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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설 창시자 어거스틴

이 글은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도서출판 두루마리, 02-2277-8087)에 들어 있는 글이다. 이 글의 프란시스 부분은 "Mission to Catholics International"(P.O. Box 19280, San Diego, CA 92159, USA)에서 발간한 「St. Francis: The Man and The Myth」를 역자가 번역한 것이고, 어거스틴 부분은 구영재 선교사가 지은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도서 출판 안티오크 출간)에서 발췌한 것이다.



연옥의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오리겐을 위시하여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씨를 뿌렸다. 이 열매들은 첫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을 통해 로마 교회 안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회사는 성경에도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찌꺼기를 청산하지 못한 개혁 교회는 이제 '메시지' 대신에 '미사' 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음으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그릇된 가정하에서 자신들의 해석체계를 정립했다.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Christ-Killer)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 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다인들의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까지도 이것을 시행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하며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시켰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오직 "교회-국가"만이 이를 실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교회의 성서로 불려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원제목은「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임)이라는 역사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치시킨 이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인 교회왕국을 건설하려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 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할 로마 교회가 국가와 함께 잠 자리를 같이하였을 때, 사탄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극적인 회심을 했으며 사도 바울의 논리성에 견줄만한 논리성을 갖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라는 종교적 천재를 기독교회사에 출현시켰다.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보다 매우 다르게 미화되어 있다. 그는 국가 교회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은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 베드(Bede, 673-735)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국가-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해답까지 제공하였다.

A.D. 410년, '영원한 도성(?)'으로 간주되어온 로마가 흔들리자 카톨릭 교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이란 표현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글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세비우스는 시편 87:3을 주로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예루살렘이 아예 존재치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이같은 유세비우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옛 바빌론의 "도시-국가"(City-state)에 뿌리를 둔 그리스의 폴리스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역, 종교, 법, 문화 도덕 등 모든 것이 같아야함을 의미했고, 어거스틴의 도시 개념 또한 정치와 종교가, 즉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도시-국가"(City-state)였다.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누누이 「하나님의 도성」이 곧 카톨릭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거룩한 교회이다.."(8권 24), "...그의 교회인 하나님의 도성..."(15권 26), "...하나님의 도성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16권 2), "...하나님의 도성에 대하여, 즉 교회에 대하여..."(시편주해 71:18), "...하나님의 도성이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시편주해 98:4). 독자께서는 부디 그가 말하는 교회란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스(Ambrose, 339-397)는 성골, 유물, 마리아 숭배사상 등을 로마 교회 안에 들여놓은 첫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주의적인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위해 세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로,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였고, 믿음에 관한 영역에 있어서 주교는 기독황제를 판단할 수가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가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기독교의 도덕 규범을 존중해야 하며, 데살로니카에서의 반란 진압시 특별히 잔인성을 보인 데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교회에서 참해(고해성사)할 것을 강요하였다. 세째로, 암브로스는 교회와 국가간의 긴밀한 결속관계를 추구하였고 이 일이 교회에 크게 유익하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절대적인 고집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왕자였다. 로마 제국과 앞으로의 모든 황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지속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Donatists)파는 그들의 신학자였던 티코니우스(Tyconius)의 지도 아래 흠없고 순수한 교회를 동경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를 흠모하였으나, 도나티스트들을 향하여는 "교회와 국가는 독립된 권력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카톨릭 공회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도나티스트들을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317년에 교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티스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몰수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화합 칙령"(Editct of Unity) 아래서 그들을 박해하였다.

파라(F.W.Farrar, 1831-190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성경을 짜맞추어 '이스라엘이 교회'라는 해석을 이끌어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성경해석 체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그는 교회, 즉 카톨릭 교회의 정설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만 하며, 어떠한 성구도 다른 어느 것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교권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권위가 나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지해주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시되어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 투성이였던 교회로 대치시켜버림으로써, 어거스틴은 철저하게 "사탄의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는 교회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었고, 따라서 교회가 복종해야만 하는 어떤 권위나 교회를 판단하는 교회 이상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란 사실이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계시록 2:7이 말씀해주듯이, 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 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시켜왔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공한 하나님의 도성의 비전을 가지고, 로마 교회는 세속적인 권세를 차곡 차곡 쌓아나갔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기증서 등의 위조문서를 만들어 자신들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것들이 위조된 것임을 밝혀 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교회 내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였고, 7년 후에는 발라(Lorenzo Valla, 1406-1457)가 더 정확히 그 문서의 허위성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인 샬르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의 정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이 책은 "로마의 통치자는 천국의 안수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동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해한 성 베르나(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부추겼다.

카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중세 때에 이미 프란시스칸파는 여우로, 도미니칸파는 늑대로 불렸고,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계속해서 칼멜파 및 어거스틴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12세기의 오토(Otto of Freising, 1114/15-1158, 독일의 주교, 사가, 신학자)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 로마 제국의 연장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이론을 펼쳐나감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의 비전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들을 첨가해서 신성로마제국을 옹호했으며, 그 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합스부르크(Hapsburg/Habichtsburg/Hawk's Castle)가를 역사 안에 등장시켰다. 또한 로마 교회는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belli, 1469-1527)의 굳건한 독재주의 이론을 첨가시켜 로마 카톨릭 군주들을 늘 로마의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다.

루터의 개혁(Reformation)이 로마 교황청과 합스부르크가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반개혁과 이어서 일어난 카톨릭의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욱 더 조직화되었다. 그 결과 교황의 문장(Papal Coat of Arms)이 모든 도시 및 촌락의 중요한 자리에 나붙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의 재능가들을 로마 교회로 끌어들였다.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 모두가 동등한 만인 성직자(제사장, 벧전 2:9,10)임을 확신시켜주었다. 반면에 옛 그리스 및 로마의 혼합된 사상에 뿌리를 둔 반개혁사상은 루터가 크게 훼손시킨 성직자 계급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철저하게 구분지었다. 이들은 특별한 의장, 타이틀, 행동 규범을 고안하여 성직자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결과 중세 암흑시대를 능가하는 성직자 무리가 생산되고 말았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의 '평신도'라는 말은 다른 예수(고후 11:4)로 둔갑하여 죄를 사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사제들에게 종속된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편협하고 미신적이며 거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녀가 자기 아들의 사회적 신분 유지 및 세상적 출세를 위해서 아들까지 낳고 동거중인 그의 내연의 아내를 지옥으로 보낼 정도의 인격을 가진 여자이며, 인간양심의 도덕법마저 무시한 종교적 잔인성을 소유한 사림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로마 교회의 거듭남의 개념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재창조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들려주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의하여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거듭남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사악한 카톨릭 주의의 제도에다 고해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주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아비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비 계급에 절대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른 것이다. 물론 영어권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사제'는 'Father'로 불린다. 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카톨릭 교회(One Chruch, the 'catholica')의 통일성으로 삼고 (제롬과 더불어 어거스틴이 만든 교황 리스트는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교회의 특성을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전통'에다 두고 있다. 3세기경에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사상"에다 "성물 숭배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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