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 가며

  우리는 왜 오늘도 방언으로 기도하는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방언기도, 어쩌면 말이 아니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방언기도를 왜 하는가? 어떤 분들은 방언기도는 귀신의 장난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의미없는 말의 되풀이로서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접신의 현상이라고도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어떤 분들은 방언기도는 성경의 기록이 종료됨과 동시에 사라졌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방언통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들어보았는가? 물론 통성으로 회개기도도 하지 않고 중보기도도 하지 않은 채, 냅다 방언기도만 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이들에게는 결코 인격과 신앙에 어떤 열매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가? 아니다. 알고 보면 방언기도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기도요,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기도이며, 이기적인 욕심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순수한 영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 우리는 이제 왜 방언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방언기도의 유익과 단점은 무엇이 있는지를 점검해보도록 하자.

 

2.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오셨다는 증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영은 사실 보이지 않는다(요4:24). 그러니 만질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왔는지 아니 들어왔는지 사실 잘 느끼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영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불어도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3:5~8). 고로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은 "바람(공기,숨)같은 성령"이시다. 그런데 성령을 비유하는 말씀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러가지가 있다. "불과 같은 성령(행2:1~4)", "비둘기같은 성령(마3:16)", "물과 같은 성령"(요7:37~39), "기름같은 성령(고후1:21,2:27)" 이라는 표현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영이시니 그분이 우리가 믿고 회개할 때에 분명히 들어왔을 텐데(고전12:3),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어도 그분이 내 영 속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어떤 표적이나 증표, 현상들이다. 예를 들어, 성령을 받는 순간 몸에 매우 뜨거움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 성령은 뜨거운 분이 아니지만 성령이 오셨을 때에 증상으로서 그 사람의 체질과 성격과 영의 특수성에 따라 그렇게 나타날 수도 있다. 모든 뜨거운 것이 성령이 오셨다는 증상은 아니지만, 성령이 오실 때에 뜨겁다는 분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읽어보면, 성령을 받았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했던 현상들이 있었다. 거기에 어떤 표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선물" 혹 "성령의 은사(카리스마)"라고 말했다. 사도행전에는 사실 성령이 사람에게 오시는 장면이 총5번 정도 나온다. 교회적으로 볼 때에는 3개교회 즉 예루살렘교회(행2장)와 사마리아교회(행8장) 그리고 에베소교회(행19장)에게 성령이 내려오셨고, 이방인에게는 고넬료가정(행10장)에게 오셨으며, 개인적으로는 사도바울(행9장)에게도 오셨다. 그럼, 이 5번에 걸친 성령강림사건과 동시에 일어난 공통현상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 성령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는 없는 영이신데, 그들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알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그들이 성령받은 후에 어떤 현상(증상,표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확인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기록상으로 사마리아교회를 제외하고 다 "방언(글로싸)"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교회는 그때에 방언을 말했는지 안했는지를 기록만 되어있지 않았을 뿐, 실은 어떤 특별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교회에 마술사 시몬이 있었는데, 그도 사도들이 와서 안수했을 때에 성령받는 것을 보고는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도 그러한 능력을 받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이다(행8:17~19). 물론 그때 베드로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사마리아교회 성도들도 그때 방언을 말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서 방언이 터질 때에는, 오순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성지순례객으로서 참여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찾아온 15개국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방언어들로 방언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막16:17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보며 새 방언(글로싸)을 말하며..."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고로, "방언말함"은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들어오셨다는 가장 강력한 공통싸인이자 표적이며 현상이었던 것이다.

 

3. 방언은사는 왜 중요한가?

 그렇다면, 왜 방언말함이 중요할까? 그것은 성령께서 사람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표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실 때 선물(은사)을 주시는데, 공통분모가 바로 "방언"이었다. 고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방언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막16:17에 의하면, 믿는 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방언이며, 고전12장 14장에 보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의 하나가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말]하는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받는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서 자기의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에 생명의 성령이 들어오시는데, 그때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조에)을 갖고 들어오신다. 그러면, 거듭남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방언"이다. 고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마땅한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는 성경의 기록이 멈추면서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믿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믿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방언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셨고(막16:17), 바울도 방언은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12장,13장,14장). 다만, 고전12:30에서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기록함으로써, 방언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했다. 이는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셨을 때에 주어지는 은사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께서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표적으로서 방언 아닌 다른 것들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도 역시 성령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은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실 때에 대부분 방언을 말했기 때문에, 방언의 성령이 오심의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어떤 것인가? 방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듣는 자가 없다. 즉 방언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므로 알아듣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답답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방언을 귀신 씻나락까먹는 소리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언은 통역해보면 영의 유창한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터부시하거나 멀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롬8:26에 의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 위하여 친히 중보기도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방언은 매우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영의 기도이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행하시는 중보사역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을 통역하여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크게 2가지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다. 그리고 실제 방언통역한 것을 분석해보면, 이러한 자신의 영이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방언은 얼마 안 된다. 방언 중 약 1/10이나 1/9정도 밖에 안된다. 오히려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방언의 80~90%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방언통역에 나오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대체 누구인가? 성부인가 성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성령이신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방언통역을 통해서 나오는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은 확실히 분리되어 있다. 아버지가 행하시는 사역과 아들이 행하시는 사역 그리고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바로 아들 "예수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성령를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방언 기도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4. 방언의 은사가 성도들의 삶을 매우 유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언은 사실 말(언어)의 은사로서, 기도의 은사요 찬양의 은사다. 사람은 방언을 통해서 더 많이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신령하게 찬양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고전14장은 방언이 영이 말하는 것이자(고전14:2,4~6,13,23), 기도라고 했고(고전14:14~14), 방언으로 찬양할 수도 있다(고전14:15)고 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에 방언을 말할 때에는 또한 통역이 필요하다고 했다(고전14:5,13,26).

  그런데 방언통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방언의 기도는 2가지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즉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서 진실한 소원을 아뢰는 기도의 통로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아버지의 뜻을 말하는 하나님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방언은 첫째, 하나도 나쁜 것이 없으며 이기적인 욕심이 전혀 들어있지 않는 순수한 기도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기도의 내용을 통역으로 들어보면, 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요 자기자신의 가족과 주의 종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나온다. 방언기도에는 단 한 번도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취직시켜달라거나, 진급시켜달라거나, 집을 사게 해달라거나, 예쁜 자매와 결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 자신의 영혼과 가족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둘째, 방언은 예수님께서 나의 대한 바람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언통역으로 자신의 영의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항상 그렇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나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혹시 방언통역에 자신이 주의 종이나 선교사의 사명이 있다고 나왔을지라도 거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지 않는 한 결코 그렇게 쓰임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은사와 달란트와 기질과 영적인 분량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으로 쓰임받을 것인지가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게 정해진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정해진 분량만큼 그렇게 쓰임받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이 땅에서 기도하고 사모하고 바라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와 분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방언기도를 통해서 나오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램은 하나님의 뜻이자 소원인 것이지 결코 운명같은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라.

 

5. 방언의 은사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그럼, 어떻게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도할 때에 그냥 내 영이 말하는 대로 내 입술과 혀를 맡기면 된다. 우리나라 말로 발음을 또박또박 말하려고 하면 오히려 방언이 잘 안 나올 수도 있다. 방언은 사실 말하는 은사이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말을 하면 된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지 못하는 분들도 가끔씩 있는데, 이런 분들은 밖으로 말을 하려고 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더 잘 나오는 것이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자신의 혀를 자연스럽게 맡기면 내 영이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랄랄랄 롤롤롤"과 같은 식으로 방언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창피하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방언통역을 해보면, 그러한 방언이라도 그 내용은 유창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에 몇 개의 단어가 아니더라도 부모는 잘 알아듣고 응수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듣기에는 "랄랄랄 롤롤롤"으로 들릴지라도 통역해보면 그 내용도 다 다르며, 다 유창한 언어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방언을 부정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아는 이들은 "랄랄랄 롤롤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만서 조롱하는데, 진짜 방언통역하시는 분을 아직 못만나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요, 방언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보면 다 알게 될 것이니,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방언은 어떻게 직접적으로 하게 되거나 받게 되는 것인가? 방언을 표적으로 보면 그것은 말하는 것이지만, 은사로 보면, 그것은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어떤 사례가 있었는가?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딱 3가지 방법으로 방언을 받았거나 말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을 보내주심과 동시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2:1~4). 대표적인 경우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의 방언의 나타남이다(행2:1~21). 사실 가룟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이미 성령을 받았다(요20:22).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여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 모여 10일동안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오순절날이 되었고 그때 오전 9시에 성령이 내려오셨고 성령이 그들 마음 속에 들어가시자, 드디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둘째, 말씀을 전하는 이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때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10:44~46). 그 대표가 바로 고넬료가정이다(행10:1~48). 고넬료는 자기의 식구들을 모아놓고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던지 이미 말씀듣는 중에 성령의 은사가 부어졌다. 그들의 입술에서 방언이 저절로 나왔고 방언찬양도 아울러 나왔던 것이다. 째, 이미 성령받은 권위있는 자의 안수기도를 받을 때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19:6).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안수함으로 성령받고 방언도 받고 예언의 은사도 나타난 사건이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교회에 가서 안수했을 때에 그들도 성령을 받았고 표적도 같이 나타났다(행8:14~17). 그리고 다메섹의 경건한 자 아나니아가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으로 기도하고 있던 사울에게 안수했을 때에도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은 벗겨지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방언도 말하게 되었다(행9:17~18, 고전14:18). 한 마디로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즉시 방언으로 말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언의 표적이나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는 것을 더욱 더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려는 것이자, 더욱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함이다(행1:8).

  한편, 어떤 사람들은 방언기도가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내 영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뜻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게 되면, 방언기도의 내 기도나 하나님의 뜻은 내게서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날마다 회개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십계명을 어긴 것은 없는지 살펴보면서 십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방언기도의 기도가 이뤄지는 것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도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로서 "회개기도"를 대신하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방언기도로서 "감사"나 "봉사"를 대신하려고 하지 말라. 또한 방언기도로서 내 성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 나의 땀과 노력과 고백과 고군분투가 필요한 것들이다. 이런 것이 없이 맨날맨날 방언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적 진보는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한다. 회개기도도 동반되고, 감사와 봉사를 생활화하면서, 자신의 성품을 바꾸기 위해 기도하면서 방언기도도 할 때에, 방언기도의 내용이 이뤄지는 것이지, 방언기도만 냅다 한다고 해서 방언기도가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하려면, 통성으로 충분히 기도하여 회개하고, 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한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 방언기도로 하는 것이 좋다. 방언기도는 미래의 나의 모습을 미리 아뢰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면, 어느날 과거에 자신이 방언기도를 한대로 자신이 이미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회개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애쓰지도 아니하면서 냅다 방언기도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6. 나오며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은 세번째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겔36장의 약속에 따라 경륜적으로 이제 믿는 이들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예수님이시요 여호와이신 분이시지 또다른 하나님이 아니시다. 물론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분은 단독적으로 인격을 가지고 일하시며 말씀하시기도 하신다(행16:7).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동시존재하시고, 상호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사실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들어오시기에 그분의 오심을 우리가 만지거나 느낄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이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표적이나 은사로 알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이때 어떤 현상이나 표적이나 은사가 자신에게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전12:3, 요3:5~6). 우리는 단지 곁에 서 있는 나뭇잎이 흔들리고 자신의 이마가 시원함을 느낄 때에,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성령을 받은 자의 대표적인 현상이나 표적이며 은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하는 분은 방언기도의 유익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인정하는 않아서라는 것을 알고, 오직 통성기도, 회개기도, 중보기도, 그리고 방언기도의 순서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029년 08월 15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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