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활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흔적(빌3:10~14)_2017-04-16(설교영상)

by 갈렙 posted Apr 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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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4p-Tv5sKfFQ
날짜 2017-04-16
본문말씀 빌립보서3:10~14(신약 32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사는생명, 부활생명, 예수생명, 사명과 부름의 상, 사도바울과 모세의 소명, 동탄명성교회의 소명

믿는 자에게는 2가지 생명이 있다. 하나는 사는 생명이며, 또 하나는 부활생명이다. 사는 생명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이지만, 부활생명은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때에 가져다 주신 생명이다. 하지만 죽는 순간을 맞이할 때 에, 사는 생명만을 위해 살았던 자들이 느껴야 할 절망감은 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속에 왜 부활생명이 들어와야 하는지, 부활생명은 나에게서 어떻게 표출되어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끝(결과)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 부활절의 의미

  오늘은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으셨으나 사망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의 절기다. 처음에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몰랐을 때가 있었다. 단지, 그분에게 죄가 없었으니까 다시 살아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보니, 한 번 죽음이 스쳐간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령 그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한 번 죽으면 사람은 다시 살아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게 되신 것은 그분에게 죄가 없었다는 이유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죄를 짓지 아니했기에 음부도 그를 붙들어 둘 수 없었다. 그분은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도 붙잡아둘 수 없는 또 다른 생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생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그분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된 것은 그분이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그분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일생을 둘로 나눠볼 수 있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신 때다.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성탄절이다. 그리고 그분이 사람의 신분에서 하나님으로 복귀하신 때가 있었다. 이것도 기념하는 절기가 있으니, 그것은 곧 부활절이다. 그렇다. 그분이 사람이 되신 성탄절과 그분이 하나님으로 복귀하신 부활절이 기독교의 절기 중의 최고의 절기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절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 믿는 이들을 존재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2. 믿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2가지 생명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든 인류에게 전시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승천하셨으며, 이어서 그분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때 예수께서 가져오시는 생명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2가지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사는 생명이다. 사는 생명이란 인간의 혼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이다. 그런데 이 사는 생명은 살려주는 생명을 받지 못하게 될 때에는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살려주는 생명이자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생명인 부활생명을 가져야 한다. 이것의 또 하나의 생명이다. 그것은 곧 살려주는 생명이요 부활생명인 것이다. 만약 사는 생명의 날동안 부활생명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죽을 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는 생명으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할 부활생명에 대해서 살펴보고, 부활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3. 행9장에 나오는 청년, 사울에게서 발견되는 2가지 생명

  사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의 본성을 드러내려 한다. 봄이 될 때 식물을 보라. 저마다 잎사귀를 내며 자신이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기를 매우 기쁘게 여긴다. 어떤 식물은 꽃부터 피워서 자신이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생명체는 자신만의 욕구가 있다. 이것은 비단 식물에게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동물이나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사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 생명도 생명이기에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사는 생명의 꽃을 피우고자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다.

  사도바울도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부활생명을 얻기 전까지는 사는 생명으로 살던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보라. 그도 사는 생명의 꽃을 피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사는 생명의 꽃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유대최고의 랍비가 되는 것이었으며, 산헤드린공회원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사용해왔고 또한 달려왔다. 그래서 그것을 얻는 최선의 방법도 찾아내었다. 그것의 기본은 율법준수였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준수하는 일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생각하며 실천해왔다. 그리고 커서는 산헤드린공회의 의견을 늘 청취하였다. 그래서 그는 나사렛출신의 선지자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을 없애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에 총진군을 시도하였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는 생명을 극도로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 대변혁의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죽어서 없어졌기에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줄로만 알았던 죽은 사람이 자기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였다(행9장). 그에게 예수는 미치광이 선지자 내지는 율법을 조금 안다고 까부는 촌놈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 백성들은 그를 메시야라고 생각했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낸 아나니아에 의해 그에게 성령이 부어졌다. 그리고 부활생명이 그에게도 부어졌다. 그러자 그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활생명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에는 주어진 또다른 생명이 자기의 인생을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4. 무슨 생명이든지 그 생명에는 저마다 다른 욕구가 있다.

  그렇다. 우리도 사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부활생명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 부활생명도 일종의 생명인지라 자기만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 욕구는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사는 생명의 욕구하고는 차원이 다른 욕구다. 이 세상에 살 때 발현되는 욕구는 사는 생명의 욕구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면 또 다른 욕구가 하나 더 더해져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부활생명이다. 이 부활생명도 생명이기게 자신만의 독특함으로 꽃을 피우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믿을 때에 받은 부활생명이 자기자신신 속에서 발현되도록 늘 부활생명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 바울에게 발현되어진 부활생명은 어떤 것이었나?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생명은 어떻게 발현되어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복음전파였다. 그에게 들어온 부활생명을 그를 율법의 일군에서 복음전파의 일꾼으로 그를 바꾸어놓았다. 사실 바울이 부활생명을 접하기 전까지 그는 복음전파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그에게 있는 "사는 생명"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최고의 랍비가 되며, 어떻게 하면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항상 초미의 관심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 부활생명이 더해지자, 그는 이전에 자신이 추구하던 사는 생명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사는 생명은 죽음과 동시에 다 엎어질 아침 안개요 물거품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는 생명은 죽음과 동시에 없어지는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살아생전에 부활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는 그의 관심사는 이제 부활생명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메시야(그리스도)가 대체 누구신지 아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부활생명으로 살아, 그분이 자기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 안에 들어온 부활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부활생명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내 그는 부활생명이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를 붙잡아 이끌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곧 믿는 이 각자의 사명이었던 것이다(빌3:12). 자신이 가진 부활생명을 발현할 때 반드시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는 생명으로 살지 않고 부활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6. 바울의 사명 및 하나님의 부름과 부름의 상을 위한 바울자신의 고귀한 도전

  그렇다면, 바울 안에 들어있는 부활생명은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행20:24). 사실 그에게 최초로 안수했던 아나니아도 그의 사명이 복음전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행9:15). 특히 그는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큰 그릇이었다.

  더욱이 예수님의 부활생명은 바울을 돕는 자들을 붙혀 바울로 하여금 복음전파에만 몰두하도록 도왔으니 바로 동역자들의 협력이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재정협력으로 그를 도왔으며, 의사 누가는 치료자로서 그를 평생 도왔고, 디모데는 그를 따라오는 견습생으로서 함께했다. 이들도 저마다 부활생명을 받고 저마다의 사명을 받아 함께 일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부활생명이 발현되면서 그것이 사명으로 나타난다는 외에도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부름의 상에 관한 것이었다(빌3:13~14). 자기자신 안에 들어온 부활생명으로 살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낸 목적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가 받게 될 상급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명인 복음전파를 깨닫고는 그 일을 위해 그의 인생을 드렸다. 그래서 1차전도여행으로 끝마치지 아니하고, 이서 2차전도여행 그리고 3차전도여행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의 복음전파의 사명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강의 위협과 동족의 위협과 배고픔의 위험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것이 위에서 그를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결국 그는 그의 인생의 끝에가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도니라(딤후4:7~8)" 그렇다. 모든 인생에게는 저마다 부활생명이 있으며, 그것이 발현되어질 때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사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주시는 부름의 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과연 부활생명대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부활생명의 욕구를 따라 살므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였는가? 그리고 하늘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만약 이런 것들이 불분명하다면, 이제부터라도 자기 안에 들어있는 부활생명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의 사는 생명을 잠시 내려놓고 그분이 주신 부활생명을 느끼며 부활생명의 욕구를 따라 살려고 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자신의 사명에까지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름의 상을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달려가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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