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버포스는 정치인인 클랙슨, 그랜빌 샤프, 작가인 모어, 성직자 존 벤, 은행가 헨리 손턴 등 나중에는 ‘클래펌 파(Clapham Sect)’로 불리는 동지들(1792년에 손턴의 제의로 클래펌 시에 본거지를 마련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과 함께 노예제 폐지 전략을 짰다. 그들은 노예제 자체의 완전 폐지가 최종 목표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추진하기는 어렵고, 먼저 노예무역부터 폐지하는 운동을 벌이자고 결정했다. 윌버포스는 피트에게 노예무역의 실상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결과 정부 차원에서 인정된 온갖 참상을 근거로 1789년 5월 12일, 처음으로 노예무역 폐지를 하원에서 역설했다. 윌버포스는 단지 의원들의 양심에 호소할 뿐 아니라, “무역을 폐지하여 추가 공급이 중단되면 노예주들이 노예를 더 아끼고 보살필 것이며, 그러면 노예들도 열심히 일하려 함으로써 생산량이 더 늘어날 것이다”는 식으로 실용적인 접근도 하며 열심히 동료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역시 한 차례의 나팔 소리로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클래펌 파는 더욱 증거를 모으고 법안을 다듬어서 1791년에 다시 폐지법안을 냈으나 역시 부결되었고, 1792년에는 한걸음 물러나서 ‘즉각 폐지 대신 점진적 폐지를 지향’한다고 내세운 덕에 하원에서 통과를 이루었으나 이듬해에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후 1805년까지 노예무역 폐지법안은 무려 11번이나 좌절을 겪었다. 윌버포스와 그 동지들에 대한 비난과 위협도 그치지 않았다. 윌버포스는 몇 차례인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그의 부인이 의회에서 모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본래 튼튼한 몸이 아니었던 그의 건강도 오랜 투쟁 끝에 점점 나빠져서 척추가 휘고 만성 위장병에 폐에 지속적으로 물이 차는 등 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편을 복용했는데, 그것이 말년에는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 많던 그의 재산도 어느덧 가물어졌다. 그는 “관리만 잘 한다면 수입의 사분의 일은 좋은 일에 쓸 수 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는 사분의 일이 아니라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운동 자금으로 내놓는 경우가 거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굴하지 않았으며, 거듭되는 법안 통과 실패로 실의에 빠진 동료들을 격려하며 끈질기게 폐지 운동을 이어나갔다. ‘흑인들은 열등한 생물이며, 인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살아 있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1792년에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프리타운’을 건설, 그곳에 이주해 있던 흑인 해방노예들이 스스로 운영해 나가는 도시를 마련하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폐지 운동을 벌이다 보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여론도 차차 그들의 대의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마침내 1806년 선거에서는 노예무역 폐지가 주된 쟁점이 되고, 여기서 윌버포스를 비롯한 폐지파가 압승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1807년 2월 23일,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법안은 통과된다.
실로 오랜 투쟁 끝의 결실이었으나 윌버포스는 아직도 만족하지 않았다. 애초에 최종 목표로 잡았던 노예제 자체의 완전 폐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823년에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고, 윌버포스는 노예제를 범죄로 규정하며 노예해방을 역설하는 팜플렛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고, 할 수 없이 1825년에 의원직을 사퇴하고는 뒤에서 동지들을 돕는 역할에 힘썼다.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노예무역을 폐지하도록 국제적 운동을 벌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1833년 7월 26일,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윌버포스는 병상에 누워 그 소식을 들었으며, 기쁨 속에서 사흘 뒤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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