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Origenes Admantius, 185년 경-254년 경)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신학자로서 성서, 체계적 신학, 그리스도의 변증적 저술 등의 내용의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체계적 사색가로서 이후의 신학사상 발전에 공헌하였다.
1.생애
오리게네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제6장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오리게네스는 AD185년 알렉산드리아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치던 교사였고 특히 자기 아들 교육에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게네스에게 수학과 문법, 수사학 같은 “일반” 학문만을 배우도록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이론과 학문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헬라문학과 기초적인 성경지식을 배웠으며, 교리문답 학교에서는 클레멘트에게서 배웠다.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황제의 박해 기간에 그의 아버지는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 후 어느 부유한 안디옥 출신 여인을 통하여 그의 가족들의 궁핍한 생활에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그 여인의 양자가 되어 큰 도움을 받았고 판네누스(Pantaenus)와 클레멘트(Clement)에게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오리게네스의 박식함은 퍼져 나갔고 경건하고 열렬한 신앙으로 이집트 교회에서 이름이 알려진다. 이것을 알게 된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오리게네스를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그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전에 교리문답 학교를 맡아 운영하던 클레멘트가 아퀼라(Aquilla)의 박해를 피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금욕생활은 철저했다. 그는 예수의 교훈대로 단 벌 옷에 맨발로 여러 해 동안 생활했고, 자기 학교에서 배우는 여성과의 관계를 스스로 경계하여 자기 자신을 불구의 고자로 만든다.
이러한 행동은 마태복음 19장 12절의 예수의 말씀과 관련시켜 행한 것으로 오리게네스는 성경말씀의 문자적 해석과 지나친 금욕에 대한 열망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것이다.
그는 기독교 변증을 목적으로 신플라톤주의 창설자인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의 학교를 다녔으며, 지식을 넓히기 위해 많은 여행을 하였다.
211년 세베루스 황제가 죽고 박해가 중단되었을 때 그는 로마를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히폴리투스를 만나 그의 부단한 성서 주석 작업을 모범으로 삼는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다시 문답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자신의 제자인 헤라클레스(Heraclas)를 보조자로 택하여 함께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성서 주석에 주력하고 구약성서를 읽기 위해서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히브리어를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들이 있을 때마다 유대인 친구에게 신세를 지곤 했는데, 그가 부유한 친구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알게 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이 후 암브로시우스의 재정적 도움과 격려로 구약성서 번역대본인 『Hexapla』를 편찬했다.
215년에는 아라비아의 태수를 가르치기 위해 아라비아로 여행했고, 216년에는 카라칼라(Caracalla)황제의 박해를 피해 다시 팔레스틴으로 도망하였다. 여기서 그는 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있던 자기의 옛 친구 알렉산더와 또 가이사랴의 감독 데옥티스투스(Theoktistus)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박식한 오리게네스가 자기들 교회에서 성서를 주석하는 강의를 열어 줄 것을 청원했다. 비록 오리게네스는 평신도로 있었지만 이 청원을 허락한다. 이로 인하여 그의 인기가 높아갔고, 이는 그의 박식에 질투를 느끼고 있던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의 감독 데메트리우스가 그를 미워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평신도가 감독들 앞에서 성서를 강해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은 즉시 오리게네스를 고향으로 돌아 올 것을 명령한다. 그는 이 명령에 순종하서 계속해서 알렉산드리아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오리게네스는 그의 감독 데미트리우스와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228년경 오리게네스는 아카이아의 교회의 초청을 받아 그리스지역의 교회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그리스지역으로 가게 된다. 이 여행은 이전의 여행과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의 허락을 받아서 떠난 것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그곳 교회가 이단 논쟁으로 불안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여행길에 팔레스틴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의 옛 친구인 그곳 감독들이 가리사랴에서 오리게네스를 성직자로 안수하여 장로로 세운 돌발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에 가서 감당해야 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안수를 주고, 오리게네스도 그러한 뜻에서 안수를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격분한다. 그것은 오리게네스의 모교회의 감독의 권한을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빌미로 213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다.
이 일 후에 그는 254년 자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팔레스틴 지방의 가이사랴로 이주하였다. 그는 매일 설교를 행했으며, 계속하여 편집하던 중에 『헥사플라』를 완성 했으며 성서주석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의 학문은 큰 발전을 얻었고, 문학, 과학, 신학에 있어서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진다. 또한 아라비아인 황제 필립의 호의를 얻어서 가이사랴에 신학교를 세우는데, 이 학교는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와 겨눌 수 있는 훌륭한 학교이다.
그러나 235년 세베루스를 암살한 트리키아인 막키민(Maximin)황제의 박해를 피해 가파도기아의 씨자리아로 도망하였다가 2년 후 다시 가이사랴로 돌아왔다.
240년 아테네와 니코메디아를 여행하고 244년에는 아라비아의 보스트라로 여행하였다.
그는 마지막 10년간의 기간 중 『켈수스반박문』을 저술하고 그의 신학연설집, 그리고 연설문과 편지들을 썼다. 250년경 데키우스(Decius)황제의 박해 시 잡혀 많은 고난을 당하다가 출옥한지 약 3년 만인 254년경 70세를 일기로 두로(Tyre)에서 세상을 떠났다.
2.주요저서
오리게네스는 다작의 저술가였다.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무려 60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저술하였으나 그의 저서는 대부분 상실되었다. 그는 헬라어로 쓰거나 구술했지만, 현존하는 그의 많은 작품들은 라틴어로 되어 있다.
그의 주요 저술은 넷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는 성서에 관한 저술이다. 그의 걸출한 여러 권의 작품 중 대부분은 설교나 주석으로 된 성서주석에 관한 것이다. 그는 구약성경의 대부분과 마가복음을 뺀 복음서들과 사도바울의 서신들 대부분을 주석했다.
오리게네스는 당시 유대회당의 여러 대표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양측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성경 본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시 교회는 70인경(Septuagint, LXX) 번역판을 사용하였고, 헬라 회당은 문자적인 번역판들인 심파쿠스(Symmachus), 테오도시온의 책들(Theodosian), 또는 아퀼라(Aquila)가 140년경 광신적이라 할 정도의 문자적 번역본을 사용하였다. 이뿐 아니라 기독교에서는 성경 구절을 그 목적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약간씩 수정을 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논쟁 중에도 문제가 되지 않을 구약 원문이 기독교에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를 위하여 구약성경의 6개의 판으로 되어 있는 『Hexapla』를 편집하였는데, 이 책은 구약성서의 히브리어 본문과 네 가지 헬라어 역 및 주석을 대조한 것이다.
두번째 부류는 체계적 신학에 관한 것으로, 오리게네스의 주된 활동 분야 중에 하나는 이단에 대하여 정통 교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당시 그노시스파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던 중 부분적, 개별적 반박의 어려움을 느끼고 기독교 전반에 걸친 교리를 체계적으로 세워 문제가 되는 그들의 중심 교리를 물리치고자 했다. 이렇게 기독교 신학을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해석하기 위해 『원리론(De Principiis, On Frist Principle)』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오리게네스 초기의 작품으로 4권으로 구성 되어있다. 제1권은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제2권은 물질적 세계와 인간과 인간의 영혼, 제3권은 자유의지와 악마와의 투쟁 그리고 선의 궁극적 승리, 제4권은 성경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4세기 말 아퀴레이아의 루피누스(Rufinus of Aquileia)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는데, 번역도중 문제가 되는 진술에 대해 오리게네스의 다른 저술에 근거하여 수정을 가했다. 이후 제롬(Jerome)에 의해 다시 원문 그대로 출판되어 원래 의도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원리론은 “최초의 조직 신학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세번째 부류는 그리스도의 변증적 저술로서, 246년부터 248년 사이에 쓰여진 전 8권의켈수스를 반박하여(Contra Celsum)는 암브로스의 설득으로 켈수스의 진리의 말씀(Alethes Logos, 170-180)중 주요 부분을 하나씩 인용하여 각각 반론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쓰여 졌다. 『진리의 말씀』에서 켈수스는 예수가 유대인의 메시아의 성격과 맞지 않으므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견지에서 볼 때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도 터무니없는 것이므로 기독교를 지지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본다. 그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기독교를 부인했고 기독교의 교리들을 거부했다. 교리적인 공격보다도 더 신랄한 것은 종교적인 공격인데, 그것은 기독교가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왜 죄악이 여전하며 사탄의 세력이 조금도 물러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가 사탄을 극복했으면 사탄의 세력에서 오는 모든 악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종교보다도 오히려 정치적 제도와 사회 제도를 원만히 해서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 사회의 죄악을 물리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또 성서를 무시하여 말하기를 성서의 문체는 조잡하고 단순하며, 그 내용에 진실한 것이 있어도 그것은 성서 이전에 보다 더 고상하게 표현된 것을 다만 되풀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네번째 부류는 실천적인 저술들로 그는 기도에 관하여(On Prayer)와 순교에의 권면(Exhortation to Martyrdom)을 썼다.
이중 기도에 관하여는 231년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서, 기도한다고 해서 어떤 사건의 발생 및 그 결과에 아무런 변경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론자들에게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주된 신학적 저술은 『원리론』이지만 『기도에 관하여』라는 그의 논문은 헌신이라는 특징적인 맥락에서 많은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논문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기도의 요점과 목적을 안내해 달라는 친구 암브로스와 타티아나라는 여인의 요청에 의해 쓰여졌다.
이외에도 스콜리아(Scholia), 설교집(Homilies)과 논문 등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3.신학사상배경
오리게네스의 신학사상의 근본은 그리스도교와 헬라철학을 조화‧융합시킨데 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방법이 성서의 비유적 해석이다. 그의 성서 해석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그의 성서 해석에 바탕이 됐던 요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좋은 도구가 되며, 성서 해석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에 영향을 준 요소로, 그가 자라고 교육을 받았던 알렉산드리아와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전통, 이교사상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에서 지적, 문화적, 상업적으로 가장 큰 중심지였다. 알렉산더 대제는 도시를 건설한 뒤(주전 331), 헬라어와 헬라의 철학, 예술, 문학을 도시 문화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만들어 도시를 헬라화 했다. 무역을 위해 몇 개의 항구가 건설되었고 사업가들과 항해사들은 이곳저곳을 여행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 최고의 항구 도시로 만들었다.
기원전 3세기 중반에 도서관이 세워졌는데, 이것은 오리게네스가 살던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도서관은 60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철학, 문학, 언어학, 수학, 천문학, 대수학, 기하학의 저서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위대한 대 수학자 디오판티우스(Diophantius)와 유명한 기하학과 탄도학 교분의 저자이자 증기 기관 기능의 발명가인 헤로(Hero)가 오리게네스와 동시대인이었다. 2세기의 문법학자인 아폴로무스 디스콜루스(Apollonius Dyscolus)는 헬라어 신약성서의 주석가들이 아직도 인용하는 아폴로니우스 정경을 만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다. 그리고 당시의 기독교인들처럼 그도 고전 교과 과정을 이수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많은 부분은 이런 훈련들에 대한 관심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2)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지성화 작업은 로마의 지적인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유대교도 여기에서 헬라화 혹은 철학화의 길을 걸었다. 이는 필로(Philo)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철학화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에 의해 그 기초가 놓였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에 의해 촉진되었고, 그리고 오리게네스에 의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세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 학파(the School of Alexandria)를 대변한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의 성서 해석을 하나의 집단적인 것으로 논의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전부 같은 도시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도시의 부와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광범위한 한도에까지 성서의 문제성에 대해서 동일한 입장을 함께 취했다. 그들 모두가 나름대로 교육받았거나 또는 개종한 종교적 전통에 대하여 충실했으나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나 그들의 전통을 계승한 후일의 정통파의 교사들로부터는 ‘정통주의’에서 이탈한 자들이라고 의혹을 받기도 한다. 그 의혹의 중심에 알레고리적 해석이 자리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 하면 가장 먼저 “알레고리적 해석”을 생각 한다. 초기 알레고리해석은 헬라의 철학자들이 그들의 철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신화적 형상을 이용하면서 이러한 해석 방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방법은 궁극적으로 이교도, 유대교, 기독교의 철학적 그리고 종교적 표현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적 해석은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창조물은 결코 아니다.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단지 이 해석법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서해석 방법의 하나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전통을 무시하고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을 연구할 수는 없다. 알렉산드리아 사람, 오리게네스도 알레고리적 해석의 영향으로 영적(spiritual) 의미를 찾는 것이 그의 해석에서 가장 중요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이며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에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t)를 뺄 수 없다. 오리게네스의 성서 해석은 많은 부분 클레멘트의 성서 해석과 비슷하다.
클레멘트는 세속적인 학문이나 철학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일부 저술가들과는 달리 다양한 학문의 분야에서 성도가 성서를 읽는 데 도움을 주는 풍성한 지식을 발견했다. 그는 비유적인 언어가 기하학이나 음악, 그 외에 다른 많은 학문들에서 수집한 정보를 가질 때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력했다. 클레멘트의 성서해석 밑바탕에는 이런 그의 성서 외적인 지식의 습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클레멘트는 성서를 실질적인 신성한 로고스의 말씀으로 쓰인 경건한 책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클레멘트는 아주 위험한 주장을 하게 되는데, 기독교 공동체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도래의 준비로 이스라엘에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것처럼 그리스에 플라톤철학(Platonism)이 주어졌다는 주장이다. 플라톤 철학이 믿음을 이해하지는 못했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위한 방법의 준비라고 본다.
클레멘트는 성서 해석의 목적을 영지주의에 “거짓 지식(false gnosis)"에 반대해서 윤리적 속성뿐만 아니라 지적인 속성을 포함해서 “참된 지식(true gnosis)"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본다.
클레멘트도 성서 해석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알레고리적 방법으로 보았다. 클레멘트의 알레고리적 방법은 필로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클레멘트의 알레고리적 방법은 필로의 것과 구분 된다.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의 근원과 내용이 되며 성서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는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 인간의 육신의 몸으로는 올바른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 진정한 의미는 숨겨져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도 또한 예수도 자신이 의도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예화나 비유로 표현한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클레멘트는 성서의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클레멘트는 비록 말씀이 의미적으로 명백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존재하는 풍성한 지혜는 완전한 메시지를 얻기 위해 보다 더 신중한 연구가 요청된다고 본다. 즉 성서의 참된 의미는 비유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고차원적인” 그리스도인, 즉 진정한 이해력을 가진 자는 의미를 분별할 수 있는 반면에, 보통 사람들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클레멘트는 성서 안의 모든 텍스트는 항상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추가적인 의미 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처음 또는 직접적인 의미 뒤에 숨겨져 있다고 본다. 이 깊은 의미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발견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클레멘트는 무지한 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문자적 의미이고 현명한 자들이 발견할 수 있는 의미는 알레고리적 의미로 제시한다. 이를 토대로 클레멘트가 제시한 해석학적 원리는 첫 번째가 문자적 의미의 연구이고 두 번째가 알레고리적 의미의 연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클레멘트의 성서 해석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각 텍스트는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 빗대어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단계는 비슷한 생각, 단어, 사물들, 이름들 그리고 숫자들은 어떻게 이해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관찰로 그 텍스트의 현재적인 의미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 성서의 직접적인 의미 그리고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클레멘트의 성서해석의 방법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알아보았는데, 클레멘트의 성서해석과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은 다음의 몇몇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성서는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 성서의 진전한 의미는 숨겨져 있다. 셋째 숨겨진 의미는 영적 해석으로 찾을 수 있다. 넷째 숨겨진 의미는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성서는 그리스도에 빗대어 해석해야 한다.
3) 이교사상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은 많은 이교사상(영지주의, 플라톤 철학, 유대교)의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 본대로 2-3세기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 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고, 또한 당시의 지식인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많은 사상이 공존하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오리게네스는 많은 사상을 접할 기회를 제공 받았다.
이 중 많은 영지주의 가르침이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에 의해서 발전된 신앙의 규율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회들은 인식했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예수의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것을 배척했다. 그리고 예수의 인성이 진실 된 주장이라는 것을 배척하고, 예수에 대한 구약성서의 메시아적 구절을 수용하지 않았다. 영지주의는 인간은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로 보는데, 이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제시한 지식(gnosis)을 얻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의 체계적이지 못한 상태는 그것을 방어하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는 영지주의에 대항할만한 변증자도 없었다. 알렉산드리아 지역 밖에는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라는 대표적인 변증자가 있었으나, 이들은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많은 질문에 대해서만 싸웠다. 그들은 영지주의에 맞설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영지주의에 의해서 정교가 더욱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 오리게네스는 태어났으며 자랐고 이들과 대면했다.
오리게네스는 영지주의에 맞서는데, 그가 대항하였던 영지주의는 바실리데스(Bailides), 발렌티누스(Valentinus), 마르시온(Marcion)의 영지주의가 있다.
이중 오리게네스는 요한복음 주석에서 마르시온이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는 것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성서로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 마르시온의 그리스도의 인성의 부정은 성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은 헬라철학과의 만남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철학화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에 의해 그 기초가 놓였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의해 촉진 됐다. 그리고 그 결실은 오리게네스에게서 나타난다.
오리게네스에게 이런 결실을 맺게 하기는 철학자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약175-242)에게서 배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이 컸다. 암모니우스는 신플라톤주의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이론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그의 이론을 체계화한 것은 암모스니우스의 제자 플로티누스(Poltinus)이다. 그가 발전시킨 사상을 신플라톤주의로 부르는데, 이는 새로운 학설이 아니라 플라톤의 제자이며 해설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신적 존재는 무엇이라 부르던 간에 원초적인 것, 영원한 것, 선한 것으로 이해불가능 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들이 부르는 신적 개념은 물질적인 것과 접촉을 갖지 않는다. 지상적인 세계와 구별되는 세계이다. 즉 지극히 이원론적인 신(神) 개념을 가진 사상이다.
오리게네스는 암모니우스의 태도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암모니우스의 말투와 문체까지도 따라했다. “무형적(asomaton)”, “정신(nous)”, “지배 기능(hegemonikon)” 등과 같은 플라톤 철학의 전문 용어는 오리게네스의 많은 저서에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중기 플라톤주의(주전 1세기부터 주후 2세기까지)와 신플라톤주의(주후 205-179년에 플로티누스(Plotinus)가 발전시킨)가 그의 많은 작업에 철학적인 골격을 제공했다. 이런 영향은 오리게네스의 사상뿐 아니라 그의 성서해석에도 나타난다. 성서해석에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은 오리게네스의 해석에서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의 해석이 관념적으로 흐르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됐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 역시 오리게네스의 성서 연구에 영향을 끼쳤다. 약 115년까지 알렉산드리아에는 헬라화 된 유대인들이 번성했다. 유대 공동체는 구약성서의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하여 70인 역본을 내었으며, 지혜서(the book of Wisdom)와 유대 철학자인 필로(약 주전 20년- 주후 50년)의 작품들을 번역했다. 오리게네스의 시대에 이르러 유대 공동체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공동체에게 여전히 상당한 도전을 주었다. 유대인들과 오리게네스의 접촉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구약성서 본문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최고의 작품, 즉 『헥사플라(Hexapla)』를 작업하는 것에 유대인들이 동기를 유발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리게네스의 신학사상은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만연해 있던 여러 이교 사상과 맞서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거나(알레고리적 해석, 암모니우스의 신플라톤 철학) 아니면 완전히 부정하는 방향(영지주의)으로 전개됐다. 그는 헬라철학, 영지주의, 그리고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부터, 그의 신학방법론에 있어서 양날에 해당하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와 금욕주의(ascetism)를 배웠다. 이 두 방법들은 그의 성서해석에 있어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4.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의 원리
오리게네스는 필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성서의 말씀을 한 의미 이상으로 해석되도록 의도하셨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영감된 성서기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는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필로의 원리를 수용했다. 필로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시거나, 분노하시거나, 협박하시는 구절들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자비로 자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신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러한 사실적 언어(picture language)를 사용해야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원리론』에서 성서 해석 문제에 대해서 길게 다루고 있다. 다음은 원리론에 나타난 그의 성서해석의 원리를 요약한 것이다.
전제 1: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 졌다. 따라서 (a) 그것의 법적 가르침은 월등하며 (b)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으며 (c) 성서의 예언은 실현되며 (d) 예수님처럼 성도도 신적인 것이지만 인간적 형태로 되어 있고 (e) 성서는 숨겨진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전제 2: 성서는 그 특성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a)모든 본문에 문자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본문은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 (b) 영적인 의미는 항상 분명하거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c) 성서 말씀은 문자적, 육체적, 영적 의미라는 삼중적 의미가 있다. (d) 성서의 난해점은 우리로 하여금 문자적 의미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 원칙의 첫째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서는 예수가 성육신하기 전까지는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다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에야 참 의미가 드러났다고 그는 생각했다.
오리게네스는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장래의 성육신과 구원 사업과 통치에 관한 예언의 권위를 설명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 예언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강조한다. 예언은 영감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권세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본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선택된 것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사업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그 예언들은 신적 권위와 모세의 율법의 신령함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후에야 들어나게 되었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는 옛 성서가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내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법도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는 베일에 싸여서 가려져 있었으나 성육신 후에야 그 율법의 문자 안에 들어 있던 축복의 그림자가 걷히고 그 축복이 차차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신, 구약 성서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전까지는 그 축복된 말씀이 나타나지 않았다. 예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도하신 의미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오리게네스가 강조하는 성서 해석의 특징은 “성서는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있게 연구하다 보면 모순이라 생각했던 구절이 그렇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서 해석을 위해 오리게네스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성서의 말씀은 그 뒤에 감춰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의 내용에 초자연적인 요소가 많은데 그것은 교육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실로 성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나타난 데도 있지만 감춰진 데도 많아서 자칫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성서라는 문서를 잘 연구하고 검토하면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과오가 있기 때문에 그 문서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유대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하여져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 즉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이루어질 일들을 믿지 않고 예수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고 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는 것이다. 또 이단들은 성서에 “나는 평화도 만들고 또 악도 만든다”(이사야 45:7)든지,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아모스 3:6)든지, 그 밖의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구절들을 들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악한 신, 데미어지(Demiurge)라고 믿는다고 지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임을 선언하였지만 불신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오리게네스는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오해하면 성서의 진정한 의미, 숨겨진 의미의 뜻을 잘못 오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의 모든 말씀에는 감춰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성서에 대한 오해는 성서를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문자대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성서의 문자적 의미만 고집하기 때문에 성서를 해석하는 많은 해석자들이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성서가 영적인 모든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전부를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성서의 신비로운 사실을 완전히 터득함은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고 본다. 이처럼 오리게네스는 인간의 이성적인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이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단계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지만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들은 올바른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바르게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별력은 성서를 해석하는 데도 모자라지 않는다. 이성과 지성을 통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이런 인간의 이성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는 유한한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인정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오리게네스가 성서해석에서 중시한 점은 인간이 이성적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힘을 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서의 본연의 뜻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가?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숨겨져 있는 의미, 즉 애매모호하고 감추어진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교육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는 예수께서 말씀을 듣는 사람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설교와 가르침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때로 수수께끼, 우화, 비유 등의 방법으로 다수의 군중들에게는 진정한 뜻을 감추셨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들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에 있는 애매한 구절들의 의미를 알 수 있는데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자적 의미는 아직 신앙적 성숙이 낮은 자들을 위한 교육적인 이유이다. 그리고 그 문자 뒤에 감추어진 의미는 보다 더 성숙하고 심오한 의미를 연구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향한 교육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오리게네스는 본다.
오리게네스 성서 해석의 또 다른 특징은 성서가 삼중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잠언(22:20)이 성서의 삼중의미 파악에 대하여 기록된 것으로 소개한다. 먼저 오리게네스는 성서는 몸(육체적, somatic)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단순한 사람이 성서를 읽고 영혼을 성장시키는 길을 제공 받는다. 다음으로 성령의 제자가 된 사람은 성서의 문자가 담고 있지 않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의 혼(정신, psychic)적 의미를 이해해야 하고, 더 나아가 영적(pneumatic)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육체적 의미는 하나님이 인류와 관계하며, 성서에 도덕적 계시와 교훈을 담고 있다고 보는 문자적 읽기이다. 그리고 혼적 해석은 악을 피하고 영혼의 영적 성숙을 위한 일반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비문자적 읽기이다. 그리고 영적 해석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비문자적 읽기이다.
오리게네스는 분명히 성서는 3가지 방법 즉 육체적, 혼적, 영적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3가지 해석은 “인간 영혼의 구원”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진다. 성서를 육체적 의미로 해석하든, 혼적, 영적 의미로 해석하든 그 해석의 결과는 영혼의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 육체적 해석(Somatic Interpretation)
오리게네스의 육체적 해석의 의미는 “성서의 명백한 의미”, “율법”, “성서의 간단한 이야기” 그리고 “영적인 진실의 외적인 표현”으로 성서에 나타난다고 본다. 육체적 의미는 성서에서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것으로 성서에서 비유적이거나 함축적인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성서에 기록된 문자들은 육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육체적 의미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 영적인 구원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서를 읽고도 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구절에는 육체적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육체적 의미가 그 안에 있다면 그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영적인 생활로의 변화와 구원으로 인도될 수 있는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문자를 읽을 때 변화의 체험을 할 수 없는 것은 언제인가? 오리게네스는 읽는 사람이 따라가기에 부적절하고 모순적인 율법을 나타내는 것이나 결코 일어난 일이 없는 비사실적 역사는 그런 체험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오리게네스는 육체적 의미의 대상을 누구로 보고 있는가? 육체적 해석은 신앙의 초보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계이고, 신앙적인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들의 이해를 위한 단계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육체적 의미를 무시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 의미는 초보자들 중에, 아직 성숙하지 않은 단계의 신앙인들이 계속해서 성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점점 더 흥미를 가지고 탐구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렇게 됨으로 오리게네스가 가장 강조하는 영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 혼적 해석(Psychic Interpretation)
오리게네스의 혼적 해석은 육체적 해석과 비슷하다. 둘 다 성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변화를 촉구한다. 그러나 육체적 해석은 가장 표면적인 해석으로, 문자에 나타난 의미를 찾는 것이라면, 혼적 해석은 문자 자체의 의미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비문자적으로, 비유적으로 읽어야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의미이다.
이 차이는 오리게네스가 누가복음 19장 41-44절을 설교하면서 자세히 설명한다.
오리게네스는 예수는 70년에 무너질 성전을 생각하시면서 울었다고 본다. 예수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 울음에 의해서 예수는 그 자신을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팔복 중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의 도덕적인 모델로 그 자신을 제시한 것이다. 즉 예수는 팔복을 통해서 그의 가르침을 예증한 것이다. 성서를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 덕의 모델로 예수, 그 자신을 나타냈다고 그는 본다. 이처럼 예수가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한 내용은 그가 정의를 위해 우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 모습을 따르길 바라는 것이라고 오리게네스는 육체적으로 해석한다.
같은 구절을 그는 인간인 삶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와 악의 싸움으로 해석하면서 혼적 의미를 제시한다. 오리게네스는 여기서 “우리 안에 있는 예루살렘”은 인간의 영혼을 나타낸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이 구절은 개인적인 인간들이 죄와 악의 희생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죄로 타락해 버린 이런 영혼들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세상에 있을 때 미래에 인간의 영혼들이 죄로 떨어질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눈물을 흘렸다고 오리게네스는 해석한다. 그는 육체적 해석과 다르게 예수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타락해 버릴 인간의 영혼에 비유해서 해석한다. 이렇듯 혼적 해석은 육체적 해석과 다르게 말씀에 대한 “비유적 읽기”이다.
그는 『원리론』에서 혼적해석의 목적에 대해서 “성도의 도덕적 교화”를 위한 해석이라고 강조한다. 혼적 의미를 통해서 성도들이 구원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오리게네스는 혼적 해석의 주된 목적이 성서 안에 담겨 있는 문자적 의미를 통하지 않고 그 안에 나타난 구절의 비유적 읽기를 통해서 성도의 영적 삶이 변하는 것이라고 본다.
• 영적 해석(Spiritual Interpretation)
영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예정하신 신비 가운데 숨어 있는 지혜와 천상적인 일들을 보여주는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이유는 오로지 신령한 영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이것을 찾아서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라고 오리게네스는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성서 안에서의 육체적, 혼적 의미 보다는 영적 의미, 숨겨져 있는 의미에 더 집중했음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 성서를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의도하시는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서이야기는 그 진정한 의미가 닫혀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문을 여는 열쇠는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자에게만 문을 열수 있는 열쇠가 주어진다. 다시 말해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구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직 영적인 해석을 통해서만 그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어떤 성서 말씀은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잠겨 있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그것을 수수께끼, 비유, 속담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계속해서 오리게네스가 강조하는 것은 성서의 진정한 의미는 다분히 감추어져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 노력을 많은 방과 열쇠로 비유하고 있다. 한 집에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그 방에는 맞지 않는 열쇠가 놓여 있다. 하나의 열쇠를 가지고 그 열쇠에 맞는 방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 방에 맞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성서의 숨겨진 의미를 찾는 방법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즉 성서의 의미는 방에, 숨겨진 의미는 열쇠에 비유한다. 성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원칙이 있는데, 원칙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그 원칙을 알맞은 성서의 의미에 적용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오리게네스는 육체적 해석, 혼적 해석, 영적 해석으로 제시한다. 성서에서 육체적 의미를 찾는 것은 쉽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의미이다. 그러나 혼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적 의미를 찾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 신령한 비밀을 알 수 있는 영적인 사람만이 그 비밀을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리게네스의 최종적인 영적 해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의 성서 해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영적인 해석의 목적은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 즉 하나님이 의도하는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이런 완전한 영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성서에 숨겨진 의미,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의미를 알아감에 따라서 인간은 알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를 때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말씀의 모호함과 신비를 명백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의 최종적인 목표이자, 성서를 해석하면서 해석자들이 도달해야할 목표로 제시한다.
오리게네스는 분명하게 성서 해석 방법으로 육체적, 혼적, 영적 해석을 강조한다. 그는 성서 구절에서 이 삼중 의미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 해석의 목적은 인간 영혼 구원에 있다. 육체적 해석과 혼적 해석이 영적 해석에 비해 구원을 향한 변화의 강도가 더 약하지는 않다. 3가지 해석 방법 모두다 다 인간 영혼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오리게네스의 성서 해석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다. 둘째 성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유지한다. 셋째 성서는 역사적 의미와 숨겨진 의미가 공존한다. 넷째 해석의 진정한 목적은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이다. 다섯째 성서를 해석함으로 육체적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변화한다. 여섯째 성서는 삼중의 의미(육체적, 혼적, 영적)를 가진다.
4. 오리게네스의 정경에 대한 견해
오리게네스는 탁월한 성서학자였다. 거의 모든 성서를 주석하였으며, 『핵사플라』를 통하여 구약 본문연구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신약에 대한 그의 증언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는 학문적 여행을 통해서 이집트,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아라비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에 있는 교회들이 신약의 책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신약의 책들을 복음서(들)와 사도들 이라는 두 개의 수집본으로 구분하였으나, ‘신약’이라는 이름아래 함께 두었고 그 책들은 똑같은 성경을 통하여 똑같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복음전도자들과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된 ‘거룩한 경전’이라고 설명한다.
오리게네스는 모든 교회가 이의없이 받아들이는 복음서들과 이단자들의 복음서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마태복음 주석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해 쓰여진 복음서들은 ‘하늘 아래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오직 논쟁의 여지가 없는 복음서들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우리는 정통교회가 인정하는 것외에는 이것들 중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오직 사복음서만을 적합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사복음서 이외의 복음서들을 종종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같이 예수의 기록되지 않은 말씀들을 종종 사용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과 서신들에 대한 오리겐의 증언은 그의 작품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는 사도행전의 저자를 누가라고 보고 있으며, 빌레몬에게 보낸 짧은 서신을 포함한 바울의 서신들을 자주인용한다. 그는 ‘바울이 이르기를’, ‘바울이 일렀으되’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때때로 바울에게서 서신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추가하기도 한다.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요한복음 주석에 보면, 오리게네스는 ‘베드로는 인정받는 서신서 하나를 남겼다.: 두 번째 서신도 베드로가 썼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다. 복음서와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은 얼마 되지 않은 서신을 남겼고 두 번째 세 번째 서신도 썼을 지도 모르나 – 모든 사람이 이 서신들을 진짜 요한의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언급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를 그의 작품에서 200회 이상 인용하였고 바울이 저자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말기에 기록한 히브리서에 대한 설교의 한 부분에서 그 권위의 전통은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히브리서의 문학적인 그리고 양식적인 부분에서 바울의 사상을 포함하고 있지만, 아마도 누가 또는 로마의 클레멘트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하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한다.
야고보서의 경우 오리게네스가 여러차례 인용하기는 하였으나, 요한복음 주석에서 서신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야고보서를 ‘회람되고 있는 서신’으로 언급한다.
유다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주석에서(10:17) ‘단지 몇 줄 밖에 안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힘있는 단어들로 가득 채워진 서신을 쓴 유다는 인사부분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오리게네스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와 삼서를 제외한 신약의 다른 책들에 관하여서는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특히 그는 그의 작품 어디에서도 베드로후서나 요한이서와 삼서를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여호수아 7장 1절의 설교(약 240년경)에서 모든 신약책들의 저자들을 특별한 기준 없이 열거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논의 가운데 있는 주제들에 도움을 받고자 사도적 교부의 여러 작품을 인용한다.
오리게네스의 정경에 대한 견해를 요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사복음서를 정경으로 여겼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그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와 삼서 이외의 신약의 다른 책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보다 먼저 있었던 클레멘트와 같이 ‘거룩하게 영감 받은’ 작품들을 기독교적인 증거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정경에 견해에 대해서 어떤 발전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가이사랴의 설교단에서 성서를 주석했을 때에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반면,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교리문답학교에서 가르칠 때에는 비 정경적인 본문들을 과감하게 사용하였다. 오리게네스를 통해서 나타난 정경화의 과정은 포함시킬 수 있는 많은 책들에서 점점 추려서 소수의 책들에 이르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론
기독교신학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오리게네스는 빠질 수가 없는 인물이다. 그의 신학의 방법론과 무엇보다도 당시의 일반사상과의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통해 기독교를 체계화시킨 점은 높이 살만하다. 오리게네스는 헬라철학, 필로, 그리고 자기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였던 저스틴과 클레멘트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의 형이상학화를 가속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서해석에 있어서 알레고리화를 시도했다. 그는 성경에는 육체적, 혼적, 그리고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성경을 한 의미 이상으로 해석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다고 한다.
또한 그의 뜨거운 신앙과 학문에의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대단하지만, 또한 신학 하는 자의 위험성과 어려움도 함께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