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마23:23)

by 갈렙 posted Nov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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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vxXoUx6vZTQ
날짜 2015-11-08
본문말씀 마태복음 23:23(신약 4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십일조의 기원, 십일조의 규례, 십일조의 4가지 의미, 십일조와 예수님, 자원제인가 의무제인가? 십일조의 용도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십일조헌금 만큼은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가? 그동안 십일조 헌금설교를 많이 들었던 자는 어찌 하든지 십일조만큼은 반드시 교회에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라고 십일조 헌금을 빼먹었다면 과거의 것까지 다 계산해서 바쳐야 할 예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혹시나 십일조를 드릴 헌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드려야 그가 믿음이 있는 자이며, 복받을 성도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을 떼어먹는다면 자신은 저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를 걱정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과연 성경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를 살펴보자.


  먼저, 십일조의 기원부터 살펴보자.

  십일조의 처음실행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다. 사실 십일조를 드린 것은 인간이 먼저 자발적인 감사의 표시로 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십일조를 처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이 시날왕에게 붙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해 올 때였다. 하나님의 크신 제사장이었던 살렘왕 멜기세댁이 마중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떼어서 그에게 주었다(창14:17~20).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신이 싸움을 잘 해서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승리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김으로 조카 롯과 온갖 것들을 되찾아온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었다.

  그 뒤로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이 십일조를 하나님에게 약속하였다. 그는 자신의 형 에서의 낯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할 때에 벧엘에서 서원기도를 올렸다. 그때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험난한 노중에서 지켜주시고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며 편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다(창28:20~22). 실제로 그렇게 시행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야곱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감사의 약속을 하나님께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십일조의 시작은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것은 전부 자발적인 감사의 표시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십일조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살펴보자. 

  그런데 자발적인 감사의 표시였던 십일조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기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어와서는 감사의 의무제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다. 그리고 그 땅에 햇빛과 비를 주시어 소출을 거두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두어들인 곡식과 과일과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우양의 소득의 십분지일은 당신 자신에게 바치라고 명하셨다(레27:30~33, 신12:17, 14:22).

  셋째, 선지서에 나타난나는 십일조에 대한 부가적인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자.

  그런데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생활을 잘 했을까? 아니었다. 그들은 십일조의 의무생활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끝나버렸을까?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사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제사장들에게 몫(보수)으로 주어졌기에, 그 수입이 부족하다가 나중에는 없어지게 되니까, 그만 제사장들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되게 책망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순종하겠다는 표시로 십일조생활을 명령하셨다. 심지어 십일조를 떼어먹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할만큼 크게 강조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내는 자들에게 축복도 보장해 주셨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십분의 구에 관한 권리를 보장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십분의 구에 대해서 황충의 재앙을 막아주실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의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이런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십일조는 자발적인 감사의 표시이며, 의무적인 감사의 표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십일조는 이어서 좀 더 영적으로 볼 때 회개의 표시이며, 권리보장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 예수님을 믿는 교회의 성도들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이것을 알려면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는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감사한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그 말씀은 마23:23에 나와 있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왜냐하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것들인)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않고 있어야 한다[원문직역]

  예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서 이제 신약이 되었으니 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것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은 십일조를 허용한다는 뜻이지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그들을 처벌하시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실 십일조규례는 율법 중에서 의식법에 속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율법 중에서 의식법은 예수님이 오셔서 성취하심으로 대부분 폐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의식법에서는 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십일조법, 첫열매법, 정결법, 제사법 등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이루심으로, 이제는 이러한 법들을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어졌다. 할례법은 세례법으로 대치되었고, 안식일법은 주일법으로 대치되었으며, 절기법과 제사법은 예수께서 성취하심으로 자동적으로 폐지되고 말았다. 다만 십일조법이나 첫열매법은 오늘날에도 존속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할 율법의 조항으로서의 효력은 상실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다. 십일조헌금생활은 해야하는 일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정확히 알려면, 왜 십일조법이 율법의 의무조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법으로 주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이었다. 율법은 사실 광야에서 받았지만 광야에서 지켜야 할 법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법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와는 달리 가나안땅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역할을 할 그룹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릴 때에 이 일들을 주관하는 이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레위지파를 특별히 구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 중에서 아론의 아들들에게는 제장의 직무를 담당하게 하셨고, 그 제사장들 중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만큼은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셨다. 엿새동안 농사하면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문제는 레위인들을 비롯한 제사장들의 의식주를 과연 누가 해결해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18장을 읽어보면, 그들의 의식주는 바로 백성이 해결해 주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음을 알 수 있다(민18:21,26).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성막(성전) 안에서 온전히 봉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영적인 일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렇다. 십일조의 용도는 레위지파인 제사장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지은 농작물과 포도주와 기름, 우양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바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레위인들은 자신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자신의 십일조를 대제사장에게 바치라고 하셨다(민18장).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의식주문제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 해결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실 농작물이나 포도주와 기름, 우양이 전혀 필요없으신 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봉사하는 레위지파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정말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간에서 봉사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는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적으로 이러한 의무적인 십일조 조항을 잘 지키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레위인이나 제사장 중에는 어떤 개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일까지도 발생하였다(삿17:7~13). 그리고 그때로부터 1,500년이 지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제사장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에 바칠 제물들을 수십배 남겨서 팔아먹는 일까지 자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위치는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이 목회자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성도들의 십일조를 전부 다 가져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을 위해 십일조가 사용되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하는 자는 물론 지교회를 시무하는 목회자다. 그리고 이어서 선교사도 있고, 또 다른 기관들에서도 그 일을 감당하는 자가 있다. 그렇다. 오늘날에 와서 십일조는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선교하는 자들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러므로 만약 이런 조항이 구약의 율법규정에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교회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을른지도 모르겠다.

  사실 복음을 전파하러 갔던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의 선교팀의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해 천막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남으로 인하여 바울은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바울은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이와같은 원리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만약 성도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다면 주의 종들이 자신의 본연의 일을 감당하는데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들도 세상에 나가서 경제활동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연 누구에게 손해가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고스란히 성도들에게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비록 율법적인 의무에서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성도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칠 예물이 없는데 빚을 내서라도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바치라고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형편상 십일조를 바칠 수 없는 형편이라면 때로는 십일조생활을 잠깐 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는 성도라 한다면, 일평생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매우 덕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십일조를 바치면서도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덧붙혀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것은 십일조만 바치지 말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내면에 이러한 마음이 없이 십일조만을 바쳐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를 종합해서 본다면, 십일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과 정성과 감사의 표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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