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서 성령을 받고 칭의를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들로 말미암음이 아니라는 성경말씀을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예수만 믿으면 십계명같은 율법말씀은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고 있는가? 만약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말씀을 과대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결코 그러한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 마디를 들으면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자기에게 맞게 고쳐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함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해주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능동태구문이 아니라 수동태문장인 것이다. 그분이 해 주셔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이후의 시대에 등장한 이신칭의는 이제 모든 일에 만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칭의를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아니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그 진의를 정확히 찾아보자.
1. 들어가며
지금의 한국기독교는 이신칭의의 만능시대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이신칭의로 칭의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처럼 가르치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는 구원의 노정의 첫시작에 불과하건만 이것을 완료형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뤄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죄를 짓고도 그것 때문에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마저 지워질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계3:5). 그러니 지금 한국교회는 더이상 존경과 우러름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에서부터 이런 잘못된 판단이 시작되었던 것일까? 그래서 오늘은 구원의 시작인 이신칭의의 관점이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진정 사도바울이 말했던 성령받음과 이신칭의의 근거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닌 믿음의 들음이라는 말의 진정한 본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성령을 받고 이신칭의를 얻을 수 있는가?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이신칭의를 얻을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한다.
갈3:2~3[직역] 나는 너희로부터 오직 이것을 알기 원한다. 너희가 그 영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들로부터냐 아니면 믿음의 들음으로부터냐? 너희가 이와같이 어리석으냐? 너희가 [그] 영으로 시작한 후에 이제는 육체로 끝마치려느냐?
갈3:11[직역]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왜냐하면 의인은 믿음으로부터 [장차] 살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성령을 받는 것이든 칭의를 받는 것이든 다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믿음을 들음으로부터인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고 이신칭의를 얻는 데에 율법은 아무 상관이 없으니 다 팽개쳐도 된다는 말인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대해 그런 뜻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다보면, 말씀을 그렇게 과대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절반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신약 어디를 살펴보아도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거나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훗날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불못에 던질 자를 심판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십계명의 준수여부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나오기 때문이다(계21:8).
그렇다고, 십계명을 지켜야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이신칭의를 얻는다고 대답하기도 곤란하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이신칭의를 얻는 모든 근거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예수님의 공로에 있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것을 근거로 우리가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고, 구원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의 정확한 견해는 천국은 믿음과 회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막1:15, 마4:17).
3. 사도바울이 성령받고 칭의를 받는 것을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고 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무슨 뜻에서 사람이 성령받고 칭의를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고 말한 것일까? 이것은 사도바울이 누구든지 율법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는다고 하는 말인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럼, 율법은 안 지켜도 믿기만 하면 구원까지 받겠구나 하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뜻에서 이 말씀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반드시 율법의 행위들도 믿음과 같이 있어야만, 성령도 받을 수 있고 칭의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들이 꼭 있어야만 성령도 받고 칭의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이방인의 갈라디아교회를 흔들어놓았던 불순한 세력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세력 때문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게 이 편지를 써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할례파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사람이 칭의를 얻으려면 예수만 믿어서는 아니 되고,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는 바울의 뒤를 뒤쫓아와서는 바울의 복음전파를 한사코 방해놓았다. 이들은 믿음도 가져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믿음만으로는 결코 칭의를 받을 수 없으며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이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이다.
4. 사도바울이 그토록 경계했던 율법의 행위들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토록 경계했던 율법의 행위들 곧 할례파 유대인들이 주장했던 이신칭의의 필수적인 요소인 율법의 행위들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십계명을 안지켜도 된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것이었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바울의 말을 곡해하여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얻으며 구원도 받는다고 생각한다. 오직 믿음이면 다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은 맞고 절받는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자기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도 우상숭배를 하는 자는 결코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계21:8). 하나님도 믿고 다른 존재도 하나님으로 믿는 자(영적인 간음자)를 하나님께서 결코 받아주실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줄기차게 우상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며(엡5:5,고전6:9~10,갈5:19~21), 불못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계21:8).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이라고 하는 말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례파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이신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고 구원도 받는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기본적으로 "할례"라고 언급한다(갈5:2~4).
갈5:2-4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렇다. 할례파 유대인들은 믿음만으로는 칭의를 얻을 수 없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치려 했다. 그것은 바로 히브리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법들(어떤 의식을 지켜 정결함을 얻는 법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을 선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민이라는 생각의 시작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처럼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히브리인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할례는 무엇인가? 육체에 행하는 어떤 의식이다. 남자의 육체에 어떤 의식을 행함으로 선민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선포된 이후에 더 확장되어졌다. 그래서 할례도 받아야하고, 안식일도 지켜야하며, 절기도 지켜야하고, 음식도 가려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갈수록 더 확대되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것들이 하나 둘씩 모아져서 결국에는 장로들의 전통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다고 여겼다. 이방인과는 식사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어떤 의식을 행함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어주고 성결케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외적으로 그렇게 하면 되는 것들이다. 겉모습을 보았을 때, 육체에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이 시작되면 육체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며,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은 절대 먹지도 않고, 이방인과 식사도 하지 않는 것들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다(막7:15~16). 외적인 행동들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이신칭의를 얻는 데에, 아니라고 말했던 "율법의 행위들"은 십계명은 안 지켜도 된다고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의식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 되었음을 주장하는 말이다. 그러나 할례파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할례, 안식일준수, 음식을 가려먹음,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음 등이 없으면 절대 거룩해질 수도 없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다가 반드시 의식법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했던 잘못된 "율법의 행위들"에 관한 말씀이다.
5. 바울이 말하려 했던 율법의 행위들에 대한 구체적인 항목은 무인가?
이제 위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서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더불어 골로새서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갈5:9-11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갈5:11-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4:9-1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20-22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그렇다. 사도바울은 날을 지키는 것(안식일), 달을 지키는 것(초하루, 월삭), 절기를 지키는 것(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레23장), 해를 지키는 것(면제년, 희년) 등과 같은 의식법들과 먹고 마시는 것(음식의 정부정법/레11장) 등으로 인하여 사람이 거룩해지거나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예수믿는 사람은 십계명을 전혀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닌데,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가 편할대로 생각해서 해석해버린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고 이신칭의를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부터라고 했다. 하지만 듣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원도 받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이 말은 이신칭의를 얻는 것이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의식법들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할례파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처음에는 다 믿음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그것의 완성은 순종과 회개다. 야고보에 의하면 칭의의 완성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약2:21~22),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칭의의 완성은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18:13~14)
약2:21-2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눅18:13-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이신칭의의 시작은 확실히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신칭의가 꼭 십계명을 지켜서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자기자신에게 진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삶 속에서 순종으로 실천해야 한다. 일평생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말씀에 따른 순종의 행위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직 가진 것은 믿음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잘못된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아예 믿음이 없거나, 자신의 죄를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눅18:9~14)를 통하여,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분명 회개를 통해서 완성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그러나 이러한 말씀들은 이신칭의를 언급하고 있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말씀으로서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이심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말씀을 들은 자는 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그렇구나. 의식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이미 폐지되었으니(갈4:9~11,골2:16~17), 이제부터는 굳이 주일을 지키려고 노력을 안 해도 되는구나" 하지만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신칭의를 언급할 때, 보통 그리스도인들처럼 십계명은 지키지 않아도 구원얻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씀으로 확대해석해 버리듯이, 안식일준수도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식일준수는 아주 특별한 명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식일준수는 출20장에서 십계명 법에도 나오고 있지만(출20:8~11), 레23장의 절기법에도 나오는 특별한 명령인 것이다(레23:1~3).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준수 계명은 도덕법으로서 명령이기에 한 번도 폐지된 적이 없고 한층 더 강화되었다(마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보라. 십계명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절기법에 나오는 안식일준수 명령은 의식법이기에 이미 폐지된 채 있다. 예수께서도 안식일을 제정한 주인으로서(마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안식을 주리라)(마11:28)"고 말씀하심으로, 일곱째날을 지키는 안식일법은 이미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실 것임을 시사하셨다. 그러므로 일곱째날을 지키는 절기법으로서 안식일(금요일 해질무렵부터 토요일 해질무렵까지)은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이미 폐지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햔다. 그렇지만 도덕법으로서 안식일계명(일주일의 하루를 자신의 영혼을 위한 날로 쓰는 것)은 폐지되지 않고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주일에 하루를 쉬면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도 성장시킬 수 있으며,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내주지 않고 지키고 보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주일의 하루를 내 영혼을 위한 날로 쓰는 안식일법(도덕법으로서 안식일법)은 오늘도 폐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을 성실히 지켜야 할 것이다.
7. 나오며
갈라디아서 2장에 읽어보면, 사도바울이 게바(베드로)를 책망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어찌 감히 예수님의 수석사도를 후발 주자가 책망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나온다(갈2:1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였지만 할례파 유대인들이 온다고 하자, 이방인과 식사하던 베드로가 슬쩍 자리를 피해버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위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행10:28). 이것은 어떤 의식적인 행위들이 자기를 거룩하게 하고 성결하게 하며 의롭게한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율법의 행위들을 지키려고 슬쩍 자리를 피해버린 것이다. 의식법은 이미 폐지되고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러한 법을 지킴으로 정결함을 입고 칭의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생각하는 베드로를 책망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번도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을 폐지했다거나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기록된 적이 없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의적으로 그것을 과대포장하여 예수믿는 사람들은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로구나 하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이신칭의는 칭의의 시작에 불과한 것인데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을 가지고 마치 자신이 구원을 이미 받아버린 것처럼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아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칭의를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은 율법의 의식적인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가 비록 믿음을 가진 자라도 결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할례파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믿고 세례받는 순간 죽을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도 그 뒤로 수십년을 살아가야 한다. 이때도 이신칭의가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에는 자신이 십계명을 준수하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한 거룩의 바로미터가 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죄인인지를 알고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진정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를 판단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과 회개는 이신칭의의 완성이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30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