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특별새벽집회 주제:“온전한 회개와 천국복음, 알고 가르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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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1) |
[찬송] 찬 254장 내 주의 보혈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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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시편 51:14~19(구약 840면) |
2017.2.28(화) |
1. 들어가며
올 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히던 해가 1517년이었으니, 딱 500년이 된 것이다. 사실 처음 루터의 종교개혁은 좋았다. 하지만 얼마 못가 개혁의 헤게모니(주도권)를 칼빈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교리가 그 자리를 박차고 들어왔고, 그것 때문에 오늘날까지 죄를 지어도 죄가 무서운지도 모르는 성도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비록 루터가 “오직 믿음”이라는 개혁신앙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의 95개조 반박문을 읽어보게 되면, 그는 최소한도 11개의 문장에서 회개의 필요성을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1항에서 제4항까지를 살펴보자.
“제1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제2항 이 말씀은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제3항 이것이 단지 내적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내적 회개(inner repentance)는 육신의 다양한 외적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한, 무가치한 것이다. 제4항 죄에 대한 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여도, 즉 참된 내적 회개를 하여도 우리가 하나님 왕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다. 회개가 중요했다. 하지만 칼빈으로 이어졌던 종교개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회개 없이도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가 탄생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시해야만 한다(막1:15). 그래서 바른 구원론을 회복하기 위해 어제 우리는 왜 사람이 회개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간의 범죄가 ‘가난’과 ‘죽음’과 ‘불행’과 ‘저주’를 가져왔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회개’밖에 없다는 것을 배웠다(요일1:7,9). 오늘은 예수님 시대에 어떻게 되어 회개가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태도와 자세로 회개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구약의 속죄제사가 어떻게 세례(洗禮)로 바뀌었을까?
구약시대에 언약의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 속죄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레4~5장).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속죄 제사 그 자체가 아니었다. 죄없는 속죄제물이 자기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주신 법이자,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주어진 임시법이었기 때문이다(갈3:19).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한 채, 죄를 지으면 으레 속죄제물만을 바치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그때 칼로 목을 쳤던 속죄제물이 결국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때가 되었다(갈4:4). 이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속죄양으로서 메시야를 보내실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람 앞에 나타난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었다(사9:6).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속한 땅으로 직접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요1:1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속죄양으로서 메시야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구속을 성취할 것인지를 미리 다 알려주셨다. 율법에서는 모형으로 알려주셨고, 선지자들을 통해서는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으로 알려주셨다. 그러니 적어도 350가지 이상의 모형과 예언이 메시야를 알려주고 있었다(요5:39). 그러니 오신 메시야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만세전에 작정하신 일을 이루셔야 한다. 그 일은 무엇인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메시야의 속죄를 믿어 죄사함을 얻은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람들은 형식적인 제사에만 매달려 있을 뿐,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속죄양을 대신해 드려질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맞아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한 사람을 먼저 보내셨는데, 그가 바로 선지자 세례요한이다. 그는 이사야에 예언된, 광야의 외치는 소리(사40:3)로서, 말라기서에 예언된 여호와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말3:1). 그런데 세례요한은 당시 행하는 방식과 달리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이었다. 사실 그가 물로 세례는 주는 것은 2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메시야와 메시야가 가져올 천국을 준비시키는 일이었고(마3:2), 또 하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메시야를 천거해주고 그분에게 인류의 죄를 넘기는 일이었다(요1:31, 마3:15~16).
그랬다. 구약의 속죄제사의 핵심은 흠없는 속죄제물이 죽어가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아울러 속죄제물로 죽으러 오실 메시야를 경배하고 그분께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고 속죄하러 오신 메시야를 믿도록, 율법에도 없던 세례를 베풀도록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회개의 중요성과 속죄양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했을까?
3.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회개와 속죄에 관련하여, 구약의 인물 가운데 두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한 사람은 욥이고 한 사람은 다윗이다. 욥은 비록 무할례자의 대표이기는 하지만 조상들로부터 배운 율례를 따라 속죄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죄를 짓게 되면 속죄제사를 통해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흠없는 제물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죄에 애통해하는 마음 곧 회개하는 마음보다는 제사의식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단지 율법규정대로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그에게 두 차례에 걸친 시험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죄용서에 관한 영적 비밀을 모른 채 죽었을른지도 모른다.
그는 비록 재산과 자식을 잃은 1차시험은 통과했지만, 건강을 잃고 아내와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버림당하는 2차시험에서는 넘어지고 만다. 30년간 지속된 질병 때문에 더이상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해버린 것이다.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던 죄된 본성이 밖으로 뛰쳐 나와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도 기도에 매달리니, 시험이 끝나갈 무렵 그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된다. 그때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받게 된다. 그러자 욥은 비로소 자신의 무지함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산업을 울타리로 지켜주셨기 때문에 부자로 살았던 것과 하나님의 배려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게 된다. 그는 너무나 죄송스러워 머리 위로 티끌을 날리며, 재를 머리에 부어가면서 깊이 회개를 하였던 것이다(욥42:6).
한편 할례의 대표자인 다윗은 좀 달랐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지켰던 약속의 자손으로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된 이후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한 다음,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속죄제물을 드리는 의식만으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쳐야 한다는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다.
시51:16-17 주께서는 제사(희생제물)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燔祭)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희생제물)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그때 무엇이 과연 실제적으로 죄를 깨끗이 씻겨주며 죄사함을 받게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늘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좋아했고,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고 골리앗과의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선대왕이자 장인이었던 사울왕의 미움 때문에 여러 곳으로 도망다닐 때에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만할 뿐 그를 해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하나님과 늘 교제하던 다윗왕은 희생제물로서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죄를 깊이 뉘우치고 산산조각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희생제물을 바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진실로 죄를 회개하며 통곡하게 된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지은 죄를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시32:5). 또한 그는 몇날며칠동안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실만큼의 눈물로서 용서를 빌고 또 빌었다(시6:6).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그렇다. 형식적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을 들어보라. “회개하라! 지금 메시야가 너희에게 다가오고 있다. 만약 지금 회개하지 않는다면 도끼로 너를 쳐내버릴 것이다.” 그렇다. 죄를 숨기지 말라. 죄를 토설하라. 죄를 깊이 뉘우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서 자복하고 회개하라. 회개없는 형식적인 신앙은 결코 죄사함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자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