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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우스  

편집자 주: 수많은 이단이 역사 속에서 발흥과 쇠퇴를 반복했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사 속 이단을 살펴봄으로, 정통신학이 정립된 과정을 배우는 동시에 잘못된 신학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는 일은 초대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였다. 예수를 선지자 혹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정도로 이해했던 에비온주의자,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특별한 능력을 받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양자론자, 구약의 성부가 곧 예수라고 주장한 양태론자 등 예수를 둘러싼 다양한 그릇된 이해가 교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특히 예수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의 등장 이후 60여 년은 그 혼란이 극에 달했다.

 

아리우스는 누구이며, 무엇을 주장 했나

아리우스(250년 경334년 경)는 루키아노스의 제자였다. 루키아노스는 인간에 불과한 예수 속에 신적 능력이 들어가 그를 점점 신화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양자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을 추종한 인물이었다.

 

예수는 피조된 존재로 창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아리우스는 핵심 주장이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아리우스가 저술한 Thalia(편집자 주: 연회)가 아직 남아 있지 않아 아리우스의 사상은 반대파의 저술을 통해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대파들은 대개 아리우스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만 인용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아리우스가 그런 사상을 개발하게 된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1)면서도, 아리우스 주장의 기본 주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다며 세 가지로 진술했다.2)

 

1.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

2. 아들은 기원과 지위에 있어서 피조물 가운데 으뜸가는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된 존재이다.

3. 아들이 여러 세계들의 창조자이므로 그것들보다 먼저 그리고 모든 시간보다 먼저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목창균 교수는 아타나시우스의 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편집자 주: 아리안에 대한 네 가지 담화(혹은 논거)를 인용해 아리우스는 아들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그보다 못한 제2의 하나님 또는 명목상 하나님으로 보았다라고 설명했다.3)

 

아타나시우스의 등장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인기를 얻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비판하며 논쟁을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주교들을 소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사모사타의 바울이 주장한 양자론을 복잡하게 만들어 되살려 낸 것이라고 비판했다.4) 알렉산더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추방했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인기 있었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아리우스에 대한 더욱 끈질긴 비판은 알렉산더의 제자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이루어졌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328년경 부터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맡았다. 아타나시우스는 피조물이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면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아리우스는 구원의 확실성을 파괴한다고 밝혔다. 또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며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면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말했다.

 

니케아 공의회

알렉산더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은 아리우스는 루키아노스의 제자들에게 지지를 부탁하는 동시에 같은 안디옥 학파의 유세비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리우스는 자신을 추방한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로마의 각 지역에서 조력자들을 얻게 된다. 결국 323년부터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집회를 따로 개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5)

 

당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단순한 신학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로마의 질서와 통일성을 헤치는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자문관을 파송해 양측을 중재하길 원했지만 실패했고, 325년 교회의 지도자들을 니케아로 소집한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다. 당시 동서방교회의 주교는 1800명 정도로 예상되는데 그중 300여 명이 이 회의에 참석했다. 300여 명 외에도 주교들을 수행하기 위한 사제, 부제 등 다양한 신학 전문가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다.

 

니케아 회의의 참석자들은 크게 세 파로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 유세비우스가 중심이 된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성자는 피조물이며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가 이끄는 아리우스의 반대자들이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즉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주장했는데,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셋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편집자 주: 아리우스의 지지자와 다른 인물)가 이끄는 중도파였다. 이들은 호모우시우스가 아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즉 성부와 성자가 유사한 본질을 가졌다고 말했다. 중도파는 수적으로는 가장 우세했다.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활약으로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교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교리를 확립하게 된다. 칼 투르먼은 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본질(substance)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함으로써 이에 관한 이후의 신학적 논의들의 궁극적인 틀을 설정했다. 1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육신하신 예수의 위격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6)라고 평가했다.

 

니케아 이후 오히려 힘을 얻은 아리우스

1차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사태의 종식이라기보다 논란의 가중화로 이어졌다. 애초에 소수파의 승리로 돌아간 것 자체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했고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아리우스의 지지자인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아리우스에게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찬에까지 참여할 수 있게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반기를 들었고 결국 유배를 가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대가로 파문과 복직을 반복했는데 그의 유배생활을 합치면 약 17년 이라고 한다.

 

상황은 점점 아리우스에게 유리해졌다. 콘스탄티누스 사망 후 로마는 세 명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콘스탄티누스 2세가 분할해 다스렸다. 그 중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에게 우호적이었는데, 나머지 두 형제의 죽음 이후 로마의 단독황제가 되면서 아리우스주의는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7)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의 교부들

아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시간이 흐르며 아노모이오스(anomoios, 상이본질)라고 불리는 극단적 아리우스파,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an, 유사본질)라고 불리는 세미 아리우스파, 호모에안(homoean, 동류본질)이라고 불리는 중도 온건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들 분파 중 극단적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점점 과격해 지자 일부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373년 아타나시우스가 사망하고 갑바도기아의 교부 삼인방인 가이사랴의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등장해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아리우스파의 분열과 갑바도기아 주교들의 활약으로 니케아 신조는 다시 한 번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총대주교로 임명하고 아리우스파 감독들을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했다.8)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소집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채택하면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다. 60여 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아리우스 논쟁이 종식되는 순간 이었다. 칼 투르먼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범교회적으로 보편적인 정통 신앙을 정의하는 표준이 되었다. 이 신조는 성령의 신성에 관해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욱 적절히 묘사한다라고 평가한다.9)

 

아리우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60여 년간의 논쟁과 그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의 공의회는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정립되었는지를 알려준다.

 

1) 알리스터 맥그라스,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포이에마, 2011), 214.

2) 같은 책 215.

3) 목창균, 이단 논쟁(두란노, 2016), 127.

4) 저스틴 홀콤, 이단을 알면 교회사가 보인다(부흥과개혁사, 2015), 125.

5) 서요한, 초대교회사(그리심, 2010), 418.

6) 칼 트루먼, 교리와 신앙(지평서원, 2015), 141.

7) 목창균, 이단 논쟁(두란노, 2016), 138.

8) 같은 책, 141.

9) 칼 트루먼, 교리와 신앙(지평서원, 2015), 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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