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성령강림절(2)] 성도가 되었어도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고전14:1~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LamNf2cm3Ks [또는 https://tv.naver.com/v/36738564]
1. 들어가며
방언이란 무엇인가? 방언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하여 최소한 몇 가지 이론이 있다. 그중에 하나는 방언을 '외국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방언을 거듭난 사람이 말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라고도 말한다. 자신이 어떤 견해를 취하느냐에 따라 방언을 말하기도 하고, 말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왜 방언을 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방언을 믿는 자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셨으며(막16:17~18), 사도 바울은 방언을 성령의 신령한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방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방언을 말하게 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그리고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방언을 말할 수 있는가?
2. 방언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방언의 시작은 사도행전 2장에서다. A.D.30년 5월 28일 오전9시경에 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본 후,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을 받기 위해 다락방에 모여 합심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온 집에 가득찼다. 그리고 마치 불의 혀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머물러 앉았다. 그러자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러고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들로 발설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방언의 시작이다.
3.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였는가?
그렇다면 방언이란 어떤 것인가? 방언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주장하는 것을 간추려 보면, 첫째, 방언은 외국어다. 둘째,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셋째, 방언은 귀신들려서 말하는 소리다. 넷째, 방언은 고린도 현상이다 등으로 나뉜다. 그중에서 종교 개혁자의 전통적인 견해는 방언은 '외국어'라고 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럼,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순절 날 마가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했을 때에, 그것을 듣고 찾아온 15개국의 헬라파 유대인들(이방 지역에 살다가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던 유대인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언어('디아레크토')로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혹 옳은 주장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 120명의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들에게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말하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이 외국어라는 견해가 맞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들과 부딪혀야 한다.
첫째,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어떤 이는 갈릴리 사람들이 왜 아침부터 새 술에 취하여 술주정하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조롱했다는 것이다(행2:13). 만약 120명의 성도들이 진짜 외국어로 말했다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는 갈릴리인들을 이렇게 외국어를 잘하는지 몰라보았다면서 겸연쩍어 했어야 한다.
둘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서 보고 말씀을 전한 뒤에 그들도 역시 '방언(글로싸)'을 말하게 되었는데, 고넬료 가정의 방언을 두고서 베드로도 자신이 오순절 날 마가다락방에서 했던 바로 그 은사와 동일한 것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행11:17). 그렇다면 고넬료 가정의 사람들도 외국어를 말했다고 해야 한다. 그럼, 고넬료 가정의 사람들은 대체 누구 들으라고 외국어를 말한 것인가?
셋째,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오는 '다른 언어들'이란 단어를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헤테로스 글로싸(different tongue)'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혀 다른 종류의 딴 말(혀)을 가리킨다. 만약 이날 120명의 성도들이 '외국어'를 말했다면, '알로스 글로싸'로서 같은 종류의 다른 말(혀)을 했다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 4절에 의하면, 120명의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언어로서, 전혀 다른 언어들을 말했던 것이다.
넷째, 헬라어로 지방말을 가리키는 단어는 보통 '디아레크토'가 사용되고, 초자연적인 신령한 언어인 방언을 가리킬 때에는 '글로싸'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는데, 사도행전 2장 4절 말씀에는 '디아레크토'가 사용되지 않았고, '글로싸'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4.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오는 방언이란 진정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오는 방언 곧 120명의 갈릴리 출신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말했던 방언이란 대체 무엇이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성령을 받아 거듭난 사람이 할 수 있는 언어'로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영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말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이것이 초자연적인 영의 언어라고 말하는 것은 방언이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은 그들이 이전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언어(헤테로스 글로싸)'였기 때문이다(행2:4). 그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전혀 딴 종류의 언어를 말했던 것이다.
둘째,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은 얼핏 듣기에 술 취한 사람들의 언어처럼 들렸기 때문이다(행2:13).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120명의 성도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 같이 술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서 말한 것인데 들리기에는 그 말이 술 취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셋째,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은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자들이 말했던 방언(글로싸)과 동일한 종류의 방언이었기 때문이다(행10:46, 11:17). 고넬료 가정에 모인 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었다.
넷째,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은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안수할 때 나타났던 방언(글로싸)과 동일한 종류의 방언이기 때문이다(행19:6). 사도 바울도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이 임하여 바로 그러한 종류의 방언(글로싸)을 말했다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증언하고 있다.
다섯째,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글로싸)은 외국어가 아니라 신령한 은사라고 했으며(고전14:1~2), 이것은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외국어가 아니라 초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신령한 은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12:8~10).
여섯째,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글로싸)은 혼이 말하는 외국어가 아니라 영이 말하는 '영의 언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14:2,1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방언이란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14:2).
그렇다. 방언은 성령이 임함으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선물로서, 사람의 영이 살아나게 되었을 때에 자연 발로적으로 입으로 토해내는 영의 언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은 사람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 언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인 방언 통역의 은사로 통역하지 아니하면,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말에 해당한다. 고로 사도행전 2장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 역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언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그들의 방언을 듣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의 말(지방어)로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지금도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의 오지 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들의 언어로 말하지 않고 방언으로 말해도 그 오지의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듣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러한 방언은 꼭 영의 기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영이 드리는 기도 역시 방언의 한 종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고전14:14). 고로 방언에는 영이 주께 아뢰는 기도도 들어 있고(고전14:14), 영이 노래하는 찬양도 들어 있으며(고전14:15)(이것을 '방언 찬양'이라고 한다), 영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축복도 들어 있다(고전14:16). 그리고 영이 하나님과 비밀스럽게 나누는 대화의 방언도 있다(고전14:13). 한 마디로 거듭난 영이 발설하는 모든 종류의 말을 방언이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4:13).
5. 왜 거듭난 성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거듭난 성도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인 영의 언어인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7가지 이유들이 있다.
첫째, 방언은 외국어라고 하는 이론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둘째, 방언은 초기 교회나 혹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만 있었던 은사였고, 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론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셋째, 방언으로 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방언을 하려면 입을 벌려서 혀로서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데, 입을 벌리지 않거나, 속으로만 조근조근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려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자신의 혀를 성령께 맡기지 못한 채, 굳이 자신이 사용하던 언어로만 계속해서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방언은 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인데, 굳이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하려고 하니 방언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곱째,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귀신이 방언을 말하지 못하도록 혀를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혀를 보면 귀신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성령의 불을 사용할 줄 아는 은사자의 도움을 받아 혀에 붙어 있는 귀신을 태워 버려야 한다.
고로, 사람이 초자연적인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 방언을 외국어라고 알거나 방언은 중지되었다고 하는 이론을 믿기 때문이다. 둘째로, 방언은 혼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말하는 말의 은사인데, 영으로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귀신들이 방언을 말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사도 바울에 따르면 방언으로 말하면 자신을 건축하는데 매우 유용하다고 했다(고전14:4). 그리고 방언은 [주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였다(고전14:22). 그러므로 유대인들일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결코 방언을 말할 수 없었다. 고로 방언을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을 구분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예수께서도 부활 후,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방언에 대해 언급해 주셨다. 즉 모든 믿는 자들은 방언을 말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켜 '새 방언(카이노스 글로싸)'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존에 자신이 사용하던 언어('디아레크토')가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다른 언어('글로싸')인 것이다(막16:17~18). 그렇다. 주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난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들어가셔서 그 사람 속에 내주하신다. 그때 성령께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실 때에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조에')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러면 죽어 있던 사람의 영이 살아나게 된다. 그러면 그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의 표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에 항상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방언이 모든 신령한 은사의 기초가 되는 것이고, 다른 은사들을 가져오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약한 자신의 영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방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을 말함으로 자신에게 영적인 유익을 끼칠 수 있고, 주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도 활용할 수 있다.
2023년 05월 21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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