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목숨을 내 건 경배를 하려 했을까?(마2:1~12)

by 갈렙 posted Dec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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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fYy0ZwNULYA
날짜 2015-12-20
본문말씀 마태복음 2:1~12(신약 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경배, 예배, 예배자의 각오와 결단, 동방박사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유대인의 왕, 메시야의 탄생의 별, 이방인의 경배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의 탄생을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온 최초의 참된 경배자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였다고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수천리 떨어진 곳에서 유대땅까지 목숨을 담보로 한 순례길을 왜 선택했던 것일까? 동방박사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유대땅까지 가서 그 아기가 경배하고자하는 비장한 각오를 한 것일까? 거기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당시 동서방은 두 제국으로 갈리어 있었다. 서방은 로마제국이, 동방은 파르티아제국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유대땅에 로마의 황제가 거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굳이 동방제국의 제사장들이 유대땅까지 가서 그것도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축하해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자기나라의 왕이 태어난 것인가? 글고 하루 이틀 걸려서 다녀올 수 있는 짧은 거리인가? 그들은 그 머나먼 길을 몇 달을 걸려 왔다와야 하는데, 그 기간동안 자신의 일도 쉬고 자기 자리를 그저 비워도 되는 것인가? 또한 광야길을 오고가는 데에 아무런 위험도 없을까? 아니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그들이 대체 유대인의 왕에게 잘 보일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면, 순례길을 다녀오면 돈이라도 생김으로 그렇게 하려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숨을 건 순례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위험하고 험난한 길을 떠나게 만들었을까?


  먼저,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조금이지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 탄생 당시 동쪽에는 어떤 나라가 있었으며, 그들이 믿고 있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이제 예수님 당시의 동방 땅으로 가보자. 거기에는 당시 '파르티아'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었다. 이 제국은 아주 비밀스런 제국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자신의 역사를 기록으로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체는 주변 나라들의 기록에 의존할 수 없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파르티아 제국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제국을 이어받은 나라로서,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좀 더 크게는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제국(B.C.247~A.D.224)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나라는 약 450년간만 존속하고 없어졌다.


  그렇다면 파르티아제국 사람들이 믿었던 종교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조로아스터교라는 종교다. 이 종교는 '조로아스터'라는 사람이 창시한 종교인데, 배화교 혹은 마니교로 알려진 종교다. 약 B.C.500년경 조로아스터에 의해 창시되었다고는 전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이 종교가 유대교나 기독교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믿고 있는 신은 유일신이기 때문이다. 그 유일신이 선신과 악신을 만들었는데, 선신은 '아후라마즈다'며, 악신은 '아후리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신들 가운데 누가 승리하느냐 하는 것은 항상 인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알고 있었다. 즉 사람이 선신을 택한다면 선신이 이기게 되고, 악신을 택한다면 악신이 이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그들의 메시야 곧 '샤오쉬안트'가 오게 되면  선신의 승리로 완성된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그들이 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순례길을 떠났는지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바로 파르티아제국에서 온 박사들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의미가 닥터가 아니다. 그들은 '마고스'들이었다. '마고스'란 하늘의 별을 연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개인이나 국가의 장래를 점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그들은 천문학을 이용하여 왕의 자문을 담당하고 있던 고위직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날 자신의 직무를 내려놓고 유대나라의 왕의 탄생을 축하하러 갈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행동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발견한 별의 출현은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담보로 할 만큼의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했던 증언과 그들이 아기예수께 바쳤던 예물을 통해서 그 이유들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그들의 말을 살펴보자. 2절이다. 그들은 말했다. "유대인의 왕으로 이미 태어나 있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동방 땅 안에서 그의 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첫째 그들이 찾았던 대상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람이었다는 점. 둘째, 그 왕의 출생을 알려준 것은 '그의 별'이었다는 점. 셋째, 그들이 그 먼 곳까지 위험을 무릎쓰고 찾아온 것은 새로 태어나신 왕에게 경배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별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 별이 단지 어느 나라의 국왕의 탄생을 알려주는 것을 넘어, 온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위대한 인물의 탄생인 것을 알려주었다라는 점이다. 사실 파르티아 제국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받은 나라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 나라는 B.C.586년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나라였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별의 출현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욱이 그들이 준비했던 예물을 통해서 본다면 그들은 그분이 하늘의 왕인 메시야인 것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그들이 유대인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사야서의 예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에는 메시야의 탄생에 관한 여러 예언들이 빼곡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사야서 중에서  9장과 53장에 보면 거기에는 첫째, 새로 태어날 아기는 아들로서 왕일 것이라는 말씀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사9:6~7). 그래서 그들은 왕에게 드릴 합당한 예물을 준비했는데,  그것은 바로 '황금'이었다. 둘째, 새로 태어난 아기는 사람이지만, 전능하신 신적 존재라는 말씀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사9:6). 그래서 그들은 신성을 상징하는 '유향'을 선물로 준비했던 것이. 셋째, 그들은 그 아기가 낮고 천한 사람들의 빛이 될 것이며, 그 일을 위해 고난받고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사9:1, 53:4~5). 그래서 그들은 고난받고 죽을 메시야에 합당한 선물 곧 '몰약'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왜 죽음을 무릎쓴 여행을 감행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이 하늘에서 발견했던 별은 단순한 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온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인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둘째, 그 별은 자신의 종교에서 말하는 메시야의 별이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의 별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생일대에 한 번 접하기도 어려운 그 경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그분을 한 번 만나뵙고 경배드릴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무릎쓴 여행을 한 것이다.


  그렇다. 결국 그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세계 최초로 하늘의 왕에게 경배를 드릴 수 있었으며, 그분에게 합당한 예물을 드린 최초의 경배자가 될 수 있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찾아왔지만 유대인들은 단 한 사람도 합당한 경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 그에게 경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적어도 3가지 복을 받았다. 첫째, 그들은 여행중에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으며, 둘째, 허탕치지 아니하고 탄생하신 아기 왕을 정확히 찾아 그에게 경배드릴 수 있었으며, 셋째, 중간에 실수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실수마저 선으로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성도들이여! 지금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 어떤 경배,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이 한 번의 예배를 드릴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인가? 아니면 또 예배시간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드리는 예배인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걸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은 예배인가? 아니면 예배시간 1시간을 내기가 아까워 예배시간이 조금 길어지면 화를 치밀어오르는 예배인가? 우리를 구원하러오신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는 예배인가? 아니면 대충 준비한대로 그냥 호주머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드리는 예배인가? 먼 거리라 할지라도 메시야를 직접 뵈옵고 입맞출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드리는 예배인가? 아니면 내가 다니는 교회는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하면서 투털거리는 예배인가? 이제 다가오는 2016년부터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믿음이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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