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 ||
| [제목] 처음 사랑으로 사랑하라 | [찬송] 찬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
| [말씀] 계2:1~7(신약 400면) | 2013.9.2(월) |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이곳에 오신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무슨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실까 하는 것이 이번 특별새벽집회의 주제다. 그래서 그 주제를 약간 다른 말로 바꾸어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라고 불러본다. 이번에 다루게 되는 요한계시록 2~3장의 강해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강해가 아니다. 그 강해는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검색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특별새벽집회 때에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씀은 지금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과연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는가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의하면, 누구든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계2:7,11,17,26~28,3:5,12,21). 그러므로 끝에 가서는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대강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어김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오늘부터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겸허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천상의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을 때는 A.D.95년경이었다. 그런데 그때도 종말이었다. 주님께서는 그 시대에 재림하시려고 하셨다. 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일곱 교회들이 경고를 듣고도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에 주님은 오서야 했지만 지금까지 재림은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준비해야 할 때다. 그때 들려주신 말씀이 지금 우리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리와 생명얻는 말씀을 얻기 위해 다른 곳을 뒤지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이 있으며, 여기에 마귀로부터 속지 않을 비결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에 가장 많이 실수하며 어디에서 잘못될 수 있는지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제는 천상의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이번 특별 새벽집회 때에는 총 7가지의 핵심사항을 일주일동안 매일 나누게 될 것이다. 이번 집회는 그래서 언제 우리가 죽는다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놓치지 말라. 이 말씀에 주의하라. 이 말씀이 생명이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의 길이 들어있다.
자, 그럼, 믿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주의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가운데 첫 번째로 기록된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 있다.
먼저 에베소교회가 어떠한 교회였는지부터 살펴보자. 그 교회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에 3년간 머무르면서 세운 아주 특별한 교회다(행18:18~19:20). 바울이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기까지는 다른 지역에 비해 2배 3배 이상의 엄청난 수고와 눈물이 들어간 곳이 바로 그곳이다(행20:31).
행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곳에는 고대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인 거대한 아데미(Artemis) 신전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아데미 신전은 당신 에베소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극에 달해 있었는지를 그대로 말해준다(행19:24~41). 그리고 그 도시에는 우상숭배와 더불어 황제숭배도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의 제4대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A.D.41~54)에게 봉헌된 신전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워낙 큰 도시인데다 B.C.133년 이래 로마의 행정구역으로서 소아시아의 수도이자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다보니 그곳을 복음화하는 것은 소아시아 전 지역을 복음화하는데 가장 중요했기에, 사도바울은 눈물로 그곳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순회전도자였다. 그러므로 그 교회는 다른 사역자들이 와서 사역했다. 이후 바울이 순교한 다음에는 디모데가 와서 사역했으며 A.D.70년 이후에는 유대인의 반란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빠져나온 사도 요한이 목회하던 곳이다. 그러니 사도요한도 얼마나 그곳에서 목회할 때 신경을 썼겠는가?
그래서 천상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교회보다도 그 교회에 대해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그들에게는 좋은 행위들과 좋은 수고와 좋은 인내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들은 매우 감동적이었고 고통을 수반한 가운데서도 그들은 최선을 다했으며, 극한 어려움 속에도 그들은 그것들을 견디어냈다(2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도 아니했다. 교회는 무골호인(無骨好人)처럼 뭐든지 좋다고 하면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교회가 그렇게 되면 교회는 악한 자들의 밥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에베소교회는 자칭 사도라 주장하지만 거짓 사도들을 분별해 내어 그들을 쫓아버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끝까지 견디어 냈고 또한 부지런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할 것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만약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그것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교회를 상징하는 촛대를 일곱 등잔대에서 뽑아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곧 그 교회를 구원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에베소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기억하는가? 1절에 보면, 그분은 자신의 오른손에 일곱 별들을 붙잡고 계시고 일곱 금 촛대들 사이를 거니시고 있으셨다. 계2~3장을 보면, 일곱 교회들에게는 각기 다른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은 그 교회의 상황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각 교회들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보상도 다르게 나오는데, 그것도 그 교회에 주신 책망을 듣고 그들이 전적으로 회개했을 때에 주어지고 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 대한 책망은 그 교회가 천상의 세계에서 제거되는 것이요, 천상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 그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만약 그들이 잘못한 것을 우리도 저지르고 있다면 우리도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능력을 못 받아서 촛대가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전도를 못해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 에베소교회의 심각한 상황은 어떤 것이었나? 그것은 4~5절에 나와 있다. 다함께 읽어보자.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것은 그 교회가 악한 자가를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사도가 참 사도인지를 분별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니 그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 즉 가장 좋은 사랑, 온 마음을 드리는 사랑, 첫째가는 사랑, 처음에 했던 그 사랑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에베소 교회도 사랑은 있긴 있었다. 하지만 온 맘을 다해 주님께 고백했던 그 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언제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님께서는 회개하라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 그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빨리 찾아보라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을 회복하라 말씀하신다. 그래서 만약 그 사랑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도 쓸데 없고,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드러낸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하신다. 혹시 우리도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은 처음에 주님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사랑했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주님을 사랑한 한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눅7:44-47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녀의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렇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준 주님께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셨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을 손에 들고서 그 냄새나는 주님의 발을 닦아드렸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몸을 팔면서까지 벌어서 장만해두었던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향유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림으로 그 발에서 향유내음이 가득하게 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이런 사랑이 있는가?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는 그 눈물이 있는가?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해도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자신을 그렇게 낮출 수 있는가?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 생명과도 같은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가? 이것이 눈물, 감사, 헌신이 처음 사랑이다. 첫째가는 사랑이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다. 그 사랑이 없다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 번째 과제다. 당신도 오늘 이 시간 그 사랑을 회복하기 바란다. 그 사랑을 잃고 살아왔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지난날을 눈물로 참회하라. 그리고 처음의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하라. 꼭 그렇게 하라. 아멘.
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 ||
| [제목] 고난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라 | [찬송] 찬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
| [말씀] 계2:8~11(신약 400면) | 2013.9.3(화) |
우리는 어제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교회 가운데에 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을 들었다. 그것은 “처음 사랑으로 사랑하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님을 온 맘으로 사랑했을 때의 그 고귀하고 희생적인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우리도 처음 사랑을 회복하자. 이를 위해서는 첫째,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둘째, 회개하며 셋째, 첫째가는 사랑을 가지고 헌신하기를 힘쓰자. 이제는 당신에게서 ‘눈물’을 되찾고 ‘감사’를 되찾고 ‘헌신’을 되찾자. 이제 우리들도 다시 주님을 찐하게 사랑하고, 또한 서로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도록 하자.
오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꼭 거쳐야할 두 번째 관문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두 번째로 언급된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계2:8~11).
먼저, 서머나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였는지부터 살펴보자. 놀랍게도 서머나 교회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교회의 예배당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일한 교회다. 다른 여섯 교회는 전부 다 허물어져 교회의 터와 흔적만이 남아있는데, 현재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3대도시에 해당되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 그대로 남아있다.
여러분은 ‘서머나’라는 도시의 현재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즈미르’라는 도시다. 그런데 ‘서머나’ 혹은 ‘이즈미르’라는 뜻이 놀랍게도 ‘몰약’ 혹은 ‘씀’ “고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이 교회가 어떤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인지를 미리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름이 등장할 때에는 거저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이 교회는 A.D.100년경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의 핍박받는 교회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서머나 도시는 굉장히 오래 된 도시이고 번성하는 도시였다. B.C.1,000년경에 헬라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B.C.600년에 리디아인들의 침입으로 그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B.C.290년경 알렉산더의 장수인 리시마쿠스가 다시 재건하여 조각같이 아름다운 도시로 재탄생했다. 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난 듯이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시면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아마도 이 도시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도시에 세워진 서머나 교회가 그때 겪고 있는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계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그렇다. 주님은 이 도시에 자신을 소개할 때 ‘처음이자 마지막(끝)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주님께서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라는 말은 주님이 모든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시자 끝맺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주님은 시작자 즉 모든 일의 창조자이면서 또한 종결자 즉 완성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이 소개가 정말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 말씀하신다. 그분은 죽었다고 해서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혹시 주님 때문에 고난받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려주실 테니까 말이다.
그 주님께서 또한 그 교회를 잘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겪고 있는 고통을 잘 알고 계셨다. 사실 서머나 교회는 3가지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하나는 환난이요 또 하나는 궁핍이요 또 하나는 고난이었다. 여기서 ‘환난’이라는 말은 지금 교회가 겪고 있는 정신적인 어려운 상황을, ‘궁핍’은 물질적인 곤란을, ‘고난’은 주님 때문에 받는 엄청난 핍박을 뜻한다. 이것은 나중에 살펴보게 될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는 정반대다.
대체 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종교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요인때문이었다. 우리들에게도 아마 그럴 날이 올 것이다. 첫 번째는 그들이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소아시아의 도시 가운데 로마의 우상과 황제숭배에 제일 앞장선 도시였다. 특히 B.C.195년에는 로마의 여신(Dea Roma)의 신전을 바고(Pargus)라는 산위에 건립했으며, A.D.23년에는 로마 황제 디베료(Tiberius)의 신전을 세웠던 도시다. 그렇다면 왜 이 도시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게 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을까? 그것은 그 도시 사람들 전부가 로마의 신전과 황제의 신전을 찾아가 경배를 했지만 기독교인들만큼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 도시 사람들이 그 신전에 경배를 한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활동을 위해서는 ‘길드’라는 상업조직에 가입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만 그 자격을 부여했는가 하면 그 신전에 가서 경배하고, 로마 황제더러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그렇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 로마에서는 그 도시에 세금 면제 혜택도 주고, 도시발전자금도 대주고, 상업활동도 안전하게 보장해 주는 등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찌 우상에게 경배하겠으며, 예수님 이외에 사람을 주님이라고 칭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상업 활동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들은 경제적으로 아주 곤란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자칭 유대인 때문이었다.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유대인들 중의 상당수가 대거 서머나까지 이주해 왔는데, 이들은 그 도시의 발전을 위한 엄청난 액수의 돈을 헌납하면서 로마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는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데 같이 동참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들이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사탄의 무리라고 말씀하셨다(9절). 그런데 서머나 교회가 겪어야할 고통은 거기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다.
계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들에게는 앞으로 겪어야 할 고난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신다. 언젠가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서머나 교회의 성도 일부를 붙잡아 감옥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인지 도미시안 황제(A.D.81~96) 때에는 로마황제를 모독했다고 잡아 죽인 성도들의 수가 무려 4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과연 훗날 죽어서 천국갈 수 있는 성도란 어떤 자일까? 당신은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인가? 아니 죽음은 좀 제쳐 놓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물질적인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낼 수 있는가? 천국, 쉽게 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기들은 환난을 받기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환란전 휴거’를 외치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과연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마24:21-22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성경은 모든 성도가 환난을 겪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환난 후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마24:29~31). 우리들 중에는 죽음으로서 그 환난을 통과해야 할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신다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그 말씀이다. 환난을 받지 않고 훌쩍 휴거되어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미혹에 속지 말라. 당신은 이러한 환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환난의 기간이 ‘열 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열 흘’이란 일천년이라는 시간과 비교하면 아주 짧은 기간을 가리키는 숫자다. 그 기간은 얼마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몇몇 사람은 죽음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서머나 교회가 그랬기 때문이다. A.D.156년 그 교회의 사도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이 그렇게 해서 빌라델비아 성도 11명과 함께 불에 타서 순교했다. 그리고 내일 보게 될 버가모 교회의 감독 ‘안디바’ 목사님도 그렇게 화형당해 순교하셨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험이 과거에 한 번 있었다.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에,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핍박을 모면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라고 타협한 채 그 예식에 앞장서서 뛰어들었다. 하지만 분연히 그것을 거절하고 5년 4개월 동안 죽기까지 맞선 자가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이시다. 당신은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말씀 ‘일사각오’라는 설교를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외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이외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이런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차례다. 그 사람에게는 생명의 승리관을 씌워주시고, 둘째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다(10~11절). 이는 그를 절대적으로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신자의 길이요, 천국 길이다. 핍박 앞에서 결단코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기왕 당신이 그것을 받아야 한다면 감사함으로 기꺼이 받으라. 그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마10:28). 누구든지 자기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면 주께서 얻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마16:25).
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 ||
| [제목]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 [찬송] 찬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
| [말씀] 계2:12~17(신약 401면) | 2013.9.4(수) |
어제 우리는 소아시아의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에게 주셨던 천상에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교회는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거절한 것 때문에 엄청난 환난과 궁핍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영적인 부자라고 칭찬해 주셨다. 더불어 장차 그들에게 감옥에 갇히는 고난이 찾아오겠지만 그것을 결단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닥칠 고난은 몇몇 사람에게만 있을 것이며, 그 고난의 기간도 아주 짧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주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면 과연 우리에게 뭐라고 하실까? 첫째는, 에베소교회처럼 “처음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고 둘째, 서머나 교회처럼 “고난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또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오늘 우리가 살펴볼 세 번째 교회는 소아시아의 행정상의 수도 버가모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다. 버가모(일명 ‘페르가몬’ 혹은 ‘페르가모스’) 지역은 선사시대의 유적이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였는데, 이 도시는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던 시기에 가장 융성한 도시였다. 그때 지어진 거대한 도서관에는 약 20만권의 도서가 있었다. 이 도시는 아탈루스 3세(Attulus III)가 통치한 후 B.C.133년 로마제국에 넘겨졌는데, 그로 말미암아 로마의 보호아래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을 누리는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B.C.29년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신전과 로마의 여신의 신전이 건축되었고, 계속해서 로마의 주신(主神) 제우스 신전과 아테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로마황제 트라얀 신전이 세워졌다. 특히 그 도시는 아스클레피오스(Aesclepios)라는 뱀 신을 숭상했는데, 그들은 그 신을 치료의 신으로 믿고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버가모 교회는 일찍부터 뿌리 깊게 형성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도 이 도시를 ‘사탄의 보좌’가 있는 도시라고 말씀하셨다(13절). 다시 말해 버가모 지역은 사탄이 자신을 왕이나 심판자와 같이 그 도시에 권세를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귀한 칭찬을 듣는다. 왜냐하면 버가모 교회가 사탄의 보좌가 있는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아서 주님의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순교할 때에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심한 핍박 속에서도 버가모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 곧 주님을 배척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충실히 의지했으며, 향을 태워 황제를 숭배하라는 압력과 황제를 주(主)라고 시인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버가모의 감독인 안디바가 순교하는 날에도 그들 자신의 믿음을 잃어버리지 아니했던 것이다. 안디바(Antipas)는 로마의 도미시안(Domitianus) 황제 때에 황제숭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당했지만, 불에 벌겋게 달군 놋쇠 황소 위에 얹혀져 죽임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교회를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과 책망이 여기에도 있다. 그것은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 중 일부가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가모 교회의 한 편에서는 안디바와 같은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발람의 교훈들을 지키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버가모 교회 가운데는 극단적인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돈에 매수된 악한 선지자의 대명사다. 그는 민22~24장에 등장하는 선지자로서, 처음에는 모압왕 발락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아니했지만 돈을 준다고 하니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예언을 선포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입술을 막으셨기에 저주는 선포하진 못한다. 그런데 돈을 받았으니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시킬 방법을 살며시 알려준다. 그 방법은 바로 모압 여인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행음하게 하고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민25장, 민31:16).
여기에서 버가모 교회가 발람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은 곧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의 맨 앞에 섰던 버가모 도시가 벌인 이방신의 축제에 버가모 교인들이 참석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발람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곧 니골라당의 가르침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발람’이라는 말과 ‘니골라’라는 말이 각각 히브리어와 헬라어로서 그 의미가 똑같은 뿐더러, 그들의 주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골라당은 어떤 거짓된 가르침으로 버가모 교회에 치고 들어왔을까? 당시 버가모 교회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었을 것으로 여러분은 생각하는가? 그것은 황제숭배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그 도시에서 살 수 없는 상태에서 버가모 성도들도 그 도시의 사람들처럼 상업행위를 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돌파구 필요했다. 바로 그것을 해결해 준 것이 ‘니골라당’이다. ‘니골라’라는 사람에 의해 시작된 니골라당 사람들은 구원은 영적인 깨달음과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듯이, 육체를 통해 행해지는 죄는 결코 죄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은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고, 육체로 간음을 저질러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미 영적으로 거듭나 구원받은 자는 육체에 어떤 죄를 저질러도 이미 받은 구원을 뒤집을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진정 주님께서 미워하는 사탄의 교묘한 술수라는 것을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발람의 가르침을 지키는 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도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데, 만약 황제의 동상이나 우상에게 절하지 않거나 향을 피우지 않는다면 경제활동을 도무지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육신적으로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이나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자라면 응당해야 하는 ‘도시규범’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협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핍박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거짓 논리이자 거짓 가르침인 것이다. 이것이 결국 교회를 타락하게 만들고 구원에서 떨어지게 만든다. 에베소 교회가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경우라고 한다면, 버가모 교회는 이와는 반대로 사랑과 포용을 앞세우다보니 정통신앙을 왜곡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수용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가 잘못된 길로 나간 것처럼, 버가모 교회도 잘못된 길로 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주님은 이 교회를 향해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으로 그들을 치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12,16절).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결단코 가만 두지 않고 그들을 갈라내어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여러분도 그들처럼 타협하지 말라.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명목하에 거짓된 이단적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은 주님의 심판만 재촉할 뿐이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서도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일제가 원하는 신도세례를 받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결정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전부다 완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서슬 퍼런 핍박과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 교단 총회에서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그것은 ‘국민의례’의 행위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적인 발람의 가르침이자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교회에 불순물이 들어오게 해서는 아니 된다. 교회에 거짓된 가르침이 들어오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주장하는 성도들을 그래도 포용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서 하나 둘씩 수용하다보면 결국 교회를 타락하게 되고 구원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이단적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고 그것을 거절하고 신앙적 지조를 지키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2가지 선물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는 ‘감추었던 만나’요 또 하나는 주님의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다. 여기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는 것은 세속적인 유혹 속에서도 지조있는 신앙을 지키며,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런 자에게는 다른 사람은 결단코 맛볼 수 없는 음식을 주시겠다는 것이 선언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그들만큼은 반드시 참여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일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시겠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새로운 소유로서 그들만큼은 천상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시겠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시 흰 돌은 기쁜 날 경축일에 공식연회에 참여할 수 있는 표 대용으로 사용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이는 비록 순결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축제에는 참여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늘의 축제에는 반드시 참여할 초대권을 주시겠다는 선언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불순물을 섞지 말라. 거짓된 이단적 가르침을 수용하지 말라. 또한 그런 자들을 교회에 용납하지 말라. 사람의 영혼을 생명책에서 도려내는 주님의 예리한 칼이 무섭지 않은가!
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 ||
| [제목] 거짓 지도자를 삼가라 | [찬송] 찬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
| [말씀] 계2:18~29(신약 401면) | 2013.9.5(목) |
얼마 전만 해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줄로만 알았다. 왜냐하면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은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우리 자신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아주 적다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마7:13~14). 아예 처음부터 우리가 그렇게 배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형통과 축복을 받기 전에 오히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견뎌내야 하는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지난 3일동안 믿음이 내포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았다. 하나는 처음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고난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세상과 타협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제 4번째 요소를 배울 차례다.
자, 방금 우리가 읽었던 말씀은 소아시아에 있는 ‘두아디라’라는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 ‘두아디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아닌가?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요한계시록 말고도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도시다. 사도행전에 보면, 두아디라에서 살고 있던 ‘루디아’라는 자주옷감 장사가 마케도냐의 빌립보까지 옷감을 팔러왔다가 사도바울의 전도를 받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 그 도시는 옷감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현재는 아킷사르(Akhissar)라 불리우는 이 도시는 고대 무시아의 수도로서,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하여 ‘두아디라’라는 이름이 붙혀진 곳이다. 이 도시는 카이쿠스 계곡과 허마스 계속 사이에 자리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무역이 번창하였고 많은 무역상인들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털실 제조업, 아마포 제조업, 외투 제조업, 염색업, 피혁업, 옹기제조업, 빵제조업, 청동 제조업 등이 성행하는 도시였다. 종합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직업이 옷감으로 먹고 사는 그런 도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도 다른 여느 도시처럼 우상숭배가 가득했는데, 특히 이 도시에서는 시(詩)나 음악 그리고 예언이나 의술을 주관하는 신으로 추앙받던 태양신 아폴로(Apollo)를 숭배했다. 아폴로 신은 제우스 신의 아들로서, 각종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합원들의 수호신으로 간주되었고 이 도시에는 이 신을 숭배하는 축제행위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도시에서는 황제숭배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박해는 없었다. 다만 이 도시는 아폴로 신전 말고도 아르테미 신전, 삼바타 신전, 헬리오스 신전 등이 우후죽순 격으로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이 도시 전체가 온통 우상숭배를 하는 도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서 제조업이나 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여러 동업조합에 가입해야 했고 그들의 수호신을 섬기며 그것과 결부된 음란한 축제에 참가해야 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우상에 바쳐진 제물과 음식과 술을 나눠먹고 신전의 여사제들과 음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만일 그들 조합원의 수호신을 숭배하는 것을 거부라도 하는 날에는 조합에서 추방되기에 이르렀으며 곧 제조업 뿐만 아니라 상업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교회는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랑의 수고와 믿음과 그리고 인내의 열매들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그들이 비록 곤란한 삶을 살았지만 점차 주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어 나중에는 그들이 처음보다 훨씬 더 많은 복을 받게 되었다(19절).
그런데 그 교회에 아주 엄한 주님의 책망이 있었다. 그것은 영향력있는 한 명의 지도자 때문이었다. 얼마나 주님께서 화가 나셨으면 자신을 ‘그의 눈이 불꽃 같고 그의 발이 빛난 주석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까?(18절) 그의 눈이 불꽃 같다는 말은 주님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어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뜻이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를 주님께서 반드시 밟아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이 교회는 버가모 교회보다 한 단계 더 우상숭배하는 교회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버가모 교회가 발람의 교훈 내지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면, 이 교회는 그러한 가르침을 주장하는 사람이 그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고, 그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주의 종들도 그러한 가르침을 따라서 행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 교회의 사악한 지도자를 일컬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라고 말씀하셨다(20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도 않았지만 자기가 하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 여자는 ‘자칭 선지자’였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호리고 또한 넘어뜨린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녀는 간교한 ‘음녀’였으며, 마지막으로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에 시집와서 북이스라엘 전체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의 부인인 이세벨을 닮았다는 측면에서, 그녀는 ‘이세벨’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녀의 주장이 얼마나 사람들을 홀렸으면 그녀를 지도자로 칭송하면서, 그녀를 따라가는 주의 종들이 부지기수였을까 하는 점이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몇몇 사람만 그런 가르침을 따랐던 상태였다고 한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 우상숭배를 겁 없이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조합원의 친목도모를 위해서는 우상을 숭배하고 그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먹으며, 음란한 행위를 갖는 것이 오히려 성도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그럴싸한 교리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의 종이라는 자들까지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었고, 음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또한 그녀와 더불어 음행하는 주의 종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있다(21절).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은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이런 것들은 결단코 친목도모 행위가 아니며, 국민의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저주를 불러들이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 십계명을 보라. 그리고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보라.
출20:4-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행21: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고전10:19-21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잘 모른다.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음행을 저지르게 되면, 본인은 질병으로 병상에 눕게 될 것이고(마9:2,6, 막4:21, 7:30, 눅5:18, 8:16, 17:34, 행5:15), 그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은 환난에 던져지게 되며, 자기의 자녀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22~23절). 이것이 바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들이 받는 징계다. 하지만 이것은 그나마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의 거짓 지도자 이세벨과 그녀를 따르는 무리들은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의 행위를 불꽃같은 눈으로 예의주시한 다음 반드시 주석같은 발로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성도들 중에 일부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사탄의 은밀하고도 비밀스런 행위들에 참여하지 않는 이가 있다고 칭찬하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만약 그들이 주님재림시까지 이러한 신앙을 끝까지 지킨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첫째로, 장차 도래할 세상에서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 하신다. 그리고 둘째로, 새벽별을 주시겠다 하신다(26~28절). 철장을 가지고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는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는데 그와 똑같이 주시겠다는 말씀이며, 예수님처럼 새벽별과 같은 영광(단12:3, 고전15:41, 계21:7)을 그들에게도 주시겠다는 뜻이다.
지금은 미혹의 시대다. 이제는 거짓 사도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해야 한다. 그것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을 허용하는가의 여부다. 한국교회 안에도 이미 추도예배와 장례예배 속에 이런 규례가 정례화되어 있다. 이제는 걷어내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우리가 징계를 받지 않을 뿐더러 천국에서도 예수님과 더불어 만국의 통치자로서의 영광을 차지하는 성도가 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 ||
| [제목] 이중적인 삶에서 돌이키라 | [찬송]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
| [말씀] 계3:1~6(신약 401면) | 2013.9.6(금)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뼛속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기는 자가 되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여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4일동안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이 가지고 있는 4가지 속성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처음 사랑으로 사랑하라.” “고난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거짓 지도자를 삼가라.”가 그것이다. 오늘은 그 다섯번째의 시간으로서 소아시아에 있는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으로서 “이중적인 삶에서 돌이키라”이다.
사데(Sardis).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서, 현재 터키지역에 속한 이 도시는 B.C.700년경부터 B.C.546년까지 약 150년간 루디아(Lydia)의 수도로서 상당히 큰 영화를 누린 도시다. 특히 이 도시는 상업적으로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특히 염직 공업과 양털 염색, 사금채취가 유명하여서 사치와 부을 누렸지만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A.D.2세기경에 그만 도시 자체가 없어지는 비운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 도시는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성채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되어 있었기에 즉 남쪽 벽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암벽으로 되어 있었기에 이 도시의 주민들은 상당히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도시는 어린아이들이라도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안일한 생각 때문에 그 도시는 두 번씩이나 갑작스럽게 함락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즉 B.C.546년에는 페르시아와 왕 고레스(Cyrus)가 이 도시를 침입하였는데, 사데의 군대가 자신들의 유일한 접근로라 생각한 곳을 방비하고 있는 동안, 페르시아 군대는 다른 절벽을 타고 기어올라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그 도시는 완전히 초토화 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350년 후에도 헬라의 안티오쿠스 대제(Antiochus the Great)도 같은 방법으로 그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보면 이 도시의 입구에는 온통 무덤들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도 만약 사데 교회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도둑처럼 오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3절).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자신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시며, 그 교회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셨을까?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렇다. 주님은 완전한 일곱 영들로서 교회와 말씀의 전달자를 감찰하시고 계신데, 사데 교회는 살아있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그 도시 사람들은 자신이야말로 가장 안전하다고 주장했지만 그 도시가 갑자기 공격받아 망하게 된 것처럼, 사데 교회도 꼭 그와 같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데 교회, 언제 누가 세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교회가 ‘위대한 어머니’라고 불리는 시벨레(Cybele)라는 거대한 신전 옆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시벨레 신전은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처럼, 여타의 다른 도시 신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한 신전이었기에 모두가 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신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도시도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하고 있던 도시들 중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그 옆에 나란히 위치해 있는 사데 교회는 왜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을까? 한 마디로 그 교회 성도들이 이중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주일이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상업과 제조활동을 통해서 얻은 물질의 십입조를 꼬박꼬박 하나님께 드렸으며, 구제헌금도 하곤 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신앙생활은 별로 흠잡을 데가 없이 보였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서 온전한 것을 하나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2절). 그랬다. 그들이 교회에 와서는 예배생활, 헌금생활, 구제생활, 전도생활, 봉사생활도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다 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 밖을 나간 다음에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교회에 나올 때에는 흰 옷을 걸치고 들어왔지만 그들이 교회 밖을 나갈 때에는 연회장의 옷으로 갈아입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들은 흰 옷을 벗어던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몸이었지만 시벨레 신전에 가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과 술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먹고 마셨으며, 신전 여사제들과 음란한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그것도 교회의 몇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일이 되면 꼬박꼬박 교회에 나갔고, 입에 발린 말로 “주여, 우리 세상에 나가 죄짓고 살았나이다. 세상에 살다보니 어쩔 수 없었나이다. 용서해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얼마나 그들이 세상에서 죄로 물들어 버렸으면, 사데 교회에는 자신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자가 겨우 몇 명뿐이라고 주님께서 한탄하셨을까?(4절).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자 몇 가지 해결방안을 말씀해 주셨다. 첫째, 깨어 정신차리라 하셨다(2a절). 정신 차려서 아직까지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들 즉 죽어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들을 견고하게 하라 하셨다. 그리고 둘째, 그들이 처음에 복음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해보라 하셨다(3a절). 그들은 결코 이중적인 삶을 살라고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때 자신의 과거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주님을 믿기로 결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받을 때에 들었던 복음을 쉬이 잊어버리고는 세속의 유혹과 죄악을 끊지 않고 도로 그리로 들어갔던 것이다. 셋째, 처음에 들었던 복음을 이제 지켜 행하고 그들의 이중적인 삶을 회개하라 하셨다(3a절).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대지 말고, 이제는 주님께서 원래 말씀하셨던 우상숭배 행위를 그치고, 우상의 제물도 먹지 말고, 음란을 끊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도둑같이 임하여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3b절). 이 일을 어찌하랴! 이러한 책망이 어찌 사데 교회에만 해당되겠는가!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 교회에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흰 옷을 입고 다니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몇몇 성도들이 있었다. 그들의 세속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 깨끗하고 성결한 삶을 살려고 했던 것이다. 혹시 조금이라도 잘못된 마음이나마 가졌던 날에는 주님 앞에 나아가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었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피로 그들의 죄를 씻어주시어서 그들에게 다시 흰 옷을 입혀주셨던 것이다.
계7:13-14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 성도들이 비록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지만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산다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첫째, 천국에서 흰 옷을 입혀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둘째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다. 얼마나 그들이 세속화되어 버리고,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해버렸으면, 아니 얼마나 죄를 짓고 세상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살았으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워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실까? 여러분은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우고 계실 주님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았는가? “내 백성이, 아니 내 자녀가 나를 믿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았거늘, 어찌 다시 죄악에 다시 빠져서 죄짓기를 밥먹듯이 한다는 말인가!” 주님에서 흐르는 피눈물이 보이지 않는가! 셋째,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고 하신다. 이미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어도, 우상숭배와 음행을 계속 저질러서 양심을 화인을 맞은 사람처럼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사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겠다고 하시겠는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갈 곳은 과연 어디라는 말인가?
주님은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속을 살피시는 이시다. 이제는 그분 앞에 정직하라.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있다고 하라. 없는 것처럼 속이지 말라. 주님 앞에 다 내어놓고 용서를 빌라.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말라(요8:11). 그래야 하늘에서 흰 옷을 입게 될 것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 이름이 하늘에서 불려질 것이다. 그래야 한다. 성도들이여,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아멘.
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 ||
| [제목] 주님 말씀에 신실하라 | [찬송] 찬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
| [말씀] 계3:7~13(신약 402면) | 2013.9.7(토) |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믿음의 마지막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간다. 왜냐하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굳건히 지키고 주님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이기는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님께서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주님께서 지금 이곳에 오셔서 말씀을 들려주신다 해도 주님께서는 그때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들을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주실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들을 정리해 보면, 각기 교회들마다 다른 평가가 나온다. 교회들마다 때로는 칭찬을 듣기도 하고 엄한 책망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 믿음을 가진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에게 주신 말씀은 2/3가 책망이고, 1/3이 칭찬이다. 이는 마지막 때에 가까울수록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어질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를 생각나게 한다.
오늘은 이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 여섯 번째에 해당되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은 ‘붉은 토양의 도시’이자 ‘하나님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알라세히르(Alasehir)’가 바로 ‘빌라델비아’라는 도시다. 헬라어로서 ‘형제사랑’이라는 뜻을 지닌 작은 도시, 사실 이 도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역사가 짧은 도시다. B.C.159~138년 버가모 왕 아탈루스 II 필라델푸스(attalus II Philadelphus)가 버가모의 동부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전초기로 세운 도시가 바로 이 도시이다. 그런데 이 왕에게는 유메네스(Eumenes)라는 형이 있었는데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깊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도시를 형제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라 불렀다고 한다. 형제사랑,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이기도 하다(요13:34~35).
한편 이 도시는 무시아(Mysia)와 루디아(Lydia) 그리고 브루기아(Phrygia) 사이에 위치했기에 교통의 요충지로서 동방으로 가는 모든 자들은 이 도시를 통과해야 했다. 다시 말해 상인들이라면 이 도시를 반드시 거쳐가는 동방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도시로 연결된 길목에 많은 도적떼가 출몰했고 그래서 밤이 되면 이 도시의 성문은 절대 열어놓지 않았다 한다. 그런 탓에 주님께서도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7b절)”이라고 소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예수님은 또한 자신을 ‘거룩하신 이’ ‘진실하신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소개하신다(7a절). 당시 그 도시의 성문은 성문지기가 열었겠지만 하늘에 들어가는 천국의 문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이 여시겠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도시의 특산품이 포도와 포도주였다는 사실이다. 이 도시의 근방의 토양이 포도를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시의 특징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 도시는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술의 신이자 식물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us)’신을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는 직물과 피혁, 농업과 상업까지 골고루 발달한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도시를 ‘작은 아테네’라고 불렀는데, B.C.133년 버가모 왕이 이 도시도 로마에 바친 이후 수많은 헬라의 신전이 세워졌고 많은 이교적인 행사가 치러졌다고 한다. 그러니 이 지역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사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임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 도시가 지진이 빈번이 일어나는 지역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A.D.17년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지진으로 말미암아 인근 12개 도시가 파괴되었고, 이 도시는 그야말로 폐허더미가 되어버렸다 한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 도시 밖으로 도망쳐 나왔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 자기들의 집들은 온통 다 무너져 있었고, 신전의 기둥 몇 개만 덩그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점차 부자들은 이 도시 밖으로 나가서 살게 되었고 가난한 자들만이 이 도시에 남아 살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그 도시가 로마에게 바쳐진 도시인지라,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A.D.14~37)가 그 도시를 재건하면서 ‘새로운 황제’라는 뜻으로 ‘네오 가이사랴(Neo Caesarea)’라고 명명하였고, 그 후에 베스파시안 황제(A.D.69~79) 때에도 그 도시를 또다시 재건하고는 ‘플라비아(Flavia)’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바로 이러한 도시 한복판에 세워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중에는 부자도 없었고 사회적으로는 높은 신분을 가진 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교회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오로지 칭찬만 들려주신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왜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 자, 그럼 그 이유를 살펴보자.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왜냐하면) 네가 작은(거의 없는)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핍박이 있었고 이들에게도 다른 교회들처럼 상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우상숭배의 종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상 앞에 끝까지 자신의 무릎 꿇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이자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기록에 보니,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 순교할 때에도, 빌라델비아 성도들 11명이 같이 순교했다 한다. 그러니 우상숭배와 황제숭배가 이 지역에서도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랬었다. 이 교회 성도들은 별 볼 일 없는 자들이었고 부자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온전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 실천하였고 어떠한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더욱더 주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며 살았던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이들을 핍박으로 몰아넣은 현장에는 유대인들의 고발도 같이 있었던 것이다(9절). 서머나 교회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사탄의 모임’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작 언젠가는 모든 열방이 자기들을 공경하고 섬기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슥8:22~23), 자기들만이 천국문을 열고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니(마23:13) 그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그 하나님을 거부했으니 그들이 어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그때는 사탄의 무리로서 빌라델비아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빌라델비아 성도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9b절), 진짜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A.D.100~160년 사이에 그들 중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목하는 것은 “작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주님의 언급이다(8b절). ‘작은 능력’. 원문에 보니까 ‘거의 없는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말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신앙을 보였던 것이다. 비록 작고 작은 살림살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찬식용 포도주를 빚어내어 무료로 이웃의 교회들에게 해마다 공급했다고 하니 그들의 주님사랑과 형제사랑의 마음은 놀랍기만 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만큼은 천국으로 들어오는 문을 항상 열어두시겠다고 약속하신다(8a절). 그리고 그들이 끝까지 주님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산 것 때문에, 그들에게만큼은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시험하는 시험의 때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0절).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앙을 굳건히 지키기만 한다면,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1절). 작은 능력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그들이 주님말씀을 붙들었으면 주님께서 그러한 약속을 하셨겠는가!
더욱이 주님은 마지막에 가서 그들에게 2가지 약속을 더 해 주신다. 그것은 훗날 그들이 하늘에 들어가게 될 때에, 첫째, 하나님의 성소에 기둥이 되게 해주시어 결코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2a절). 지진이 나기만 하면 얼마나 밖으로 뒤쳐나가기가 바빴던 그들이었던가!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결단코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해주실 것이며, 지진에도 넘어지지 않고 있던 기둥처럼 그들을 견고히 붙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신다. 둘째, 그들에게 3가지의 이름 즉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및 예수님의 새 이름을 그들의 이마에 기록하시겠다고 하신다(12b절). 이는 곧 그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이자 예루살렘의 시민이요 예수님의 소유임을 인쳐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이 부럽지 않은가? 우리 동탄명성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을 사랑해서 형제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말씀에 끝까지 충성했던 빌라델비아 교회, 우리는 그 이름을 잊지 말자.
2013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 ||
| [제목]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 | [찬송] 536장 죄짐에 눌린 사람은 |
| [말씀] 계3:14~22(신약 402면) | 2013.9.8(일) |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정말 놀랍기만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갔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교회는 이단이 빠지지 않을까 하여 정통교리를 붙잡다보니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다시 상기하라 하신다. 더욱이 서머나교회는 우상숭배와 황제숭배를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던 교회다. 그래서 경제적인 궁핍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핍박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럴듯한 거짓 가르침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에베소교회는 그런 것들이 아주 작았다. 하지만 버가모교회 및 두아디라교회는 바로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들이 세력을 확장하더니 교회의 주된 위치를 선점해 갔다. 당시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한편 두아디라교회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교회의 지도자가 앞장서서 주의 종들에까지 거짓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하랴!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믿을 때에는 기적같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야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구세주이신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사탄의 공격과 유혹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합당한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때부터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때부터 사탄이 교묘히 가르치는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그리스도인이 받는 복은 그릇이 준비된 다음에 부어지는 복이다. 그 복은 점차 훈련이 되어서 그릇이 준비되어감에 따라 받는 복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안정을 이루게 되는 복이다. 그때 일확천금으로 유혹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다. 그때,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불어오는 고난과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내야 하고, 조상제사나 추도예배같은 우상숭배행위를 버려야 비로소 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때 핍박을 모면해 보기 위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사람들이 쓰는 방법까지 동원하여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도들이여, 이때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세상적인 방법이 교회에 들어와 불순물이 섞이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하지만 실제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바보취급 당하기 일쑤다. 적당주의와 타협주의가 교회 안방까지 점령하고 있는지 자신을 들여다보라. 우리는 그러한 교회를 ‘사데교회’라 칭한다.
사데교회. 그들은 이중적인 신앙생활의 대명사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인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 밖을 나서는 순간 그들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왜 그럴까? 세상의 우상에게 제사하고 음행까지도 즐기기 위해서다. 그들의 옷을 보라. 즐기기 위한 연회장의 옷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 주일이면 어김없이 흰 옷을 맞춰 입는다. 그렇지만 교회에서는 그가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 말은 하지만 그들이 진정 관심갖고 있는 것은 사람들로부터의 칭찬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미 기록된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시고 있다고 말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순간 그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하지만 복음에 합당한 삶을 버리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그의 이름이 지금 지워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마치 사데교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얼마 되지는 않아도, 이 땅에 빌라델비아교회의 성도들을 남겨두셨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유층에 속한 자들도 아니다. 비록 작은 능력밖에 가진 것이 없어도, 그들은 자신이 가진 아주 작은 것이라도 형제와 함께 나누며 사는 자들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두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던가!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소아시아의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과 흡사하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데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교회다. 이중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대명사였던 사데교회는 그래도 그 교회 안에 소수이지만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단 한 군데도 칭찬들을 만한 여지가 없는 지금의 현대교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판단착오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17a절)”라고 생각했다.
라오디게아. 그 도시는 에베소에서 동방으로 통하는 무역로의 교차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 어떤 도시보다도 이 도시는 상업활동이 왕성한 도시였다. 그러니 소아시아 가운데 유일하게 큰 은행을 가지고 있었고, 그 사업만으로도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도시는 흑양모로 짠 화려하기 그지없는 검정색 양털옷을 만들어 고가로 판매하는 도시였고, 그곳에서 생산되어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히트상품도 가지고 있었으니, 세계 최고로 각광받던 ‘브루기아 안약’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위치한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이미 발람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물들어 있어 우상숭배에 참여하거나 연회를 즐기는 것 정도는 친교모임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 도시에서 벌어들인 수입들로 인해 그들은 자신을 부요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다보니 그 교회 성도 중에는 그 도시의 높은 관직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를 생각한 것이다. 물질적인 부요를 곧 영적인 부요의 결과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너희들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아니하니, 내가 이제는 너희들을 토하여 내버릴 것이다(16절)” 그들은 완전히 차갑지도 아니했다. 그들은 완전히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지도 아니했던 것이다. 하지만 뜨겁지도 아니했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실천하며 핍박까지도 견뎌내는 성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 도시로부터 16Km 떨어진 ‘골로새’에서 차가운 냉수를 끌어오지만 하수도로 오다 보니 미지근해 버렸고, 이 도시로부터 11km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끌어오지만 또한 오다 보니 미지근해져 버리는 그 도시의 수돗물과 그들의 신앙이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실상을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비록 금은 많이 가지고 있으나 실제는 비참하고 불쌍하며 가난하기 그지없으며, 비싼 안약은 바르고 있으나 눈은 멀었고, 고급 흑양모를 걸치고 있으나 벌거벗고 있도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해결책을 마련하여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들려주신다. “그래도 나의 사랑하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아, 이제는 불순물이 제거된 순전한 믿음의 금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며, 자신의 상태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는 그래서 영적인 어둠을 제거해주는 예수 이름의 안약을 사서 바르고, 나 예수의 피로 너희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내어 너희들의 사치스럽고 더러운 흑양모 옷을 벗어버리고 내가 주는 속죄의 흰 옷을 입으라. 이제는 뜨뜻미지근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회개하여 돌이키라(18~19절).”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우상숭배하기 위한 연회가 아니라 하늘의 연회에 참석하여 먹고 마시게 해 줄 것이며, 세상의 높은 관직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보좌에 내가 이기고 앉은 것처럼 너희에게 앉게해 줄 것이니라(20~21절)”
우리는 그동안 몰라도 너무 몰랐다. 믿음에 부요한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속 마음은 세상적인 방법이라도 써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역겨움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물질적으로 부요해지고, 사회적으로 높은 관직을 얻게 되는 것이 진짜 복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주님없이 살게 되기 때문이다. 돌이켜야 한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권면의 말씀처럼, 믿음에 부요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자기자신의 더러운 옷을 빨아 희게 만들고, 보지 못하는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지라. 혹시 지금까지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거나, 눈에 보이는 축복만을 축복으로 알고 살아왔다면 이제는 안약을 사다 발라야 한다. 진짜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지도록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제는 혹 더디 가더라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보자. 그리고 주님의 방식으로 살아보자. 세상에서는 혹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진실로 성실로 살아보자. 주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축복을 최고의 덕으로 알고, 자신의 약함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자.
주님은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마음 가운데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있다. “이제 나는 네 마음 문 밖에 서 있다. 네가 문을 열고 아니 열고는 네 결정에 달려있나니,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연 자는 내가 들어가 그의 인생을 책임질 것이고, 그의 영혼도 책임질 것이며, 그의 먹고 사는 문제까지 책임져 줄 것이다. 이 시대를 향한 나의 호소에 너희 마음의 문을 열라. 너의 마음에 노크하는 나의 기다리는 이 애타는 마음을 기억하라. 그래서 천국에 꼭 입성하는 성도가 되거라.” 아멘.
2013년도
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호소(계1:11)”
1. 일시 : 2013.9.2(월)~7(토) 새벽5시30분
2. 장소 : 동탄명성교회 본당
3. 설교제목
9.2(월) 에베소교회에게 주신 말씀 - 처음 사랑으로 사랑하라(계2:1~7)
9.3(화) 서머나교회에게 주신 말씀 - 고난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라(계2:8~11)
9.4(수) 버가모교회에게 주신 말씀 -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계2:12~17)
9.5(목)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 - 거짓 지도자를 삼가라(계2:18~29)
9.6(금) 사데교회에게 주신 말씀 - 이중적인 삶에서 돌이키라(계3:1~6)
9.7(토) 빌라델비아교회에게 주신 말씀 - 주님 말씀에 신실하라(계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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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동탄명성교회 (031)61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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