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가운데에 말의 은사에는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의 은사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소나무 몇 개의 뿌리를 뽑으면 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무엇에 주의하며 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은사는 받았지만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바깥 어두운데 떨어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 중에서 은사에 관한 부분은 12장부터 시작하여 14장까지 게속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은사의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 속해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자기의 덕만을 세운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방언을 마치 자신의 영성을 자랑하기 위한 잣대로 삼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방언의 은사 사용을 교정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12장부터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더불어 직분의 은사를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 14장에 들어와서 비로소 방언의 한계와 그것을 사용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언도 좋은 은사에 해당되지만 방언은 예언에 비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공중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과 예언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은사인지를 살펴보고, 방언이 지닌 한계점과 그것이 교회의 공예배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린도전서 14:20~40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들어와서 드디어 은사들 중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방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바울은 방언 통역이나 예언도 방언과 함께 다룬다. 이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말하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방언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면서,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방언 통역과 예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견주어 비교하고 추천할 많은 은사가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방언의 은사보다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19의 단락을 통하여, 방언이란 어떤 것이며 교회의 덕을 세움에 있어서 방언은 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방언보다는 예언이 상대적으로 유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20~25절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상반된 역할에 대해서 다룬다. 즉 이 두 가지 은사가 성령의 은사를 믿지 않는 자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26~40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할 때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사도는 그것들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까지도 같이 알려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 사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서와 품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은사에 대한 말씀을 마치게 된다. 

 

3. 방언과 예언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이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사실 방언과 예언은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서 '방언 통역'의 은사와 더불어 '말'의 은사에 속한 은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방언'과 '예언'은 그 목적에 있어서 거의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교회를 세워 주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방언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남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과 예언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먼저, 첫째로 방언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자. 방언은 한 마디로 개인의 덕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할 수 있다(고전14:4). 왜냐하면 방언을 통역해 보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주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약 80~90%정도이며, 자기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약 10~20%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3가지 정도로 나온다. 하나는 위로과 격려의 말씀이 나온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모든 사람이 내 교회를 버리고 떠날 때에 너 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아 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너의 진심 어린 기도를 내가 들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앞 길을 친히 인도해 주마." 라는 말이 나온다. 또 하나는 책망(꾸짖음)과 폭로의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너는 왜 나의 종을 쫓아내는 일에 앞장을 섰느냐? 내 종은 내가 판단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종은 내가 세웠으니 내가 판단할 일인 것인데, 네가 네 손으로 그 종을 쫓아내었으니 네가 만일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와 너의 집을 향한 나의 징계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니라."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사명과 과업에 대한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이 땅에 보낸 것은 너만 믿고 구원 받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네가 회개함으로 네 자식과 네 집안까지 일으켜 세우라고 내가 너를 보낸 것이다. 너는 네가 했던 일에만 만족하지 말고, 이제는 너의 눈을 들어 너의 가족과 너의 가문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고로 이렇듯 방언의 내용이 위로와 격려, 책망(꾸짖음)과 폭로, 사명과 과업에 대한 메시지인 것을 가정해 보면, 그것이 예언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방언은 이러한 말씀을 방언하는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을 믿지도 않은 자나 불신자가 방언을 듣는다면, 아마도 그들을 미쳤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로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자. 예언은 사실 방언과 비슷한 은사이면서도 방언과는 좀 성격이 다르다.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방언 통역이란 방언하는 자의 말을 통역자가 듣고 그것을 해석해 주는 것이지만, 예언은 성령께서 내 영에게 주신 말씀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예언도 마찬가지로 주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만을 뚝 떼어놓고 본다면 그것이 통역되어 나온 방언인지 혹은 예언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예언에는 상대방의 영이 드리는 기도가 들어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정말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예언으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6가지 측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첫째는 권면과 위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전14:3). 그리고 둘째는 책망과 판단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고전14:24). 또한 셋째는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도 같이 수행한다(고전14:25,31). 왜냐하면 예언을 통하여 상대방이 감추고 있는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사람을 책망하여 결국 그를 회개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예언을 모든 회중이 같이 듣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를 제일 싫어하시고 또한 어떤 일을 매우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예언은 많은 사람을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게 된다(고전14:25). 

 

4. 공적인 예배시 방언과 예언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바울은 이제 공예배시에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첫째로 공중예배 때에 등장하는 예배의 요소들 곧 찬송시나, 가르치는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이 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에 팔요한 것임을 지적한다(고전14:26).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공중예배시 방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설명해 준다(고전14:27~28). 즉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에는 첫째, 방언하는 자를 두 명 내지는 세 명 정도만을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중구난방식으로 방언하게 하지 말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차례대로 방언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교회에서 방언을 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하는 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온 회중이 들어서 알게 하라고 하였다(고전14:27). 만약 교회에 이렇게 통역할 수 있는 자가 없다면 방언은 결단코 공중예배시에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혹시 방언을 하고 싶다면 그때에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에게만 말하라고 하였다(고전14:28).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공중예배시 예언을 할 때에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했다(고전14:29~32). 이때에도 역시 방언 통역 때와 마찬가지로, 첫째, 예언을 두 명이나 혹시 많으면 세 명 정도만을 선별하여 예언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 역시 이것도 차례대로 질서있게 해야 하며, 셋째, 예언이 끝나면 예언의 내용을 100%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 마귀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하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언이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보통 상대방을 보면서 그때 자기의 마음에 주님께서 떠오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예언하는 자의 마음과 발성 기관을 거치면서 예언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언하는 자가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았다든지, 하나님 앞에 불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은사를 사용하게 되면 예언이 잘못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언할 때에도 성령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사람이 예언을 할 때에 다른 이에게서 또 예언이 나오면, 그때에는 전에 예언하고 있던 자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지만 그 예언이 틀리게 전달될 경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 예언을 막으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뒤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에 제제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고전14:32).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 중에 부르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5. 모든 교회에서 여자는 항상 발언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은사 사용에 있어서 질서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고전14:33). 그러므로 공중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할 때나 예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차례를 따라 순서대로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고전14:27~28). 이어서 바울은 모든 성도가 교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창3;16),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어떤 질서를 정해 주셨으니, 그것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으로서 질서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고전11:3). 그러므로 여자가 교회에서 자꾸 말하다 보면 교회가 소란스럽게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태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을 보더라도 여자는 뱀에게 계속해서 말을 한다. 이때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함으로 인하여 여자가 먼저 꾀임을 받아서 죄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굳이 여자가 말을 하려고 한다면 직접 나서서 말하기보다는 자기의 집에서 자기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소란스럽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에게 묻지 않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대원칙과도 같은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참고로 이러한 명령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강요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성을 갖기를 위하여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자는 어떤 생각으로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은사의 사용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두고서 자기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서 그것을 정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권면한다(고전14:36). 그리고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직접 개척하고 세웠던 사도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교회에게 좀 더 강경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영적인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거나 모르는 자가 자기를 선지자나 영적인 자로 자처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라고 말했다(고전14:38). 그는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7. 방언과 예언 및 은사 사용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 이렇게 마무리 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있으며,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고 있어라(고전14:39)" 그렇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영적인 것을 사모하려면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더 사모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것일 뿐 교회의 덕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은사를 구하는 대원칙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방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금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방언이 마치 구원의 확실한 표적인 것인 양 떠들어대는 교단도 있으며, 반대로 방언을 지나치게 무시한 나머지 방언을 고린도 현상 내지는 귀신들의 장난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양쪽 다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이다(고전14:18). 왜 그런가? 방언이야말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다른 은사들을 받게 하는 일종의 첫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요, 방언을 많이 말할 때에 다른 은사들도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에는 2가지 태도를 꼭 지켜 줄 것을 권면하였다(고전14:40). 그것은 품위있게 은사를 사용하고, 질서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내가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그 은사를 최고로 여긴 채 함부로 사용하여서 교회를 소란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때로는 가진 은사라도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으며,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될 때까지 때로는 기다릴 필요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더 성숙한 은사자의 통제가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귀신의 밥이 될 확률이 매우 크며,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 바깥 어둔 데에 내던져지는 이들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8.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신령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영적인 것들을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 그런데 너희들은 더욱더 예언하기를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고전14:1)". 그렇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으려면 이러한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은사를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인가? 그것에 관하여는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니, 첫째,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의 은사는 다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시는 은사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신 은사들이 대부분인데 기도도 많이 하지 않으려 하면서 은사들을 사모하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은사는 예언의 은사의 경우처럼 그것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로 혼합되어 밖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진 상태에 있으면서 은사를 사모하여 은사를 받게 된다면 그 더러움은 누가 과연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회개를 하지 못해 청결하지 않는 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성령과 함께 동시도 귀신도 역사하여, 귀신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나게 한 것을 성령이라고 함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들은 누가 또 책임을 지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청결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모든 은사는 섬기기 위해 주어진 은사이므로 주신 하나님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은사를 다른 지체를 섬기라고 주어진 은사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을 제외한 모든 은사들은 다 남을 섬기라고 주신 은사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려 하고, 그것을 남을 위해 섬기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것을 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는 반드시 자신을 주님께서 헌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은사가 좋다하며 간구했다가 결국 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묶어 둔다면, 결국 주님 앞에 책망받을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은사를 받기 사모하는 자는 남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섬기는 은사이기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남을 섬기기를 더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남 섬기기를 자기를 섬기는 것보다 우선할 수 있는 자가 은사를 간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이 은사가 과연 최고의 은사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는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고로 바울은 모든 은사들은 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주어지는 은사이니만큼,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그래도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데에는 그만한 은사가 없기 때문에 방언 말하기를 금해서도 아니 된다고 하였다.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신령한 은사는 방언 통역의 은사요 예언의 은사이니 이러한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특별히 조금 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 경우에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은 거의 비슷한 은사라는 것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달랐다. 어떤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없고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을 유창한 발언을 따라 신령함의 정도로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결국 바울에 의해 크게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교정을 받아야 했다.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공예배시에 사용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을 세우라고 하였고,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때에는 잠잠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큰 소리로 내뱉는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제일 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최초로 나타났던 예루살렘교회가 그랬고, 이어서 이방인 최초로 믿는 자였던 고넬료 가정에서도 그랬으며, 베드로의 뒤를 이어 이방인 선교에 집중했던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렇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언이 만사 형통의 방법은 결코 아닌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는 아무런 유용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방언은 결코 회개를 대신할 수 없으며, 방언은 결코 자신의 성품을 바꾸어 주지도 못하며, 방언으로서는 감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언을 비롯한 신령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하기 위해 그러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더불어 진정 남보다도 더 십계명을 지키면서 성결한 삶을 살려고 하면서 은사를 구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시간을 다른 지체를 섬기려는 의도에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어찌되었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는 사역자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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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9월 2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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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사도행전 강해(12) 오순절날 방언이 복음전파에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02)(행2:5~13)_2022-06-17(금)

  12. 사도행전 강해(11) 오순절날 방언이 복음전파에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01)(행2;5~13)_2022-06-16(목)

  13. 사도행전 강해(10)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 은사의 특징은 무엇인가?(행2:1~13)_2022-06-15(수)

  14. 사도행전 강해(09)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단순한 지방말인가 영의 언어인가?(행2:1~13)_2022-06-14(화)

  15. [성령강림절(2)] 성도가 되었어도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고전14:1~5)_2023-05-21(주일)

  16. [성령강림절(5)] 방언은 믿는 이의 '표적'인가 성령의 ‘은사’인가?(고전12:4~11)_2023-05-24(수)

  17. 어떻게 하면 방언으로 말할 수(방언을 받을 수) 있는가?(행1:12~14, 2:1~4)_2019-08-15(목)

  18. 방언을 통역해보면 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 있으며 방언통역은 어떻게 하는가?(고전14:1~5)_2019-06-13(목)

  19. 어떤 것이 진짜 성령께서 행하시는 방언통역이며 예언인가?(행21:7~14)_2019-06-12(수)

  20. 성경이 기록된 후 방언은 그쳤는가 아니면 방언은 만능의 기도의 은사인가?(고전13:8~13)_2019-03-2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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