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매년 전문가 25만 명 양성
문·이과 구분하는 학제 손봐야
‘1 대 125의 싸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초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데이터·AI 경제 활성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지난해 14조원 규모인 국내 데이터 시장을 2023년까지 30조원 규모로 끌어올리고, AI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 10곳과 전문인력 1만 명을 길러내겠다고 선언했다. 5년간 1만 명이니 매년 2000명의 전문인력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
그런데 일본은 3월 29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총리 비서실장 격)이 나서 매년 25만 명의 AI 전문인력을 양성하겠다고 발표했다. 1 대 125의 싸움이다. 물론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단순한 숫자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내용의 구체성과 방향성이다.
먼저 일본은 AI 인재 수요와 공급을 치밀하게 계산해 필요한 인력의 수를 산출했고, 구체적인 인력 육성 방법도 제시했다. 일본경제산업성은 당장 내년 말이 되면 AI 지식을 갖춘 인력이 30만 명가량 부족할 것으로 추산한다. 현재 일본 4년제 대학 학생은 학년별로 약 60만 명이다. 이 중 이공계, 보건계열 18만 명과 인문계 15%가량인 7만 명을 합쳐 매년 25만 명을 AI 관련 인재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통섭형 인재양성을 위해 ‘AI와 경제학’ ‘데이터 사이언스와 심리학’ 등 문과와 이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목을 개설하기로 한 것도 눈길을 끈다. 반면 우리 정부는 "데이터와 AI 산업을 육성해 2023년까지 글로벌 선도 국가로 도약 하겠다"는 거창한 목표에 비해 상황 인식과 세부 추진 계획은 빈약하다. 30곳으로 운영되던 소프트웨어(SW) 중심 대학을 얼마 전 35곳으로 늘렸고, 9월부터 KAIST·고려대·성균관대에 AI 대학원 개설을 확정 지었지만, 전문 교원과 연구자 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그나마 있는 전공자들도 열악한 국내 환경에 좌절해 다른 분야나 외국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많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대학 교육까지 완전히 뜯어고쳐가며 AI 인력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글로벌 AI 연구의 양대 산맥인 미국과 중국 추격은 고사하고 일본에도 크게 뒤처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AI 산업 경쟁력은 경제 수준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일본과 우리나라가 보유한 AI 전문인력 수(2008~2017년 누적 기준)는 각각 3117명, 2664명으로 조사 대상 15개국 중 14위와 15위에 머물렀다. 1위 미국(2만8536명), 2위 중국(1만8232명)이었고, 이어 인도·독일·영국·프랑스·이란 등의 순이었다.
세계 각국이 AI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빅데이터 기반 산업의 파이가 커지는 데다, 일상의 모든 영역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확산하면서 ‘두뇌’ 역할을 하는 AI 기술의 중요성이 부쩍 커졌기 때문이다.
제조업과 유통,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기술 접목 성공 사례가 쏟아져 나오면서 주요 기업들이 앞다퉈 관련 분야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도 AI 전문가 확보가 시급해진 주요 원인이다.
아마존은 폭넓은 고객 데이터를 수집하고 AI를 통해 이를 분석∙적용하면서 시가총액 1조달러(약 1136조원)를 넘나드는 글로벌 초우량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빅데이터 기 반의 AI 접목을 통해 최적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어느새 전자상거래 서비스의 기본이 돼 버렸다.
일찌감치 AI 기술의 중요성을 파악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사이버 냉전’이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 과거 높은 몸값을 주고 경쟁사의 인재를 빼 오는 차원에 머물던 AI 인재 확보 경쟁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정부 주도의 교육 과정 혁신 노력으로 발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AI 인재 확보를 위한 주요국의 노력을 정리했다.
AI 전문가 양성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대학들은 관련 전공과정 개설로 화답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의 최근 보도를 보면, 사이타마대와 무사시노대·도쿄공과대 등 3개 대학은 내년 봄학기부터 AI 전공과정을 신설하기로 했다. 사이타마대는 새 전공 과정을 통해 ‘일본 딥러닝협회’의 전문가 자격 취득을 지원하기로 했다. 무사시노대는 1학년 때부터 교수의 지원을 받아 연구에 돌입할 수 있도록, 오는 2020년까지 교수 13명을 신규 채용할 계획이다. 도쿄공과대는 컴퓨터과학부 내 AI 전공 과정을 신설해 의료보건학부·응용생물학부 등 다른 전공과 교차 연구를 진행하며 다양한 분야의 AI 인재를 육성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 교육부는 최근 35개 대학에 AI 학과를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베이징이공대·통지대·저장대·난징대·상하이교통대·하얼빈공대 등이 포함된다. 중국 교육부는 이와 별개로 AI 관련 학과 신설을 허용해 현재까지 총 329개 대학이 관련 학과 개설을 허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101개 대학은 ‘로봇 엔지니어링’ 학과, 203개 대학은 ‘데이터 과학과 빅데이터 기술’ 학과, 25개 대학은 ‘빅데이터 관리와 응용’ 학과를 각각 개설할 예정이다.
프랑스 파리의 혁신적 SW 교육기관인 ‘에콜42’를 벤치마킹해 서울 개포동에 한국판 에콜42를 올해 9월 개원할 예정이다. 에콜42는 교사나 교재 없이 학생이 스스로 과제를 선정하고 팀을 꾸려 연구한다. 학비는 무료다. 취업 또는 창업하거나 목표했던 기술을 습득하면 과정을 마친다. 재학생들은 통상 3~5년간 150여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지금의 언어로 설명 어려운 시대 온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AI 경쟁력은 미국·중국과 격차가 크다. 대학원과 학과 몇 개 개설하는 것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격차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전문가들은 AI 분야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문과와 이과를 엄격히 구분하는 현재의 학제를 손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정체성과 무인 기술, 지속 가능한 발전 등 AI 기술을 통해 다뤄야 할 이슈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 만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형’ 인재 육성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AI 연구가인 벤 괴르첼 싱귤래리티넷(SingularityNET)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에서 "지금의 언어로는 설명조차 어려운,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며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그것을 습득하는 방식을 전수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서로 다른 영역끼리 연결하는 능력도 가르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싱귤래리티넷은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AI 오픈마켓이다. 괴르첼은 홍콩에 있는 로봇제조사 핸슨 로보틱스의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겸하고 있다. 핸슨 로보틱스는 지금까지 개발된 로봇 가운데 사람과 가장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 휴머노이드 ‘소피아’ 개발사다.
철학과 교수로서 AI의 윤리 문제를 오래 연구해온 데이비드 댄크스 카네기멜런대 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IT 기업들이 기술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다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늘면서 철학·윤리 전공자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며 "최대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각도로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엉뚱한 방향으로 기술이 치우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Plus Point
국내 AI 연구의 버팀목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AI와 빅데이터, 로봇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성장 사업 육성을 위해 최고 인재를 영입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벌써 기대가 모인다.
삼성전자는 최근 AI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해 위구연 미국 하버드대 전기공학·컴퓨터과학과 석좌교수를 ‘펠로’로 영입했다. 펠로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나 석학에게 주는 연구 분야 최고직이다. 위 교수는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비행 곤충 로봇인 로보비의 센서와 프로세서 등 핵심 기술을 개발한 AI 프로세서 부문 세계적 석학이다. 그는 삼성전자 AI 연구를 총괄하는 삼성리서치에 소속돼 인공신경망 기반 차세대 AI 프로세서를 연구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이에 앞서 지난해 6월 AI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세바스찬 승 미국 프린스턴대 뇌과학연구소 컴퓨터공학과 교수와 다니엘 리 코넬대 전기공학과 교수를 부사장으로 영입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AI 인재들의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것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산업연구원 보고서와 중국 현지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2017년 기준 텐센트의 평균 임금은 77만8300위안(약 1억3100만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 평균 임금(1억1700만원)을 앞질렀다. 2016년 60만400위안으로 삼성전자(1억700만원)를 턱밑까지 쫓아온 뒤 1년 사이 29%에 육박하는 기록적인 임금 상승률을 기록하며 삼성전자를 추월했다. [이코노미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