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원교리의 역사 (1)
http://cafe.daum.net/hanul-sarang/4jk1/13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성적 간음, 교회 내 권위주의적 정치구조, 교회재정의 불투명성/불건전성, 제왕적 권위주의, 세습, 폭력, 도박, 표절, 사기, 거짓말 등 죄의 열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온갖 불법/불의/악행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택받았으니,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비성경적인/잘못된 구원관에 기인합니다.
* 김기석목사 -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으며, 행함이 믿음을 증거한다. 삶의 변화 없이 교회출석만으로 천국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가시적 교회성장이 신과의 관계성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복음은 말의 교리가 아닌 삶의 교리이다.>
* 신광은목사 - <교회의 구원론만 보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면죄부를 발행했던 중세 카톨릭보다 더 심각한 타락에 빠져있다. (삶의 변화 없는) 편리한 慙悔신학에서 비롯된 면죄부가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다. 나쁜 신학인 아르뱅(아르미니안-깔뱅)주의는 회개를 위한 노력 없이(삶의 변화가 없는 말뿐인 후회/의지적이 아닌 감정적 뉘우침)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 칼뱅주의 - 인간이 완전히 타락했으므로 구원은 100%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고<Total Depravity>, 하나님의 선택으로 가능하며<Unconditional Election>, 예수그리스도는 선택된 자만을 위해 피흘렸고<Limited Atonement>, 인간은 구원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으며<Irresistible Grace>,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음<Perseverance of Saints>을 주장.
* 아르미니우스주의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과 은총을 베푸실 때 인간이 이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책임이 있으므로 믿음의 주체는 인간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매일 매일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함을 주장.
* 아르뱅주의 - 1980년에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으며,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혼합됨. 속죄와 은혜에 대해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닮았으나(감정적 차원의 뉘우침인 참회기도를 하면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심), 견인교리(한번 구원 영원 구원)에 대해서는 칼뱅주의를 채택함.
지금의 장로교는 칼뱅주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나의 구원의 여부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예정론은 신실한 신앙생활(내적 증거)과 도덕적 실천(외적 증거)을 통해 개인의 구원의 가능성을 살짝 엿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장로교단의 헌법(9장)과 웨스트민스터신조(18조2항)에서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행위로 복종하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義가 전가되어 행위에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지상주의는 오늘날 경건과 성화의 기조를 무너뜨리며 도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2. 구원교리의 역사(2)
성경공부를 깊이 할 기회가 없는 교인들은 엉터리 목사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분별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 목사들도 신학교(목회연구과정 같은 교육부 비인가 과정)에서 공부하는 수준으로는 성경자체를 정확히 해석하기는커녕 다 읽어 보지도 않고 목사안수를 받고 심지어는 용팔이, 이근안도 목사안수 받는가 하면 대형교회 목사들은 대부분 사기꾼이나 성추행범으로 판명되었는데도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 착취하는 바리새인으로 있으니 길이 안보입니다
한국교회는 1960년 전반까지는 영생의 조건으로 행위가 있는 믿음을 설교했으나, 군사정권이 내건 <잘 살아보세>표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사상으로 사회윤리와 가치기준을 몰살시켰으며, 교회마저 영적 성장보다는 양적/물질적 성장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특히 양적으로 급성장한 순복음교회가 교회성장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싫어하고 무관심한 회개와 거룩한 삶은 설교에서 사라졌으며, 오히려 <믿기만 하면 행위가 없어도 영생을 얻는다.>는 믿음지상주의와 기복주의가 가르쳐지고 설교되었으며, 그 결과 죽음의 면죄부를 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대형 예배당을 짓고 목사는 제왕적 권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김세윤 박사 - 한국교회는 구원론이 구원파와 다르지 않다. 그저 믿기만(이해하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는 가짜 복음이 부패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행위 없는 믿음을 조장했으며, 결국 기독교인들은 사기를 치거나 탈세를 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나 스스로 믿겠다는 의지가 없이 그리스도라고 말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4영리는 구원을 왜곡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종말까지 하나님나라의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며, 이는 산상수훈(마5-7장)을 행하는 것이며, <팔복>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품성이며, <세상의 소금과 빛>은 그 정체성이다.
본회퍼 - (“제자됨의 대가” 중에서)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인하여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값싼 은혜는 ①회개하지 않고 죄를 그대로 품고 있는 죄인에게도 은혜가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친다. ②참된 회개 없이도 용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③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다. ④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의를 부여하는 자기기만이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교리들 - (1)한 번 구원은 영원히 상실되지 않는다. (2)믿고 고백만 하면 천국 간다. (3)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순간 구원은 완성된다. (4)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를 영원히 붙드신다. (5)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신다. (6)행위는 구원과 상관없다. 상급에 관한 문제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속임수는 성경을 압축하거나 논리적/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닌 교리라는 틀에 성경을 억지로 꿰어 맞추며, 그 틀에 맞지 않을 경우 성경을 곡해/오역하여 맞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서기관이 근거없이 주장하는 모세->여호수아->사사->선지자->랍비에게 口傳되어 成文化된 미쉬나/탈무드/할라카/미드라쉬(장로들의 유전/사람의 유전<막7:8,골2:8>/너희의 유전<마15:3>/조상들의 유전<갈1:14>)으로 모세오경/선지서 등 成文化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였듯이(마15:1-9), 이 시대의 목사들이 비성경적 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고 있습니다.
3. 구원교리의 역사(3)
TULIP(칼빈의 5대교리)은 인간이 전적타락으로 인한 전적무능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선택한 자들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속죄를 하시고, 구원의 소명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베푸시고, 영원히 구원받도록 성도로서 견인하신다는 칼빈의 복잡하고 방대한 예정론의 압축된 결정체로서의 5가지 교리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어떤 조건/반응이 배제된 채 하나님에 의해 창세 전에 일방적으로 계획된 것이라면 성경에 쓰여진 <모든 사람/누구든지/나를 믿는 자는/믿는 자마다/-하면>(딤전2:4/딛2:11/계22:17/요3:14-16/요7:37/마22:1-10/벧후3:9)은 <예정된 사람/예정된 자/믿기로 예정된 자/예정된 자마다/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으로 표현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정>은 성경적 단어이나(행3:20/엡1:3-7/롬8:30), 개인예정론은 비성경적 이론이며 칼빈의 5대 교리로 인용된 성경구절은 문맥을 무시한 한 구절 만의 억지 적용/오역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칼빈주의는 구원에 관해서 하나님이 다 해 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나, 성경적 구원관은 심판의 기준은 열매이므로 믿음의 반응과 성숙/경건의 열매를 구원의 조건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에 있어 신의 은총이 강조되고 인간의 의지가 무시되는 시대는 도덕적 부패를 낳았으며, 인간의 의지가 강조되고 신의 은총이 무시되는 시대는 율법주의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시작되고 성령님의 도움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성화로 반응할 때 이루어집니다.
로마카톨릭의 신의 은총의 강조에 따른 도덕적 방종에 대해서 펠라기우스(5세기 영국의 수도사)가 인간의 능력(자유의지)에 대한 지나친 긍정으로 자력구원/자유의지 구원을 주장하자 이에 신플라톤주의적 숙명론(운명론)에 심취된 어거스틴(카톨릭의 신학적 오류인 마리아 무원죄 회태/마리아 중보자론/연옥설 정립)이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칼빈에 앞서 개인예정론을 수립합니다.
4. 구원교리의 역사(4)
사도 바울 시대로부터 그리스도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누구든지 복음의 부름에 믿음으로 응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며, 신의 은총이 강조될 때 도덕적 부패가 왔으며, 인간의 의지가 강조될 때 율법주의로 흘렀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시작되었으며, 인간은 의지로 그 은총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로마카톨릭이 교세 확장을 위해 신의 은총에 집중하므로 도덕적 방종이 나왔으며, 이에 대해 5세기경 펠라기우스가 극단적인 자유의지 교리(자력구원)로 로마카톨릭을 비난하자, 극단적인 신의 은총 교리를 주장하는 어거스틴(AD396-430)이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신플라톤적 숙명론(운명론)에 심취한 어거스틴의 신학적 이론이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에 의해 시작된 개인예정론(once saved, always saved)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시므로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자들은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죄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은 구원 받았다는 깊은 자기기만 속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지만(딤전2:4), 인간의 죄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6세기 초 카톨릭교회의 부패/오류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나 1,100년 전에 있었던 어거스틴의 오류(신적작정에 의한 구원)를 다시 부활시켜 암흑 속으로 빠지는 우를 범했습니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①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알미니우스에 의해 교리화 됨) ②구원은 교회로부터 받는다.(카톨릭에 의해 교리화 됨) ③구원은 신적작정에 의해 받는다.(칼빈에 의해 교리화 됨)입니다. 제왕적 권위(수찬정지/종부성사)를 가진 카톨릭이 (사제가 있는)교회를 통한 구원(세례+기부+선행)을 택함은 어거스틴이 이단으로 정죄한 펠라기우스의 자력구원과 유사함을 보여주며, 이는 내적 변화 없이 외적 행위만을 강조하는 행위구원론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해서 목숨을 걸고 옛 자아를 죽이고 내면적인 변화를 이루어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치열한 구원의 전투를 삶속에서 벌이는 것을 행위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며, 이는 성화구원으로 성경적 구원관입니다. 칼빈의 구원에 있어서의 신의 은총의 극대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 사상으로의 복귀/부활을 의미합니다.(B.B.Warfield/Henry Meeter)
칼빈의 이중예정론<창세 전에 어떤 이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었고, 어떤 이들은 버림(유기)받도록 예정되었다. 이러한 구원/버림의 선택의 예정된 계획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결정되며,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도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 인간의 선택권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 있을 뿐이다.>은 어거스틴주의이며, 철학적 이론에 불과하며, 철저히 비성경적인 사탄의 교리입니다.
이중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구원에 대한 믿음의 반응과 삶의 변화를 완전히 무시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①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 아닌 폭군으로 만든다. ②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편파적이다. ③인간이 행하는 선행은 모두 무시된다. ④모든 복음전파를 무가치하게 한다. ⑤굳이 하나님을 믿으려 할 필요가 없다. ⑥성화에 관한 모든 가치와 열정을 소멸한다. ⑦세상의 모든 악도 하나님의 계획이다.
5. 구원교리의 역사(5)
극단적 칼빈주의자인 베자는 스승인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한층 더 발전시켜 절대예정(타락전예정-인간이 타락하기도 전에 죄가 예정됨)을 주장하였으며, 칼빈주의의 神은 창세 전에 유기하도록 정해 놓은 자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죄를 짓도록 만들어야 하며, 따라서 죄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에 1589년 학식있는 평신도인 코른헤르트(Koornheert)가 베자의 타락전예정설을 논박하여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되므로 신성모독이며 비성경적이라고 신랄하게 공격하므로 베자는 제자로서 인품/신앙/학문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아르미니우스(1560-1609)를 택하여 그를 논파하도록 합니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주의 철학의 중심인 롬9장을 연구하면서 예정론이 비성경적임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교회 교부들(AD100-700)의 책을 통해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한 결과 신적작정(예정론)에 관한 타락전예정설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공식적으로 거부합니다.
①예정론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②과거 1500년 동안 예정론은 책임있는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적도 없고 전체 교회에 의해 수용된 적도 없다. ③예정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든다. ④예정론은 창조되지도 않은 사람에 관해 선택의 작정을 만든다.
또한 아르미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합니다.
①구원에 있어 개인예정은 없다. ②하나님은 회개하고 나아오는 모든 자를 받아들이시기로 작정하셨다. ③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는 참고 견디는 자에게 주어진다. ④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선행적 은총) ⑤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만 믿음의 행위는 인간이 한다.(칼빈주의-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 ⑥하나님께서는 신적 예지에 의해서 예정하신다.(이 주장은 아르미니우스의 한계임) 이에 베자는 제자인 고마루스(F.Gomarus)를 세워 논박을 준비합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는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십자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도덕적 자력구원설)을 좇는 이단으로 몰리게 되며, 기득권 세력인 칼빈주의자들의 일방적인 성토로 인해 신앙적/인격적/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국가차원의 종교회의의 개최를 요구하지만 거부됩니다. 그의 사후 1610년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46명의 목사들이 논쟁 해결을 위해 5가지 신조를 공인해 주도록 탄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자 칼빈주의자들은 반항변서를 국회에 제출합니다.
칼빈주의자인 Maurice는 1618년 7월 쿠데타로 총독의 자리에 오른 후 그의 정적인 올덴바르네벨트(아르미니아누스파)와 유력한 아르미니아누스 지지자들을 투옥하며, 1618.11.13. 도르트회의(아르미니아누스파는 배제됨)를 열어 154번의 회의를 거쳐 다음의 결의 내용과 함께 1619.5.9. 막을 내립니다.
①타락전의 예정에서 타락후의 예정으로 바뀜 ②칼빈주의 예정설을 그대로 승인함 ③아르미니안의 5개항을 이단으로 정죄함 ④회의 폐막 후 5/13 올덴바르네벨트를 처형함 ⑤해양법의 아버지인 그로티우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함 ⑥200명의 아르미니안 목사들을 성직에서 추방함
도르트종교회의는 칼빈주의자들이 자행한 로마카톨릭 식의 종교재판이었으며(Motley), 가장 불행한 사실은 한국의 장로교 역시 도르트회의의 결의를 따르고 있다는 점입니다.(신종국 목사)
6. 구원교리의 역사(6)
성경에는 예정이란 단어가 있으나(엡1:5-공동체 예정), 칼빈이 주장하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개개인의 구원을 예정(개인절대예정)/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를 예정(이중예정)과 베자의 타락전예정은 성경에 없습니다.
칼빈주의자는 렘1:4-5/왕상13:2/사44:28/행9:15/롬9:10-13을 개인예정론의 근거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개인예정이 아니라 개인사명 내지는 개인사역에 관한 예정일 뿐입니다.
(1)렘1:4-5(사명/사역예정) - 미리 아시는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 시대에 맞는 특별히 예정된 사역자로 세우셨으며(렘1:6-19), 예레미야는 사명자로 쓰임 받으나 자신의 구원은 자기 스스로 이루어가야 합니다.
(2)왕상13:2(사명/사역예정) - 요시야왕이 산당제사를 혁파하는 개혁자로 예정됩니다.
(3)사44:28-45:1(사명/사역예정) - 하나님은 고레스(구원받은 자가 아님)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시키며, 성전건축을 허락(대하36:22-23)할 것을 그가 태어나기 200년전 이사야를 통해 예정하셨습니다.
(4)행9:15(사명/사역예정) - 하나님은 바울을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으로 세우셨으나, 바울 자신은 구원이 예정되어있지 않음을 고백하였습니다.(빌3:10-14/고전9:27)
(5)롬9:10-13 - ①롬9:12b는 창25:23에서 인용한 것이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내용으로 에서/야곱이 살아 있을 동안에 에서가 야곱을 섬긴 적은 없으며, 약 1000년후 다윗왕 때 에돔족속이 유다족속을 섬겼습니다. ②롬9:13는 말1:2-3을 인용한 것이며, 이 말씀은 에서/야곱이 태어난 때로부터 1600년 후의 일로서 그들의 삶의 결과론적인 내용이며, 야곱은 사랑 받을 만한 삶을 살았고 에서는 미움 받을 만한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창25:29-34/히12:16)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에 대해서 하나님은 <너희는 내가 왜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를 미워했는지 모르겠느냐? 이유는 야곱은 영적인 것을 귀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의 영적 상태가 에서를 닮았다.(말1:6-13)>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개인예정(행3:20) 이외의 개인예정은 反성경적이며(딤전2:4/벧후3:9/요3:16/눅11:52/마23:15/마18:6-9), 이는 분명히 십자가 모독행위(요3:16)입니다.
칼빈의 5대교리 중 전적타락의 근거로 주장하는 <롬3:10-12>는 내용상 전적타락인지 인간 스스로 반응 불가하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요3:16>에서 인간이 전적타락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를 믿는>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스스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하여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엡2:8>에서 <그 은혜>는 하나님의 역할인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의 자비에 해당되며, <믿음>은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역할에 해당됩니다. have been saved([쎄쏘쓰메노이]-현재진행형 의미를 내포함)의 수동형은 과거의 <그 은혜에 의해서>(by the grace-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하심) 하나님에 의해 구원이 시작되었으며, 현재의 <믿음을 통하여>(through faith) 구원이 이루어지며, 그래서 구원은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진행중 임을 보여줍니다.
은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나, 믿음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믿음의 반응/행위는 인간이 합니다. 믿음이라는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임의 여부는 인간이 결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임의 여부는 각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칼빈주의에 따른 창세전에 개인의 구원이 예정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신해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의 행위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주며(신30:15-16,19-20/수24:15-21/계22:17), 또한 구원은 언제든 상실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고전9:27/히6:4-6)
* John Calvin - 선택과 유기에 관한 섭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로 약속한 개개인은 물론 현재 태어나지 않은 자도 해당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정말 참담한 내용입니다.)
8. 구원교리의 역사(8)
불행하게도 칼빈주의자들은 불신자가 교인이 되는 순간 천국을 확신(구원을 확신)시켜 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필수적인 교인이 성도로 변화되는 모든 성화의 과정을 구원의 확신으로 박탈해 없애 버리는 참담하고도 어리석은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요5:24(직역)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고 있다. 나의 그 말을 듣고 있고([아쿠온]-현재형)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고 있는([피스튜온]-현재형)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는 중이며([에케이]-현재진행형)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는 중([엘케타이]-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사망으로부터 나와서 생명 안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메타베베켄]-현재완료형<현재진행 포함>)이다.”
칼빈주의 5대강령은 어거스틴이 성경(바울 서신)을 신플라톤주의(철학)적 관점으로 잘못 해석해서 얻어낸 지식을 칼빈이 정리한 것입니다.
칼빈주의(1559) 신앙의 기초 위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는 영국 성공회가 1643년 웨스트민스터총회를 열어 5년6개월 동안 151명에 의해서 작성되고 채택된 신앙고백 문서입니다.
예장합동의 <신학지남> 제34권 3집은 ‘거룩한 성경의 요약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합당하여 영존할 것이다... 그 신앙고백은 불변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요약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부지런히 연구를 계속해서 그 권위의 동일함을 우리 백성에게 가르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계실 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그 신앙고백의 권위가 단순히 교리의 위치가 아닌 거의 성경의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은 심히 우려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공통점:
(1) 전적무능력
- 기독교강요 : 제1권 1장 8절 / 제2권 2장 제목 / 제2권 2장 12절 / 제2권 3장 5절
- 신앙고백서 : 제6장 4절 / 제9장 3절
인간이 심하게 타락했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이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남아 있기에 하나님은 은혜에 반응하여 회개하라고 하셨으며,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책임이므로 심판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였으나 100% 완전무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오셔서 은혜를 베푸시면 그 은혜에 반응할 만큼 인간의 자유의지가 살아있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이 성경적인 설명이며, 따라서 성경은 계속해서 인간의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무능으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신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결코 물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에 반응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으며, 결국 인간은 자유의지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2) 개인예정
- 기독교강요 : 제3권 21장 제목(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 제3권 21장 5절 / 제3권 21장 7절
- 신앙고백서 : 제3장 3절(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얼마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정하셨고, 또 달리 얼마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 / 제3장 4절
* 칼빈의 억지 주장/성경 왜곡:
요6:45에 대한 칼빈의 주석(모든 사람 -> 선택된 자들)과 요일2:2에 대한 칼빈의 주석(온 세상 -> 모든 믿는 자들)처럼 칼빈은 성경구절에서 <모든 사람>이 나올 때 그 모든 사람을 <선택된 모든 사람>이라고 성경을 억지 왜곡하고 있으며, 다음은 칼빈식으로 성경을 읽을 때의 왜곡된 내용입니다.: 사45:22(모든 자들아 -> 모든 선택된 자들아), 히2:9(모든 사람을 -> 모든 선택된 자들을), 딤전1:15(모든 사람이 -> 모든 선택된 자들이), 고전15:22(첫번째 모든 사람이 -> 신자/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두 번째 모든 사람이 -> 모든 선택된 자들이), 요3:16(믿는 자마다 -> 모든 선택된 자마다)
9. 구원교리의 역사(9)
* 칼빈의 5대 강령
①전적타락: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믿음의 반응보다 우선함을 보여줌)
②무조건적 선택: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졌다.
③제한된 속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해 돌아가셨다.
④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하지만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한다. (카톨릭의 <[피데이인퓨싸] - 강제적으로 주입된 은혜>와 유사함)
⑤궁극적 견인: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된다.
* 아르미니우스의 5대 전제
①자연적인 무력: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새로워 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하다.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반응할 수 있을 만큼 무력하고 무능함을 의미)
②조건적 선택: 하나님이 예지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창세전에 개인 구원을 작정하심이 아님)
③보편적 속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람의 믿는 여부에 달려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를 속죄하심을 의미)
④저항 가능한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됨이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도 없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하시는 방식 때문에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다.
⑤조건적 견인: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았다.
칼빈의 5대 강령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의 요약이 아니며, 또한 그것이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은 관련 성경의 문맥적 해석을 할 경우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서 전혀 비성경적/사단적/철학적 이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신도개요-제10장-불가항력적 은혜에 관하여>가 근거로 제시한 롬9:16을 문맥적 해석을 할 경우 이 성경 본문은 구원에 관한 내용이 아닌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 해석의 오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1589년 학식있는 평신도인 코른헤르트(Koornheert)가 칼빈의 제자인 베자의 타락전예정설을 논박하여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되므로 신성모독이며 비성경적이라고 신랄하게 공격하므로 베자는 제자로서 인품/신앙/학문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아르미니우스(1560-1609)를 택하여 그를 논파하도록 하였으며,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주의 철학의 중심인 롬9장을 연구하면서 예정론이 오히려 비성경적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 롬9:16의 칼빈주의적 해석:
‘구원은 사람이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얻기 위해 달음박질(최선을 다한다는 표현)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긴 자만(창세전 예정된 택자)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다. ’
롬9:16은 결코 한 개인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관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닌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방 선교사로 부름 받은 사도 바울이 한 때 이방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제사장 나라/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던(롬9:4-5/출19:5-6) 동족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당시의 상태를 몹시 고통스럽게 느끼고(롬9:1-3), 리브가에서 이삭이 나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김으로(다윗왕 때)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지 않고 다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역자로 세우심에 실수하지 않으실 것이며(롬9:6-13), 하나님께서 바로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처럼(롬9:17-18) 긍휼히 여기심으로(롬9:14-15) 이스라엘의 원과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사역자로 부르시는(롬9:16) 그 권한에 인간이 항의할 수/이의할 수 없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주권(롬9:19-21)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0. 구원교리의 역사(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신도개요-제17장 1,2,3항-성도의 견인에 관하여>의 내용 요약정리: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작정하신 대로 부르신 자들은(1항),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으나 최종적으로는 타락할 수 없다.(1항) 만약 일시적으로 타락하면, 영생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쾌를 일으키며, 성령을 슬프게 하며, 은혜의 위로를 어느 정도 빼앗기게 되고, 마음이 강퍅해지고, 양심이 부상을 당해 다른 사람을 해치며 중상하는 사람이 되지만 영생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자신들에게 심판을 초래한다.(3항)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선택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그리고 은혜 언약에 기초하기 때문이다.(2항)
위의 내용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책임과 반응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끝까지 견인하신다는 것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제시하는 궁극적 견인 관련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요6:37
①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 (직역)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보내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벧후3:9) <모든 사람>은 육적 양식을 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요6:26-27)
②내게 오는 자는 : (직역) 나를 향하여 오는 자는 - <모든 사람> 중 영적 양식을 구하는 자(요6:26-27), 요6:39의 <내게 주신 자>를 의미하며, 이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나아오는 자를 말합니다.
③내쫓지 아니하리라 : (직역) 내가 밖으로 던지지 않을 것이다. - <밖>은 바깥 어두운데 곧 지옥을 말합니다.(마22:13)
결국, 요6:39는 영적 양식을 구하는 자의 조건에 관한 성구이지, 예정에 관한 성구가 아닙니다.
(2) 요10:28
궁극적 견인 이론은 창세 전 선택에 기초하므로 조건이 없어야 하며, 무조건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10:22-27에서 예수님의 양은 믿고([피스튜에테]-믿다,신실하다,충성하다,의리가 있다) / 들으며([아쿠우씬]-집중해서 듣다) / 따르는([아코루두씬]-제자처럼 복종하고 동행하며 따르다) 사람들을 말하며, 이 조건적 반응을 보이는 <내 양>을 위한 조건적 견인으로 예수님은 <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십니다.(요10:14-15)
(3) 롬8:33-35
롬8:33의 <택하신 자들>([에크렉토스]-주님을 따르기를 선택한 자-택함은 선별이 아닌 결과를 의미함)는 청함을 받은 자 중에서 <the best>로 뽑힌 자를 말하며, 이는 롬8:1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정죄함이 없고(8:1), 성령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셨고(8:2),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고(8:4), 영의 일을 생각하며(8:5), 성령께서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며(8:16), 상속자가 되며(8:17), 영광의 자유에 이른(8:21) 사람들을 의미하며, 롬8:12-14에서 분명히 증언됩니다. 또한 롬8:10,11,13,14,17 성구는 조건적 견인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11. 구원교리의 역사(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신도개요-제17장 1,2,3항-성도의 견인에 관하여>가 제시하는 궁극적 견인 관련 성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4) 롬11:29
롬11:29 말씀의 <후회하심이 없느니라>의 올바른 해석은 [아메타메레토스](돌이킬 수 없는/변경할 수 없는/최종적인)이며, 칼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한 번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 그리고 그 선물을 적용하기 위해 부르시는 것에는 하나님의 변경은 없다. 왜냐하면, ‘창세 전에 작정된 대로’이기 때문이다.>로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11장에서 이스라엘이 완악함과 지속적인 거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포기선언(마23:39)으로 완전히 버림을 당하여 이스라엘을 배제한 채 교회가 시작된 것 같으나, 엘리야 시대에 칠천명을 남겨 주셨듯이 앞으로 이스라엘에 구원의 기회를 주실 것으로 희망하며(롬11:1b-5), 이스라엘의 허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으며(롬1: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므로 찍어 버리셨으므로(사역과 구원을 상실) 교회도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두려워해야 하며(롬11:17-22),
하나님이 정하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를 때까지 이스라엘의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으나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롬11:25-26,8),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웅장한 계획)을 찬양하고 있습니다.(롬11:33-36)
따라서 롬11:29 말씀은 <창세 전 개인 구원>이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즉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5) 빌1:6
빌1:6의 말씀에 관해서 칼빈주의자들은 문맥(context)을 무시한 문장(text)만의 해석으로 <착한 일>은 <구원>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재림>으로 오역하고 있습니다. 문맥적 해석에 의하면 <착한 일>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사전적 의미로서 <참여>는 [코이노니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관심사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영적/정신적/물질적인 것을 공유하는 것)을 말하고, <확신하노라>는 [페포이도스] (신뢰할 만한 일에 대해서 납득이 간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빌1:6 말씀은 <궁극적 견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6) 엡1:3-14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 예정)
성경에서 개인에 관한 예정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행3:20). 엡1:3-14 말씀에서 <나>라는 단어는 없고, 오직 <우리>라는 단어만 12번 나오며, 이는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 예정된 공동체 안에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즉,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으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요3:14-16).
<창세 전>[프로 카타볼레스 코스무]의 원 뜻은 <세상에 죄가 들어와 지배하기 전>으로 아담이 타락한 후인 창3:15을 의미하며, <세상>은 [코스모스] (타락한 세상)<요3:16>을 말하며, 창1장의 <세상(무결점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12. 구원교리의 역사(12)
(7) 행13:48
행13:48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창세 전 선택>을 증명하는 구절로 인용되고 있으나, 본문 해석의 오류 (①‘작정된’ 오역-[테타그메노이]:지정하다/배치하다 ②단어 삭제-[호소이]:~만큼 ③단어 추가-주시기로)를 교정한 원문 직역은 <그러나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들은 그 이방인들은 기뻐했고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배치된 만큼 영생을 얻었다.>입니다.
본문 관련 문맥을 살펴보면,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하며(행13:1-3), 그들은 이방인이 아닌 동족 유대인들에게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나(행13:4-5,14,43-44), 동족으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며(행13:45,50-51), 이 사건을 통해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을 향한 소명을 확인하고 발길을 이방인에게로 돌리며(행13:46-48), 복음이 이방인에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행13:48)
하나님은 천국에 이방인을 채우실 계획된 수가 있으며,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자 마치 군인을 배치하는 것과 같이 천국에 이방인이 배치되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며, 이는 <창세 전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비성경적 해석의 주된 원인은 <①성경해석학적 무지 ②견인교리라는 틀이 만들어 낸 목회자 ③그 틀 속에 갇힌 설교와 해석들 ④구원 받았다는 거짓 확신에 찬 사람>에 있습니다.
* 칼빈주의 5대 교리의 허구를 알기 위해서는 이 이론의 모체인 개인예정론 교리를 알아야 합니다.
①창세 전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②창세 전에 결정된 계획은 역사 속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여 진행된다.
③역사나 세계는 이미 배정된 순서에 따라 오직 앞으로만 전진해 나간다.
④결정(예정)한 대로만 모든 것이 발생된다.
⑤창세 전 결정과 성취는 절대자의 주권이다.
* 결정론의 모순들:
창2:16-17은 하나님께서 창세 후에 아담과 함께 맺은 행위 언약으로서 이는 창세 전에 아무런 결정이 없음을 보여주며, 결국 창세 전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고 계획되었다는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근거가 허구임을 증명해 줍니다. 즉, 전 인류가 가야할 역사의 특징을 결정한 것은 창세 후에 결정된 일이며, 인간이 영생의 삶을 또는 멸망의 삶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 장본인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은 양자택일의 기회를 아담에게 주었으며, 아담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서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것임이 명백히 증명되었습니다.(롬5:12,17)
칼빈주의자들은 창2:16-17에 대한 결정론적 적용이 너무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또 다른 앞뒤가 맞지 않는 이중 잣대적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주장하는 개인 예정론이 완전히 허구임을 스스로 폭로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G.I.Williamson/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1/J.Calvin/L.B.Bottner/A.A.Hodge)
* J. Calvin이 억지 주장하는 모순된 이율배반적 이론:
- 이론 (1) : 개인예정론 (창세 전 결정)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따라 아담이 타락 전에 온 인류와 모든 개인의 운명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
- 이론 (2) : 아담의 창세 후 타락 (창2:16-17)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에 찾아 올라갈 수 있었다.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넘어졌다.”
13. 구원교리의 역사(13)
칼빈주의 절대예정론(개인예정론)의 필수적인 전제인 전적타락(Total Corruption)의 기본 명제는 칼빈의 神이 절대주권으로 창세 전에 인간 타락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의 神은 창2:16-17에서 <내가 이미 결정한 것이니 타락하거라>라고 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神은 타락 결정/예정/신적 작정이라는 불변적인 음흉한 계획은 철저히 숨겨 놓고 타락을 주도한 다음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영생을 줄 것이다. (행위 언약)>라는 거짓으로 속이고 그 범죄의 책임에 대해서 그 책임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돌아가게 해서 결국 영멸/영벌을 주는 그 神은 가증한 기만자요 거짓의 아비인 것입니다.
칼빈은 <범죄의 책임은 인간이 전적으로 질 수 밖에 없다.>라고 억지 주장을 하면서도 교활하게 <어떻게 하셔서 그 죄를 범했던 우리의 첫 조상 (그리고 우리 자신들)에게 전적으로 그 죄책을 돌릴 수 있으셨는가? 여기에 대하여는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도 이 엄청난 신비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도록 하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허구를 얼버무립니다. 결국 칼빈은 창2:16-17에서 상호 공존할 수 없는 모순된 두 개의 허구(아담 책임론의 타락설과 칼빈주의 神의 타락결정론)를 말하므로 칼빈의 神은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를 기만하고 있으며, 성경적 공의의 하나님을 상대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습니다.
* 칼빈주의자 들의 허구적 주장들 :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1 - 사람이 그 율법을 지킬 때 생명을 주시겠다고 경고하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② J. Calvin -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넘어졌다. 의심의 여지없이, 신은 그의 섭리 가운데서 이 최초의 인간의 타락에 개입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틀림없이 영원 전부터 예지되었으며, 아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 아담이 타락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이 타락하도록 하신 것이다.
③ Gordon H. Clark -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는 죄의 원인자(Cause of Sin)이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④ 강정진 - 인간이 받은 저주에 대해서 스스로가 책임이 있다고 할지라도 타락 그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 명령된 것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인간 타락의 궁극적 원인이 인간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반대한다.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타락한 것이 아니다.
칼빈은 위와 같은 자신의 허구를 감추려는 교활한 미봉책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기독교강요 1권 15:8)>라고 말하면서 무책임하고 교묘하게 빠져 나갑니다.
* 칼빈주의자들의 참람한 주장들 :
① 칼빈 기독교강요 3권 21장 제목 -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② 칼빈 기독교강요 3권 21:5 -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는 그 예정을 부정하지 못한다.
③ 칼빈 기독교강요 3권 23:5 - 주께서는 멸망으로 갈 줄을 분명히 미리 아신 자들을 창조하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④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4 -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얼마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예정하셨고, 또 달리 얼마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 이 천사들과 사람들에 대한 예정은 개별적으로 정확하게 또는 변동성 없게 계획되었다. 그러므로 그 수효는 확정되어 있어서 가감할 수 없다.
칼빈의 절대예정론은 창세 전 선택에 기초하므로 조건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면, -이면, -으면, -면>의 조건절을 가진 다음의 말씀들 역시 칼빈의 神의 입장에서 명백한 기만임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 롬6:5-8, 고전15:2, 골1:22-23, 벧후2:20, 요일1:7, 요일2:24, 히10:38, 요15:6, 요8:51, 롬11:22, 벧후1:10, 히3:14, 딤후2:2, 히10:26, 요일2:15, 요15:14, 롬8:13
칼빈주의 철학은 절대예정론이라는 허구적 이론 위에 세워진 집입니다. 절대예정론이 허구라면 칼빈의 신적작정론/구원론/믿음론/기독론/주권설/영광론/섭리론/율법론/타락론/계획설/신론/교회론/종말론/역사관/우주관/세계관 이 모든 것 역시 허구임이 분명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1항 - 전 인류의 타락은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영광을 드러냈다.>는 타락한 인간을 보면서 겉으로는 몹시 진노한 것처럼 하면서 그 책임을 물어 사망을 명령하였지만 뒤돌아서서는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칼빈주의의 神은 도대체 누구인가?
<L.B.Bottner - 인간의 죄행 역시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된 다음 구원에 대해 더욱 깊이 감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빠지는 것을 종종 허락하신다.>는 악마적 가르침을 사주하는 칼빈주의 神은 도대체 누구인가?
칼빈주의가 신봉하는 神은 사단이며, 칼빈은 사단에게 미혹된 사악한 어리석은 망나니/어릿광대이며, 칼빈의 5개 이론(TULIP)의 구원론은 거짓된 허무맹랑한 허구/망상에 불과하며, 창세 이래 사단 마귀의 최대 미혹 중의 하나인 칼빈주의의 최종 목적지는 지옥의 영원한 불못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14. 구원교리의 역사(14)
*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
① 개인 예정은 없다. - 개인 예정은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으며, 하나님은 회개하고 (repent), 그리스도를 믿고 (believe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remain in Christ), 그리스도에 연합된 (be united with Christ) 자는 누구든지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 (아르미니우스의 구원의 4단계)
②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믿음으로 참고 견디는 자들에게 부여된다. - 각 개인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다.
③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은총을 부여 받았다. -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믿을 수는 없다. 믿음이라는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부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그 은혜를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④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오명을 벗기기 위해 롬8:29-30을 근거로 예지예정론 (하나님은 믿을 사람과 믿지 않을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예정하신다.)을 주장함
아르미니우스의 한계인 예지예정론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누가 믿어 자녀가 될지를 미리 아셨고 그에 따라 미리 자녀를 정하셨다.>는 예지에 근거한 예정론으로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으므로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임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론은 칼빈의 예정예지론과 다를 바가 없는 숙명론에 불과합니다. (예지예정론은 아르미니우스에게 있어서 가장 아쉬운 점입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론(④)은 자신의 다른 3개의 주장(①,②,③)의 내용들과 상충하게 되어 자체적 모순을 드러냈습니다. 즉, 롬8:29-30에서 문장의 중심어인 <자들을>은 1인칭 복수이므로 엡1장처럼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공동체>를 미리 아셨고(공동체 예지), 그 <공동체>를 세울 예정을 하신(공동체 예정)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예지론은 예정에 근거한 예지로서 칼빈의 神은 자녀를 미리 정하였고 그들을 미리 안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책임은 칼빈의 神에게 있는 것이며, 결국 칼빈의 神은 예정과 유기에 근거해서 타락을 주도한 결과가 됩니다.
* 칼빈주의자들의 주장 :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1항 : 전 인류의 타락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영광을 드러냈다.
② 강정진 : 인간의 타락 그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 명령된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③ Gorden H. Clark : 의심의 여지없이 신은 그의 섭리 가운데에서 이 최초의 인간의 타락에 개입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아담이 타락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첫 번째 사람이 타락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의미에서는 죄의 원인자 (Cause of Sin)이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John Wesley (1703-1791)의 비판 - <Free Grace (자유 은총)> 中에서 :
만약 <예정/선택>이 옳다면 모든 설교는 헛되다. <예정/선택>된 사람에게는 설교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교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필연코 구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설교의 목적은 그들과의 관련 하에서 볼 때 공허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설교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필연코 멸망하게 된다.
* 칼빈 예정론의 역사적 배경 :
제네바에서 위압적인 방법으로 확립된 칼빈의 예정론은 시작부터 성경적/이성적으로 모두 무리한 것이었으므로 논란의 불씨가 되었으며, 특히 그의 주변의 가까운 동료/학자/추종자들(Bolsec, 불링거, 파브리, 멜란히톤, 카스텔리오, 비블리안더)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으나 제네바에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들의 투옥/추방/파면/축출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확고히 세워갑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본능 가운데에 내재하는 내세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삶이 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점점 더 증폭하게 되며, 칼빈주의는 그러한 두려움을 단번에 제거하는 심리적인 안정감/편안함/안도감/성취감을 주기 때문에 한번 받아들이면 맹목주의에 빠지게 되며 결국 그것을 절대 진리로 착각하게 됩니다. 칼빈주의는 분명히 비성경적/비논리적/비윤리적/철학적 이론이며, 하나님의 공의(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임)에도 위배되며, 오히려 일방적인 천국으로의 선택과 일방적인 지옥으로의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라고 억지 주장합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처음부터 그 출발이 성경이 아닌 Augustine (354-430)의 신플라톤주의에 근거를 둔 예정론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
* John Calvin - Tracts and on the Doctrine and Worship of the Church - Vol.3 / 1958 / P468-469
어거스틴은 몇 가지 전적으로 새로운 견해를 교회제도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그 중 몇 가지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절대적인 예정, 그리고 선택된 자들에게만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죄이다.
*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im)
플라톤의 철학은 이데아(Idea)론에서부터 출발하며, 이는 그의 책 <국가론 (Politeia)>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플라톤주의가 뿌리를 둔 플라톤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깨달음에 있으며 (어거스틴/칼빈이 구원에서 행함을 빼버린 근본 동기가 됨), 神의 전적은총으로 육체적인 감각 (가상 세계/허구의 세계-그림자/허상/像-육체적/물질적)에서 벗어나 神 (이데아/횃불/실제 세계-진리/실제-정신적/영적)에 이르는 길을 思惟/생각을 통해 발견할 때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즉, 육체적/물질적인 것을 버리고 정신적/영적인 것을 깨달아 이데아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칼빈 철학의 TULIP은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관점으로 성경에 대입한 전적 은총과 궁극적 견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삶이 아닌 책상에서 구원을 깨닫고/책상에서 구원을 완성시키는 칼빈주의는 결국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불과합니다.
15. 구원교리의 역사(15)
16.구원교리의 역사(16)
17.구원교리의 역사(17)
18.구원교리의 역사(18)-최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