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원래 하나님이셨지만 속죄제물이 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하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한계를 겪으셔야 했다. 그분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셨으며, 하루 종일 사역을 하고나면 힘이들어서 쉬셔야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걸어가셨던 길은 우리가 걷는 길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려운 길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모든 예표와 예언을 성취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간으로서 견뎌내야 했을 그 무게를 우리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엄청난 무게의 짐을 예수께서는 어떻게 짊어지시고 결국 구속사역까지 완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 때문에이었다. 예수께서도 인간인지라 인간의 한계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분도 성령을 힘입지 않으면 안 되었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쳤으니(행10:38)"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레마)를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사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잉태의 순간부터 성령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삶을 사셨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그분은 남자의 도움없이 처녀의 몸을 빌어 잉태되셔야 했기 때문이다(사7:14).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사장의 나이가 되자, 부모를 받들어섬기고 동생을 뒷바라지하던 사적인 일을 끝내시고 유월절양으로서 인류의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3년반의 공생애를 사시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성령을 힘입을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다. 성령께서는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들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정관사 없는 성령으로서, 성령의 어떤 것=성령의 선물)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과 답변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이미 항상 하루의 일과를 새벽미명에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시고 있었다(눅1:35). 한 마디로 예수께서 사역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곧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이었던 것이다(행10:3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셨는데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더 성령을 힘입어야 하는 것일까?
그럼, 우리가 성령을 힘입기 위해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령님이 누군신지부터 알아야 한다. 우선 성령은 말 그대로 거룩한 영으로서 악한 영과는 전혀 다른 거룩하신 분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약에서는 이 땅에 보내어진 여호와의 영을 가리키며, 신약에서는 이 세상에 보내어진 예수의 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은 한 마디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영이 곧 성령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은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만질 수도 없다. 어쩌면 바람과 같은 존재다. 존재는 하나 만지거나 볼 수는 없는 것 그것이 성령이시다. 그렇지만 성령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경험할 때에는 그분이 지나가면서 그분이 남기고 간 흔적이나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크게 4가지의 모습과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기름같고, 물같고, 불같고, 비둘기같은 것이라고 표현이 되는 것들이다. 성령님은 기름같아서 모든 힘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물과 생수와 같아서 목마른 자에게 만족을 줄 수 있으며, 불같이 뜨겁게 역사하며, 비둘기처럼 온유하고 깨끗하기 그지없는 분이시다. 우리도 이러한 성령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역이 예수님처럼 성공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령께서는 보이지 않는 분이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거나 아니면 다녀간 것에 대해 잘 모를 수가 있다. 하지만 성령께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오셨다는 어떤 흔적을 남기신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의 선물 즉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다. 사실 모든 신앙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거나 누림으로서 자신의 신앙이 더욱 더 신앙이 견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선물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령의 선물이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기왕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어와계시고 때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오셨다 가셨다는 증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어떤 믿는 사람 위에 내려오시거나 다녀가신 흔적인 성령의 선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도바울은 고전12장에서 성령께서는 총 9가지의 선물을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다(고전12:8~10).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ㅁ디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이 그것이다. 물론 당시에 바울이 경험하기에는 9가지였겠지만 딱 9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간단한 예로, 성령이 부어지면 환상을 보고나 꿈을 꾼다고 되어있는데, 9가지 은사들 중에서는 이러한 은사가 없다.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면,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가질 수 있는 성령의 선물들이 여러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것에는 방언말함, 치유가 일어남, 하나님을 찬양함, 예언함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의 선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들 중에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방언(글로싸)이다. 첫번째로 탄생했던 예루살렘교회를 보자. 그들에게 성령이 오실 때에 나타난 증상이 방언이었고, 두번째로 사마리아교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물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그것은 십중팔구는 방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로 최초의 이방인(고넬료집안)에게 성령께서 부어졌을 때에는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사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로 에베소교회에서는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었다. 그렇다. 믿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선물들을 주신다. 그리고 그것의 공통분모는 방언이다.
한편 성령의 선물로서 공통분모가 방언이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이러한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는 방법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교회는 기도할 때에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고, 사마리아교회와 에베소교회는 성령받은 사도들이 가서 안수할 때에 성령의 선물이 주어졌으며, 고넬료가정에서는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선물이 주어졌다. 그렇다. 기도를 하든지, 성령받은 사도들이 가서 안수를 하든, 말씀을 듣고 있든지 성령께서 오실 때에는 반드시 어떤 선물을 주신다. 방언은 성령께서 방문하신 가장 중요하고도 동일한 흔적이다.
또한 행9장에 등장하는 바울도 아나니아의 안수기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때 바울은 놀라운 성령의 치유의 경험을 하였으며, 그때 방언도 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전14장에 보면,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4:18). 그렇다. 성령께서 오시거나 다녀가시면 반드시 흔적을 남기신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은사)이다. 그리고 그것의 공통분모는 방언이다. 당신에게도 방언의 은사가 주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자들은 어떤 성령의 선물이 가장 좋은 것일까? 성령의 9가지 선물들은 다 좋은 은사이다. 성도들의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리고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들 중에서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이다. 그것은 모든 교회들마다 다 나타났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방언의 은사를 받아, 그것을 활용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유익할 것이다. 방언은 일종의 말의 은사이자 기도의 은사이므로, 방언은 더 많이 말할수록 자신의 영혼에게 유익하다(고전14:4). 다만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방언기도만 하고 있으면 답답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교회에서 함께 모였을 때에는 방언의 통역자를 세워서 남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하고 있다. 사실 방언이란 헬라어로 '글로싸'라는 단어로서, 그것이 혀의 발성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는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 언어는이 세상의 언어처럼 자음과 모음의 일정한 결합법칙을 따라 발성되어져서 나오는 그러한 소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오직 그것을 주신 하나님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니 이보다 더 유익한 기도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이 어떻게 해야 방언을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할 수 있을까? 마가복음 16장에서는 단지 믿는 자에 나타나는 어떤 표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막16:17~18). 그러나 사도행전에 보면, 방언을 말하려면 첫번째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다(행2:38). 그리고 두번째로는 방언의 은사받기를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자는 방언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렇게 간절히 사모함으로 예루살렘교회가 그렇게 하여 방언을 받았고, 에베소교회가 그렇게 하여 방언을 받았다. 그러므로 먼저 믿고 있었으나 성령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방언선물받기를 사모하면 된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이것은 말의 은사이므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라고 말로 요청할 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다. 기도하라. 특히 입을 열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하라. 그렇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혀를 성령하나님께 맡기게 될 때, 성령께서 자신의 혀를 붙잡아 말을 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방언의 은사인 것이다.
성도들이여, 그러니 이제는 방언을 사모하라. 그리고 방언을 달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라. 그렇다고 방언을 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언을 말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영이 거듭 태어났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으니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한 은사인가? 지금 내게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지에 대한 증표로서 방언으로 말함은 매우 유익한 성령의 선물이다. 성도들이여, 이제는 누구든지 방언받기를 사모하라. 그리고 큰 소리로 기도하라. 그래서 방언을 받고 방언의 은사를 활용하여 사탄의 유혹에서 이기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더 긴밀한 기도를 드리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복음의 전령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복음전도자가 되라. 이것이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의 은사를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