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교도를 박해한 루이 14세 | | | [세계사] 중세 |
2010.03.14. 22:39 |
루이 14세는 일반적으로 군주 중의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것은 주로 우리가 무척이나 당당하고 자신 있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루이 14세는 끊임 없는 전쟁과 국채로 전비를 낭비하고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기근과 질병 등으로 프랑스의 경제적,인적 자원을 고갈시킨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파멸의 길로 내몰았고, 그 결과 2대 뒤에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부르봉 왕조가 통치의 근본원칙으로 삼았던 절대군주제가 무너졌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루이 14세는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군주였다. 이 결과를 미리 예견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후계자의 애인이었던 드 퐁파두르(de pompadour) 부인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 뒤에는 홍수가 온다."
루이14세 (좌) , 드 퐁파두르 (우)
역사가의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루이 14세가 치세 중에 저지른 최악의 실정은 1658년에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조부인 앙리4세가
정한 관용책을 파기하여 위그노교도에 대한 박해를 재개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비난하거나 경고하기는커녕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30년뒤에 국왕이 죽었을 때조차 국왕이 시행한 가장 찬양해야 할 시책의 하나로써 기렸을 정도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은 또 하나의 기준, 즉 어떤 정책도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낭트 칙령의 폐지가 어리석었다고 평가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십년도 지나지 않아 볼테르는 이 정책을,
'추구하는 목적과 완전히 상반된' 결과를 불러온 '프랑스 최대의 참화 가운데 하나' 라고 불렀다.
볼테르(Francois-Marie Arouet) (1694~1778)
모든 아둔한 정책이 그렇듯이 이 정책은 당시의 사회상황이나 사람들의 자세나 신념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모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몇 가지 어리석은 행동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정책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인 행동주의 정책을 제창했기 때문이다. 낡은 종교적 분파와 교의를 방패로 든 난폭한 칼뱅파의 힘은 쇠퇴하고 말았다. 위그노교도는 인구의 약 10분의 1인 200만 명을 밑돌았지만, 국왕에게 충실하고 근면한 시민이었다. 너무나 근면해서 가톨릭교도를 불안하게 만들 정도였고, 그것이 마찰의 원인이었다. 가톨릭교도는 100일이 넘는 성일(聖日)과 성인축제일을 지켰지만 위그노교도는 안식일에만 쉬었기 때문에 생산량도 많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의 점포와 작업장은 뛰어난 실적을 올렸다. 위그노교도를 억압하라고 카톨릭교도가 요구한 이면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의 요구를 정당화한 것은 종교상의 의견차이는 국왕에 대한 모반이고, 양심의 자유를 폐지하는 것이야말로 신과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고상한 논거였다.
루이 14세는 젊었을 대의 후견인인 마자랭 추기경의 손을 떠난 뒤부터 차차 독재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카톨릭교도의 충고에 귀를 많이 기울였다. 그의 독재가 도를 더하면 더할수록 국왕의 의지에 복종해야하는 신하가 분파행위를 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법, 하나의 왕, 유일한 신'이 국가에 대한 그의 개념이었고, 마자랭 사후 25년 동안이나 이 개념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치적 동맥경화를 불러 다양성을 허용하는 능력이 위축된 것이다. 그는 종종 지배자를 파멸로 이끄는 '신의 명령을 방았다는 병' 에 걸려, '내가 신의 도구가되어,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시느이 길로 이끄는 것' 이 신의 의지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정치적인 동기도 있었다.
영국에서 제임스 2세가 가톨릭화 정책을 취하자 루이 14세는 가톨릭 주권을 확립하는 것이 유럽의 추세라고 생각하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는 극적인 몸짓으로 이 추세를 조장했던 것이다. 나아가 다른 문제로 교황과 다투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자신이야말로 정통신앙의 신봉자임을 세상에 드러내어 '가장 기독교다운 군주'라는 옛 프랑스 왕의 칭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다.
박해는 낭트 칙령이 실제로 폐지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금지되고 교회와 학교는 폐지되었으며, 가톨릭식의 세례가 강요되었다. 어린아이들은 가톨릭교도로 육성되기 위해서 일곱 살이 되면 가족을 떠나야 했다. 여러가지 직업이 서서히 제한되다가 이윽고 금지되었다. 위그노교도인 관리는 퇴직을 강요받았다. 성직자로 구성된 개종촉진대가 조직되고, 개종자 개개인에게는 상금을 지급했다. 위그노교도를 그들의 공동체와 국민생활에서 분리시켜 근절하고자 하는 법령이 잇달아 공포되었다.
박해는 잔인하게 발전해서 마침내 폭력을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가장 잔혹하고 효과적이었던 것은 용기병을 활용한 박해였다.(용기병 : 16세기 말 유럽에서 공격할 때는 경무장 기병으로, 방어할 때는 보병으로 싸우던 병사로, 중대단위로 편성되었다. 용기병이란 이름은 이들이 가지고 다니던 드래군(dragoon)이라는 짧은 총에서 유래했다.)이것은 위그노교도의 가정에서 용기병을 숙박시키는 제도로, 그들은 마음껏 악덕한 짓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천박하고 거칠기로 악명 높았던 용기병들은 집주인을 구타하고, 강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하고, 닥치는 대로 부수고, 오물을 뿌리는 등 대학살을 전개했다. 당국은 개종하면 용기병의 공포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개종은 도저히 진심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것은 가톨릭교도들을 격분시켰다. 왜냐하면 위그노교도들이 교회를 거짓맹세와 모독의 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내키지않는 걸음으로 성찬을 받으로 미사에 이끌려왔지만 간간이 저항하는 자도 있어서 성찬용 빵과 포도주에 침을 뱉거나 발로 뭉개서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붙잡히면 갤리선(galley: 노예나 죄수에게 노를 젓게 한 돛배) 의 노역에 처한다고 위협하여 출국을 금지한 칙령이 있었지만
위그노교도의 해외이주가 시작되었다. 한편 위그노교도의 목사들은 배교를 거부하는 경우에 강제추방을 당했다.
비밀리에 설교를 해서 개종자를 위그노교도로 되돌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집스럽게 예배를 보는 목사들은
마차로 찢어 죽이는 형에 처해졌다. 순교자가 꼬리를 물었고 사람들은 더욱 격렬하게 저항했다.
어떤 지역에서 사흘 동안 6만명이 집단개종을 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왕은 낭트 칙령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위그노교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낭트 칙령은 필요없다는 논거였다. 이 무렵에는 이러한 정책이 효과적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었다.
폐지하기 전날 밤에 열린 평의회에서는 황태자가 칙령을 폐지하면 반란과 집단이주가 일어나
프랑스 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마도 위그노교가 몰래 전파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대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견을 밝힌 사람은 황태자 한 사람뿐이었던 듯하다. 국가의 보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그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이 1658년 10월 18일, 낭트 칙령의 폐지가 공식적으로 포고되었고, 이것은 '우리 시대의 기적' 으로 찬양되었다.
생시몽은 "이렇듯 기쁨에 찬 노래가 울려퍼진 적은 일찍이 한번도 없었다." 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렇듯 엄청난 찬사가 바쳐진 적도 일찍이 없었고......귀에 들리는 소리는 찬양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왕이 죽을때까지 불같은 독설을 가슴에 담고 있어야했다.
클로드 생시몽 (1760~1825)
머지않아 악영향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그노교도인 직물업자, 제지업자와 그 밖의 장인들은 그때까지 프랑스가 독점했던 기술의 소유자였는데, 숙련된 기술을 갖고 영국과 독일로 건너가 버렸다. 은행가와 상인은 자본을 갖고 빠져나갔다.
인쇄업자와 제본업자와 조선업자,법률가, 의사, 많은 목사들이 달아났다.
채 4년도 지나지 않아 8,000~9,000명의 해군, 1만~1만 2,000명의 육군, 게다가 500~600명의 장교가 네덜란드로 달아나
루이 14세의 적 윌리엄 3세의 병력을 증강시키는 꼴이 되었다. 마침내 3년 후에 추방된 제임스 2세의 뒤를 이어 윌리엄 3세가 영국의 국왕까지 되자 적의 전력은 2배가 되었다. 투르와 리용의 명주공업은 파괴되고, 랭스와 루앙 같은 중요한 도시는 노동자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국내인구가 4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고 주장하는 생시몽의 험악한 비난을 비롯해서, 어떤 사건이 악영향을 불러오면 항상 그렇듯이 이 사태가 과장된 것도 사실이다. 현재 총 이주자 수가 약간의 편차는 있다고 해도 10만에서 25만명 사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주자 수가 얼마인가는 별도로 치고, 프랑스의 적국인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위그노교도가 얼마나 가치가 큰지를 즉시 깨달았다.
네덜란드는 즉각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3년 동안 세금을 면제했다. 브란덴부르크(훗날의 프로이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낭트 칙령이 폐지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위그노교도를 자국으로 불러들이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 결과 그들의 산업이 베를린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의 연구는 위그노교도의 이주로 프랑스가 입은 경제적 손실은 지금가지 과대평가되었고, 사실은 전쟁이 불러온 더욱 큰 피해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위그노교도가 이주한 모든 도시에서는 위그노교도 인쇄업자와 그 동료들이 반프랑스 팸플릿과 풍자문을 홍수처럼 만들어 프랑스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불태웠다. 브란덴부르크가 네덜란드와 맹약을 맺고 군소 제후국들이 여기에 가담하자 프랑스에 대한 프로테스탄트파의 제휴는 한층 강화되었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이 다시 살아났고 가톨릭교도와의 반목도 고개를 들었다.남쪽의 산악지대인 세벤 지방의 카미자르파 위그노교도가 장기간에 걸쳐 일으킨 반란은 잔혹한 전쟁을 불러 프랑스를 피폐시켰다. 이 지역과 프랑스에 남아 있던 다른 위그노교도의 집단촌에서는 이윽고 다가올 혁명의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하였다.
더욱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것은 절대군주 개념에 대한 불신이었다. 위그노교도들이 종교적 통일을 강요하는 국왕의 권리를 거부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왕권은 신이 부여한 권리(왕권신수설)라는 사고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다음 세기에 일어날 개헌 움직임으로 연결되었다. 루이 14세가 아들이나 소자보다도 오래 살면서 72년 동안이나 통치하고 1715년에 죽었을 때 후손에게 남긴 것은 그가 꿈꿨던 국가의 통일이 아니라 증오로 가득한 반목이었고, 국부와 국력의 증진이 아니라 허약하고 가난한 데다 질서까지 잃은 국가였다. 이다지도 자기중심적인 지배자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국익을 파괴한 사례는 달리 없다.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는 위그노교도를 방치하거나 힘과 잔학행위에 호소하는 대신에 민사법으로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대신과 사제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박해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기는 했지만, 박해해야 할 긴급한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이 사건은 그 모두가 불필요했는데도 강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기묘하다. 이것이 독선의 두 가지 특징을 강조한다.
즉 일반적으로 독선은 거대계획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과, 종종 엄청난 결과를 빚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독선은 역사속에서 똑같이 되풀이 된다. 한 프랑스 역사가는 의도적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날카로운 의미를 담아 칙령폐지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 정계에서는 대계획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루이14세는 경험에 의존해서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랠프 왈도 에머슨은 뜻밖에 논거에 입각해서 이 의견을 날카롭게 보충했다. 그는 "역사를 분석 할때는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사건의 원인이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이다." 라고 경고했다. 이것은 대개 정치학자가 간과하는 요소이다. 정치학자는 권력의 성격을 논할 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에도 항상 대단한 존경을 담아 다루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때로 보통사람들이 한 길이 넘는 물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 들어간다거나 무분별하고 어리석고 고집스럽게 행동하듯이, 권력도 어리석고 단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권력은 장식물과 영향력이 권력의 소유자를 실제 이상으로 포장하여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태양왕은 엄청나게 긴 가발과 하이힐, 족제비 외투(왕위의 상징)를 벗겨내면 그릇된 판단과 오류를 저지르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기 쉬운, 결국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