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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사본과 역본들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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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야기/기독교 자료

2017. 12. 11.

 

성서의 사본과 역본들의 문제

 

성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5,000개가 넘는 필사본들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필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문제, 수많은 사본들의 취사선택의 문제 등등......
그 문제들을 풀어가면서 진도를 나가보자.


1. 필사과정에서의 문제

《 옛날에 이 필사본들은 만드는 방법은 흔히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한 개인이 한 자 한 자 옮겨 써서 만드는 법인데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알파벳에는 유사한 글자들이 여럿 있어서 아주 성실한 사사일지라도 종종 혼동을 일으켜서 잘못 옮겨 쓰는 일이 생기곤 하였고 더구나 옛날에는 원어 성서에서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할 때 여러 가지 종류의 과오를 일으켰던 것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한 사람은 읽어 주고 여러 서사들이 받아쓰기하는 방식으로 단 번에 서사의 수만큼 많은 사본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서사들이 그 문서내용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자연히 잘못 듣고 쓰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경우 등에는 많은 착오가 생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후대 헬라어에서는 '우리'라는 말과 '너희'라는 말의 발음이 거의 구별할 수 없으리 만큼 같았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서신들에서 사본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본래 어떤 인칭이 사용되었는지 결정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 때로는 이러한 차이가 고의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데 마태복음의 가장 오랜 사본에는 주기도문(마 6:6~13)이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로 끝난다.

그런데 후대 사본에는 그 끝에 의식(儀式)에 사용하기 알맞은 송영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두 마디 송영이 되었지만, 후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는 세 마디 송영이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 의식의 발전과정을 통해 약간의 고의적 첨삭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금욕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서 사본이 변하는 경우도 생겼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9:29에 본래는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되었던 것이 후에 금욕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기도하고 금식하지 않고는...."으로 변하였으며, 사도행전 10:30과 고린도 전서 7:5 등도 그러한 예다.

또 때로는 필사자가 다른 책에 있는 병행 구절들과 조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보충 삽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골로새서 1:14은 "우리는 그의 아들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인데, 후대의 어떤 사본에는 에베소서 1장 7절과 조화시키기 위해서 '그의 피로'라는 말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실수로, 또는 고의로 사본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차이가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원문 비평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에 의하여 오늘 우리는 성서 원본에 거의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여기까지가 신학대학 교수가 말한 내용이다.

"근본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지금 성서원본에 거의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뒤에서 좀 더 솔직한 신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필사과정에서 너무나 오류와 변개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성서의 사본들

현재까지 구약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마소라 원문(the Hebrew Masoretic Text) : 10세기 말

1) 벤 하임 편집본 --> BHK1(Biblia Hebraica Kittel1,1906) BHK2(1912)

    벤 하임이 편집했던 본문은 어떤 한 히브리어 사본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입수 가능한 모든 사본을 참조하여 만든 절충 본문으로, 대부분 14-16세기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후대의 사본들이다.

2) 벤 아세르 편집본 --> BHK3(1937),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1977)
    BHK3 와 BHS는 레닌그라드 사본(B19a 또는 "L")을 기초로 해서 편집되었는데, 그것은 레닌그라드 사본이 완전한 히브리어 성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이라는 점과, 그것이 10세기에 인정받았던 벤 아세르 본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BHK3 와 BHS는 대부분의 현대 영어성경의 번역의 기초가 되고 있는데, BHK1 이나 BHK2 에 비교해 볼 때 20,000에서 30,000 군데 차이가 있다.

 

 현재는 히브리 대학에서 레닌그라드 사본보다 그 이전인 A.D.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알렙포 사본에 근거한 히브리어 성경인 HUB를 발간하고 있는 중이다. KJV, ASV, RSV 등이 초기 맛소라 본문을 사용했으며, NEB, NASV, GNB, NIV 등은 BHK3을 사용했고 NKJV는 BHS를 사용했다.
 

▷ 쿰란의 사해문서(BC1~AD1세기)

이 고대 사본은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구약의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책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금세기만 해도 영국에서 긴스버그의 히브리성경(1894, 1908, 1926)이 마소라텍스트에 의거하여 고대 수사본들을 정밀히 대조하여 새로 나왔고, 또 독일의 구약학자 키텔과 카아레에 의한 "비브라이카 헤브라이카"(1906, 1912)가 있다.

현존하는 최고사본(最高寫本)보다 일 천년이나 앞선 사해두루마리가 1947년에 다시 발굴됨으로써 새로운 변환을 맞게 되었다.


다음은 신약의 사본들이다.
 

▷ 시나이 사본(4세기경)
    구약이 199개, 신약 147.5개의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는 헬라어 성서 사본이며, 신약 성경 본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물 중 하나이다. 이 사본에서 마가복음은 16:8절에서 끝나고 요한복음 7:52-8:11의 간음한 여자의 기사는 빠져 있다.


▷ 바티칸 사본(4세기초)

    외경의 므낫세 기도서, 마카베오서를 제외한 희랍어 성경 전체를 수록하였으나 현재는 상당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 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초)

    원래는 외경을 포함한 희랍어 성경 전체를 담고 있었으나 현재는 구약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신약도 일부가 빠져 있다. 구약은 2명, 신약은 3명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워싱톤 사본(4세기말~5세기초), 에프라임 사본(5세기초), 베자 사본(5, 6세기) 등등

    19세기 이래 많은 성서 사본들이 발견되고 성서원문 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현대 비평판 헬라어 신약 성서"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바흐(1812), 라흐만(1851), 트레겔레스(1872), 티쉔돌프(1874),웨스트코트와 홀트(1881), 네슬(Nestle)판 헬라어 성경(1-26판, 1898-1979)

3. 고대 역본(譯本)

▷ 셉츄아진트(Septuagint, 70인역,
    구약 헬라어[그리스어] 번역본 ) 셉츄아진트는 기원전 280년 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서로 '70인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셉츄아진트와 마소라텍스트는 체제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마소라 텍스트는 토라, 네비임, 케투빔의 삼경(三經)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반하여 셉츄아진트는 율법, 역사, 시, 예언의 네 부분으로 나뉘고 많은 외경(外經)들이 사이사이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쓴 구약은 희랍어 번역본인 셉츄아진트(Septuagint,70인역,알렉산드리아 번역판)이며 지금 신약에 인용되고 있는 구약의 구절들도 모두 셉츄아진트에서 온 것이다.


70인역 구약성서(LXX)와 유대교 성서(타낙)가 따르고 있는 마소라텍스트(MT)는 서로 다른 독법(讀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두 성서의 원본이 다르거나 필사과정에서 수정 및 삭제 혹은 보충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 탈굼(Targum, 아람어 번역본): 기원전
▷ 페쉬타(Peshitta, 시리아 번역본): 2세기에 신약의 일부 번역, 4세기에 신약 22권 번역, 6세기에 27권 전체 번역

▷ 라틴 벌케이트(Latin Vulgate, 라틴어 번역본): 4세기말 제롬이 번역한,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성서.

이 성서가 1,000년이나 내려오면서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수정되고 첨가되면서 복잡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3세기에 스테판 랑튼이 이 라틴 번역에다 장(章)을 구분해 놓았고 많은 교정을 붙였고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 때의 장 구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 성서는 그 사본이 약 8,000개나 된다고 하며, 그것들을 모두 대조하여 제롬의 원 벌게이트 성서를 찾아내는 작업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역시 원본이 없는 상태이고 또 그 내용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고 수정되고 첨가된 것이라는 말이다.

4. 서로 다른 텍스트(사본)와 번역본들

다음의 도표는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말씀보존학회'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이며, 제목은 <한글KJV성경>
對<개역한글판성경>,대조표 이다.

원래는 "㉮ 보존된 성경: 하나님께서 기록 --> 최조의 원문 ⓐ 히브리 맛소라 원문 
           ㉯ 변개된 성경 : 사탄이 변개 --> 바빌론-그리스-로마의 신비종교---> ⒜오리겐" 과 같이 적혀있었으나  중립의 입장에서 다루기 위해 " ㉮ KJV,한글킹제임스 성경
                                  ㉯ NIV ,개역한글판성경"라고 고쳐서 사용하고자 한다.

두개의 성경을 비교하여 보면, 상이한 부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KJV(영어),한글 킹제임스 성경

ⓐ 히브리 맛소라 원문(Hebrew Massoretic Text) 
ⓑ 코이네 헬라어 표준원문(Koine Greek Textus Receptus) 
ⓒ 구 시리아 역본(The Old Syriac, A.D.120) 

ⓓ 구 라틴 역본(Old Latin, A.D.150) 
ⓔ 이태리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57-A.D.180) 
ⓕ 골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77-A.D.200) 

ⓖ 켈트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300) 
ⓗ 발칸과 독일 지역에서 사용한 성경(A.D.400) 
ⓘ 비잔틴 제국 기간 동안 희랍 교회들에서 사용한 성경(A.D.312-1453) 

ⓙ 헬라어 표준원문(Textus Receptus) 
ⓚ 에라스무스 성경(1522),
ⓛ 콜리네우스 성경(1534),
ⓜ 스테파누스 성경(1550),
ⓝ 베자 성경(1604),
ⓞ 엘지버 성경(1633) 
ⓟ 틴데일 성경(1525) 

ⓠ 루터 성경(1543) 
ⓡ 킹 제임스 성경(Authorized King James Bible, 1611) 
ⓢ 새성경 사복음서(1998) 

    새성경 1판(신약, 1990) 
    새성경 2판(신약, 1990) 
    새성경 3판(한영판 신약, 1991) 

    새성경 4판(신약, 1992) 
ⓣ 한글 킹 제임스 성경(신구약 합본, 1994) 
ⓤ 한영대역 한글 킹 제임스 성경(1995)

 NIV(영어), 한글 개역판

 

⒜ 오리겐(A.D.184-254)의 헥사플라(Hexapla)제 5란-70인역(LXX, Septuagint) 
⒝ 유세비우스의 50권의 복사본 
⒞ 바티칸사본(Vaticanus, A.D.350),
⒟ 시내사본(Sinaiticus,A.D.350) : "외경"포함 

⒠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 A.D.415) 
⒡ 예수회의 림즈 듀웨이 성경(Rheims Douay, 1582)  여러 비평가들이 편집한 헬라어 성경들 

⒢ 그리스바흐(1812),
⒣ 라흐만(1851), 
⒤ 트레겔레스(1872),
⒥ 티쉔돌프(1874) 
⒦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 성경(1881) 

⒧ 영어 개역본(RV, 1884) 
⒨ 네슬(Nestle)판 헬라어 성경(1-26판, 1898-1979) 
⒩ 연합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의 헬라어 성경 1,2,3판(1966-1975) 

⒪ 개역표준역본(RSV, 1952),
⒫ 여호와의 증인 - 신세계역본(NWT, 1957) 
⒬ 새미국표준역본(NASV, 1959),
⒭ 새개역표준역본(NRSV, 1970) 
⒮ 새국제표준역본(NIV, 1978),
⒯ 뉴킹제임스역본(NKJV, 1982) 

⒰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6) - 첨가와 삭제가 임의로 이루어짐 
⒱ 공동번역 성서(1977)
⒲ 현대인의 성경(1986) 
⒳ 현대어 성경(1991)
⒴ 표준새번역(1993)

 

KJV(영어),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한국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절대다수가 사용하고 있는 NIV(영어), 한글 개역판성경을 사탄이 변개한 성경이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NIV(영어), 한글 개역판성경과 NIV(영어), 한글 개역판성경은 그 텍스트를 서로 달리함에 따라 무려 30,000군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와 칼빈이 읽던 성경과 지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읽는 NIV(영어), 한글 개역판성경이 30,000군데가 다르다는 것이다.

편리상,  
NIV(영어), 한글 개역판성경을
㉮라고 하고
NIV(영어), 한글 개역판성경을㉯라고 한다.


구약성서의 대본으로 ㉮성경은 벤 하임 마소라 원문(봄 베르그 편집본)을 사용한 데 반해 ㉯성경은 벤 아세르 맛소라 원문을 기초로 한 키텔의 히브리어성경(BHK3)과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스튜트가르텐시아"(BHS) 외에 70인역(LXX), 시리아 역본(페쉬타),

사해 사본, 사마리아 오경, 소수의 히브리어 필사본들, 아퀼라 역본, 심마쿠스 역본, 테오도티안 역본, 벌게이트(라틴어 역본), 탈굼, 제롬의 적스타 헤브라이카(Juxta Hebraica) 등의 원문을 혼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대본으로 ㉮성경은 전통원문(다수필사본, 비잔틴 원문, 시리아 원문)을 대표하는 헬라어 공인 원문<표준원문, Textus Receptus>를 사용한 데 반해 ㉯성경은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성경, 네슬&알랜드의 헬라어성경 등의 현대 비평판 성서를 주로 사용하였다.

㉮성경을 주장하는 측은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70인역을 엉터리 번역판이고 변개된 의역판이라고 혹평하고 있으며 또 현대 비평판 성서에 대해서도 표준원문을 5,600군데 이상 변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된 ⓚ에라스무스 성경에 대해 박창환 교수는 에라스무스가 참고한 사본들 중에는 10세기 이전 것이 하나도 없었고 계시록을 위해서는 12세기 사본 하나만을 사용하였고, 마지막 장이 없어진 사본이었던 까닭에 거기에 있어야 할 여섯 절은 라틴 벌게이트에서 거꾸로 헬라어로 번역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너무도 서둘러서 출판하였고 아주 후대의 열등한 사본들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헬라어 신약성서의 공인 원문(Textus Receptus)의 조상이 되기에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고 에라스무스 자신도 고백하였다고 한다.

사실 그는 계시록의 마지막 여섯 절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벌게이트를 기초로 해서 헬라어 본문으로 고쳐 놓은 것이라 한다. 박창환 교수는 오히려 최초의 한글번역성서는 공인원문을 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잘못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성서 원문 비평학의 발달에 따라 최신 비평판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되는 새번역 성서들은 원본에 가까운 원문을 대본으로 삼은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결론은 서로가 서로의 대본들을 부정확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박창환 교수의 말 중에 "원본에 가까운 원문을 대본으로 삼은 번역"이라는 구절에 대해서이다.

여기서 "원본"은 신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수가 말한 '아람어'에서 희랍어(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말한다. 물론 이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5000개가 넘는 사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람어 --> 희랍어 --> 영어의 번역과정에서 아람어는 예수의 목소리와 함께 증발해 버렸고 무수히 많은 희랍어 번역사본들 중에서 심혈을 기울여 예수가 말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원문을 추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평학이 고도로 발달되어 거의 원본(희랍어)에 가까운 희랍어 원문이 만들어진 것이 소위 현대 비평판 헬라어(희랍어) 성경이고 그 헬라어 성경의 원문을 대본으로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본도 문제가 있지만 또 번역의 과정에서 얼마나 본래의 뜻이 왜곡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가 말한 메시지가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물론 '하나님의 감동' 운운하는 것이겠지만 현재의 성서번역에 수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이 번역판은 못 믿겠으니 새로운 번역판을 만들자는 식으로 해서 발행된 새로운 번역판은 미국만 해도 100여 종류가 넘는다.

그리고 번역의 오류뿐 아니라 복음서끼리 서로 모순이 발생하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증거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성경 구절을 임의로 삭제했다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삭제 당한 성경 구절

개역 한글판(1956), 공동번역 성서(1977), 현대인의 성경(1986), 현대어 성경(1991), 표준새번역(1993) 등의 성경에는 "없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구절이 13군데나 있는데 이 구절들이 한글 킹제임스성경에는 그대로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일곱 개의 구절은 예수가 직접 말한 내용인데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는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고 말하였지만 무려 일곱 군데나 삭제를 당한 것이다.


지금 "없음"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구절은 다음과 같으며, 이 중에서 [ ]안의 구절들은 예수가 직접 말한 구절이다.

마태복음 [17:21], [18:11], [23:14] 마가복음 [9:44], [9:46], [11:26] 15:28 누가복음 [17:36] 23:17 사도행전 8:37 15:34 28:29 로마서 16:24

이런 구절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성경이 전달되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믿음과 맞지 않기 때문에 고의로 삭제해 버렸다고 한다.
한글개역판 등의 성경과 한글킹제임스 성경은 서로 다른 텍스트를 기반으로 번역한 까닭에 많은 부분에서 서로 상이한 구절들이 많고 결국에는 교리까지 완전히 틀려지게 되어 버린다.

따라서 '한글개역판' '공동번역판'등의 성경을 고집하는 기득권 세력은 한글 '킹제임스'성경(1994)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킹제임스'성경측은 '한글개역판' 등의 성경을 사탄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대성경 사해사본들과 역본들 

 

 

 

 

 

 

[맛소라 사본]

현재 남아 있는 히브리어 성서 코덱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 카이로 예언서'이다. 이것은 895년에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에서 모세스 벤 아셰르가 쓰고 모음 기호를 붙였다. 그다음으로 오래 된 것은 레닌그라드 코덱스인 '후기 예언서'(916경)이다. 벤 아셰르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모음 기호가 티베리아 마소라 체제를 따른 것이다. 그다음의 것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 알렙포 코덱스'이다. 솔로몬 벤 부야가 썼고,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가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마소라 주기를 붙인 것으로서,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 사본은 [구약성서]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으나 모세5경과 성문서 부분이 거의 소실되고 예언서 부분만 그대로 남아 있다.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의 체제를 따르는 또다른 두 사본이 있다. 하나는 BM(4445) 사본으로서 모세5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9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다른 하나는 레닌그라드 사본으로서 [구약성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MSB 19a 사본인데, 이것이 완성된 것은 1008년이다. 이밖에도 1105년에 씌어진 예언서 로이클린 코덱스(Codex Reuchliana of the Prophets)가 있다.

 

맛소라 자료들의 대조

 

일찍이(1050 이전) 미샤엘 벤 우지엘이 자신의 책 [키타브 알 훌라프 Kitab alHulaf]에서 벤 아셰르의 맛소라 본문과 벤 납달리의 마소라 본문 사이의 차이를 비교한 바가 있다. 솔로몬 예디다 노르지는 [민하트 샤이 Minhath Shai]로 알려진 본문비평주석에서 방대한 양의 마소라 본문 자료들을 비교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1626년에 완성하여 1742년에 나온 '만투아 성서'(Mantua Bible)에 함께 인쇄되어 나왔다. 벤저민 케니콧은 615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52개의 인쇄본을 수집하여 2권으로 편집했다(1776~80). 조반니 베르나도 데 로르시는 731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300개의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고(1784~88), C.D. 긴스부르크는 70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17개의 초기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다(1908~26).

 

[고대 역본들]

 

성경이 유대인들만의 소유였고 그들이 히브리어만을 사용했을 때에는 번역이 필요없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성경을 원전의 언어로 읽기가 어렵거나 전혀 읽ㅇ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성경의 일부 혹은 전체가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런 필요는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로서는 성경번역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에는 수많은 번역본들이 있다.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20세기 중엽까지 1,500여 종 이상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번역본들 가운데 특히 고대의 역본들은 현존하는 사본들보다 이른 것들이 많이 있어서 사본과 함께 성경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취급되고 있다.

1.아람어 탈굼역

바벨론 포로기 이후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한 다음 당시 히브리어보다 아람어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해설해 주었다. 이같은 구두 해석이 전승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2세기에는 문서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탈굼이라고 하는 아람어 역본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탈굼은 모세 오경, 예언서, 성문서집 등이다. 하지만 아람어 역시 나중에는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히브리어와 같은 운명을 겪는다.

 

탈굼은 히브리성경을 후일 포로 후기시대팔레스타인의 일상용어가 되었던 아람어로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초기에 구전되었다가 히브리성경으로 읽혀졌으며 아람어 번역본에 이르게 되었다. 최초에 기록된 탈굼, 즉 온켈로스의 모세오경이나 요나단의 예언서 등은 그리스도 시대에 기록된 것이다.

 

BC 5,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람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와 디아스포라(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아람어를 쓰게 되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때 통역자(메투르게만)가 등장하여 예배 때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 관련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통역 내용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졌고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

 

율법서 탈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온켈로스의 탈굼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탈굼(Babylonian Targum)이다. 이것은 본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개정되고 크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9세기 직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다른 여러 종류의 탈굼들을 제치고 독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온켈로스의 탈굼은 문자적인 번역이면서도 랍비들의 주석을 번역에 반영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탈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나단의 탈굼이다. 요나단은 14세기경부터 생긴 이름으로서 예루살렘 탈굼(Targum Jerusalem)을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TJ'를 요나단의 탈굼(Targum Jonathan)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옛 팔레스타인 탈굼(Old Palestinian Targum)과 온켈로스의 초기 번역을 뒤섞은 것이다. 랍비들의 주석·설교·교훈 등이 번역에 많이 첨가되어 있다.

 

사마리아 5경을 번역한 탈굼도 있다. 유대인의 탈굼이 문자적인 번역인 데 비해 이것은 좀 자유스러운 번역이다. 본문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적은 없다. 예언서 탈굼도 본래는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개정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BC 1세기말에서부터 AD 1세기초까지 활동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의 제자 요나단 벤 우지엘의 번역으로 본다. 이것이 엄격한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온켈로스에 의존한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성문서의 아람어 역은 모두 5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2.그리스어 역본(LXX)

기원전 3세기 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7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이를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은 이 70인역만을 사용하였다.

약자로는 LXX부르며 〈구약성서〉최초의 번역으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최초의 〈구약성서〉 번역본이다.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도록 제작한 것 같다. 언어분석 결과 토라, 즉 모세 5경(처음 5권)은 BC 3세기 중반에, 나머지 부분은 BC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70'을 뜻하는 라틴어 septuaginta에서 유래한 '70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했는데, 그들의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는 후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사실 토라(율법서)와 후대의 번역본은 문체와 용례가 많이 다르다. 예루살렘대제사장 엘레아자르가 문학의 후원자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BC 285~246)의 요청으로 번역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는 전승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처음 보이는데 별로 신빙성이 없는 자료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용한 언어는 주로 그리스어였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예언들을 70인역 본문에서 인용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성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70인역 사용을 중단했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70인역에 끼어든 필사자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는데, 당시 사본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오류가 있었다. 다른 학자들도 70인역을 좀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히브리어 본문을 참조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 라틴어역·콥트어역·에티오피아어역·아르메니아어역·그루지야어역·슬라브어역, 그리고 아랍어역 일부의 주요근거가 된 것은 히브리어 성서가 아니라 바로 70인역이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70인역을 〈구약성서〉 표준역본으로 인정해왔으며, 히에로니무스는 이 역본을 가지고 불가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보존한 70인역은 히브리 정경의 모든 책 외에 소(小)예언서들과 몇몇 책들을 구분했으며,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외경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는 제2정경으로 알려진 부수적인 책들을 덧붙였다. 히브리 정경토라·느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의 3부분으로 나뉘는 데 비해, 70인역은 율법서·역사서·시가서·예언서의 4부분으로 나뉘며 외경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 서방세계 대부분의 성서 역본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구분되었으나 개신교 역본들의 경우에만 외경을 빼거나 따로 묶는다. 70인역의 본문은 몇몇 초기의 사본들에 실려 있지만, 그 사본들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이 가운데 잘 알려진 사본들은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바티칸 사본'(B)과 '시나이 사본'(S), 그리고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다. 그밖에도 이전에 제작된 수많은 파피루스 단편들과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있다. 최초의 70인역 인쇄본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對譯聖書)'(1514~22)에 실려 있다.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

 

편의상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Capitalletters : Uncials), 필기체 소문자 사본(Cursive script : Minuscules)으로 나뉜다. 파피루스 사본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르고, 크기는 다양하며, 70인역이 형성되던 초기에서 7세기 중엽의 것까지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 발견된 [신명기] 파피루스는 기원전의 것이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양피지나 가죽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단편 조각 사본들, 그리고 나할 레베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형성 초기시대의 두루마리 사본도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다. 가장 중요한 파피루스 사본은 구약에 속하는 9권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는 11개의 코덱스로 되어 있는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이다. 이 사본이 만들어진 것은 2~4세기경이다. 그후 300여 년 동안 파피루스 본문들이 급증했고 현재 200여 개의 사본들이 남아 있다.

 

대문자 사본들은 4~10세기에 나온 것들로서 모두 코덱스(책 모양)로 되어 있다. 괄목할 만한 것들로는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Codex Vaticanus : [구약성서] 전체),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 : [구약성서] 일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누스 사본(Codex Alexandrianus)이다. 이 셋은 본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 포함한 것들이었다. 이밖에도 성서의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사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예언서를 보여주고 있는 6세기의 마르칼리아누스 사본(Codex Marchalianus)은 값진 것이다.

 

필기체 소문자 사본은 9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11~16세기에 1,500여 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같은 본문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좋은 본문을 간직한 대문자 사본을 베낀 것일 때에는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인쇄된 70인역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1514~17)이다. 이것은 1522년에 비로소 유포되었으므로, 1518년에 베네치아에서 나온 알다인판(版)이 실제로는 맨 처음에 나온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다. 1587년 로마에서 식스투스(교황 식스투스 5세) 판이 나왔고, 19,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가지 비평적 편집본들이 나왔다.

 

 

3.아퀼라 역본

아퀼라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으로 유대교인이 된 사람으로서, 랍비 아키바의 지도를 받으면서 130년경에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극도로 직역을 했다. 전체 역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인용된 부분들과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Hexapla : 6개 언어 대조성서)에 그 단편이 남아 있고, 카이로의 고본 서고에서 나온 재활용 양피지(palimpsests : 한 번 쓴 양피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에 단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4.테오도루스의 개정본

그리스어 번역본의 2차 교정이 70인역을 개정한 것인지, 아니면 70인역 외에 다른 그리스어 역을 개정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2세기 후반에 테오도루스라는 사람이 개정했다. 히브리어 음역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5.심마쿠스의 역본

2세기말 심마쿠스가 번역했다. 번역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번역은 우수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히에로니무스가 그의 불가타 역에서 심마쿠스의 번역을 활용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의 번역은 '헥사플라'를 통하여 단편만이 알려져 있다.

 

6.오리게네스의 역사플라

여러 가지 상이한 번역판을 갖게 된 3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란이 생겼다. 230~240년경에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를 편집했다.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역, 심마쿠스 역, 70인역, 테오도루스의 개정본을 평행으로 편집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관심은 70인역이었다. 그는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70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의구표(疑句標)를 했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70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70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표를 붙여 놓았다. 의구표란 고사본의 의심스러운 본문이나 재생시킨 본문을 표시하던 단검표(+), 마이너스표(-), 나누기표(÷), 별표(*) 등을 일컫는다.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7.콥트어 역본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권 밖으로 퍼져가면서 그곳 언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콥트어 성서이다. 3세기말 4세기초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며, 번역 대본은 그리스어 성서이다. 부분적으로는 고대 라틴어 역본과 유사성도 보인다.

 

8.아르메니아 역본

5세기초까지 아르메니아 민족 교회는 그동안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해왔으나, 성 메스로프(361~439)가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민족 문학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때 성서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첫 번역은(414경) 시리아 역 페시타(Peshitta)를 대본으로 번역했고, 곧 이어서 개정했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최종적인 공인 번역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여기에도 페시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9.그루지아어 역본

아르메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그루지야어 역본도 메스로프의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루지야어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시편]도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지는 않는다. 사본들은 그리스어 역본이나 아르메니아 역본에 근거해 있다.

 

10.에티오피아어 역본

5세기경에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으면서 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것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1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는 아랍어 역과 콥트어 역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많은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하고, 70인역 본문과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11.고트어 역본

고트족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알려진 지방에서 살았다.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던 울필라스가 고트어 알파벳을 발명하여 성서를 번역했다. [구약성서] 번역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극히 일부 단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다. 그리스어 역을 대본으로 번역했다. 고트어로 기록한 문헌이라고는 성서 단편적 사본뿐이다.

 

12.고대 라틴어 역본

2세기 중엽 라틴어 역 [구약성서]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지방에 유포되고, 3세기 초에는 로마에도 유포된 흔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지에 살며 라틴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그리스어 역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옷을 입은 70인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0인역과 관계가 깊다.

 

고대 라틴어 역본에는 오리게네스가 개정하기 이전의 70인역의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본문비평에 있어서 고대 라틴어 역의 비중이 크다. 3세기까지 여러 종류의 라틴어 역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 번역이 하나의 번역본에서 나온 개정판들인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번역된 것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382년경 교황 다마수스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정리했다.

 

13.불가타 역본

불가타(vulgata)는 라틴어의 '공동번역'이라는 뜻의 editio vulgata에서 유래했다.

 

 

성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

 

불가타 역382년 교황 다마스쿠스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에게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83년경 복음서의 라틴어역 개정판이 나왔다. 그는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역 〈시편〉(갈리아 시편)과 〈욥기〉, 몇몇 다른 책들을 펴냈다. 나중에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성서〉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히브리 성서 원본을 토대로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405년경에 이 작업을 끝마쳤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모든 낱권 성서들을 하나의 겉표지로 묶은 성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책 안에는 보통 〈시편〉을 제외한 히에로니무스의 〈구약성서〉 번역본,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갈리아 시편〉, 〈토비트〉·〈유딧〉·〈복음서 개역본〉 등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신약성서〉는 히에로니무스가 이전의 라틴어 역본에서 취해 약간 고친 듯하다. 또한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하는 〈70인역 성서〉의 일부도 이전의 번역본에서 취하여 포함시켰다.

 

여러 편집인과 교정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불가타 성서'의 여러 개정본을 발행했다. 파리대학교는 13세기에 중요한 판본을 발행했는데, 그것의 1차적 목적은 신학 강의와 토론 때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오래된 인쇄본인 불가타 성서는 모두 파리 판본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가 라틴어 성서로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를 출판하라고 요구했다. 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발행한 이른바 〈클레멘스 불가타 성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성서본문이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1941년에 '성심회' 역본이 번역되었고 현대에 들어와 여러 교정판이 출판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Vellum leaf from an illuminated Medieval Manuscript
Italy; Early 14th Century
Latin Text; Transitional Rotunda Script
23.5 by 17 cm


At this period, the St. Jerome Bible was not transcribed as often as one would expect in the country of its origin and the very land which held the seat of the Roman Church. During the greater part of the 13th century, while the popes were greatly concerned with gaining political power, art was at a low ebb in Italy, and religious manuscripts were comparatively few and far inferior to the work of monastic scribes in Germany, France, and England. But with the great wealth accumulating in Italy during the 14th century through commerce and the Crusades, this country soon surpassed in richness as well as in numbers the manuscript output of all other nationalities.

The rich black lettering of this manuscript is in the transitional rotunda script and is excecuted with skill and beauty. It is supplemented by initial letters in rich ultramarine blue and deep cinnabar (vermilion), which colors are reflected in the ornament of the romanesque capitals. All of these factors combine to indicate that the manuscript was executed in central Italy, possibly at Florence.

 

13.시리아어 역본

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리아 역 성서는 '페시타'(단순한 번역)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번역은 본래 1세기경에 번역되었던 것 같고,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했던 것 같다. 페시타는 문체도 다양하고 채택한 번역 방법도 다양하다. 모세5경 부분은 마소라 본문과 아주 가깝지만, 다른 부분은 70인역과 가깝다. 맛소라 본문과 가까운 본문은 유대교인들이 번역한 것이고, 70인역과 가까운 본문은 그리스도교 쪽의 개정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시리아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동시리아)와 야코부스파(서시리아)로 나뉘면서 페시타의본문사도 2갈래로 갈라진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사본이 덜 손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초에 마북의 감독 필록세노스가 70인역의 루시아 개정본을 근거로 페시타를 개정했다. 617년에는 헥사플라에 들어 있는 시 리아어 역을 텔라의 주교인 파울루스가 헥사플라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했다. 지금 단편만 남아 있는 팔 레스타인 시리아 역은 에데사 야코부스(708 죽음)가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페시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42년에 나온 것이다. 완전한 형태로보존된 4권의 코덱스는 5~12세기 때의 것이다. 아직 비평적편집본은 없으나, 국제구약학회가 준비하고 있다

 

14.아랍어 역본들

최초의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본은 사디아 벤 요세프(892~942)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씌어진 아랍어 역본이다. 이 번역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부 알 하산이 이것을 대본으로 모세5경을 번역했으며, 11~12세기에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다른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은 아부 사이드가 13세기에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다른 여러 번역들 중에 10세기에 야피트 이븐 알리가 번역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946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아들 이삭이 복음서를 라틴어에서 번역했다. 아랍어 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본으로는 16세기에 번역된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의 것으로 파리와 런던에 있는 '대역성서'(Polyglots)에 아랍어 역이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랍어 역 사본들은 히브리어·그리스어·사마리아어·시리아어·콥트어·라틴어 중에서 번역된 것 등이 함께 전해져오기 때문에 번역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만큼 아랍어 역은 본문비평 자료로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19, 20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번역한 현대 아랍어 역들이 있다.

 

[라틴 역본]

기원후 2세기 말엽부터 유럽 각지에서 라틴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이들을 고대 라틴어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대 라틴어역들은 무절제한 수정과 내용의 와전으로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는 당시의 가장 유능한 성경학자인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오늘날 제롬으로 알려져 있음)에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을 요청하였다. 제롬은 383년 복음서를 시작으로 하여 405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마쳤다. '불가타'(The Vulgata: 공통적인)라고 불리는 제롬의 라틴어 역본은 이후 중세 1,000년 동안 서구세계에서 공인성서로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불가타본 이전에 있었던 라틴어 역본들의 총칭을 편의상 고대 라틴어 역본이라고 한다. 성서가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2세기 말엽 북아프리카로 추정된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하였으나, 구약성서는 헤브라이어 원본이 아니라 그리스어 역본을 토대로 번역하였다. 3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여러 곳에 라틴어 성서가 유포되었다. 고대 라틴어 역본들의 표현 및 문체의 특징은 통속적이고 구어적이다. 이는 비지식층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라틴어 역본들은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해서 후에 성서편찬작업을 한 성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 번역의 종류는 필사본의 수효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불가타본 성서의 형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2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대 라틴어 역본은 오늘날 50여 개의 수사본(手寫本)과 단편들이 전해질 정도로 대단히 많았다. 4세기 말경에 이르러 라틴어역 수사본들이 양산되자, 라틴어 역본은 심각할 정도로 그 순수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라틴 교회 안에서 사용하던 성서를 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성서를 편찬한 사람이 바로 고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 성 히에로니무스였다. 그는 달마티아의 스트리돈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고, 그리스어와 헤브라이어도 익혔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그때 그가 맡은 일이 라틴어판 성서를 개정하는 일이었다. 384년 4복음서의 개정판을 완성하였고, 신약성서는 386년경에 개정한 것으로 전해지나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구약성서까지 포함해서 개정판을 완성한 것은 391~405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 방대한 작업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라틴어 성서문헌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그 방법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구약성서 본래의 언어로 된 헤브라이어본을, 신약성서는 그리스어 필사본 중에서 나은 것들을 새로운 번역의 문헌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고대 라틴어본을 개정한 《시편》을 제외한 모든 구약을 종래의 70인역에 의존하던 것을 지양하고, 히브리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15년간의 노력으로 서방교회70인역을 계승해갈 수 있는 라틴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성서개역작업이 과소평가되었으나, 중세에 이르러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불가타 성서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인수페르 Insuper〉라는 칙령을 통해 라틴 교회의 공식 성서로 선언되었다. 그후 1590년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주관하에 식스투스판 개정본이 나왔으며, 1592년 클레멘스 8세에 의해 다시 개정본이 나오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표준성서로 공인되었다.

 

[중세와 근대 역본]영어역 제외

중세와 근대에 번역된 성경의 수효는 수없이 많다. 더구나 일부 언어(예. 프랑스와 독일어)에서는 상이한 번역본이 수백종에 이른다. 여기에서는 일부 대표적인 유럽어 번역본 성경만을 살펴보겠다. 독일어역 성경은 서고트의 주교 울필라스(Ulfilas)가 고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 시초이지만 게르만어로 된 가장 최초의 성경은 몬제(Monsee)의 프랑크역 마태복음이다(738). 그러나 독일 성경사뿐 아니라 독일 언어사에서도 신기원을 이룩한 것은 루터역 성경이다. 1522년 9월에 신약이, 1534년에 성경 전체가 간행되었는데, 장엄한 어법과 풍부한 어휘로 유명해 독일문학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이 외에 쮜리히위원회에서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쮜리히성경》(1931)과 현대 독일어역 성경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인정받는 《Menge Bibel》(1926)이 있다. 프랑스역 성경으로 최초의 것은 1170년경 발도(P.Waldo)가 추종자들과 함께 번역한 복음서 및 바울서신이다.

 

성경 전체의 번역판은 파리대학에서 출판한 것이 최초의 것이다(1226-50).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번역본은 칼빈의 사촌형 올리베땅(Olivetan)의 작품(1535)인데, 칼빈은 여기에 라틴어 서문과 신약의 서언을 썼다.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성경은 이것을 개정한 것이다. 이 외에 현존하는 네덜란드어 최고의 번역본은 10세기 초에 의역된 시편이고, 완역성경은 무명의 학자들에 의해 1526년에 출판되었다. 이탈리아어 최고의 번역본은 13-14세기의 공관복음서이고 완역성경은 1532년에 출판된 브루치올리(A.Brucioli)의 번역이며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번역성경은 디오다티(G.Diodati)의 작품이다(1607). 약간의 단편이 남아 있는 최초의 헝가리역 성경은 15세기 초 프란치스꼬회 수사인 토마스와 발렌티누스의 작품이고 최초의 완역성경은 멜란히톤의 제자이며 개신교 목사였던 카롤리(G.Karoli)의 번역본인데(1590), 비졸리에서 인쇄되었다고 해서 비졸리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역본]

영국 기독교의 초기에 알려진 유일한 성경은 불가타성경이었다. 앵글로 색슨어로 해설된 성경이야기가 캐드먼(Caedmon, 680사망)에 의해 시 형식으로 출판된 것 외에는 1382년이 되기까지 자국어 성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1. 위클리프 성경

최초의 영역성경은 위클리프불가타성경에서 번역한 《John Wycliffe’s Version》(1382; →위클리프역 성경)으로서, 그는 가톨릭에 반대해 평신도의 손에 성경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번역을 했고 이로 인해 이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2. 틴데일 성경

그 후 틴들이 처음으로 히브리어헬라어에서 직접 번역한 《Tyndale’s Version》(1525-35; →윌리엄 틴들의 역본)이 출판되었는데, 그도 이로 인해 화형을 당했다.

 

3. 커버데일역과 매튜성경

인쇄된 최초의 영역본은 틴들의 조수였던 커버데일의 《Coverdage Version》(윌리엄 틴들의 역본, 1535)이고, 커버데일의 친구 매튜가 틴들역과 커버데일역을 개정해 《Matthew’s Bible》(1537; →매튜성경)을 출간했다.

 

4. 1539~1610년 성경

그 후 크롬웰과 크랜머 대주교가 커버데일에게 부탁해 만든 매튜역 개정판인 《The Great Bible》(1539-1541;→큰 성서)이 나왔는데, 그 규격이 크고 화려해서 붙인 명칭으로 대중에게 인기가 좋았다. 큰 성서와 비슷한 시기에 평신도였던 태버너(R.Taverner)가 번역한 《Taverner Bible》(1539; →태버너성경)이 나왔는데, 그것은 영국에서 인쇄된 최초의 영역성경이었다. 메리여왕의 가톨릭 정책으로 제네바에 피신한 신교도들이 1560년에 《Geneva Bible》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160판을 거듭하면서 인기를 누렸다(→제네바 성서). 큰 성서가 강단에서, 제네바 성경이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있자 이를 절충할 필요가 생겨나 1568년 파커대주교의 지시로 《The Bishop’s Bible》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참여자의 대부분이 주교들이라 붙여진 명칭이다(→비숍스 바이블). 한편 이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 마틴(G.Martin)의 역본으로 《Douai And Rheims Version》(1610)이 출간되었다(→두에이-랭스성경).

 

5. 흠정역 성경
1611년 영역성경의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The King James Version》이 출간되었다. 이것은 제임스1세의 지시로 큰 성서제네바 성서의 결점을 검토해 전면적으로 개정된 성경으로, 영문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성경은 발행 후 300년간 최고의 성경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언어의 낙후성과 성경사본의 발견으로 인해 개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English Revised Version》(1885)이 출판되었다(→영어 개역 성서). 한편 이에 협력한 자들이 미국에 알맞게 출판한 것이《American Standard Version》(미국 표준 성서, 1901)인데, 10년이 못되어 개정의 필요가 생겨났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Revised Standard Version》(1952)이 출간되었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KJV)은 1604년 영국왕 제임스 1세가 "전 영국 교회가 하나님 예배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번역을 명령하여 성공회와 청교도 성직자 및 평신 도로 구성된 54명에 의해 1611년 완성되었다. 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10세기 이후 발간 된 각종 영역성경에 입각, 왕과 교회의 권위로써 통일시킨 표준역으로, 내용 면에서도 독 일어의 루터역 성경과 쌍벽을 이루는 명역(名譯)으로 알려져 있다. 장중한 문체, 간결하 고도 힘 있는 표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리듬,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미지 등의 특징으로 인하여‘영어 산문의 가장 숭고한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출판된 이래 수세 기를 경과한 오늘날까지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사랑을 받아왔다.

>> 참고고리 : 킹 제임스 성경의 유래

 

6. 그 밖의 영어 성경

흠정역 이후 17-19세기 동안 새로운 사본의 발견에 자극받아 수많은 번역이 이어졌다. 어져 나왔다. 1870년 영국에서 신교가 초교파적 개역 작업에 착수하여 1881년 신약이 출 판되었는데 영,미 양국에서 첫 해에 300만부나 팔렸고 4년 후 구약이 마저 발간되었다(English Revised Version). 1901년에는 미국에서 이를 일부 수정한 American Standard Version이 출판되었다. 그 후로도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New English Bible, The New American Bible, The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NIV), The Living Bible 등이 발간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New Living Translation(NLT)이 번역, 출판되었다.

 

이 외에 주요한 것으로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한 《The New English Bible》(1970;→새영어성경), 프랑스판을 영어로 번역한 《The Jerusalem Bible》(1974; →예루살렘성경), 가톨릭에서 주관해 불가타를 대본으로 번역한 《The New American Bible》(1974;→새미국성경), 교육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읽도록 번역된 《Today’s English Version》(1976, 일명 Good New American Bible;→오늘의 영어성경), 보수적 입장에서 KJV적 권위를 회복시키려 했던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1978; →새국제성경), 테일러(K.Taylor)의 작품으로 70년대에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면서 또한 물의를 일으킨 《The Living Bible》(1971;→리빙 바이블), 유대교 영어 역본들 등이 있다.

 

 

[프랑스어 역본]

처음으로 프랑스어 완역 성서가 나온 것은 13세기였다. 파리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자들을 동원하여 번역했는데, 그 대본은 라틴어 성서였다. 1487년에는 가톨릭 학자들이 성서를 번역하여 '큰 성서'로 출판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탕으로 알려진 피에르 로베르가 성서를 번역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했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다. La 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

 

1553년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이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의 장절을 구분하여 출판했다. 19세기 후반에 루이 스공이 프랑스어 역 [구약성서](1874)와 [신약성서](1879)를 출판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20세기에는 1956년에 완역된 도미니쿠스 수도회 학자들이 번역한 예루살렘 성서 (La Bible de Jerusalem)와 1971~75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서(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가 있다.

 

[독일어 역본]

Martin Luther's German Bible6세기에 고트어로 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있었으며, 8세기에 와서 라틴어 역에서 번역된 [마태오의 복음서]가 바이에른(독일 남부)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9세기에 복음서들의 발췌 번역과 [시편] 번역이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 성서(Augsburg Bible)로 알려진 [구약성서]는 1389~1400년에 나왔다. 최초의 인쇄본 성서인 멘텔 성서(Mentel Bible)가 1466년에 나와 1533년까지 18판이 나왔다.

 

독일에서 성서 번역의 신기원을 이룬 것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역 성서이다.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서 [신약성서]가 나왔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제2판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다. 뒤이어 나온 [구약성서]는 브레시아 히브리어 성서(Brescia Hebrew Bible : 1494)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터히브리어와 아람어 독해력은 제한된 것이었으나, 그의 번역에는 11~12세기 프랑스의 랍비였던 라시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1534년 루터 역 성서가 완역되었다. 루터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번역을 계속 개정했으며, 1534~46년에 11번이나 개정을 거듭했다. 마지막 판은 그의 사후에 나온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가톨릭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히에로니무스 엠세르의 번역은 불가타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지만, 루터 역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534년 요한 디텐베르거가 마인츠에서 엠세르의 번역·개정판을 낼 때 재세례파(개신교의 한 분파) 역과 1529년의 취리히 번역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가톨릭의 표준 번역이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그뤼네발트 성서(Gruenewald Bible : 1956년에 7판이 나옴)는 가장 주목할 만한 역본이다.

 

12~13세기에 독일어로 번역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이디시어 역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쇄본으로서는 야콥 벤 이삭 아슈케나지의 [체나 우레나(Tzenah u-Rena : 1616)가 있다. 유대교에서 번역한 최초의 독일어 역 [구약성서]는 모세 멘델손의 번역으로 1780~83년에 나왔다.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지만 히브리어로 쓴 것이다. [구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독일어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역본은 고트홀트 살로몬의 역본이다(1837). 마르틴 부버와 프란츠 로젠바이크가 히브리어 문체의 특성을 살린 번역을 했다(1925). 최근의 역본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Die Bibel Einheitsubersetzung : 1980), 현대 독일어 성서(Die Bibel im heutigen Deutsch : 1982), 공동번역 성서에 프랑스어 예루살렘 성서의 해설을 함께 단 새 예루살렘 성서(Neue Jerusalemer Bibel : 1985)가 있다.

 

 

 

 

 

 

[중국어 역본]

중국어 성경중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7세기에 경교(景敎 Nestorianism)가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3세기에 가톨릭이, 19세기에 개신교가 들어갔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은 개신교가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10년에 선교사 마르시만이 [마태복음서]를 번역했다. 1822년에는 [구약성서]·[신약성서]가 간행되었다.

 

중국어 성서의 대표적인 두 역본은 대표역본(Delegates Version : 1854)과 화합역본(和合譯本 Union Version)이다. 대표역본은 '하나님'을 '신'(神)으로 표기한 '신판'(神版)과 '상제'(上帝)로 표기한 '상제판'(上帝版)으로 출판되었다. 화합역본은 중국의 표준 역본으로서 1891년에 시작하여 1919년에 완료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의 역본으로는 홍콩 성서공회에서 간행된 현대중문역본(現代中文譯本 Todays Chinese Version : 1979)이 있다.

 

[일본어 역본]

일본어 성경최초의 번역은 귀츨라프의 [요한의 복음서]를 번역한 것이다(1837). 1880년에 [신약성서]가 번역되고 1888년에 [구약성서]가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역[明治譯]이다. 1917년에 [신약성서] 개정판이 나왔으며, 1954년에는 메이지 역에 이어 2번째로 완역 성서가 나왔다. 이것은 구어(口語)로 개정되어 나온 성서로서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인다. 1970년에 기존 역본을 개정한 신개역이 나오고, 1978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신약이 나왔고, 1987년에는 신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한국어 역본] 한글성경

성경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832년 네덜란드 선교사 귀츨라프 선교사를 통해서이다. 그는 얼마동안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그 후에 1865년 토마스 목사는 황해도 해안지방에서 대동강을 따라 평양 근처에서 순교하기까지 한문성경을 전해 주었다.


이수정 서상륜우리말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것은 중국에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이다. 당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에 들어오지 못한 로스 목사는 만주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만난 서상륜에게 한글을 배우며 함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 그 때 서상륜 이외에도 이응찬, 백홍준 두 사람이 협조, 1882년 말에 최초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이 누가복음이었다. 로스 목사는 같은 선교회에서 파송한 매킨타 예수셩교젼서(1887년) 예수셩교젼서(1887년)이어와 합작, 1887년에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을 완역하였다.
한편 1883년 4월 일본에서는 미국성서공회가 한문으로 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와 사도행전에 이두로 토를 달아 3천부를 인쇄했는데, 토를 다는 작업을 맡았던 관비 유학생 이수정이 1884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그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00년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완역하였다. 이를 다시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 신약을 개정하였는데, 1938년에 개정한 성경은 1956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개역성경(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을 발간하였으며, 1998년 개역 개정판이 나왔다. 이외에도 1977년 가톨릭과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이, 1985년 현대인의 성경, 1993년 표준새번역 등이 있다.

   

 

1. 개역 성경이 나오기까지
성경젼서(1911년)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성경은 피터스(A. A. Pieters)가 번역한 '시편촬요'이다. 그 후 1882년에는 존 로스누가복음을 번역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해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성경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들은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1900년에 신약을 모두 번역했고, 1911년에는 구약을 모두 번역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신구약 성경'이 출판되었는데, 이 성경은 1938년에 다시 한 번 개역이 되었다. 이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 성경'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 이 성경은 '한글 맞춤법 표기'에 맞추어서 다시 한 번 부분적으로 개정이 되었다.
개역성경은 1911년에 번역 출간된 「셩경젼셔」를 두 차례에 걸쳐서 크게 개정한 것이다. 1차로 개역된 성경은 1938년에 출간된 「셩경 개역」이다. 1938년의 「개역」과 구별하여 1911년의 「셩경젼셔」를 「옛 번역」 또는 「구역」이라고 부른다.

 

  1)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이것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표기를 고치고 더 손질하여 출판한 첫 판이 1952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다. '한글판'이라는 이름은 '국한문판'과 구별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기를 「셩경 개역」에서 쓰던 옛 철자법을 버리고,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철자법에 따랐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그 후 번역 내용과 표기법을 더 손질하여 출간한 개정의 결정판이 1961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표제지 연도 1956)이다.
구약은 1911년부터 1937년까지 26년 동안 개역 작업을 하였고, 신약은 1926년에 시작하여 1937년에 끝마쳐 12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2) 개역 성경 개정판
        각 교단이 표준 새번역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사용하기를 꺼리게 되자, 대한성서공회는 내용을 더욱 보완해서 2000년에 "개역성경 개정판"을 내놓았다. 그 후에도 여러 교단들의 지적에 의해 개역 성경 개정판은 수정작업을 거쳤으며, 일부 교단이나 단체에서는 이 성경을 공인 성경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교단들은 이 성경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2. 공동번역
그러나 개역 성경은 원어 성경이 아닌 영어성경(흠정역)과 한문 성경을 기초로 해서 번역되었고, 자국인이 아닌 외국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1968년에 대한성서공회는 레닌그라드 비평 자료인 BHK를 기초로 해서 천주교와 공동으로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대한성서공회는 1971년에 신약을 완역하였으며, 1977년에는 구약과 외경을 완역하여 "공동 번역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개신교와 가톨릭(가톨릭은 자체 번역한 새 성경을 사용한다.)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성경이 되었으며 북한성경은 공동번역을 북한단어로 수정하여 출판하였다.


3. 현대인의 성경
현대인의성경대한성서공회에서 카톨릭과 개신교 공동으로 공동번역을 내 놓았지만, 외경 문제로 인해 개신교 내에 전혀 수용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생명의 말씀사에서 개신교인을 위해서 현대어로 된 번역 성경을 만든 것이 바로 '현대인의 성경"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1977년에 신약이, 그리고 1985년에 신구약 완역본이 나왔다.

현대인의 성경은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주로 영어판 성경인 Living Bible에서 번역을 했다. 이 성경은 히브리어헬라어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역성경을 대체하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번역진들이 이 성경을 번역한 것은 기존의 개역 성경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어로 된 개역 성경을 현대어로 알기 쉽게 번역하여 개역 성경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번역자들은 개역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을 함께 사용하여 어려운 개역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 이 성경은 개신교인들에게 새롭고 쉬운 한글성경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Living Bible은 많은 영어 번역 성경 중에서 가장 풀어쓰기(의역)를 한 성경이며 가장 읽기 쉬운 성경으로 꼽히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이 이러한 Living Bible을 번역했기 때문에 주요 번역 원칙이나 특징은 Living Bible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4. 현대어 성경
현대인의 성경이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에서 번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 성서교재 간행사에서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을 근거로 해서 현대어 성경을 출간했다. 신약은 1978년에 출간되었고, 신구약 완역은 1991년에 출간되었다.

현대어 성경은 번역을 위한 원전으로 히브리어헬라어 원문 성경을 사용했다. 그리고 번역원칙은 현대인의 성경과 같이 Living Bible과 같은 쉬운 풀어쓰기(의역)를 따랐다. 현대어 성경은 현대인의 성경과 같이 고어로 된 성경을 현대어로 쉽게 번역을 하는 동시에,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을 참고해서 번역함으로 그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했다. 현대어 성경은 성도들이 쉽게 이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원문의 내용이 모호한 부분은 권위있는 주석을 참고해서 성도들이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성경의 번역자들은 현대어 성경을 만들면서 '주석을 바탕으로 풀어 옮긴 성경', 그리고 '주석의 도움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만들려고 했다.

5. 표준새번역
1983년 번역에 착수하여 1993년에 출판한 새 번역이다. 개역 성서의 개정이 아닌 새로운 번역이다. 현대 한국어, 쉬운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어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에 한국어의 어법에 맞게 표현하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예배와 교육에 적합한 번역이 되도록 했으며, 고유명사의 음역은 개역 성서를 따르고, 한국교회가 중요하게 여기고 써온 용어는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서 번역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네 글자 YHWH를 '여호와'라고 번역하지 않고, 맛소라 본문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2,000년의 번역 전통을 따라 '주'(主)로 번역했다. 

6. 북한 성경(1990)

 

7. 쉬운성경(2001)

    아가페 출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쉬운 구어체로 원문에서 번역하여 그림과 함께 발행한 성경이다.


8. 우리말 성경(2004, 두란노)

 

9. 새 성경(2005, 가톨릭 성경)

 

 [사해사본]


이사야 A 사본의 32-33단(columns)
 
 
그리스도교 기원 살아숨쉰다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
구약성경 전승과 본문형성 규명 자료
 
 
   1947년 봄,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 해변가. 한 목동이 잃은 염소를 찾아 나선다. 절벽에 있는 구멍에 혹시나 염소가 빠졌는가 싶어 돌을 던져 염소의 울음소리를 확인한다. 그때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동굴로 들어간 목동은 항아리 안 가죽 두루마리를 발견한다.
 
   이 우연한 ‘찾음’으로 가장 오래된 성경필사본인 ‘사해사본’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사해사본이란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영어를 그대로 풀면 ‘사해 두루마리’. 생소한 말이다. 요약하면, 이스라엘 사해지역에서 발견된 성경필사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1947∼1956년 사해지역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성경사본을 통틀어서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사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 중에서 쿰란(Qumran) 지역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뜻한다. ‘쿰란사본’으로도 불린다. 주로 종교적 학문적 의미로 사해사본이라 하면, 좁은 의미의 쿰란사본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47년 쿰란지역에서 베두인족 목동 무하마드 아드 디브에 의해 첫 동굴이 발견된 후, 56년까지 모두 11개 동굴에서 850여 종류의 사본들이 발견됐는데, 이를 쿰란사본이라 한다. 이 사본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필사된 것들이다.
 
   2000년 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본들이 유다 광야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실을 두고,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부른다. 제 1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단편들이 대부분이며, 특히 500여 종류가 발견된 제 4 동굴의 사본들이 양과 중요성에 있어 의미가 있다. 사본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만들어졌고, 대부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졌다.
 
   사해사본의 가치
 
   ‘사해사본’은 현존하는 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역사학적으로, 알렙포 사본(925년 경 기록), 레닌그라드 사본(1008년 기록) 보다 1000년 이상 오래된 성경 본문을 보여준다.
 
   쿰란에서 발견된 850여 사해사본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215여 종류의 구약성경 사본. 두 번째로, 구약성경의 다양한 외경 사본과 마지막으로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룬 이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공동체 생활조직, 사상 등을 적은 쿰란-에세네파 사본이다.
 
   특히 구약성경 사본들은 성경의 전승과 본문 형성의 역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구약성경의 정경들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소라 본문’, ‘사마리아 오경’, ‘칠십인역’ 등 여러 다른 본문들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쿰란공동체 고유 방식으로 필사한 것도 있어 비교연구에 도움이 된다.
 
   또 성경 사본 외 나머지 사본들은 예수 그리스도 활동시기였던 기원후 1세기, 당시 팔레스티나 유다이즘 연구의 직접적 문헌으로서 가치가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 쿰란에서 발견된 구약성경 사본 수
 
   모세오경 : 창세기(19), 탈출기(17), 레위기(13), 민수기(8), 신명기(33)
   예언서 : 여호수아기(2), 판관기(3), 사무엘기(4), 열왕기(3), 이사야서(21), 예레미야서(6), 에제키엘서(6), 다니엘서(8), 열두 예언자(8)
   성문서집 : 역대기(1) 에즈라-느헤미야기(1), 시편(34), 욥기(4), 잠언(3), 룻기(4), 아가(4), 코헬렛(2), 애가(4), 집회서(1), 토빗기(5), 예레미아의 편지(1)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오늘날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모든 책들의 사본이 발견됐는데, 특히 시편, 신명기, 이사야서 사본이 상대적으로 많이 발견됐다. 현재 ‘쿰란사본’ 공식판은 옥스퍼드대학교 출판사의 ‘DJD’(Discoveries in the Judaean Desert) 시리즈를 통해 39권까지 발표됐다.
 
 
“초기 교회공동체 당시 유다이즘 연구에 중요”
◎ 사해사본 연구 대구가대 송창현 신부
 
  
   “사해사본은 구약성경 시대 문헌의 발견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어떻게 전승되고, 본문이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의 연구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중요합니다.”
 
   ‘사해사본’ 연구학자인 송창현 신부(대구가톨릭대 신학과 성서학 교수)는 “특히 사해사본은 구약과 신약 사이를 잇는 것으로 바빌론 유배 이후 제 2차 성전시대의 유다이즘 연구에 직접적 자료가 된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했던 기원후 1세기, 초기 교회공동체가 태동했던 동시대에 살았던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이 만든 사본입니다. 그들의 조직과 가치관, 신앙관 등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 활동 당시의 배경이 되는 사상, 역사, 문화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배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고,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송신부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동시대 팔레스티나인들의 의식과 비교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올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다음달 5일부터 2008년 6월 4일까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전시와 관련 세미나는 국내에서 사해사본에 대한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도 사해사본, 쿰란공동체 등에 대한 여러 책들이 번역 출간됐지만, 종교적 가치보다 화제성에 초점을 맞춘 내용도 적지 않다. 이 부분에서 송신부는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학설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과도한 상상력에 의한 것은 순간적일 뿐 오래가지 못합니다. 학문적 객관적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돼야 할 것입니다.”
 
   사해사본 전시를 앞두고 송신부는 “실제로 수 천 년 전에 쓰여진 사본들을 보면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송창현 신부는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공부했으며,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고,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 연구소에서 ‘쿰란 사본의 메시아 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사해사본, 제2차 성전시기의 문헌, 역사적 예수 등이다.
 
[가톨릭신문, 2007년 11월 25일, 박경희 기자]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전시품 소개
 
 
 
● 사해사본 회중규칙서 ‘1Q sa’
 
회중규칙서는 공동체 규칙서의 두 개 부록 중 하나다. 회중규칙서는 마지막 날에 등장할 두 메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 규칙서(Messianic Rule)라고도 불린다. 히브리어로 적혀있으며 기원전 1세기 전반부에 필사되었다. 현재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이 소장하고 있다.
 
● 성묘성당(주의 무덤 성당)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한 장소와 예수의 무덤을 둘러싼 위치에 세워진 성묘성당 내부 모습이다.
 
● 물고기 모양 등잔
 
물고기 모양의 등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인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ΙΧΘΥΣ인데,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글의 첫 글자들을 모아놓은 것과 같다.
 
 
● 쿰란 항아리
 
1947년 베두인 목동들이 사해사본을 발견했을 당시 사본이 담겨있던 항아리이다. 접시모양의 뚜껑과 함께 몸체가 긴 이 항아리는 ‘쿰란공동체’가 거주했던 곳인 ‘쿰란’ 유적지와 사본이 발견된 동굴에서만 발견되었다.
 
● 마다바지도
 
요르단의 마다바에서 발견된 비잔틴 시대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자이크 성지 지도 이다. 크기는 가로 16m와 세로 6m로 전시회에서 실물 그대로 복원된다. 세계적 고대 문화유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된 마다바는 350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 유로기아 토큰
 
비잔틴 시대의 상징적 유물이다. 당시에는 모든 일상적인 생활 물건에 대부분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특히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그려진 장면은 토큰과 병에 많이 장식되어 순례자들에게 보급됐다.
 
● 청동등잔과 등대
 
청동으로 만들어진 등잔과 등대로 십자가가 장식돼 있다. 예수 이전의 유물에서도 발견됐지만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구속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2.<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3.<쿰란사본들>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4.<사해 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5.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6.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7.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8.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금세기 중엽에 그노시스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및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 각각 극히 중요한 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즉,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 일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1945년 이었다고 한다)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투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투인들이 가지고 온 출저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종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전장 7.34미터,폭 평균 26센티미터,각 난은 평균 30행.
이사야 66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시게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 등에 기록되어 있다.

 

2.<쿰란 사본들> 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단편,<시편>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축복기도문>,<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3.<쿰란의 폐허>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이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4. <사해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 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 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5. 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역사서는 연대를 표시하는데 서혁 기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원1년으로 하고 그 이전을 기원전 (BC.Before Crist)로표시하고, 그 이후를 기원후(AD.Anno Domini)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남러시아의 스키티아 지방에서 출생한 6세기 로마의 수도이사이며 연대사가인 죠니 시우스,엑시구스(497년경-550년경)가 525년에 로마 교황의 명령을 받고 <부활절>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탄생 기원을 채용하여 확립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754년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 기원법은 9세기가 되어 프랑스 왕국 카로링왕조 제2대 왕 칼 대제(742-814)시대에 다른 기원법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두게 된 이후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년표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전 4년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 서력 기원법의 전체 체계는 기원전에 관해서는 4년을 빼고 기원후에 관해서는 4년을 가해야 한다. 그 근거는 차치하고 실제로 예수가 탄생한 것은 후일의 연구에 의하여 기원전 6년경에서 기원전 4년경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오랜 습관대로 이것을 편의상 그대로 상요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동시대의 다른 인물에 비해서 비교적 정확한 편이지만,예수의 탄생에 관한 사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과학적 검토에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연대의 연대학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1절이하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 왕 때(BC 3-74)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했으며 헤롯왕의 유아 학살의 명령을 피해서 이집트로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누가복음에도 로마황제 어거스투스 시대(BC 27-AD14)에 전 로마 제국의 인구조사 칙령이 있어서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9킬로미터에 있는 도시이며 다윗왕과 관계가 깊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가 아니라,예수가 다윗의 호순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다윗과 인연이 있는 베들레헴이 예수의 탄생지로 전해졌다고 한다. 마가복음 12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 자신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또 예수의 생애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또 예수의 탄생지는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거의 중간에 있는 갈리리아의 도시나사렛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사렛은 예수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도시였다.
아무튼 마태,누가 양 복음서의 탄생 기록은 예수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이 그 만년에 로마 황제의 신뢰를 잃고 그 결과로 헤롯은 광기가 들어서 많은 육친까지도 살해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그것은 구약성서 위경의 모세의 승천 6장 이하에도 나타나있다. 누가복음의 탄생 설화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모두 헤롯왕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클레니오(로마의 귀족 스루피큐스.퀴리노)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에 한것보다 이전의 국세조사>때였다고 한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프라비우스.요세퍼스(37년경-100년 이후)의 <유대 고대사>나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5장 37절 등에 의하면 클레니오가 유대에서 인구조사를 한것은 기원 6년이다. 아마 이 인구조사는 몇년에 한번씩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칼타고 태생의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로 유명한 텔트아누스(160년경-220년이 이후)의 <마르키온에 대한 반론>4-16에 의하면 사르투르니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BC 9-6)에 인구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4세기의 로마 역사가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340/360년경-?)에 의하면 어거스투스가 동시대인 헤롯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2세 이하의 남아를 모두 학살한 것을 엄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마크로비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평화 정책을 써서 각지의 신망을 얻고 로마 황제 어거스투스(그는 헤롯왕가의 유대인에게도 우호적이었다고 한다)시대와 헤롯왕 시대에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의 활동의 시작은 30세경이며,그는 그 만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30년경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지방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에 의하여 극형,즉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이 해부터 역산하면 예수의 탄생은 기원 전후가 된다.
한편 헤롯은 기원전 4년의 과월절 전에 요르단강 하류의 서쪽 여리고에서 죽은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후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해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6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라고 추정된다.
인간 예수의 짧은 생애는 그 죽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 =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원시 그리스도교단 안에서 형성된 전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삼일만에 부활했음을 전하고 있다.

 

6.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각 복음서에 의해서 묘사돼 있는 예수상은 차이가 있으나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예수>란 헤브라이어 인명 예수아 또는 예호수아(여호수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예수스이다. 사도행전 7장 45절,히브리서 4장 8절에는 모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로 기재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야훼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인명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기원 1세기의 프라비우스.요세퍼스나 파피루스 문헌등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많았던 것이다. 골로새서 4장 11절에도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라는 예가 보인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는 <예수.바라바>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도>또는 하리스토스>라고도 표기된다>란 그리스어의 동사 크리오 chrio(<기름 붓다>란 뜻)에 유래하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이며, 헤브라이어의 마시아하,아람어의 메시하,즉 그리스,라틴어형의 메시아스 Messias에 해당한다(요한복음1장 41절 4장 25절).

기름 특히 향유는 고대에는 귀한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용도는 여러가지였으며, 기름에 유향을 섞어서 태워 향기 예물로 바치거나(레위기 6장 15절),기름은 번영의 표시이며(신명기 8장 8절,예레미야서 31장12절),귀중한 상품으로 수출됐다(느헤미야기 5장 11절,에즈라기 3장8절),또는 기름은 융성(신명기 33장 24절),기쁨(시편45편 7절,히브리서 1장 9절)의 상징이 되며,기름이 떨어지는 것은 비애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요한계시록 6장 6절).

돌 벼개를 벤 야곱은 천사의 꿈을 꾸고 깨어서 그 돌을 세워서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창세기 28장 18절,이것은 가나안 종교의 특징의 하나인 신성한 돌을 숭배하는 흔적이다), 사울,다윗 그 아들 솔로몬드 제사장 아론,예언자 엘리사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사야서 45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며, 이방 페르샤의 왕 큐로스가 구약성서에서는 왕의 칭호인 <메시아>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큐로스가 유대인을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며 이 호칭이 당시 일반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 명사였으며 복수형도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도.예수>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칭호>인 예수 (인명)>라는뜻이다.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예수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목수였던 요셉을 가장으로 하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구약성서를 읽고 주의 사람들에게도 요셉의 아들로 인정받고,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모친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모친>으로 숭배되고 있다. 예수에게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사해 문서는 예수가 태어난 배경을 전해주고 있다.

 

7. 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최대의 유산은 알파벳과 헤브라이즘일 것이다. 전자는 실용적인 유산이며 후자는 정신적인 유산이다. 먼저 알파벳의 정의부터 해보자.

알파벳이란 말의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즉 표음 문자를 가리키며, 이런 글자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된 자모표 이다. 원칙적으로 1장 1음을 표기하는 것이다. 4항에서 말한 것처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우선 글자의 사용 여부로 할 수 있다.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이미 글자가 사용되었다. 즉,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의) 쐐기글자와 이집트의 신성 문자가 그것이다. 양자가 모두 독자적인 표의 문자이며, 각기 극히 복잡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기나 신관 계급등의 독점물로서 신성시되었다.

한편 이러한 서기제도는 대 신전이나 대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 글자들은 처음은 그림 글자에서 발달한 것이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 일부 표음 문자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해서 글자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함께 발달했으나 지금부터 약 2천년전에는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미 기원전 2천년경부터는 가나안인은 쐐기 글자와 신성 문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가나안 글자의 창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원전 1500년 경에 <시나이 그림 글자>가 나오고 이것이 알파벳의 직접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인의 발명한 글자를 페니키아인,아람인,이스라엘인 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서의 무역 활동 상의 필요 때문에 표음화된 이집트 글자를 근거로 해서 독자적인 간략한 표음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지중해를 통해서 그리스.로마로 전달된 알파벳은 유럽인의 글자로서, 즉 라틴 글자의 알파벳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라틴 글자의 알파벳 없이는 유럽 문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에서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처럼 거대한 중앙집권 국가는 성립되지 않았다. 가나안 사회의 중심은 상인층이었다. 그들에게는 왕후나 신관과 같이 서기를 양성할 경제적인 힘은 물론 없었으나 문자를 신성시할 필요도 없고 문자를 오직 실용적인 기호로 바꾸어 사용해갔다.

별표에서 보는 것처럼,첫 글자는 <숫서 머리>를 뜻한다. 숫소는 가나안어로 <알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글자도 <알프>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 <알프>는 <숫소>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순히 <아> (엄밀하게 말하면,<아>를 발음하기 직전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 라고 하는 첫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0세기의 비문에는 이 <숫소의 머리>가 이미 양식화 되어 두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어 있었다. 이 글자가 180도 회전하면 고대 그리스 글자(BC 8세기)의 알파가 되며, 이것을 90도 회전하면 라틴 글자 A가 된다. 둘째 글자는 <집>을 뜻한다. 이것은 가나안어의 <집>을 나타내는 <벳>의 첫 소리 B음을 나타낸다. 이 그림 글자는 기원전 10세기에는 한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고 그것을 180도 회전한 것이 고대 그리스 글자 베타가 되고 그 베타의 윗부분 획이 이어져서 라틴 글자 B가 됐다고 한다.

알파벳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리스.알파멧의 처음 두 글자 알파와 베타에서 나온 것이며, 그 어원은 가나안어의 <숫소의 머리>와 <집>에 유래한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이게서 알파벳을 배우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헤브리어 글자로 발전시킨 것이다.

 

8. 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전항에서 우리는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유산의 하나, 즉 실용적인 유산인 알파벳의 기원을 살펴봤으며 다음은 정신적인 유산인 헤브라이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고나 행동속에서 자라난 것이며,고대 이스라엘인의 유일 인격신 야훼 신앙에 유래하며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되고 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근본 원리로 한다.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문화)과 함께 유럽 정신의 전통을 형성하여 온 2대 사조의 하나이다.

영국의 문예 사회 평론가 머슈.아놀드(1822-1888)가 평론집<교양과 무질서> (1869)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논한 이래, 이 양자가 유럽사상의 2대 원류로서 파악되게 되었다. 보통,헤브라이즘은 인간중심주의의 헬레니즘과 대비해서 논의되는데 그것은 구약성서에 근거한 헤브라이적 사유의 특질을 나타내는 경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트리프.보만(1894-)은 그 저서<그리스도인의 사유와의 비교에 의한 헤버라인의 사유>에서 헤브라이인과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헤브라이인의 사유벙밥의 특색은 동적이고 힘차고 열정적이고 자주 거의 폭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비해서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은 정적이고 온화하고 절도를 중히 여기고 조화를 사랑하는데 있다. 헬레니즘이 이성적 과학적 미적인데 비해서 헤브라이즘은 의지적 윤리적 신중심적 인생관 세계관이고 그 특색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스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알아 내기는 사료의 제약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유대인의 편협한 선민 사상도 부정하고 하나니의 사랑과 공정을 믿었고, 그것을 유대교의 전통적 문화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보면 변경지인 북쪽 갈릴레아를 거점으로 해서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포에게 전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면으로는 유대교를 모태로 해서 그것을 계승하고 다른 면으로는 그것을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유럽인이 받아들인 헤브라이즘은 신약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인 것이다.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인이 고전 고대의 세계로 침입하여 이른바 헬레니즘,헤브라이즘,게르마니즘의 융합이 시작되고 역사의 담당자가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인으로 바뀌고,그와 함께 무대도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역사 개체로서의 유럽이 형성된다.

 

 

 

 

 

 

 

 

 

 

 

 

고대성경 사해사본들과 역본들

 

 

[맛소라 사본]

현재 남아 있는 히브리어 성서 코덱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 카이로 예언서'이다. 이것은 895년에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에서 모세스 벤 아셰르가 쓰고 모음 기호를 붙였다. 그다음으로 오래 된 것은 레닌그라드 코덱스인 '후기 예언서'(916경)이다. 벤 아셰르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모음 기호가 티베리아 마소라 체제를 따른 것이다. 그다음의 것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 알렙포 코덱스'이다. 솔로몬 벤 부야가 썼고,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가 교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마소라 주기를 붙인 것으로서, 9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이 사본은 [구약성서]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으나 모세5경과 성문서 부분이 거의 소실되고 예언서 부분만 그대로 남아 있다. 아론 벤 모세스 벤 아셰르의 체제를 따르는 또다른 두 사본이 있다. 하나는 BM(4445) 사본으로서 모세5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95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다른 하나는 레닌그라드 사본으로서 [구약성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MSB 19a 사본인데, 이것이 완성된 것은 1008년이다. 이밖에도 1105년에 씌어진 예언서 로이클린 코덱스(Codex Reuchliana of the Prophets)가 있다.

 

맛소라 자료들의 대조

 

일찍이(1050 이전) 미샤엘 벤 우지엘이 자신의 책 [키타브 알 훌라프 Kitab alHulaf]에서 벤 아셰르의 맛소라 본문과 벤 납달리의 마소라 본문 사이의 차이를 비교한 바가 있다. 솔로몬 예디다 노르지는 [민하트 샤이 Minhath Shai]로 알려진 본문비평주석에서 방대한 양의 마소라 본문 자료들을 비교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1626년에 완성하여 1742년에 나온 '만투아 성서'(Mantua Bible)에 함께 인쇄되어 나왔다. 벤저민 케니콧은 615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52개의 인쇄본을 수집하여 2권으로 편집했다(1776~80). 조반니 베르나도 데 로르시는 731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300개의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고(1784~88), C.D. 긴스부르크는 70개의 상이한 사본들과 17개의 초기 인쇄본들을 수집하여 4권으로 펴냈다(1908~26).

 

[고대 역본들]

 

성경이 유대인들만의 소유였고 그들이 히브리어만을 사용했을 때에는 번역이 필요없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의 변화로 인해 성경을 원전의 언어로 읽기가 어렵거나 전혀 읽ㅇ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성경의 일부 혹은 전체가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런 필요는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로서는 성경번역이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성경에는 수많은 번역본들이 있다. 전체적이든 부분적이든 20세기 중엽까지 1,500여 종 이상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번역본들 가운데 특히 고대의 역본들은 현존하는 사본들보다 이른 것들이 많이 있어서 사본과 함께 성경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취급되고 있다.

1.아람어 탈굼역

바벨론 포로기 이후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한 다음 당시 히브리어보다 아람어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해설해 주었다. 이같은 구두 해석이 전승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2세기에는 문서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탈굼이라고 하는 아람어 역본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탈굼은 모세 오경, 예언서, 성문서집 등이다. 하지만 아람어 역시 나중에는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히브리어와 같은 운명을 겪는다.

 

탈굼은 히브리성경을 후일 포로 후기시대팔레스타인의 일상용어가 되었던 아람어로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초기에 구전되었다가 히브리성경으로 읽혀졌으며 아람어 번역본에 이르게 되었다. 최초에 기록된 탈굼, 즉 온켈로스의 모세오경이나 요나단의 예언서 등은 그리스도 시대에 기록된 것이다.

 

BC 5,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아람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와 디아스포라(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아람어를 쓰게 되자, 유대인 회당에서는 예배 때 통역자(메투르게만)가 등장하여 예배 때 낭독되는 율법서와 예언서 관련 본문 등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 통역 내용이 일정한 형식으로 굳어졌고 드디어 기록으로 정착되었다.

 

율법서 탈굼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온켈로스의 탈굼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탈굼(Babylonian Targum)이다. 이것은 본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개정되고 크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9세기 직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 다른 여러 종류의 탈굼들을 제치고 독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온켈로스의 탈굼은 문자적인 번역이면서도 랍비들의 주석을 번역에 반영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탈굼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나단의 탈굼이다. 요나단은 14세기경부터 생긴 이름으로서 예루살렘 탈굼(Targum Jerusalem)을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TJ'를 요나단의 탈굼(Targum Jonathan)으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옛 팔레스타인 탈굼(Old Palestinian Targum)과 온켈로스의 초기 번역을 뒤섞은 것이다. 랍비들의 주석·설교·교훈 등이 번역에 많이 첨가되어 있다.

 

사마리아 5경을 번역한 탈굼도 있다. 유대인의 탈굼이 문자적인 번역인 데 비해 이것은 좀 자유스러운 번역이다. 본문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적은 없다. 예언서 탈굼도 본래는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나 바빌로니아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개정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BC 1세기말에서부터 AD 1세기초까지 활동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의 제자 요나단 벤 우지엘의 번역으로 본다. 이것이 엄격한 문자적 번역은 아니지만 온켈로스에 의존한 증거가 많이 나타난다. 성문서의 아람어 역은 모두 5세기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2.그리스어 역본(LXX)

기원전 3세기 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7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이를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은 이 70인역만을 사용하였다.

약자로는 LXX부르며 〈구약성서〉최초의 번역으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최초의 〈구약성서〉 번역본이다. 히브리어 성서 원문을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도록 제작한 것 같다. 언어분석 결과 토라, 즉 모세 5경(처음 5권)은 BC 3세기 중반에, 나머지 부분은 BC 2세기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70'을 뜻하는 라틴어 septuaginta에서 유래한 '70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뽑은 72명의 번역자들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했는데, 그들의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는 후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사실 토라(율법서)와 후대의 번역본은 문체와 용례가 많이 다르다. 예루살렘대제사장 엘레아자르가 문학의 후원자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BC 285~246)의 요청으로 번역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보냈다는 전승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처음 보이는데 별로 신빙성이 없는 자료이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사용한 언어는 주로 그리스어였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예언들을 70인역 본문에서 인용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성서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70인역 사용을 중단했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70인역에 끼어든 필사자의 오류들을 바로잡으려고 시도했는데, 당시 사본에 따라 여러 가지 많은 오류가 있었다. 다른 학자들도 70인역을 좀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히브리어 본문을 참조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대한 고대 라틴어역·콥트어역·에티오피아어역·아르메니아어역·그루지야어역·슬라브어역, 그리고 아랍어역 일부의 주요근거가 된 것은 히브리어 성서가 아니라 바로 70인역이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70인역을 〈구약성서〉 표준역본으로 인정해왔으며, 히에로니무스는 이 역본을 가지고 불가타 〈구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보존한 70인역은 히브리 정경의 모든 책 외에 소(小)예언서들과 몇몇 책들을 구분했으며,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에게는 외경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는 제2정경으로 알려진 부수적인 책들을 덧붙였다. 히브리 정경토라·느비임(예언서)·케투빔(성문서)의 3부분으로 나뉘는 데 비해, 70인역은 율법서·역사서·시가서·예언서의 4부분으로 나뉘며 외경들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오늘날 서방세계 대부분의 성서 역본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구분되었으나 개신교 역본들의 경우에만 외경을 빼거나 따로 묶는다. 70인역의 본문은 몇몇 초기의 사본들에 실려 있지만, 그 사본들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이 가운데 잘 알려진 사본들은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바티칸 사본'(B)과 '시나이 사본'(S), 그리고 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사본'(A)이다. 그밖에도 이전에 제작된 수많은 파피루스 단편들과 후대의 많은 사본들이 있다. 최초의 70인역 인쇄본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對譯聖書)'(1514~22)에 실려 있다.

  

70인역 성서 사본들과 인쇄본 사본

 

편의상 파피루스 사본, 대문자 사본(Capitalletters : Uncials), 필기체 소문자 사본(Cursive script : Minuscules)으로 나뉜다. 파피루스 사본의 수는 수백 개에 이르고, 크기는 다양하며, 70인역이 형성되던 초기에서 7세기 중엽의 것까지 있다. 특히 이집트에서 발견된 [신명기] 파피루스는 기원전의 것이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양피지나 가죽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단편 조각 사본들, 그리고 나할 레베르에서 발견된 그리스도교 형성 초기시대의 두루마리 사본도 중요한 고대 사본들이다. 가장 중요한 파피루스 사본은 구약에 속하는 9권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는 11개의 코덱스로 되어 있는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이다. 이 사본이 만들어진 것은 2~4세기경이다. 그후 300여 년 동안 파피루스 본문들이 급증했고 현재 200여 개의 사본들이 남아 있다.

 

대문자 사본들은 4~10세기에 나온 것들로서 모두 코덱스(책 모양)로 되어 있다. 괄목할 만한 것들로는 4세기의 바티카누스 사본(Codex Vaticanus : [구약성서] 전체), 4세기의 시나이티쿠스 사본(Codex Sinaiticus : [구약성서] 일부),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누스 사본(Codex Alexandrianus)이다. 이 셋은 본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다 포함한 것들이었다. 이밖에도 성서의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사본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예언서를 보여주고 있는 6세기의 마르칼리아누스 사본(Codex Marchalianus)은 값진 것이다.

 

필기체 소문자 사본은 9세기 이후부터 나타난다. 11~16세기에 1,500여 개의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들은 모두 같은 본문을 반영하는 사본들이다.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좋은 본문을 간직한 대문자 사본을 베낀 것일 때에는 가치가 있다. 가장 먼저 인쇄된 70인역은 '콤플루툼 학파 대역성서'1514~17)이다. 이것은 1522년에 비로소 유포되었으므로, 1518년에 베네치아에서 나온 알다인판(版)이 실제로는 맨 처음에 나온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다. 1587년 로마에서 식스투스(교황 식스투스 5세) 판이 나왔고, 19,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 가지 비평적 편집본들이 나왔다.

 

 

3.아퀼라 역본

아퀼라는 소아시아의 폰투스 출신으로 유대교인이 된 사람으로서, 랍비 아키바의 지도를 받으면서 130년경에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극도로 직역을 했다. 전체 역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인용된 부분들과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Hexapla : 6개 언어 대조성서)에 그 단편이 남아 있고, 카이로의 고본 서고에서 나온 재활용 양피지(palimpsests : 한 번 쓴 양피지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에 단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4.테오도루스의 개정본

그리스어 번역본의 2차 교정이 70인역을 개정한 것인지, 아니면 70인역 외에 다른 그리스어 역을 개정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2세기 후반에 테오도루스라는 사람이 개정했다. 히브리어 음역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5.심마쿠스의 역본

2세기말 심마쿠스가 번역했다. 번역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번역은 우수하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히에로니무스가 그의 불가타 역에서 심마쿠스의 번역을 활용하긴 했으나, 오늘날 그의 번역은 '헥사플라'를 통하여 단편만이 알려져 있다.

 

6.오리게네스의 역사플라

여러 가지 상이한 번역판을 갖게 된 3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란이 생겼다. 230~240년경에 카이사리아에서 활동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헥사플라'를 편집했다.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역, 심마쿠스 역, 70인역, 테오도루스의 개정본을 평행으로 편집하여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오리게네스의 주요관심은 70인역이었다. 그는 70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70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의구표(疑句標)를 했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70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70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표를 붙여 놓았다. 의구표란 고사본의 의심스러운 본문이나 재생시킨 본문을 표시하던 단검표(+), 마이너스표(-), 나누기표(÷), 별표(*) 등을 일컫는다.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다.

 

7.콥트어 역본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권 밖으로 퍼져가면서 그곳 언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콥트어 성서이다. 3세기말 4세기초에 번역된 것으로 보이며, 번역 대본은 그리스어 성서이다. 부분적으로는 고대 라틴어 역본과 유사성도 보인다.

 

8.아르메니아 역본

5세기초까지 아르메니아 민족 교회는 그동안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를 함께 사용해왔으나, 성 메스로프(361~439)가 아르메니아어 알파벳을 만들어 아르메니아 민족 문학의 기반을 닦았는데, 이때 성서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었다. 첫 번역은(414경) 시리아 역 페시타(Peshitta)를 대본으로 번역했고, 곧 이어서 개정했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최종적인 공인 번역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여기에도 페시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9.그루지아어 역본

아르메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그루지야어 역본도 메스로프의 번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루지야어 [구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시편]도 5세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지는 않는다. 사본들은 그리스어 역본이나 아르메니아 역본에 근거해 있다.

 

10.에티오피아어 역본

5세기경에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으면서 성서 번역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것은 70인역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3세기의 것이다. 1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는 아랍어 역과 콥트어 역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많은 부분이 히브리어 본문과 일치하고, 70인역 본문과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11.고트어 역본

고트족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로 알려진 지방에서 살았다. 4세기 중엽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던 울필라스가 고트어 알파벳을 발명하여 성서를 번역했다. [구약성서] 번역은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극히 일부 단편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없어졌다. 그리스어 역을 대본으로 번역했다. 고트어로 기록한 문헌이라고는 성서 단편적 사본뿐이다.

 

12.고대 라틴어 역본

2세기 중엽 라틴어 역 [구약성서]가 북아프리카와 갈리아 지방에 유포되고, 3세기 초에는 로마에도 유포된 흔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지에 살며 라틴어를 쓰던 유대인들이 번역한 것을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그리스어 역이다. 고대 라틴어 역본은 '라틴어 옷을 입은 70인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0인역과 관계가 깊다.

 

고대 라틴어 역본에는 오리게네스가 개정하기 이전의 70인역의 상태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본문비평에 있어서 고대 라틴어 역의 비중이 크다. 3세기까지 여러 종류의 라틴어 역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그 번역이 하나의 번역본에서 나온 개정판들인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번역된 것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382년경 교황 다마수스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정리했다.

 

13.불가타 역본

불가타(vulgata)는 라틴어의 '공동번역'이라는 뜻의 editio vulgata에서 유래했다.

 

 

성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

 

불가타 역382년 교황 다마스쿠스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에게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83년경 복음서의 라틴어역 개정판이 나왔다. 그는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역 〈시편〉(갈리아 시편)과 〈욥기〉, 몇몇 다른 책들을 펴냈다. 나중에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성서〉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히브리 성서 원본을 토대로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405년경에 이 작업을 끝마쳤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모든 낱권 성서들을 하나의 겉표지로 묶은 성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책 안에는 보통 〈시편〉을 제외한 히에로니무스의 〈구약성서〉 번역본,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갈리아 시편〉, 〈토비트〉·〈유딧〉·〈복음서 개역본〉 등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신약성서〉는 히에로니무스가 이전의 라틴어 역본에서 취해 약간 고친 듯하다. 또한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하는 〈70인역 성서〉의 일부도 이전의 번역본에서 취하여 포함시켰다.

 

여러 편집인과 교정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불가타 성서'의 여러 개정본을 발행했다. 파리대학교는 13세기에 중요한 판본을 발행했는데, 그것의 1차적 목적은 신학 강의와 토론 때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오래된 인쇄본인 불가타 성서는 모두 파리 판본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가 라틴어 성서로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를 출판하라고 요구했다. 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발행한 이른바 〈클레멘스 불가타 성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성서본문이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1941년에 '성심회' 역본이 번역되었고 현대에 들어와 여러 교정판이 출판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Vellum leaf from an illuminated Medieval Manuscript
Italy; Early 14th Century
Latin Text; Transitional Rotunda Script
23.5 by 17 cm


At this period, the St. Jerome Bible was not transcribed as often as one would expect in the country of its origin and the very land which held the seat of the Roman Church. During the greater part of the 13th century, while the popes were greatly concerned with gaining political power, art was at a low ebb in Italy, and religious manuscripts were comparatively few and far inferior to the work of monastic scribes in Germany, France, and England. But with the great wealth accumulating in Italy during the 14th century through commerce and the Crusades, this country soon surpassed in richness as well as in numbers the manuscript output of all other nationalities.

The rich black lettering of this manuscript is in the transitional rotunda script and is excecuted with skill and beauty. It is supplemented by initial letters in rich ultramarine blue and deep cinnabar (vermilion), which colors are reflected in the ornament of the romanesque capitals. All of these factors combine to indicate that the manuscript was executed in central Italy, possibly at Florence.

 

13.시리아어 역본

시리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시리아 역 성서는 '페시타'(단순한 번역)라고도 알려져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번역은 본래 1세기경에 번역되었던 것 같고,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아베네 지역에 있던 유대인 사회에서 번역하여 사용했던 것 같다. 페시타는 문체도 다양하고 채택한 번역 방법도 다양하다. 모세5경 부분은 마소라 본문과 아주 가깝지만, 다른 부분은 70인역과 가깝다. 맛소라 본문과 가까운 본문은 유대교인들이 번역한 것이고, 70인역과 가까운 본문은 그리스도교 쪽의 개정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5세기 시리아 교회가 네스토리우스파(동시리아)와 야코부스파(서시리아)로 나뉘면서 페시타의본문사도 2갈래로 갈라진다.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사본이 덜 손상되었을 것으로 본다. 6세기초에 마북의 감독 필록세노스가 70인역의 루시아 개정본을 근거로 페시타를 개정했다. 617년에는 헥사플라에 들어 있는 시 리아어 역을 텔라의 주교인 파울루스가 헥사플라 70인역에 근거하여 개정했다. 지금 단편만 남아 있는 팔 레스타인 시리아 역은 에데사 야코부스(708 죽음)가 새롭게 개정한 것이다. 현존하는 페시타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42년에 나온 것이다. 완전한 형태로보존된 4권의 코덱스는 5~12세기 때의 것이다. 아직 비평적편집본은 없으나, 국제구약학회가 준비하고 있다

 

14.아랍어 역본들

최초의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본은 사디아 벤 요세프(892~942)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것으로서 히브리어로 씌어진 아랍어 역본이다. 이 번역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부 알 하산이 이것을 대본으로 모세5경을 번역했으며, 11~12세기에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으로 받아들여졌다. 또다른 아랍어 역 사마리아 5경은 아부 사이드가 13세기에 번역한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다른 여러 번역들 중에 10세기에 야피트 이븐 알리가 번역한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946년 스페인 코르도바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벨라스케스의 아들 이삭이 복음서를 라틴어에서 번역했다. 아랍어 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본으로는 16세기에 번역된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관되어 있다. 19세기의 것으로 파리와 런던에 있는 '대역성서'(Polyglots)에 아랍어 역이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랍어 역 사본들은 히브리어·그리스어·사마리아어·시리아어·콥트어·라틴어 중에서 번역된 것 등이 함께 전해져오기 때문에 번역판들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만큼 아랍어 역은 본문비평 자료로서는 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19, 20세기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번역한 현대 아랍어 역들이 있다.

 

[라틴 역본]

기원후 2세기 말엽부터 유럽 각지에서 라틴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이들을 고대 라틴어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대 라틴어역들은 무절제한 수정과 내용의 와전으로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는 당시의 가장 유능한 성경학자인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오늘날 제롬으로 알려져 있음)에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을 요청하였다. 제롬은 383년 복음서를 시작으로 하여 405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마쳤다. '불가타'(The Vulgata: 공통적인)라고 불리는 제롬의 라틴어 역본은 이후 중세 1,000년 동안 서구세계에서 공인성서로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불가타본 이전에 있었던 라틴어 역본들의 총칭을 편의상 고대 라틴어 역본이라고 한다. 성서가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2세기 말엽 북아프리카로 추정된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하였으나, 구약성서는 헤브라이어 원본이 아니라 그리스어 역본을 토대로 번역하였다. 3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여러 곳에 라틴어 성서가 유포되었다. 고대 라틴어 역본들의 표현 및 문체의 특징은 통속적이고 구어적이다. 이는 비지식층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라틴어 역본들은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해서 후에 성서편찬작업을 한 성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 번역의 종류는 필사본의 수효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불가타본 성서의 형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2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대 라틴어 역본은 오늘날 50여 개의 수사본(手寫本)과 단편들이 전해질 정도로 대단히 많았다. 4세기 말경에 이르러 라틴어역 수사본들이 양산되자, 라틴어 역본은 심각할 정도로 그 순수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자, 라틴 교회 안에서 사용하던 성서를 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성서를 편찬한 사람이 바로 고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 성 히에로니무스였다. 그는 달마티아의 스트리돈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였고, 그리스어와 헤브라이어도 익혔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 그때 그가 맡은 일이 라틴어판 성서를 개정하는 일이었다. 384년 4복음서의 개정판을 완성하였고, 신약성서는 386년경에 개정한 것으로 전해지나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구약성서까지 포함해서 개정판을 완성한 것은 391~405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 방대한 작업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라틴어 성서문헌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그 방법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즉,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구약성서 본래의 언어로 된 헤브라이어본을, 신약성서는 그리스어 필사본 중에서 나은 것들을 새로운 번역의 문헌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고대 라틴어본을 개정한 《시편》을 제외한 모든 구약을 종래의 70인역에 의존하던 것을 지양하고, 히브리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15년간의 노력으로 서방교회70인역을 계승해갈 수 있는 라틴어 성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성서개역작업이 과소평가되었으나, 중세에 이르러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불가타 성서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인수페르 Insuper〉라는 칙령을 통해 라틴 교회의 공식 성서로 선언되었다. 그후 1590년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주관하에 식스투스판 개정본이 나왔으며, 1592년 클레멘스 8세에 의해 다시 개정본이 나오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표준성서로 공인되었다.

 

[중세와 근대 역본]영어역 제외

중세와 근대에 번역된 성경의 수효는 수없이 많다. 더구나 일부 언어(예. 프랑스와 독일어)에서는 상이한 번역본이 수백종에 이른다. 여기에서는 일부 대표적인 유럽어 번역본 성경만을 살펴보겠다. 독일어역 성경은 서고트의 주교 울필라스(Ulfilas)가 고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 시초이지만 게르만어로 된 가장 최초의 성경은 몬제(Monsee)의 프랑크역 마태복음이다(738). 그러나 독일 성경사뿐 아니라 독일 언어사에서도 신기원을 이룩한 것은 루터역 성경이다. 1522년 9월에 신약이, 1534년에 성경 전체가 간행되었는데, 장엄한 어법과 풍부한 어휘로 유명해 독일문학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이 외에 쮜리히위원회에서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쮜리히성경》(1931)과 현대 독일어역 성경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인정받는 《Menge Bibel》(1926)이 있다. 프랑스역 성경으로 최초의 것은 1170년경 발도(P.Waldo)가 추종자들과 함께 번역한 복음서 및 바울서신이다.

 

성경 전체의 번역판은 파리대학에서 출판한 것이 최초의 것이다(1226-50).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번역본은 칼빈의 사촌형 올리베땅(Olivetan)의 작품(1535)인데, 칼빈은 여기에 라틴어 서문과 신약의 서언을 썼다.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성경은 이것을 개정한 것이다. 이 외에 현존하는 네덜란드어 최고의 번역본은 10세기 초에 의역된 시편이고, 완역성경은 무명의 학자들에 의해 1526년에 출판되었다. 이탈리아어 최고의 번역본은 13-14세기의 공관복음서이고 완역성경은 1532년에 출판된 브루치올리(A.Brucioli)의 번역이며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번역성경은 디오다티(G.Diodati)의 작품이다(1607). 약간의 단편이 남아 있는 최초의 헝가리역 성경은 15세기 초 프란치스꼬회 수사인 토마스와 발렌티누스의 작품이고 최초의 완역성경은 멜란히톤의 제자이며 개신교 목사였던 카롤리(G.Karoli)의 번역본인데(1590), 비졸리에서 인쇄되었다고 해서 비졸리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역본]

영국 기독교의 초기에 알려진 유일한 성경은 불가타성경이었다. 앵글로 색슨어로 해설된 성경이야기가 캐드먼(Caedmon, 680사망)에 의해 시 형식으로 출판된 것 외에는 1382년이 되기까지 자국어 성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1. 위클리프 성경

최초의 영역성경은 위클리프불가타성경에서 번역한 《John Wycliffe’s Version》(1382; →위클리프역 성경)으로서, 그는 가톨릭에 반대해 평신도의 손에 성경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번역을 했고 이로 인해 이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2. 틴데일 성경

그 후 틴들이 처음으로 히브리어헬라어에서 직접 번역한 《Tyndale’s Version》(1525-35; →윌리엄 틴들의 역본)이 출판되었는데, 그도 이로 인해 화형을 당했다.

 

3. 커버데일역과 매튜성경

인쇄된 최초의 영역본은 틴들의 조수였던 커버데일의 《Coverdage Version》(윌리엄 틴들의 역본, 1535)이고, 커버데일의 친구 매튜가 틴들역과 커버데일역을 개정해 《Matthew’s Bible》(1537; →매튜성경)을 출간했다.

 

4. 1539~1610년 성경

그 후 크롬웰과 크랜머 대주교가 커버데일에게 부탁해 만든 매튜역 개정판인 《The Great Bible》(1539-1541;→큰 성서)이 나왔는데, 그 규격이 크고 화려해서 붙인 명칭으로 대중에게 인기가 좋았다. 큰 성서와 비슷한 시기에 평신도였던 태버너(R.Taverner)가 번역한 《Taverner Bible》(1539; →태버너성경)이 나왔는데, 그것은 영국에서 인쇄된 최초의 영역성경이었다. 메리여왕의 가톨릭 정책으로 제네바에 피신한 신교도들이 1560년에 《Geneva Bible》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160판을 거듭하면서 인기를 누렸다(→제네바 성서). 큰 성서가 강단에서, 제네바 성경이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있자 이를 절충할 필요가 생겨나 1568년 파커대주교의 지시로 《The Bishop’s Bible》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참여자의 대부분이 주교들이라 붙여진 명칭이다(→비숍스 바이블). 한편 이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 마틴(G.Martin)의 역본으로 《Douai And Rheims Version》(1610)이 출간되었다(→두에이-랭스성경).

 

5. 흠정역 성경
1611년 영역성경의 금자탑이라고 불리는 《The King James Version》이 출간되었다. 이것은 제임스1세의 지시로 큰 성서제네바 성서의 결점을 검토해 전면적으로 개정된 성경으로, 영문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성경은 발행 후 300년간 최고의 성경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언어의 낙후성과 성경사본의 발견으로 인해 개정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English Revised Version》(1885)이 출판되었다(→영어 개역 성서). 한편 이에 협력한 자들이 미국에 알맞게 출판한 것이《American Standard Version》(미국 표준 성서, 1901)인데, 10년이 못되어 개정의 필요가 생겨났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Revised Standard Version》(1952)이 출간되었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KJV)은 1604년 영국왕 제임스 1세가 "전 영국 교회가 하나님 예배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번역을 명령하여 성공회와 청교도 성직자 및 평신 도로 구성된 54명에 의해 1611년 완성되었다. 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10세기 이후 발간 된 각종 영역성경에 입각, 왕과 교회의 권위로써 통일시킨 표준역으로, 내용 면에서도 독 일어의 루터역 성경과 쌍벽을 이루는 명역(名譯)으로 알려져 있다. 장중한 문체, 간결하 고도 힘 있는 표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리듬,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미지 등의 특징으로 인하여‘영어 산문의 가장 숭고한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출판된 이래 수세 기를 경과한 오늘날까지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사랑을 받아왔다.

>> 참고고리 : 킹 제임스 성경의 유래

 

6. 그 밖의 영어 성경

흠정역 이후 17-19세기 동안 새로운 사본의 발견에 자극받아 수많은 번역이 이어졌다. 어져 나왔다. 1870년 영국에서 신교가 초교파적 개역 작업에 착수하여 1881년 신약이 출 판되었는데 영,미 양국에서 첫 해에 300만부나 팔렸고 4년 후 구약이 마저 발간되었다(English Revised Version). 1901년에는 미국에서 이를 일부 수정한 American Standard Version이 출판되었다. 그 후로도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New English Bible, The New American Bible, The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NIV), The Living Bible 등이 발간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New Living Translation(NLT)이 번역, 출판되었다.

 

이 외에 주요한 것으로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한 《The New English Bible》(1970;→새영어성경), 프랑스판을 영어로 번역한 《The Jerusalem Bible》(1974; →예루살렘성경), 가톨릭에서 주관해 불가타를 대본으로 번역한 《The New American Bible》(1974;→새미국성경), 교육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읽도록 번역된 《Today’s English Version》(1976, 일명 Good New American Bible;→오늘의 영어성경), 보수적 입장에서 KJV적 권위를 회복시키려 했던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1978; →새국제성경), 테일러(K.Taylor)의 작품으로 70년대에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면서 또한 물의를 일으킨 《The Living Bible》(1971;→리빙 바이블), 유대교 영어 역본들 등이 있다.

 

 

[프랑스어 역본]

처음으로 프랑스어 완역 성서가 나온 것은 13세기였다. 파리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자들을 동원하여 번역했는데, 그 대본은 라틴어 성서였다. 1487년에는 가톨릭 학자들이 성서를 번역하여 '큰 성서'로 출판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탕으로 알려진 피에르 로베르가 성서를 번역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했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다. La 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

 

1553년 인쇄업자 로베르 에티엔이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의 장절을 구분하여 출판했다. 19세기 후반에 루이 스공이 프랑스어 역 [구약성서](1874)와 [신약성서](1879)를 출판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20세기에는 1956년에 완역된 도미니쿠스 수도회 학자들이 번역한 예루살렘 성서 (La Bible de Jerusalem)와 1971~75년에 나온 공동번역 성서(Traduction Oecumenique de La Bible)가 있다.

 

[독일어 역본]

Martin Luther's German Bible6세기에 고트어로 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있었으며, 8세기에 와서 라틴어 역에서 번역된 [마태오의 복음서]가 바이에른(독일 남부)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9세기에 복음서들의 발췌 번역과 [시편] 번역이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 성서(Augsburg Bible)로 알려진 [구약성서]는 1389~1400년에 나왔다. 최초의 인쇄본 성서인 멘텔 성서(Mentel Bible)가 1466년에 나와 1533년까지 18판이 나왔다.

 

독일에서 성서 번역의 신기원을 이룬 것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역 성서이다.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서 [신약성서]가 나왔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제2판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된 것이다. 뒤이어 나온 [구약성서]는 브레시아 히브리어 성서(Brescia Hebrew Bible : 1494)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터히브리어와 아람어 독해력은 제한된 것이었으나, 그의 번역에는 11~12세기 프랑스의 랍비였던 라시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1534년 루터 역 성서가 완역되었다. 루터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번역을 계속 개정했으며, 1534~46년에 11번이나 개정을 거듭했다. 마지막 판은 그의 사후에 나온 것이다.

 

루터의 번역은 가톨릭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히에로니무스 엠세르의 번역은 불가타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이지만, 루터 역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534년 요한 디텐베르거가 마인츠에서 엠세르의 번역·개정판을 낼 때 재세례파(개신교의 한 분파) 역과 1529년의 취리히 번역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가톨릭의 표준 번역이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그뤼네발트 성서(Gruenewald Bible : 1956년에 7판이 나옴)는 가장 주목할 만한 역본이다.

 

12~13세기에 독일어로 번역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이디시어 역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쇄본으로서는 야콥 벤 이삭 아슈케나지의 [체나 우레나(Tzenah u-Rena : 1616)가 있다. 유대교에서 번역한 최초의 독일어 역 [구약성서]는 모세 멘델손의 번역으로 1780~83년에 나왔다.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지만 히브리어로 쓴 것이다. [구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독일어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역본은 고트홀트 살로몬의 역본이다(1837). 마르틴 부버와 프란츠 로젠바이크가 히브리어 문체의 특성을 살린 번역을 했다(1925). 최근의 역본으로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Die Bibel Einheitsubersetzung : 1980), 현대 독일어 성서(Die Bibel im heutigen Deutsch : 1982), 공동번역 성서에 프랑스어 예루살렘 성서의 해설을 함께 단 새 예루살렘 성서(Neue Jerusalemer Bibel : 1985)가 있다.

 

 

 

 

 

 

[중국어 역본]

중국어 성경중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7세기에 경교(景敎 Nestorianism)가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3세기에 가톨릭이, 19세기에 개신교가 들어갔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은 개신교가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10년에 선교사 마르시만이 [마태복음서]를 번역했다. 1822년에는 [구약성서]·[신약성서]가 간행되었다.

 

중국어 성서의 대표적인 두 역본은 대표역본(Delegates Version : 1854)과 화합역본(和合譯本 Union Version)이다. 대표역본은 '하나님'을 '신'(神)으로 표기한 '신판'(神版)과 '상제'(上帝)로 표기한 '상제판'(上帝版)으로 출판되었다. 화합역본은 중국의 표준 역본으로서 1891년에 시작하여 1919년에 완료된 것으로서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의 역본으로는 홍콩 성서공회에서 간행된 현대중문역본(現代中文譯本 Todays Chinese Version : 1979)이 있다.

 

[일본어 역본]

일본어 성경최초의 번역은 귀츨라프의 [요한의 복음서]를 번역한 것이다(1837). 1880년에 [신약성서]가 번역되고 1888년에 [구약성서]가 번역되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역[明治譯]이다. 1917년에 [신약성서] 개정판이 나왔으며, 1954년에는 메이지 역에 이어 2번째로 완역 성서가 나왔다. 이것은 구어(口語)로 개정되어 나온 성서로서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인다. 1970년에 기존 역본을 개정한 신개역이 나오고, 1978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신약이 나왔고, 1987년에는 신공동번역 성서가 나왔다.

 

 

 

 

[한국어 역본] 한글성경

 

성경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832년 네덜란드 선교사 귀츨라프 선교사를 통해서이다. 그는 얼마동안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그 후에 1865년 토마스 목사는 황해도 해안지방에서 대동강을 따라 평양 근처에서 순교하기까지 한문성경을 전해 주었다.


이수정 서상륜우리말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것은 중국에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이다. 당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에 들어오지 못한 로스 목사는 만주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만난 서상륜에게 한글을 배우며 함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 그 때 서상륜 이외에도 이응찬, 백홍준 두 사람이 협조, 1882년 말에 최초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이 누가복음이었다. 로스 목사는 같은 선교회에서 파송한 매킨타 예수셩교젼서(1887년) 예수셩교젼서(1887년)이어와 합작, 1887년에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신약을 완역하였다.


한편 1883년 4월 일본에서는 미국성서공회가 한문으로 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와 사도행전에 이두로 토를 달아 3천부를 인쇄했는데, 토를 다는 작업을 맡았던 관비 유학생 이수정이 1884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그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00년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완역하였다. 이를 다시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 신약을 개정하였는데, 1938년에 개정한 성경은 1956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개역성경(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을 발간하였으며, 1998년 개역 개정판이 나왔다. 이외에도 1977년 가톨릭과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이, 1985년 현대인의 성경, 1993년 표준새번역 등이 있다.

   

 

1. 개역 성경이 나오기까지


성경젼서(1911년)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성경은 피터스(A. A. Pieters)가 번역한 '시편촬요'이다. 그 후 1882년에는 존 로스누가복음을 번역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해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성경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들은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1900년에 신약을 모두 번역했고, 1911년에는 구약을 모두 번역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신구약 성경'이 출판되었는데, 이 성경은 1938년에 다시 한 번 개역이 되었다. 이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 성경'의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 이 성경은 '한글 맞춤법 표기'에 맞추어서 다시 한 번 부분적으로 개정이 되었다.
개역성경은 1911년에 번역 출간된 「셩경젼셔」를 두 차례에 걸쳐서 크게 개정한 것이다. 1차로 개역된 성경은 1938년에 출간된 「셩경 개역」이다. 1938년의 「개역」과 구별하여 1911년의 「셩경젼셔」를 「옛 번역」 또는 「구역」이라고 부른다.

 

 

  1)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이것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표기를 고치고 더 손질하여 출판한 첫 판이 1952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다. '한글판'이라는 이름은 '국한문판'과 구별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기를 「셩경 개역」에서 쓰던 옛 철자법을 버리고,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철자법에 따랐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그 후 번역 내용과 표기법을 더 손질하여 출간한 개정의 결정판이 1961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표제지 연도 1956)이다.
구약은 1911년부터 1937년까지 26년 동안 개역 작업을 하였고, 신약은 1926년에 시작하여 1937년에 끝마쳐 12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2) 개역 성경 개정판
        각 교단이 표준 새번역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사용하기를 꺼리게 되자, 대한성서공회는 내용을 더욱 보완해서 2000년에 "개역성경 개정판"을 내놓았다. 그 후에도 여러 교단들의 지적에 의해 개역 성경 개정판은 수정작업을 거쳤으며, 일부 교단이나 단체에서는 이 성경을 공인 성경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교단들은 이 성경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2. 공동번역
그러나 개역 성경은 원어 성경이 아닌 영어성경(흠정역)과 한문 성경을 기초로 해서 번역되었고, 자국인이 아닌 외국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1968년에 대한성서공회는 레닌그라드 비평 자료인 BHK를 기초로 해서 천주교와 공동으로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대한성서공회는 1971년에 신약을 완역하였으며, 1977년에는 구약과 외경을 완역하여 "공동 번역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개신교와 가톨릭(가톨릭은 자체 번역한 새 성경을 사용한다.)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성경이 되었으며 북한성경은 공동번역을 북한단어로 수정하여 출판하였다.


3. 현대인의 성경
현대인의성경대한성서공회에서 카톨릭과 개신교 공동으로 공동번역을 내 놓았지만, 외경 문제로 인해 개신교 내에 전혀 수용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생명의 말씀사에서 개신교인을 위해서 현대어로 된 번역 성경을 만든 것이 바로 '현대인의 성경"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1977년에 신약이, 그리고 1985년에 신구약 완역본이 나왔다.

현대인의 성경은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주로 영어판 성경인 Living Bible에서 번역을 했다. 이 성경은 히브리어헬라어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역성경을 대체하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번역진들이 이 성경을 번역한 것은 기존의 개역 성경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어로 된 개역 성경을 현대어로 알기 쉽게 번역하여 개역 성경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번역자들은 개역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을 함께 사용하여 어려운 개역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 이 성경은 개신교인들에게 새롭고 쉬운 한글성경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Living Bible은 많은 영어 번역 성경 중에서 가장 풀어쓰기(의역)를 한 성경이며 가장 읽기 쉬운 성경으로 꼽히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이 이러한 Living Bible을 번역했기 때문에 주요 번역 원칙이나 특징은 Living Bible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4. 현대어 성경
현대인의 성경이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에서 번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에 성서교재 간행사에서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을 근거로 해서 현대어 성경을 출간했다. 신약은 1978년에 출간되었고, 신구약 완역은 1991년에 출간되었다.

현대어 성경은 번역을 위한 원전으로 히브리어헬라어 원문 성경을 사용했다. 그리고 번역원칙은 현대인의 성경과 같이 Living Bible과 같은 쉬운 풀어쓰기(의역)를 따랐다. 현대어 성경은 현대인의 성경과 같이 고어로 된 성경을 현대어로 쉽게 번역을 하는 동시에, 히브리어헬라어 성경을 참고해서 번역함으로 그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했다. 현대어 성경은 성도들이 쉽게 이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원문의 내용이 모호한 부분은 권위있는 주석을 참고해서 성도들이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성경의 번역자들은 현대어 성경을 만들면서 '주석을 바탕으로 풀어 옮긴 성경', 그리고 '주석의 도움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만들려고 했다.

5. 표준새번역
1983년 번역에 착수하여 1993년에 출판한 새 번역이다. 개역 성서의 개정이 아닌 새로운 번역이다. 현대 한국어, 쉬운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어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한 다음에 한국어의 어법에 맞게 표현하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예배와 교육에 적합한 번역이 되도록 했으며, 고유명사의 음역은 개역 성서를 따르고, 한국교회가 중요하게 여기고 써온 용어는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서 번역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네 글자 YHWH를 '여호와'라고 번역하지 않고, 맛소라 본문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2,000년의 번역 전통을 따라 '주'(主)로 번역했다. 

6. 북한 성경(1990)

 

7. 쉬운성경(2001)

    아가페 출판사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쉬운 구어체로 원문에서 번역하여 그림과 함께 발행한 성경이다.


8. 우리말 성경(2004, 두란노)

 

9. 새 성경(2005, 가톨릭 성경)

 

 [사해사본]

 
  
그리스도교 기원 살아숨쉰다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
구약성경 전승과 본문형성 규명 자료
 
 
   1947년 봄,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 해변가. 한 목동이 잃은 염소를 찾아 나선다.
절벽에 있는 구멍에 혹시나 염소가 빠졌는가 싶어 돌을 던져 염소의 울음소리를 확인한다.
그때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동굴로 들어간 목동은 항아리 안 가죽 두루마리를 발견한다.
 
   이 우연한 ‘찾음’으로 가장 오래된 성경필사본인 ‘사해사본’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사해사본이란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영어를 그대로 풀면 ‘사해 두루마리’. 생소한 말이다.
요약하면, 이스라엘 사해지역에서 발견된 성경필사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1947∼1956년 사해지역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성경사본을 통틀어서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사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 중에서 쿰란(Qumran) 지역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뜻한다.
‘쿰란사본’으로도 불린다. 주로 종교적 학문적 의미로 사해사본이라 하면, 좁은 의미의 쿰란사본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47년 쿰란지역에서 베두인족 목동 무하마드 아드 디브에 의해 첫 동굴이 발견된 후,
56년까지 모두 11개 동굴에서 850여 종류의 사본들이 발견됐는데, 이를 쿰란사본이라 한다.
이 사본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필사된 것들이다.
 
   2000년 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본들이 유다 광야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실을 두고,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부른다. 
제 1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단편들이 대부분이며,
특히 500여 종류가 발견된 제 4 동굴의 사본들이 양과 중요성에 있어 의미가 있다. 
사본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만들어졌고, 대부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졌다.
 
   사해사본의 가치
 
   ‘사해사본’은 현존하는 성경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역사학적으로, 알렙포 사본(925년 경 기록), 레닌그라드 사본(1008년 기록) 보다 1000년 이상 오래된 성경 본문을 보여준다.
 
   쿰란에서 발견된 850여 사해사본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215여 종류의 구약성경 사본.
두 번째로, 구약성경의 다양한 외경 사본과 마지막으로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룬 이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공동체 생활조직, 사상 등을 적은 쿰란-에세네파 사본이다.
 
   특히 구약성경 사본들은 성경의 전승과 본문 형성의 역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구약성경의 정경들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소라 본문’, ‘사마리아 오경’, ‘칠십인역’ 등 여러 다른 본문들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쿰란공동체 고유 방식으로 필사한 것도 있어 비교연구에 도움이 된다.
 
   또 성경 사본 외 나머지 사본들은 예수 그리스도 활동시기였던 기원후 1세기, 당시 팔레스티나 유다이즘 연구의 직접적 문헌으로서 가치가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 쿰란에서 발견된 구약성경 사본 수
 
   모세오경 : 창세기(19), 탈출기(17), 레위기(13), 민수기(8), 신명기(33)
   예언서 : 여호수아기(2), 판관기(3), 사무엘기(4), 열왕기(3), 이사야서(21), 예레미야서(6), 에제키엘서(6), 다니엘서(8), 열두 예언자(8)
   성문서집 : 역대기(1) 에즈라-느헤미야기(1), 시편(34), 욥기(4), 잠언(3), 룻기(4), 아가(4), 코헬렛(2), 애가(4), 집회서(1), 토빗기(5), 예레미아의 편지(1)
 
   에스테르기를 제외한 오늘날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모든 책들의 사본이 발견됐는데, 특히 시편, 신명기, 이사야서 사본이 상대적으로 많이 발견됐다. 현재 ‘쿰란사본’ 공식판은 옥스퍼드대학교 출판사의 ‘DJD’(Discoveries in the Judaean Desert) 시리즈를 통해 39권까지 발표됐다.
 
 
“초기 교회공동체 당시 유다이즘 연구에 중요”
◎ 사해사본 연구 대구가대 송창현 신부
 
   “사해사본은 구약성경 시대 문헌의 발견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어떻게 전승되고, 본문이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한 신약성경의 연구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중요합니다.”
 
   ‘사해사본’ 연구학자인 송창현 신부(대구가톨릭대 신학과 성서학 교수)는 “특히 사해사본은 구약과 신약 사이를 잇는 것으로 바빌론 유배 이후 제 2차 성전시대의 유다이즘 연구에 직접적 자료가 된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했던 기원후 1세기, 초기 교회공동체가 태동했던 동시대에 살았던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이 만든 사본입니다. 그들의 조직과 가치관, 신앙관 등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 활동 당시의 배경이 되는 사상, 역사, 문화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배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하고,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송신부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동시대 팔레스티나인들의 의식과 비교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올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다음달 5일부터 2008년 6월 4일까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전시와 관련 세미나는 국내에서 사해사본에 대한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도 사해사본, 쿰란공동체 등에 대한 여러 책들이 번역 출간됐지만, 종교적 가치보다 화제성에 초점을 맞춘 내용도 적지 않다.
이 부분에서 송신부는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학설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과도한 상상력에 의한 것은 순간적일 뿐 오래가지 못합니다.
학문적 객관적 연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돼야 할 것입니다.”
 
   사해사본 전시를 앞두고 송신부는 “실제로 수 천 년 전에 쓰여진 사본들을 보면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송창현 신부는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공부했으며, 로마 성서 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고,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서 및 고고학 연구소에서 ‘쿰란 사본의 메시아 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사해사본, 제2차 성전시기의 문헌, 역사적 예수 등이다.
 
[가톨릭신문, 2007년 11월 25일, 박경희 기자]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전시품 소개 
  
● 사해사본 회중규칙서 ‘1Q sa’ 
회중규칙서는 공동체 규칙서의 두 개 부록 중 하나다.
회중규칙서는 마지막 날에 등장할 두 메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메시아 규칙서(Messianic Rule)라고도 불린다.
히브리어로 적혀있으며 기원전 1세기 전반부에 필사되었다.
현재 요르단 문화재 관리국이 소장하고 있다.
 
● 성묘성당(주의 무덤 성당)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한 장소와 예수의 무덤을 둘러싼 위치에 세워진 성묘성당 내부 모습이다.
 
● 물고기 모양 등잔 
물고기 모양의 등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 중 하나인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ΙΧΘΥΣ인데,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글의 첫 글자들을 모아놓은 것과 같다. 
 
● 쿰란 항아리 
1947년 베두인 목동들이 사해사본을 발견했을 당시 사본이 담겨있던 항아리이다.
접시모양의 뚜껑과 함께 몸체가 긴 이 항아리는 ‘쿰란공동체’가 거주했던 곳인 ‘쿰란’ 유적지와 사본이 발견된 동굴에서만 발견되었다.
 
● 마다바지도 
요르단의 마다바에서 발견된 비잔틴 시대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자이크 성지 지도이다.
크기는 가로 16m와 세로 6m로 전시회에서 실물 그대로 복원된다.
세계적 고대 문화유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된 마다바는 3500년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 유로기아 토큰 
비잔틴 시대의 상징적 유물이다. 당시에는 모든 일상적인 생활 물건에 대부분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특히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가 그려진 장면은 토큰과 병에 많이 장식되어 순례자들에게 보급됐다.
 
● 청동등잔과 등대 
청동으로 만들어진 등잔과 등대로 십자가가 장식돼 있다.
예수 이전의 유물에서도 발견됐지만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구속을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금세기 중엽에 그노시스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및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 각각 극히 중요한 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즉,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 일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1945년 이었다고 한다)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투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투인들이 가지고 온 출저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종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전장 7.34미터,폭 평균 26센티미터,

각 난은 평균 30행.이사야 66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시게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 등에 기록되어 있다. 

 

 

2.<쿰란 사본들> 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

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단편,<시편>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축복기도문>,<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3.<쿰란의 폐허>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이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4. <사해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 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 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5. 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역사서는 연대를 표시하는데 서혁 기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원1년으로 하고 그 이전을 기원전 (BC.Before Crist)로표시하고, 그 이후를 기원후(AD.Anno Domini)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남러시아의 스키티아 지방에서 출생한 6세기 로마의 수도이사이며 연대사가인 죠니 시우스,엑시구스(497년경-550년경)가 525년에 로마 교황의 명령을 받고 <부활절>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탄생 기원을 채용하여 확립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754년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 기원법은 9세기가 되어 프랑스 왕국 카로링왕조 제2대 왕 칼 대제(742-814)시대에 다른 기원법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두게 된 이후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년표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전 4년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 서력 기원법의 전체 체계는 기원전에 관해서는 4년을 빼고 기원후에 관해서는 4년을 가해야 한다. 그 근거는 차치하고 실제로 예수가 탄생한 것은 후일의 연구에 의하여 기원전 6년경에서 기원전 4년경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오랜 습관대로 이것을 편의상 그대로 상요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동시대의 다른 인물에 비해서 비교적 정확한 편이지만,예수의 탄생에 관한 사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과학적 검토에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연대의 연대학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1절이하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 왕 때(BC 3-74)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했으며 헤롯왕의 유아 학살의 명령을 피해서 이집트로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누가복음에도 로마황제 어거스투스 시대(BC 27-AD14)에 전 로마 제국의 인구조사 칙령이 있어서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9킬로미터에 있는 도시이며 다윗왕과 관계가 깊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가 아니라,예수가 다윗의 호순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다윗과 인연이 있는 베들레헴이 예수의 탄생지로 전해졌다고 한다. 마가복음 12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 자신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또 예수의 생애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또 예수의 탄생지는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거의 중간에 있는 갈리리아의 도시나사렛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사렛은 예수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도시였다.


아무튼 마태,누가 양 복음서의 탄생 기록은 예수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이 그 만년에 로마 황제의 신뢰를 잃고 그 결과로 헤롯은 광기가 들어서 많은 육친까지도 살해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그것은 구약성서 위경의 모세의 승천 6장 이하에도 나타나있다. 누가복음의 탄생 설화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모두 헤롯왕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클레니오(로마의 귀족 스루피큐스.퀴리노)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에 한것보다 이전의 국세조사>때였다고 한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프라비우스.요세퍼스(37년경-100년 이후)의 <유대 고대사>나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5장 37절 등에 의하면 클레니오가 유대에서 인구조사를 한것은 기원 6년이다. 아마 이 인구조사는 몇년에 한번씩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칼타고 태생의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로 유명한 텔트아누스(160년경-220년이 이후)의 <마르키온에 대한 반론>4-16에 의하면 사르투르니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BC 9-6)에 인구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4세기의 로마 역사가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340/360년경-?)에 의하면 어거스투스가 동시대인 헤롯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2세 이하의 남아를 모두 학살한 것을 엄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마크로비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평화 정책을 써서 각지의 신망을 얻고 로마 황제 어거스투스(그는 헤롯왕가의 유대인에게도 우호적이었다고 한다)시대와 헤롯왕 시대에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의 활동의 시작은 30세경이며,그는 그 만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30년경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지방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에 의하여 극형,즉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이 해부터 역산하면 예수의 탄생은 기원 전후가 된다.
한편 헤롯은 기원전 4년의 과월절 전에 요르단강 하류의 서쪽 여리고에서 죽은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후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해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6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라고 추정된다.


인간 예수의 짧은 생애는 그 죽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 =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원시 그리스도교단 안에서 형성된 전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삼일만에 부활했음을 전하고 있다. 

 

 

6.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각 복음서에 의해서 묘사돼 있는 예수상은 차이가 있으나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예수>란 헤브라이어 인명 예수아 또는 예호수아(여호수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예수스이다. 사도행전 7장 45절,히브리서 4장 8절에는 모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로 기재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야훼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인명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기원 1세기의 프라비우스.요세퍼스나 파피루스 문헌등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많았던 것이다. 골로새서 4장 11절에도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라는 예가 보인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는 <예수.바라바>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도>또는 하리스토스>라고도 표기된다>란 그리스어의 동사 크리오 chrio(<기름 붓다>란 뜻)에 유래하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이며, 헤브라이어의 마시아하,아람어의 메시하,즉 그리스,라틴어형의 메시아스 Messias에 해당한다(요한복음1장 41절 4장 25절). 

 

기름 특히 향유는 고대에는 귀한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용도는 여러가지였으며, 기름에 유향을 섞어서 태워 향기 예물로 바치거나(레위기 6장 15절),기름은 번영의 표시이며(신명기 8장 8절,예레미야서 31장12절),귀중한 상품으로 수출됐다(느헤미야기 5장 11절,에즈라기 3장8절),또는 기름은 융성(신명기 33장 24절),기쁨(시편45편 7절,히브리서 1장 9절)의 상징이 되며,기름이 떨어지는 것은 비애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요한계시록 6장 6절). 

 

돌 벼개를 벤 야곱은 천사의 꿈을 꾸고 깨어서 그 돌을 세워서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창세기 28장 18절,이것은 가나안 종교의 특징의 하나인 신성한 돌을 숭배하는 흔적이다), 사울,다윗 그 아들 솔로몬드 제사장 아론,예언자 엘리사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사야서 45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며, 이방 페르샤의 왕 큐로스가 구약성서에서는 왕의 칭호인 <메시아>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큐로스가 유대인을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며 이 호칭이 당시 일반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 명사였으며 복수형도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도.예수>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칭호>인 예수 (인명)>라는뜻이다.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예수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목수였던 요셉을 가장으로 하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구약성서를 읽고 주의 사람들에게도 요셉의 아들로 인정받고,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모친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모친>으로 숭배되고 있다. 예수에게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사해 문서는 예수가 태어난 배경을 전해주고 있다. 

 

 

7. 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최대의 유산은 알파벳과 헤브라이즘일 것이다. 전자는 실용적인 유산이며 후자는 정신적인 유산이다. 먼저 알파벳의 정의부터 해보자. 

 

알파벳이란 말의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즉 표음 문자를 가리키며, 이런 글자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된 자모표 이다. 원칙적으로 1장 1음을 표기하는 것이다. 4항에서 말한 것처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우선 글자의 사용 여부로 할 수 있다.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이미 글자가 사용되었다. 즉,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의) 쐐기글자와 이집트의 신성 문자가 그것이다. 양자가 모두 독자적인 표의 문자이며, 각기 극히 복잡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기나 신관 계급등의 독점물로서 신성시되었다. 

 

한편 이러한 서기제도는 대 신전이나 대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 글자들은 처음은 그림 글자에서 발달한 것이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 일부 표음 문자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해서 글자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함께 발달했으나 지금부터 약 2천년전에는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미 기원전 2천년경부터는 가나안인은 쐐기 글자와 신성 문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가나안 글자의 창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원전 1500년 경에 <시나이 그림 글자>가 나오고 이것이 알파벳의 직접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인의 발명한 글자를 페니키아인,아람인,이스라엘인 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서의 무역 활동 상의 필요 때문에 표음화된 이집트 글자를 근거로 해서 독자적인 간략한 표음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지중해를 통해서 그리스.로마로 전달된 알파벳은 유럽인의 글자로서, 즉 라틴 글자의 알파벳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라틴 글자의 알파벳 없이는 유럽 문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에서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처럼 거대한 중앙집권 국가는 성립되지 않았다. 가나안 사회의 중심은 상인층이었다. 그들에게는 왕후나 신관과 같이 서기를 양성할 경제적인 힘은 물론 없었으나 문자를 신성시할 필요도 없고 문자를 오직 실용적인 기호로 바꾸어 사용해갔다. 

 

별표에서 보는 것처럼,첫 글자는 <숫서 머리>를 뜻한다. 숫소는 가나안어로 <알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글자도 <알프>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 <알프>는 <숫소>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순히 <아> (엄밀하게 말하면,<아>를 발음하기 직전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 라고 하는 첫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0세기의 비문에는 이 <숫소의 머리>가 이미 양식화 되어 두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어 있었다. 이 글자가 180도 회전하면 고대 그리스 글자(BC 8세기)의 알파가 되며, 이것을 90도 회전하면 라틴 글자 A가 된다. 둘째 글자는 <집>을 뜻한다. 이것은 가나안어의 <집>을 나타내는 <벳>의 첫 소리 B음을 나타낸다. 이 그림 글자는 기원전 10세기에는 한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고 그것을 180도 회전한 것이 고대 그리스 글자 베타가 되고 그 베타의 윗부분 획이 이어져서 라틴 글자 B가 됐다고 한다. 

 

알파벳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리스.알파멧의 처음 두 글자 알파와 베타에서 나온 것이며, 그 어원은 가나안어의 <숫소의 머리>와 <집>에 유래한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이게서 알파벳을 배우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헤브리어 글자로 발전시킨 것이다. 

 

 

8. 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전항에서 우리는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유산의 하나, 즉 실용적인 유산인 알파벳의 기원을 살펴봤으며 다음은 정신적인 유산인 헤브라이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고나 행동속에서 자라난 것이며,고대 이스라엘인의 유일 인격신 야훼 신앙에 유래하며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되고 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근본 원리로 한다.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문화)과 함께 유럽 정신의 전통을 형성하여 온 2대 사조의 하나이다. 

 

영국의 문예 사회 평론가 머슈.아놀드(1822-1888)가 평론집<교양과 무질서> (1869)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논한 이래, 이 양자가 유럽사상의 2대 원류로서 파악되게 되었다. 보통,헤브라이즘은 인간중심주의의 헬레니즘과 대비해서 논의되는데 그것은 구약성서에 근거한 헤브라이적 사유의 특질을 나타내는 경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트리프.보만(1894-)은 그 저서<그리스도인의 사유와의 비교에 의한 헤버라인의 사유>에서 헤브라이인과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헤브라이인의 사유벙밥의 특색은 동적이고 힘차고 열정적이고 자주 거의 폭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비해서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은 정적이고 온화하고 절도를 중히 여기고 조화를 사랑하는데 있다. 헬레니즘이 이성적 과학적 미적인데 비해서 헤브라이즘은 의지적 윤리적 신중심적 인생관 세계관이고 그 특색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스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알아 내기는 사료의 제약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유대인의 편협한 선민 사상도 부정하고 하나니의 사랑과 공정을 믿었고, 그것을 유대교의 전통적 문화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보면 변경지인 북쪽 갈릴레아를 거점으로 해서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포에게 전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면으로는 유대교를 모태로 해서 그것을 계승하고 다른 면으로는 그것을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유럽인이 받아들인 헤브라이즘은 신약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인 것이다.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인이 고전 고대의 세계로 침입하여 이른바 헬레니즘,헤브라이즘,게르마니즘의 융합이 시작되고 역사의 담당자가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인으로 바뀌고,그와 함께 무대도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역사 개체로서의 유럽이 형성된다.

 

 

 

 

 

 

 

 

 

 

 

 

쿰란문헌(사해사본,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s. Manuscript found at Qumran by The Dead Sea 

 

1947년 쿰란의 한 동굴(Qumran Cave 1)에서 산양을 쫓고 있던 베두인족(유목민) 양치기 소년에 의해 히브리어나 아람어 등으로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850여

개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쿰란문헌(사해문서,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문서로는 에스델서를 제외한 구약성경의 모든책과 일부 주석서, 외경, 공동체 조직과 생활 등과 관련된 여러 문서들이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히브리어텍스트는 거의 전부가 마소라본으로 오래된 것은 서기 9~11세기에 이르는데(유대교 랍비인 벤 아셰르 학파와관련한 A사본,

L사본 등이 있음. 후술), 사해사본기원전 3~2세기로 연대가 추정되는 것으로 현존하는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참고로 이 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BC 150년경으로 연대가 추정되며 신명기7장 11절 이하의 십계명이 실려있는 나쉬Nash 파피루스가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였음).

 

쿰란 사본들은 정경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어 성경 본문의 형성과 전승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데

70인역,사마리아 오경, 마소라본 등과 유사하거나 쿰란공동체 고유 방식으로 필사한 것도 있어 사본군 비교연구에 도움이 된다.

 

한편 쿰란의 두루마리들은 유대교 랍비들에 의한 히브리어 마소라본이

성서 본문을 충실하게 전수하였음을 입증하여 주는데, 이사야서 등은 오늘날 스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서의 본문 비판에 많이 인용되고있다.

기타 란문헌에 대해선 http://blog.daum.net/_blog/

BlogView.do? blogid=0IDRC&articleno=569634&categoryId=102092 참고 

 

Manuscript found at Qumran by The Dead Sea 

 

 

 

70인역(略語 LXX)  Septuaginta, Greek version of

the Old Testament

 

70인역은 유다교 랍비들에 의해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약 100여년에

걸쳐 팔레스티나 外域(디아스포라 지역,diaspora '흩어진')에 살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 공동체를 위하여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최초의 번역본이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살았던 히브리인 아리스테아스 Pseudo-Aristea의 편지에 적힌 전승에 의하면, 이 번역은 BC 3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BC 2세기 말엽에 완료되었으며 유다교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차출하여 72명(이후 70명)의 유다교 율법학자들이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부른다.

 

70인역 번역에 사용한 히브리어 사본은 쿰란 사본이나 마소라본과는 다르며 오늘날 그 사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서기 245년경 그때까지 전해오던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수집하여 집대성한 것이 오늘날 전해온다. (오리게네스는 당시 히브리어 본문, 그리스어로 된 히브리어 본문, 다른 그리스어 번역본 4개, 아퀼라본 심마쿠스본 70인역 테오도시온본 등을 종합하여 6단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분량의 육역대역본을 완성했는데 이중 70인역 이외의것들은 638년 마호메트 교도들의 카이사리아 침공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0인역은 기원전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교 히브리인 공동체의 공식 성경이었으며(P.지로니,약성서 ABC, 바오로딸, P.59),

 

 이미 오래전부터 회당을 선교하는 책이었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매우 깊은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책으간주되었다(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1, 분도출판사, P.102). 70인역엔 약 350여개의 인용구가 신약성경에 인용되어 있으며(상게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 70인역을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였다(H.R.드롭너, 교부학, 분도

출판사, P.82).

 

 70인역에는 서기 70년 제1차 유다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함락 후 얌니아(야브네)로 옮겨간 유대교에서 서기100년경 처음으로 경전목록을 정하며 '계시의 언어'인 히브리어 사본이 없다는 이유로 정경에서 제외한 7권의책이 더 실려 있다(종류는 9권이지만 다니엘서와 에스델서 추가 부분은 별책으로 보지 않는다).

 

한편 유다교와 유대교의 용어 사용과 관련하여, 기원전 '유다교'는 민족국가로서 사두가이, 율사와 바리사이,에세네파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었으나 제1차 독립전쟁에서 패하고 얌니아(70-135년, 135년 이후는 갈릴래아)로 옮겨 간 이후엔 사두가이의 세력은 식민지의 필연적 결과로서 약화되고 에세네파는 거주지를 잃고 사라져버려 결국 율사와 바리사이로 구성된 랍비가 중심이 되어 오늘날까지 줄곧 영향을 미치는 랍비 중심의 '유대교'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하 글에서 유다교와 유대교는 이러한 인식에서 교회사 학자인 에른스트 다스만의분류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함. 이하 사진 아래는 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저) 등에서 70인역에 대해 발췌한 글이다.

 

 

 

70인역 텍스트

 

 

 

 

* 칠십인역(Septuaginta, 略語 LXX). 셉튜아진타Septuaginta란 단어는 70이란 숫자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전통적으로는 현존하는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히브리어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중엽이다. 처음에는 모세오경만 번역되었다.전설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Ptolemaios II Philadelpus, 기원전 285∼247)의 통치기간 중 그리스어에 정통한 72인의 유태인 학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모세오경 이외의 부분은 그 뒤 100여년간에 걸쳐 이뤄졌다. 이러한 번역의 필요성은 당시 유태인들 사이에는히브리어보다도 그리스어가 더 익숙한 구어口語였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BC 6세기 바빌론 유배 이후 히브리어는 이미 구어로서의 자리를 상실하여 BC 20세기부터 사용되어온 아람어가 일상어로서의 구어가 되었고, BC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티나 점령 이후엔 그리스어가 공용어로서 구어가 됨)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70인역을 그들의 성서로 채택할 정도였다. 이외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한필요성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비교적 신빙성이 없다. 70인역에는 히브리어 구약의 정경의 번역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에스델서, 지혜서, 집회서, 유딧서, 토비드서, 바룩서, 예레미야 서신, 마케베오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경에서도 전통적인 마소라 본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70인역의 원문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계보의 자료를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70인역은 마소라 본문비평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또 70인역은 번역문서이기 때문에 원문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유태인의 신학적 윤리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 중요한 70인역의 가치는 (쿰란사본이나 아람어 역본인 타르굼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의공백을 메워주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코이네(Koine)로 표현된 신약의 종교적 어휘는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 아니라 70인역의 헬라어를 매개로하여 구약의 히브리 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현존하는 70인역의 여러 사본(寫本)들은 기원전 3세기경 복잡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집대성하여 비판적으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70인역을 원상태대로 회복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70인역의 자료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해문서라 불리는 쿰란 동굴들의 두루마리에서발견되는 여러 가지 자료들도 70인역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종교학적 가치 외에도 문화사적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크게 평가된다. (가톨릭대사전)

 

 

 

 

 

 

 

* 추가 발췌글. 예수님 역시 이 70인역 성서를 인용하셨고(→이에 대해선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

d1id=6&dir_id=60303&eid=4B+Z4KS1LFb1L43pG4neS56HHG4onO1s 참고하라)

사도들의 복음서나 서간도 이 70인역 성서를 기준으로 복음서 등을 썼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70인역 성서는 당연히 성서인 것이다. 70인역 성서엔 당시 유대교 히브리어 성서에는 없는 7가지 성서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이 공동번역에는 제2경전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 있는 책들이다(→번역시 제2경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정경이면 정경이고 아니면 아닐 것이므로 제2경전이란 용어는 사실상 부적절하다).

 

정경이란 성경 자체를 말한다. 이 성서에 들어가지 않은 성경 비슷한 것을 외경이라 하지만 서기 70년 이후 그리스도를 죽이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율사와 바리사이가 주축이 된 유대교는 당시 계시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된 사본이 없고 그리스 사본에만 있는 7가지 성서를 외경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70인역은 성서이지 성와 비성서가 모아진 책이 아니다.

 

히브리어 사본이든 그리스어 사본이든 주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것(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당연히 성서, 즉 정경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글자로 기록한 것을 성서라 하는데 하느님이신 우리 구세주께서 사용하시고 말씀하신 70인역 성서를 성서가 아니라 주장함은 구세주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라는 주장과도 같다.

 

그런데 예루살렘 대성전이 파괴된 후 이를 재건하기 위하여 얌니아에 모인 유대교의 종교회의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기독교)의 단죄였으며 그리스도교에 흡수된 유대인들을 민족 배반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더욱이 안식일마다 열리는 유대교의 전례(예배)에서 하루 3번씩 고백하는 18개 축복문 중 13번째에는 "야훼여, 예수그리스도와 그 도당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라고 하는 저주가 포함되어 있었다(→오랫동안 원문으로 간주되어 온 카이로의 게니자에서 발견된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배교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으며 불손한 제국은 오늘날 급속히 전멸되고 나자렛파nostrim와 이단자들minim은 당장 파멸하기를. 그들이 생명의책에서 지워지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불손한 이들을 굴복시키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또한 70인역의 성서를 인용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며 전교를 하는 그리스도교를 원천상 막기 위하여 히브리어로 된 성서만 정경이며 그 외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는 성서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중세 종교혁명 때 루터 등이 일어나 분열을 일으켰는데 이들 교회 이탈자들은 자기들의 말을 믿게 하기 위하여 주님과 사도들이 사용한 70인역 성서를 유대교 전통에 따라 성서가 아니라 하며 성서에서 임의로 삭제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도 이 70인역에 의한 성경이 1800년대 초까지 성경목록 안에 들어와 있었다. 물론 이름은 외경이라 하면서.. 그 이후로 유대교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7개의 성서들은 성서 밖으로 추방되었고 오늘에 이른다. 그러다가 공동번역 성서 안에 다시 제2경전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인정하지 않고 신성을 부정하는 유대교라든지, 초대 교회에서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성서에서 나오는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의 일부를 부정하기 위하여 고의로 성경목록에서 성경 일부를 삭제시킨 개신교는 유대교 히브리어 사본만을 정경이라 하고 70인역 사본에만 있는 7권의 성서를 외경이라 하지만 오리지널 그리스도교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당치 않는 짓이다.

 

(참고로 연옥교리와 관련지어 보면, 오직 마음으로 믿으면 천국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므로 마지막 렙톤지 갚아야 한다는 식의 보속이나 정화의 개념은 혁명가의 교설에 들어맞지 않게 되는데, 이에 따라 유대교가 배제한 상기 7권을 성경에서 빼어 버리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유대교와는 성경에서 배척하는 이유가 다른데 실상 연옥 교리는 성경에서뿐 아니라 유다교 및 교회의 역사와 관습인 성전에서 비롯한다. 한편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기도에도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아 주시도록 청하는 내용이 있다)

 

유대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만을 믿는다는 개신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70인역 성서를 외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성서학계에서도 70인역 성서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더욱이 70인역 성서를 외경이 포함되었다 하는 이유로 버린 것에 대하여 대단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음이 작금의 상황이다. (가톨릭 굿뉴스)

 

 

 

 

Septuaginta, Greek version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Hebrew text of the Old Testament

 

사마리아인들이 경전으로 여기는 구약성서 오경을 말한다. 단편들까지 합쳐서 150여개의 두루마리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9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고 대부분은 14~15세기의 것들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꼽히는 것은 세겜의 그리짐산 기슭에 위치한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아론의 증손자 이름을 붙여 아비샤 두루마리라고 불린다.

 

사마리아 오경은 기원전 108년에 하스모네 왕조의 히르카누스 왕이 그리짐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오경과는 신학적 차이를 반영하는 독자적 경전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마리아 오경만의 독특한 히브리어 서체가 쿰란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경에 기록된 소위 고어체 히브리어 두루마리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당시부터 사마리아 오경이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오경은 약 1,900군데에서 마소라본보다는 70인역과 유사한 면을 보여 많은 학자들은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이 같은 히브리어 성서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마리아 오경은 마소라본과 주로 철자 등에서 6천여 곳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복수형인 엘로힘대신 단수형 엘라를 사용하거나 야훼를 의인화한 표현들을 고치는 등 절대적 유일신론을 더욱 강조하였고,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이 언급된 구절들을 의도적으로 고쳤으며, 하느님이 지정한 거룩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세겜의 그리짐산이라고 한 점이다. 특별히 이 마지막 부분에서 출애굽기 20, 17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끝부분에 그리짐산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별도의 규정을 첨가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등)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Hebrew text

 

 

사마리아인들

 

 

 

사마리아 알파벳

 

  

불가타본  Vulgata, Latin Version

 

불가타본은 서기 391년부터 406년까지 성 예로니모 Hieronymus Sophronius(히에로니무스 또는 제롬으로도 불림, 아래 참고)에 의해 구약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신약은 서기 2세기 이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던 고대 라틴어 역본을 그리스어 원문과 대조 수정하여 완성한 라틴어(고대 로마어) 성경을 말한다.

 

이때 구약 중에서도 시편을 포함한 6권은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라틴어 역본이 낫다고 여겨 히브리 본문과 대조하며 수정하는데 그쳤는데, 이 고대 라틴어 역본은 몇 권이나 되는지 오늘날 알 수는 없지만 불가타본 작업 이전에 70인역(구약)과 그리스어 원문(신약)에서 이미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던 단행본들을 통칭한다(최근 독일 보이론의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고대 라틴어본의 비판본을 출판 중이라고 함).

 

불가타는 대중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 명칭이 붙여진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인데 번역이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당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불가타본은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에서 법적인 정통성 및 신뢰성을 공인 받았는데 다만 미흡한 부분에 대해선 위원회를 구성하여 식스토판과 식스토-클레멘스판이 1590년대에 출간되었다.

 

이후 1907년에는 성 예로니모의 원래 텍스트를 복원하기 위하여 이를 위해 베네닉토 수도원을 건립하여 25권으로 된 베네딕토 수정판 불가타본을 1987년에 완성하였고, 1965년에는 교황청 위원회에 의해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본문과 대조하여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다듬은 네오 불가타본이 1979년에 완성되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반포되었다. 오늘날 가톨릭 라틴교회에서 공식 경전으로서 라틴어 전례와 공식문서에 활용되는 불가타본은 이 네오 불가타본이다.

 

 

 

 

 

Vulgata Text

 

 

Vulgata, Sixto-Clementina 

 

* 성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 제롬Jerome, 예로니무스. 347-419년. 사제 교회학자 성서학자). 달마티아의 아퀼레이아 근처 스트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12세 때 로마에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하였고, 373년에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성서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하였으며, 그 후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생활을 하면서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다. 379년에 일정한 사목직을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382년에 로마로 왔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구약성서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헬비디우스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교황 서거후 386년 여름부터는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서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당시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반박글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 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406년까지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토Trento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마도 라틴 교부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성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으로 꼽힌다. (가톨릭대사전)

 

 

성 예로니모 Hieronymus, Jerome

 

 

 

마소라본  Masoretic Text of the Old Testament (MT)

 

오늘날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히브리어 텍스트는 거의 전부(수천 개)가 마소라본이며 이중 오래된 것은 서기 9-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헌이다(→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는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해사본이며, 사해사본 발견 이전에는 BC 150년경으로 연대가 추정되는 나쉬Nash 파피루스).

 

이 히브리어 본문들은 마소레티 Masoreti들의 인내로운 작업의 소산인 바, 그들은  갈릴래아 도시 티베리아 학파에 속하는 전문가 랍비들로서(→앞서 언급했듯이 율사와 바리사이로 구성된 유대교 랍비들은 제1차 독립전쟁이 있던 서기 70년 이후 예루살렘에서 얌니아로 옮겨가 유대교를 재건했으며, 제2차 독립전쟁이 있던 서기 132-135년 이후 다시 얌니아에서 갈릴래아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갈릴래아 지방에서도 처음엔 우사에서 벳셰아림으로, 세포리스로, 마지막 티베리아로 옮겨갔음)

 

그들은 서기 6세기부터 9세기 사이에 당시까지 구전으로 전해오거나 수사본으로 되어 있던 성경 텍스트들을 모아 작업하였다. 즉 문자 기록을 확정하고 단어의 모음표기 확정하였으며(그때까지 히브리어는 자음체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타 악센트의 위치라든지 중자음의 설정 등 여타 특정한 수정을 함으로써,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거나 수사본으로 확정되어 있던 구약성서 텍스트 전체가 갖추어졌다.

 

마소레티는 오늘날에도 히브리어 성서에 그 이름을 남겨 학계에서는 이들이 작업한 구약성경 본문을 마소라본 Masoretic Text이라고 부른다. 이 텍스트를 작성함에 있어 마소레티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랍비 학파 가운데 하나인 벤 아셰르 Ben Asher의 서방 학파에서 도움을 받았는데, 이 학파에서 작업한 오경과 예언서가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온다(→이들 텍스트는 쿰란사본 발견 이전에는 나쉬 파피루스 이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로서 의의가 있었으나 오늘날은 단지 마소라본의 기초문헌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이중 오경은 학자에 따라 서기 820-95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예언서는 895년 집필된 것으로 알렙포의 스페인계 회당에 보존되어 왔으나 지금은 카이로에 소장되어 있다(카이로 예언서라고도 하는 듯함).

이것들의 보다 완전한 텍스트는 서기 950년경으로 소급되는 아아론 벤 아셰르Aaron Ben Asher의 텍스트인데 학계에서는 이를 A사본이라고도 부르며 현재 이스라엘에 있다. 한편 파울 칼레Paul Kahle는 이 텍스트의 다른 사본 하나를 레닌그라드에서 발견했는데 이사본은 서기 10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레닌그라드 사본(L사본)이라고 부른다.

 

칼레는 이 L사본에 현대적 사료 비판을 가하였고 그것이 1927년부터 1937년 사이에 만들어진 키텔 Rudolph Kittel의 히브리어 성서 Biblia Hebraica이다(→제3판까지 나왔는데 이중 L사본에 기초하여 1937년에 간행된 3판이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대본). 칼레와 키텔의 히브리어 성서가 나오기 전 모든 히브리어 성서는 야콥 벤카임 Jacob Ben Chayyin에 의해 편집되어 1524-1525년에 베니스에서 봄베르그 Bomberg에 의해 출판된 간행본을 따라왔다.

 

오늘날은 1947년 쿰란 유적의 발굴이 있고 난 다음이라서 히브리어 성서의 보다 완전한 간행본이 있는데 스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서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 K.Elliger - W.Rudolph eds., Stuttgart 1967-1977; 일명 BHS)가 그것이다(→새로 번역된 가톨릭 공용 성경의 히브리말 부분의 번역대본). 이 간행본은 키텔본을 기본 텍스트로 유지하면서 쿰란에서 발견된 수사본(특히 이사야서의 중요한 사본들)을 반영하여 본문비판 측면에서 훨씬 가치가 있으며, 키텔의 히브리어 성서 3판에서와 같이 판면 하단에 본문 비평 각주가 덧붙여져 있다.

 

 

 

Masoretic Text of Old Testament

 

 

 

 

 

 

  

신약 사본

 

신약에 관한 한 사본 논의는 구약보다 훨씬 복잡하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원본은 전해져 오지 않으며 필사자들의 인내롭고도 고마운 작업을 통해 전수된 사본寫本을 가진 것이 고작이다. 필사자들의 작업은 엄청나게 많은 그리스어 수사본手寫本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현재 파피루스 80편, 대문자 사본 268편, 소문자 사본 2792편, 전례용 텍스트를 담은 독서경본 2193권이 전해온다.

 

이 사본codex들은 간행본 작업을 위해 사본마다특정한 기호로 표시되었는데 이중 중요한 것으로 신약 전체를 담고 있는 시나이 사본(S사본), 히브리서 9,14까지 담고 있는 바티칸 사본(B사본), 기타 알렉산드리아본(A사본) 등이 있다. 이들 문헌들은 서기 120-124년에 필사된 요한복음서의 존 라일랜드 파피루스Papyrus JohnRylands 단편(요한 18,31-33 및 37-38이 실린 P52 사본, 아래 사진)처럼 요한복음이 쓰인지 약 30여년 밖에지나지 않은 시기에 필사되어 원전과 시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작품도 있지만 이런 필사본은 드물고 대부분 최초의 원본이 기록된 시기와 적지 않은 시간차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원전과 긴 시간차를 보이고 어느 수사본도 신약 27권을 빠짐없이 다 수록하고 있지 않으며 또 그중의 어느 한 권도 다른 사본에 비해서 이문異文(Variantes; 여러 텍스트들사이의 차이를 말함. 혹자의 계산에 의하면 신약의 모든 어휘가 15만 단어인데 그 이문들은 무려 25만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이문들이 나오는 것은 교리상의 문제라기보다 텍스트의 필사와 전승의 오류 때문이라고 함)이 없지 아니하므로 학자들은 최초의 저술가의 붓끝에서 나온 그대로 본문을 복원(해독, 번역, 수정)하기 위해 참으로 주의 깊고 면밀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다.

 

학자들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필사자의 실수에 의한 이문들을 수정하는 일인데, 이때 실수에는 i요타와 h에타의 첨삭 같은 그리스어 발음상의 오류, 동어이월同語移越 같은 시각상의 오류, 눈으로 보고 기억해서 옮기는 과정에서 나오는 기억상의 오류, 고의적인 수정이나 교리적 수정에 의한 오류 등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입수하는 비판본(여러 수사본들을 대조 수정하여 만들어 낸 간행본을 말함)들은 이런 사정들을 염두에 두고 복원 작업을 한 것이며, 본문 여백에 소위 텍스트 비판란(본문비평 각주, apparatus criticus)을 두어 이문들 가운데서 그 표현을 선택한 기준을 제시하고 중요한 수사본들 사이에 있는 텍스트의 전승 상태나 이문, 상이등을 알려 주고 있다.

 

 

Papyrus John Rylands - P52

 

 

Papyrus John Rylands - P957

 

 

 

 

신구약 정경 형성과 외경

 

정경(정전, 경전, 그리스어 Kanon)이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서 신앙인의 삶과 믿음에 규범이 되는 책을 말한다. 서기 2세기 이후 영지주의 같은 이단적 사조들이 등장함에 따라 대략 2세기 중엽에 전통(성전)을 바탕으로 경전 기준을 정하려는 합의가 처음 이루어졌으며(H.R.드롭너, 교부학, 분도출판사, P.77),

 

교회는어떤 책이 신앙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담고 있고 성서로 존경받기에 알맞으며 공개적으로 선포될 수 있는가를 권위로 확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4세기에 이르러서야 27권이 마침내 경전으로 확정되었지만 이러한 과정은 2세기 말에 대략 정해졌으며, 그때까지 경전으로 여긴 책들은 지역 또는 공동체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무라토리 경전은 거의 최종적인 꼴을 갖추고 있는 신약성서 경전 목록을 처음으로 증언한다.

 

이 목록은 정경목록이 유권적으로 결정되기 전인 서기 200년경의 것으로 1740년 루드비코 안토니오 무라토리 L.A.Muratori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신약 27권 가운데 22권이 정경으로 실려 있다. 이후 정경목록은 서기 382년 다마소 교황의 주관으로 열린 로마 교회회의에서 27권으로 결정되는데, 이들 목록이 겔라시아누스 교령Decretum Gelasianum에 실려 있으며 또한 393년 북아프리카 히포레기우스에서 열린 교회회의의 기록도 이를 전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경전이 확정되면서 구약성경의 정경을 결정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유다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앞서 얌니아에서의 유대교 정경이 결정됨으로 인해 구약 정경목록에 대한 상이한 입장과 태도가 있었으나 393년 히포 교회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교회회의는 아우구스티노와 아프리카 교회의 관습을 따라 46권의 구약 정경을 받아들였고(상기 구약성서 ABC) 별다른 이의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16세기 종교혁명 당시 특정 교설(예: 오직 믿음)과 주장에 따라 정경 문제를 포함한 갖가지 신학적 문제가 일어나자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서와 채택된 성전에 관한 교령 Decretum de libris sacris et de traditionibus recipiendis(DH 1501)을 통해 신구약의 정경목록을 과거와 변함없이 재차 확인(새로 승인)한바 있다.

 

한편 교회는 작품의 제목, 내용, 형태에서 신약성경과 관계가 있고 사도적 권위에 알맞지만 경전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모든 작품을 외경Apocriphae이라고 부른다. 많은 외경은 교회의 신학, 경건, 특히 마리아론에 대한 믿을 만한 내용도 싣고 있다. 그러나 외경은 꾸민 이야기들과 이해할 수 없는 기적사화들로 가득 차 있고 전체적으로 경전과 같은 확실성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경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이상 상기 교부학 발췌).

 

외경에관한 현대 비판적 연구는 신약의 외경들이 지리학이나 고고학, 환경 전반에 대해 괄목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며 비록 지엽적인 내용이더라도 일종의 영적 독서로 취급할 만한 내용을 싣고 있다. 구약 외경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에 나온 문서들로 중간시기 문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 그대로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위치하는 작품들이며, 그 종류로는 에녹이라는 성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에녹서, 성경에서의 뜻 깊은 사건과 그 일자 등을 기록한 희년서, 묵시록 성격의 책으로 우울하고 비관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에즈라 4서, 야곱의 12아들 유언을 담고 있는 12성조의 유언, 에즈라 4서와 유사하지만 염세론에 가득 차있지는 않고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고난 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바룩의 묵시록(제2,3바룩서를 말함, 1바룩서는 정경임), 마카베오 3,4서(1,2서는 가톨릭 정경이며 그리스 정교회 등은 3서까지를 정경으로 인정함), 시편 151장, 므나쎄의 기도, 이사야 승천기 등이 있다.

 

신약 외경은 수가 많으며 복음서, 행전, 서간, 묵시록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복음서에는 필립보 복음, 토마복음(최근 이슈가 되어온 책), 베드로 복음, 히브리인들의 복음, 야고보의 원복음(경전성을 띠고 있으나 결정시 제외됨, 경전 복음서를 보충하는 외경으로서 가치가 높음,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경건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 니고데모 복음, 나자렛파 복음, 유년기 복음, 假마태오 복음, 토마의 유년설화, 가말리엘 복음, 구세주와의 대화, 프리어-로기온, 야고보의 편지와 두 묵시록 등이 있고, 행전에는 베드로 행전(유명한 쿼바디스 이야기가 실려 있음), 바오로, 요한, 토마, 필립보, 안드레아 행전 등이 있으며,

 

서간에는 바오로가 세네카에게 보낸 편지, 라오디게이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바르나바의 편지(지역에 따라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정경 결정시 제외됨),

사도들의 편지(형식상 복음서로 보기도 함) 등이 있고, 묵시록에는 베드로, 바오로, 토마의 묵시록, 헤르마스의 목자(경전과 거의 다름없는 책, 아래 사진) 등이 있다.

 

 

 

 

야고보의 원복음 Protevangelium Jacobi 

 

 

 

토마복음  Thomas Evangelium

 

 

 

  

바르나바의 편지 The Epistle of Barnabas

 

 

헤르마스의 목자  Shepherd of Hermas

 

 

헤르마스의 목자  Pasteur d'Hermas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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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 2024.08.29 10:30
    본문 중에 에세네파의 창시자가 예수님처럼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라고 사해 문서에 기록돼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오보입니다.
    사해문서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반기독교성 기사로서 타임지와 과학동아에 실렸던 내용인데,
    아직도 인용되고 있네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joodup/80016279095
    https://blog.naver.com/joodup/8002640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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