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벗처럼 찾아오셨나(창18:16~33)

by 갈렙 posted Feb 0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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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QJnucJSl9VY
날짜 2016-02-07
본문말씀 창세기 18:16~33(구약 2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하나님의 방문,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끈질긴 기도, 강청기도, 중보기도의 효력

  B.C.2067년경, 하나님께서는 왜 직접 사람의 형체를 입고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던 것일까? 사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뭔가를 전달하시는 방편은 여러가지가 있다. 직접 음성으로도 말씀하실 수가 있고, 꿈이나 환상으로도 말씀하실 수가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천사의 몸으로 나타나 천사의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도 하신다. 그런데 구약시대 때에, 오직 영으로만 존재하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의 형체를 입고서 나타나신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다. 그러한 일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그 일은 바로 아브라함 때에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음성이나 꿈이나 환상이나 천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아브라함을 나타나신 것일까?

  신약시대 예루살렘교회의 장로이자 예수님 친동생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했다(약2:23). 하지만 구약성경을 읽어보더라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였다고 언급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칭함받았다는 대목을 창18~19장의 장면이라고 해석한다. 그렇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절대자로서의 신분을 잠깐 내려놓으시고 직접 사람의 육체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대화를 나누셨다. 이것을 두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능자요 절대자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것일까? 아니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만약 직접 만나서 친밀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셨다면 그날 그렇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필요가 없으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부르짖는 원한맺힌 절규가 크고 그 성 사람들의 죄악이 심히 무거우면 그냥 심판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부러 찾아가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면서,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성에 대해서 진짜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이 아니다. 실제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 곳은 헤브론의 고산지대다. 그리고 롯이 있는 소돔과 고모라는 해발 -400미터에 위치한 곳으로서 해수면보다 훨씬 낮은 곳이다.

  하지만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꼭 내려가봐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그곳에 있는 롯을 구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롯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성에 살고는 있지만 상한 심령을 가진채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의 죄악을 꾸짖으며 그 성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간구하고 있는 의인 롯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벧후2:6~10).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을 심판하기 전에 그를 구원해주고 싶으셨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구출을 위해 기도하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롯 자신도 그 성이 멸망당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 자기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롯도 그 성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부인도 그 성 사람인 것 같고, 벌써 출가한 딸들과 사위들이 그곳에 있는데 그들은 롯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롯을 구출해달라는 중보기도를 부탁하러 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일하시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로서 무엇인가를 요청해야만 하나님도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데에 인간의 요청이 없이 일을 하시면 하나님께서 마귀로부터 참소를 받게 된다. 그런데 장차 범죄한 천사들을 심판하셔야 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공의로 모든 일을 행하셔야 한다. 그런데 그 누구의 요청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롯에게 자비를 베풀어버린다면, 이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가 설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을 찾아와 의인인 롯을 구출해달라는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아브라함에게 청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 서 인간을 구원하고 싶지만 그것을 위해 중보하는 자가 있어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인간구원을 위한 중보기도의 요청과도 똑같다. 하지만 인간 중에 어느 누가 인간구원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자가 있었던가? 없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조차 자기들만 구원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뿐 이방인의 구원까지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되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할 것없이 다 구출해달라고 하는 중보기도가 필요했기에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방문한 목적과 이유를 즉각 알아차리게 된다. 곧이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면서도 긍휼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곧 롯의 구출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린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롯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에 그 성의 멸망 중인데도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두 딸들도 함께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우리의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룰 수 있으니 중보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우리의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중보기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진노중이라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될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중보기도하자. 가족 중 불신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 먼저는 부모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고 이어서는 친척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사촌까지는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친구와 이웃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러한 중보기도가 당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손을 위한 것임도 알 필요가 있다. 롯의 후손 중 훗날 모압여인이 룻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의 3대자손 중에서 다윗왕이 나오게 된다. 다윗은 훗날 왕이 되기 전에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는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위험한 순간에 다윗은 자신의 증조할머니의 백성인 모압으로 피신하여서 목숨을 건지게 될 때가 있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메시야의 조상인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나왔다는 것도 특별한 일이지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인 다윗도 모압사람들로 인하여 도움을 받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중보기도로 통해서 어떤 훌률한 후손이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중보기도가 훗날에 어떻게 나에게 혜택으로 되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이제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되는가? 내 문제도 산적해 있는데 무슨 중보기도냐고 말할 것인가? 아니다. 중보기도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시면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나와 내 후손을 위해 복을 저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보기도, 이제 당신이 시작할 때가 되었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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