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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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먼저 이 책은 사진에서도 촌스러운 글씨체를 통해 풍기는 포스처럼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7년도에 출판된 아주 오래된 책이다.
2003년에 재출판 되었다고 하긴 하는데
현재 판매하고 있는 서점은 없는 듯하니 구하기는 조금 힘들겠지만
수고를 해서라도 읽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요새 기독교 서점 가보면 별 쓸데 없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유명인이나 학벌 좋은 사람의 수필식 간증이나
외국의 저명한 목회자들의 자기개발서들로 가득 차 있는데
정작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담은 기독교 고전들, 설교집, 신학책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어서 구하기조차 힘들어지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 '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은
현재 장로교로 대표되는 칼빈 신학과
현재 감리교로 대표되는 웨슬레 신학의
주요 교리들의 차이를 대조, 정리하고 성경적인 입장에서 비평해 놓은 책이다.
특히 그 유명한 '예정론'과 '성화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저자가 정말 기가 막히게 정리를 잘 해놓아서 개념 정리에 큰 도움을 얻었다.
이 주제에 대한 웬만한 책 몇 권 읽는 것 보다
짧게 정리 된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훨씬 유익했다.
대부분의 신학책들이 이러한 성경의 교리를 다룰 때 실수하는 점이
'교회사적 관점' '신학적 관점' '철학적 관점' '윤리적 관점' 등
학문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반면 이 '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을 쓴 밀드레드 와인쿱은
'성경적' 예정론과 성화론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에 힘쓴다.
물론 교회사에 나타났던 논쟁들을 소개하고
각 교단의 교리들을 소개해주지만
어디까지나 성경에 비추어 비평하기 위함이다.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면
그 어떤 인물이나 이론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권위를 성경 위에 올려 놓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복음주의자의 자세인데
요새는 성경과 학문에 한 발씩 양다리를 걸치는 신복음주의가
아무런 비판도 없이 인정되고 보편화되고 있다.
어쨌든 저자의 이런 복음주의적인 점이
성경적인 '예정론'과 '성화론'만을 알기 원하는 나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반면 성경이 아닌 다른 학문적인 관점에서의 통찰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얇은 책이 상당히 초라하게 생각될 것이다.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부 감리교인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웨슬리의 예정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즉, 웨슬리주의의 예정론은 아르미니안주의적이고
아르미니안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며
인간의 선함과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이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큰 오해는 신학을 잘 모르는 평신도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의 주류 목사님들까지도 갖고 있다.
두말 할 것 없이 조지 휫필드가 바로 이것을 주장하며
웨슬리와 대립하여 큰 싸움이 있었고,
훌륭한 복음주의 목사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도
아르미니안 예정론을 비판하고 있다.
어거스틴으로 시작해 존 칼빈을 거쳐 청교도로 이어져온
칼빈주의 신앙이 복음주의 신앙의 주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입장에 서서 복음의 흐름을 이어온
하나님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도
이들이 말하는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웨슬리가 가르치는,
소위 그들이 아르미니안 이단으로 부르는
예정론을 거룩한 진리라 믿고 따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내가 철저하고 뿌리 깊은 감리교도 집안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왔기 때문에
편파적으로 웨슬리의 편을 드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나는 존 웨슬리보다 오히려
찰스 스펄전이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 같이
칼빈주의에 속한 분들의 설교를 더 많이 접하고 영향을 받아 왔다.
그런데 내가 이 사람들과 다른 편에 서서
웨슬리의 예정론을 믿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며
인간의 선함과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이단적 가르침이
어떻게 성경적일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런 가르침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
내 대답이자 웨슬리의 대답이다.
그런 질문은 웨슬리와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여러 오해를 풀고 웨슬리 예정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1) 아르미니안주의와 펠라기안주의는 다르다.
- 아르미니우스가 가르친 성경의 진리와
필라기우스가 가르친 이단적 가르침은 완전히 다르다.
2)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은 그의 자칭 후계자들에 의해 발전 된 후기 아르미니안주의 가르침과도 다르다.
- 후기 아르미니안주의는 펠라기안주의의 가르침과 유사하며
아르미니우스는 이 후기 아르미니안주의를 알지도 못했고
당연히 가르치지도 않았다.
3) 웨슬리가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아르미니안 예정론은 아르미니우스가 가르친 초기 아르미니안주의 예정론이다.
일단 이 세 가지 사실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현재 웨슬리의 예정론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비판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 밀드레드 와인쿱은
이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해가는 과정을 통해
"예정론"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
먼저 예정론을 다루려면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교회사 최초로 있었던 "예정론" 논쟁이다.
이 때 맞붙은 것이 펠라기우스와
그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 두 사람인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예정론 논쟁의 점화선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선한 자유의지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반면 어거스틴은 이에 대항하여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아무런 자유의지도, 능력도 없으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고 가르쳤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
"펠라기우스의 주장
1. 인간은 완전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
2. 죄를 향하는 타고난 충동은 없고,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원죄도 없다.
3. 죄는 잘못을 행하기로 한 단순한 선택이다. 인간의 성적 본성 (sensual nature)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죄의 한 경우 (occasion)에 불과하다.
4. 원인으로서의 은총은 의지를 하나님께로 옮기는 데 불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의로운 행동의 한 동기와 모범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더 이상 중생한 마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개인적인 덕성들과 행위들의 복합체이다.
어거스틴의 반대 주장
1.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지 않도록 창조하셨다. 자신의 의지가 주인(master)이었다.
2.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복종하기로 결심했으며, 그 결과로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 의지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3. 그 의지는 죄를 짓는 의지가 되었다. 아담이 범죄할 때 모든 사람이 그 안에 있었으므로 악한 의지를 공유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와 함께 죄를 짓고 죄책감을 갖게 된다.
4. 구원은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호성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 오직 세례와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1) 세례는 어린아이의 구원을 확신시킨다. 따라서 그는 유아 세례를 인정했다. (2) 은총만이 인간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pg. 26)
2. 어거스틴 예정론의 문제점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펠라기우스의 이단적 가르침을 물리치고
교회의 정통적인 예정론으로 자리 잡는다.
문제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훗날 칼빈주의 예정론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거스틴이 예정론을 가르칠 때
오직 성경 안에서만 사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사람은
아무도 이 은혜를 거부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의 의지나 그 무엇과도 상관 없이 구원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선 신학적, 철학적 논리 전개가 시작된 것이다.
3. 칼빈주의 예정론
이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칼빈이 더 발전시켜
'이중 예정'이라는 개념을 추가하면서
예정론은 점점 성경에 근거를 두기보다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리 전개에 가까워진다.
이중 예정이란
창세 전에 하나님이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셨다면
창세 전에 하나님이 멸망 받을 자도 이미 선택하셨고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의지와 어떤 것에도 상관 없이
멸망 받게 된다는 논리적 귀결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말한 예정론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결론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문제는
칼빈의 후계자들이 이 예정론을 극단화시키며
지금의 '극단적 칼빈주의 예정론'이 완성, 유포되면서 생긴다.
극단적 칼빈주의 (extreme Calvinism or high Calvinism)은
이 모든 것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신적 작정의 순서"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 말은 성경이 말하는 것 외에 창세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뜻의 순서(order)를 우리는 알 수 있으며
이 순서에 의하면 이미 모든 것, 죄와 타락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이 이미 누군가는 천국으로, 누군가는 지옥으로 가게 정하셨다는 것이다.
4.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
이렇게 예정론이 성경에서 벗어나
철학으로, 신학으로, 먼 산을 헤매고 있을 때
아르미니우스가 성경적인 예정론을 갖고 일어난다.
아르미니우스는 성경, 특히 로마서를 근거로
성경은 칼빈주의 예정론을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말할 뿐
창세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비밀하신 계획과
예수님과 상관없이 천국과 지옥으로 예정된 운명에 관해서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공개 토론회를 열며
아르미니우스를 잠잠케하려 했지만
성경에 해박하고 경건했던 아르미니우스는
모든 공개 토론회에서 승리했다.
그러자 칼빈주의자들은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아르미니우스를이단으로 정죄했고
그가 죽은 뒤 열린 도트 공의회에서도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발언권도 얻지 못한 채
이단으로 몰려 핍박을 받게 된다.
(이 결정에는 정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5. 아르미니안 예정론 VS 극단적 칼빈주의 예정론
이렇게 대립이 계속 되다가 도르트 공회에서
아르미니안 예정론은 이단으로 칼빈주의 예정론은 정통으로
확정되면서 오늘까지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은
칼빈주의 예정론의 영향 아래 있게 된 것이다.
6. 웨슬리주의 VS 칼빈주의
이렇게 칼빈주의 예정론이 개신교의 정통 예정론 교리가 되어
내려오지만 성경의 진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철저했던
존 웨슬리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성경을 근거로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항해 외친 것이다
칼빈주의 예정론에 의하면 구원은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지며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천국에 가도록 보장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영원전에 알 수 없는 뜻에 의하여 소수에게 주어진 이 택하심이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가 타락한 죄인임에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
즉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선행적 은총"(미리 주어진 은총)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선택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고 또 결정할 능력도 있다.
성경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그리스도인이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 이것은 웨슬리의 "성화론"으로 이어진다.
7. 결론: 성경적인 예정론
이 책의 결론은 "우리는예정에 의한 구원인가 믿음에 의한 구원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에 의해 구원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고
웨슬리주의자들은 "믿음에 의해 구원 받는다"고 말한다.
이 둘 중에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구원 받는다"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 아니던가?
쉽게 요약하자면,
칼빈주의 예정론은 논리적으로 아무 흠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에 더 경건해보인다.
하지만 칼빈주의 예정론에는 치명적으로 빠져 있는 하나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예정에 대해서,
우리의 택하심과 구원에 대해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말하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1장만 보아도 이 짧은 장 하나에
"창세 전에 택하심" "예정" "그의 뜻의 결정"
"비밀" "계획"이란 말들이 반복되고 도배되어 있다.
이렇게만 보면 우리는 칼빈주의자들의 말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강조하며
우리의 구원도 영원전에 있었던 비밀스러운 계획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더욱 유심히 읽어보면
이 모든 단어들 전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등의 말이
항상 따라 붙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짧은 장 안에서만 셀 수 없이 반복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고 고백해야 할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만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 모든 것을 다뤄야 하며
그 분을 벗어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원전의 신비한 예정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대로, "예정을 전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마틴 루터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의 성도들이 아직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죄를 생각할 때
그 원인이 가려진 선택이라든가 섭리라든가,
이른바 예정설에서 찾아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사고는 의문 이외에 아무것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확실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절망일까요?
만일 선택되어 있다면 아무리 타락해도 위해는 미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은총 가운데 있어 망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선택되지 않은 경우, 아무것도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실로 무서운 것이고,
마음에 이와 같은 사고를 갖는 것은 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직접 지시하시고,
그 말씀 안에 하나님은 그 뜻을 계시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움직이시고 그 자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죄를 벌하고, 여러 가지 죄를 밝히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이 주님의 은총 안에 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루터 생명의 말>, 동서문화사, pg.162)
와인쿱이 지적했듯이 존 칼빈조차도 영원 전의 신비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칼빈주의를 알지 못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을 가르쳤다:
"이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그를 받아들여 수용할 때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보증이시다.
그도 그럴 것이 피택이란 영생에의 참여 이외에 무엇이곘는가?
우리는 태초부터 생명이시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누리도록 우리에게 생명으로 제공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피택되었고 영생에 참여케 되었다.
따라서 만약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했을진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더 이상 캐물을 필요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이 반사되는 거울이요,
우리에게 영생을 확인시키시는 보증이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요약 초판> 13장 선택과 예정에 대하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g.37)
바로 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이 웨슬리가 전한 복음이고
나 또한 이것이야말로 "성경적인 예정론"이라고 믿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과 구원함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출처] [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 - 밀드레드 와인쿱|작성자 루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