위해 그 자리를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6. 택하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공급이 있음을 기대하라.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이끄신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석에서는 생수가 터저 나오게 하시며, 하늘에서 만나과 메추라기 떼를 보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공급은 당신의 백성 즉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보내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무런 계획 없이 낳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속자로서 성숙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먹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이라도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하기만 한다면,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급해주시는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비록 이 땅의 아버지들은 넉넉하고 훌륭한 공급자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따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것입니다(벧후1:3).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에게 뭔가를 공급해 주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마귀가 그럴 때에는 우리들을 참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욥1:8~9).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자녀의 신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한 공급을 기대하고 요청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실 것입니다(마7:9~11).

마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처럼 하나님의 공급은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용서, 치료 그리고 우리의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우리 양떼들의 목자이십니다(시23;1).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내 몸과 영혼을, 수족과 그리고 나의 이성과 감정까지도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나의 의복과 신발, 육류와 음료, 집과 가정, 아내와 자식, 땅과 가축과 모든 소유까지 지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분은 매일 매일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실 뿐더러 그것들을 넉넉히 공급해주시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실 것이고, 모든 악에서부터도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7.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주의 말씀을 믿고 전진하라.

이제는 눈을 들어 보화로 가득찬 하나님의 창고를 볼 때입니다. 과연 누가 그 하늘의 창고에서 그것을 가져다가 쓸 수 있을까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빌4:13).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기드온이 그에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는 큰 용사가 되어 거대한 미디안 족속들을 300명의 군사로서 무찌를 수 있었으며, 다니엘도 자기에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사자굴에 쳐넣어졌지만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머리털하나 상하지 않고 거기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마리아는 자기에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처녀의 몸이었어도 예수님을 잉태하는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 머물렀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사람이지만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처럼 행하기만 한다면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당신의 생각을 조사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하루 종일 사용하는 말들 글로 써 보십시오. 그리고 행동을 조사해 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처럼 살고 있습니까? 이제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의 백성처럼 원망과 불평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을 계속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민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산이 너무 크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고, 그 산을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지를 그 산을 향해 선언하십시오.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말하십시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그대로 실행하는 능력이 있기에, 우리의 인생과 가정 친구와 미래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8. 가치있는 인생을 살았는지는 끝까지 경주한 후에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 세상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종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누가 평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결산할 때, 우리를 평가할 존재는 결코 우리의 부모나 친척이나 이웃들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절대 아닙니다. 죽음 하나 정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인생을 판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적어도 우리를 평가하려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사상까지도 다 아시고, 더욱이 인간의 죽음까지도 정복하실 수 있는 분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139:2-3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판단하실까요?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며 그 말씀에 순종했으며,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의 은사와 달란트를 얼마나 신실하게 사용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은 세상적인 기준과는 다릅니다. 그분의 지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며, 그분의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판단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한 베드로는 세상적으로 볼 때는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죽음을 죽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하나 뿐인 자기의 목숨을 주님을 위해 드렸으니, 그보다도 더 귀한 죽음이 없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기도했으나 혹 지금 얻은 것이 없다해도 결코 낙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못받은 것은 우리의 자손이라도 꼭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 기준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평가의 안목에서 볼 때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 바로 그러한 인생을 당신이 살고 있다면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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