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한 글라우디오 황제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7/03/27 [12:19]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제4대 황제로 AD 41-54까지 13년간 통치했다.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이다.
한국 성경은 그를 글라우디오 황제라 부른다. 전임황제 가이오(칼리굴라)가 근위병들에게 무참히 살해될 때 현장의 커튼 뒤에 숨어 있다가 졸지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어릴 때 앓은 병 때문에 다리를 절었고 가는 귀가 먹은 장애자였다. 그를 황제로 세운 이들은 그의 흠잡을 것 없는 혈통과 함께 그의 장애를 눈여겨 보았다고 한다. 온전치 않으니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황제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사도행전 11:28의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성령으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했는데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이 흉년은 AD 45-48년에 있었고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했다.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18:2의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하였다”는 것이다(A.D.49). 그도 전임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제국내의 소수민족들에게 일정정도의 자유를 허락하는 포용정책을 폈다.
유대인들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렸고 특히 신앙과 관습의 유지에는 거의 애로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염병, 즉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전하는 이들로 인하여 유대인 공동체뿐 아니라 유대인과 로마인, 유대인과 헬라인 간의 갈등과 충돌을 심하게 일으켰던 것이다. 황제는 첫 단계로 충돌을 자제할 것을 권하다 여의치 않으니 집회를 금지하게 되고 그마저 별무효과이니 아주 추방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로마의 사가 수에토리우스는 “이 추방령은 크레스투스에 의해 촉발된 유대인들의 계속되는 소란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크레스투스를 크리스투스의 오자(誤字)로 보면 추방령의 원인이 기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난 사람이 약 25,000명이며 그 중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포함되어 있다.
그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사렛 칙령이다. 나사렛 칙령이란 글라우디오가 유대총독에게 보낸 명령으로 무덤을 훼손하거나 시체를 손상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 것이다.
총독은 이 칙령을 헬라어로 대리석 판에 새겨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에 비석처럼 세웠다. 그 중 나사렛의 비문이 발견되었으므로 이를 나사렛 칙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현재 파리의 메달레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은 쿠몬트(F. Cumont) 박사가 번역하여 역사잡지에 소개함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이렇다.
“선조들을 기리는 장엄한 기념비를 세운 지하무덤과 분묘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분묘들을 부숴버리거나 그곳에 장사된 시신들을 끌어내거나 혹은 고의로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일을 한다면 신들에게 죄를 범하는 자와 또 같은 형벌을 가할 것이다. 땅 속에 묻히어 잠자는 자들을 결코 방해해서는 안된다. 무덤을 약탈하는 자들에게 최고의 형벌을 가하는 것이 내 뜻이다”.
무덤이나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왜 이런 엄중한 금지가 이스라엘에 내려졌을까? 이렇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라는 신흥종교가 있는데 그 종교를 믿는 자들이 제국 내에서 염병과 같은 폐해와 소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는다. 역사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컸던 황제는 더 자세한 내용을 살피다 <예수>라는 사람의 존재와 가르침,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듣게 된다. 부활이란 것이 실제는 시체를 훔쳐간 제자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불신자(?)의 설명을 듣고 기독교는 시체를 도적질한 사람들이 만든 종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괘씸한 마음으로 나사렛 칙령을 반포한다.제국의 안전과 질서를 위한 그의 칙령이 세월이 흐른 뒤 주님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돌들이 외치는 소리>가 될 줄은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
1.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추방령과 로마 교회
바울은 직접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어떤 사도나 선교사에 의하여 로마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사도행전을 근거로 추측은 해볼 수가 있는데, 복음은 아마도 유대인들 사이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 2장은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 사건을 목도(2:10)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2:14-40)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2:41-42)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회심하여 로마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유력한 견해이다.
* 행 18:1-3에 따르면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에 로마에서 온 성도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는데, 이때가 A.D. 50년경으로 본다면 로마 교회는 50년 훨씬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에 오게된 이유를 누가는 클로디우스(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행 18:2), 당시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클로디우스 황제가 A.D. 49년에 칙령을 내려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고 한다. 클로디우스 황제의 칙령은 로마서 기록 동기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1세기 로마에는 약 4-5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클로디우스 황제가 이러한 대규모의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켰다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사건에 속한다. 이것이 중대한 사건임은 오늘날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현재 미국 인구의 1% 정도가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1%의 유대인들이 미국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시의 로마 인구가 얼마나 되는 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100만이라고 한다면 인구의 약 5% 정도가 유대인이라는 계산이다. 50만이라고 한다면 10%대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이 정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살고 있었다면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 지는 알 수가 없겠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가 있다. 당시 유대 상인들과 그리스 상인들이 로마 제국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상권을 형성하였고 이 두 집단이 경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미국의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단 1%만 되어도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당시 도시 전체 인구의 5-1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전 유대인들을 하루아침에 로마에서 추방시킨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편에서는 상당한 결단을 요구했던 중대한 사건이었음이 확실해진다.
클로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내려진 유대인 추방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로마 도시 사회에 끼쳤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힘이 상당하였다는 것은 클로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네로 황제가 추방된 유대인들이 불과 5년만(A.D. 54)에 로마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는 사실로 입증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을 유대인 추방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저술한 <클로디우스 황제의 생애 (Life of Claudius)> 25장 4절에 따르면 클로디우스 황제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에 의해 유대인 사이에서 야기된 상습적인 소요사태로 인하여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한다 (Claudius expelled Jews from Rome because of their constant disturbances impelled by Chrestus.).
여기서 크레스투스는 누구를 가르키고 있을까? 크레스투스(Chrestus)는 크리스투스(Christus)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이유는 1세기에 헬라어에서는 ‘에(e)’와 ‘이(i)’를 거의 동일하게 발음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당시 로마 유대인 사회에서 그만한 분쟁을 이끌 역사적 인물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클로디우스 황제는 로마 유대인 사이에서 그리스도로 야기된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로마 도시밖으로 추방한 것이 된다.
황제의 추방령은 49년에 있었는데, 이것은 49년 이전에 이미 로마에서 복음의 증거가 활발히 진행되어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 회당에서 충돌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행 18:1-2).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고 주장하였을 것이고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소요가 상습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당시 로마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수의 유대 그리스도인으로는 황제의 추방령을 이끌 정도의 대규모 소요사태를 야기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기 7-10여년 전에 로마 황제가 4-5만의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할 정도라면 로마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이 가능하다.
2.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추방령과 로마서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은 로마서를 기록하는 바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유대인 추방령은 가장 먼저 로마 교회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가 있다. 로마 교회는 마가 다락방 사건을 목도하고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돌아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세워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대인보다는 더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나아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유대식 이름들(아굴라, 브리스가, 안드로니고, 유니아, 헤로디온등)이 있는 가 하면 많은 이방인들의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거들에 의하면 49년 당시의 로마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혼합 교회임을 알 수가 있다. 로마서의 곳곳에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언급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1:5, 13; 11:13, 23-24, 28, 31; 15:7-9).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로마 교회는 클로디우스 황제의 추방령으로 중대한 전기를 맞은 것으로 보여진다. 추방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포함되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cf. 브리스 길라, 아굴라: 행 18:1-2).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추방된 유대인들이 54년의 클로디우스 황제의 사망과 네로 황제의 등극으로 인하여 다시 귀환하였다. 하지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돌아 왔다 하더라도, 5년간의 공백 기간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교회의 주도권을 넘겨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따라서 교회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귀환한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서신에 심화된 양자사이의 갈등에 대한 화해의 시도가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18-4:25; 9-11장, 11:18-21, 28-30; 14-15장, 15:8-13, 18; 16:17-18등).
이상의 정황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염두에 두었을 사항들이다. 로마서의 기록 목적과 연관하여 고려하여야 할 중대한 사안은 추방되었을 당시에 추방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의 교인들과 접촉하였으리라는 가능성이다. 바울의 교회와 직접적 접촉을 갖고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로마 제국내 각지로 흩어져야 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을 통하여 바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로 귀환한 이들이 바울에 대한 나쁜 소문들도 듣고 돌아갔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보면 여러 곳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과 암시들이 나오고 있고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교회에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기록하는 시점까지도 바울은 갈라디아, 고린도등의 지역에서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의 방해와 또한 회심자들의 잘못된 이해와 오류에 직면하고 있었다. 로마서 3:8에도 바울을 대적하는 자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고 있다.
3. 유대인 추방령과 로마서 기록 목적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중에 자신의 복음에 동의하는 자도 있었겠지만 동의하지 않는 자도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방인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가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신의 복음의 본질에 대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확신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마찬 가지로 곧 방문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 앞에서도 자신과 복음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울의 복음을 변호하고 변증하는 성격을 띠고 있는 서신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신의 복음과 입장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로마에 있는 비방자들의 공격과 비방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특히 서바나 선교를 앞두고 로마 교회의 후원을 얻고자 하는 바울이라면 비방자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반증하고 변호해야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우리는 왜 로마서가 기독교의 진수를 담고 있는 교리서신이며 로마서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참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왕조는 직계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씨족 출신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종손(從孫)이자 양자였고 반면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는 귀족계급인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이었다.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였고 클라우디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조카였으며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였다.
이 왕조의 가장 유능한 황제는 티베리우스였다. 그는 의심할 나위없이 능력있고 힘있는 통치자로서 속주에 사법행정을 시행하고 변경지방을 튼튼하게 유지했으며 제국의 재정을 절감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사회에서 극도로 인기를 잃었으며 말년에는 잔인한 폭군이 되었다. 보통 칼리굴라라고 알려진 그의 후계자 가이우스는 거칠었고 변덕과 방종한 열정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결국 광기로 발전했다. 그뒤를 이은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는 개인적 습관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나 정치가다운 능력을 많이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재위기간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 불변의 자취를 남겼는데 그것은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과업을 계승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속국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고 남부 브리타니아가 정복되었으며 서유럽 세계의 로마화 과정이 강력하게 추진되는 한편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로마 제국의 관료조직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네로는 괴상한 악행과 상상을 넘어선 사치의 화신으로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난폭하고 지나친 행동도 제국 전체의 번영에는 그다지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속주들은 잘 다스려지고 있었고 파르티아와 벌인 전쟁은 아르메니아 문제에서 타협점을 찾아 반세기 동안 평화가 보장되었다. 이 왕조는 반란과 내전의 와중에서 종말을 맞이했다. 네로는 자살한 것 같으며 반란세력 중 한 무리를 이끌었던 갈바 장군이 제위를 계승했다.각주
[Daum백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다음백과, Daum
클라우디우스 황제
출생 BC 10. 8. 1, 갈리아 루그두눔(리옹)
사망 AD 54. 10. 13
국적 로마
요약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통치권을 북아프리카까지 확대하고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만들었다.
황실에서 방치된 상태로 역사와 저술에 몰두해있었으나, 41년 가이우스가 살해당한 뒤 뜻하지 않게 왕위에 올랐다. 내정 면에서는 사법제도를 세부적으로 개선했으며 로마 시민권을 적절하게 확대했다. 종교정책에서는 전통을 존중하고 옛 종교의식을 부활시켰다. 행정정책으로는 황제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자신이 임명한 원로원 관할 속주의 총독들에게 재정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주었다. 43년 브리튼을 침공해 카물로두눔 점령을 지휘했으며, 그곳에 퇴역병사들의 식민지를 세우고 속국들을 만들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를 합병하고 2개의 속주로 재편했고, 소아시아의 리키아와 트라키아도 점령했다.
초기생애
황제 즉위와 식민지 정복
행정의 쇄신
클라우디우스(Claudius) 클라우디우스(Claudius)
ⓒ Coyau/wikipedia | CC BY-SA 3.0
개요
로마 통치를 북아프리카로 확대하고 브리타니아(브리튼)를 속주로 만들었다(로마사).
초기생애
인기 있고 성공을 거둔 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小)안토니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부인인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였다.
건강이 나쁘고 외모가 매력적이지 못한데다 행동이 투박하고 취미가 조잡해 공직 생활에 걸맞지 않아 황실에서는 그를 골칫거리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따라서 오랫동안 혼자 공부하고 혼자 놀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그를 인정해주고 역사 연구에 대한 취미를 일깨워주었다.
삼두정을 편 콘술(집정관)들에게 처형당한 공화주의 정치가이며 웅변가인 키케로를 옹호하는 소책자를 썼으나, 로마 공화정 말기에 벌어진 내전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치를 출발점으로 해 로마사를 썼다. 에트루리아의 역사에 관한 20권의 책과 카르타고의 역사에 관한 8권의 책을 모두 그리스어로 집필했으며 자서전과 철자법 개혁안을 담은 로마어 알파벳의 역사에 관한 연구논문도 썼다. 후에 황제가 되어 그 개혁안을 실행하려고 했으나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즐기던 주사위 놀이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저작은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의의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트루리아 역사에 관한 저술은 독창적인 자료를 담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첫번째 부인인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가 에트루리아 혈통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가문을 통해 클라우디우스는 에트루리아 전통의 진수를 접했을 수도 있다. 우르굴라닐라와 이혼한 뒤에 아일리아 파이티나, 발레리아 메살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小)아그리피나 등과 결혼했다. 그가 황제에 즉위할 때는 발레리아 메살리나가 부인이었다.
앞의 3명의 부인에게서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드루수스와 클라우디아는 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다. 청년시절에 클라우디우스는 다양한 종교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나 콘술이 된 것은 겨우 37년에 형의 아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가 황제가 되고 난 이후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거의 애정이 없었다.
황제 즉위와 식민지 정복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가 살해된 뒤 권력이 뜻밖에 클라우디우스에게 굴러들어왔다.
가이우스 살해 당시 그가 궁궐 안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것을 한 병사가 발견했다. 황실의 친위부대인 근위대는 1월 25일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가문의 전통과 복고적 성향 때문에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의 귀족계급에게 동조했으나 병사들과 궁정의 관리들이 그의 실질적인 지지세력이었으며 노예 출신 자유민들과 외국인들은 그가 무시당하던 시절에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이었다. 처음에 원로원의 태도는 좋게 말해서 애매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42년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달마치야 총독의 반란을 지지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로도 클라우디우스의 목숨을 노린 암살 기도에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들이 가담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의 권위에 경의를 표하고(그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속주들을 원로원의 관할로 되돌려주었음) 기사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는 했지만, 두 계급의 개별 성원들을 다루는 데는 무자비했고 때로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 처음부터 그는 군대와 자신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자신을 황제로 선포해준 대가로 현금을 지불했다.
43년 브리튼을 침공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원정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클라우디우스가 직접 모습을 나타내 템스 강 도강작전과 카물로두눔(콜체스터) 점령을 지휘한 것은 인기와 영예를 얻기 위한 그의 욕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그가 진압하려고 한 드루이드교 사제단이 반(反)로마적 영향을 미치는 데 대한 우려와 전반적으로 변경을 확대하고 싶은 욕심도 작용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카물로두눔에 퇴역병사들의 식민지를 세우고 그 속주의 변경을 보호하기 위해 속국들을 만들었다. 이것이 나중에 화근이 되어 47년 이케니의 속왕인 프라수타구스가 일으킨 반란이라든지 나중에 그의 부인 부디카(보아티케)가 일으킨 전면적인 반란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또한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를 합병하고(41~42) 2개의 속주(동부의 카이사리엔시스와 서부의 팅기타나)로 재편했다. 또 소아시아의 리키아(43)와 트라키아(46)도 합병했다. 그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왕국을 넓혀주었다가 44년 아그리파가 죽자 유대를 속주로 만들었다.
49년에는 이투레아(동북부 팔레스티나)를 시리아 속주에 합병했다. 그는 게르만족이나 파르티아족과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가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는 것을 지지했으나, 52년 파르티아족과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그곳의 친(親)로마 정부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두는 입장을 취해 어려운 상황을 후임자에게 떠넘겼다.
내정에서 클라우디우스가 시행한 많은 조치는 개명한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법제도를 세부적으로 개선했으며 로마 시민권을 적절하게 확대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중부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일부를 포괄하는 도나우 강 남부의 노리쿰 지방에서 5개 부락이 로마 자치시가 되었다. 또한 그는 카물로두눔 외에도 51년에 게르마니아의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지금의 쾰른) 같은 식민지를 여러 군데 세우고 도시화 정책을 장려했다.
종교정책에서 클라우디우스는 전통을 존중하고 옛 종교의식을 부활시켰으며 47년에 백년제(로마 건국 800주년을 기념하는 3일 낮 3일 밤의 운동경기와 희생제)를 열었다(로마 종교). 또 47년에는 스스로 켄소르(감찰관)가 되었으며, 49년에 로마의 포메리움(즉 로마 신들만을 섬기고, 행정관들이 군사력이 아니라 민간정부의 권한으로 통치하는 지역의 경계)을 확장했다. 그는 점술가들을 보호하고 프리지아의 신 아티스의 숭배의식을 로마식으로 바꾸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전기작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클라우디우스 Claudius〉(25)에 따르면 한동안 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그는 그리스도교도들을 포함해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일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유대인들의 기득권을 인정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집트의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일 없이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도 남아 있는 알렉산드리아 시에 보낸 한 서한(41)에서 그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게 "파멸적이고 고집스러운 상호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개인적으로 그는 신적인 영예를 누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추세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카물로두눔에 자신의 신전을 세우도록 했다. 그가 벌인 공공사업으로는 로마의 곡물공급 체계를 재편한 것과 오스티아에 새 항구를 건설한 것 등이 있다.
오스티아의 항구는 나중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시 고쳐 지었다.
행정의 쇄신
클라우디우스의 전반적인 정책은 제국 재정과 속주 행정에 대한 황제의 통제력을 높이고 자신이 임명한 원로원 관할 속주의 총독들에게 재정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종의 자유민 내각을 만들어 다양한 행정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일부 훼손된 루그두눔 명문(銘文)에 기록되어 있는 갈리아인을 원로원에 받아들이는 내용의 연설,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한 알프스 지방의 아나우니족에게 시민권을 인정해주는 내용의 칙령, 그리고 앞서 언급한 알렉산드리아 시에 보내는 서한과 같은 일련의 인상적인 문헌들이 클라우디우스의 개인적인 통치방식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남아 있다.
즉 그의 통치방식은 현학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인자하다가도 진노에 차 있는가 하면 궁극적으로는 전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루그두눔 명문은 역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 Annals〉에서 똑같은 연설에 대해 해설한 것과 흥미 있는 대비를 이룬다. 명문에 기록된 연설은 부적절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주제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타키투스의 책에는 그런 내용들의 많은 부분이 빠져 있음) 클라우디우스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바를 알고 있고 로마 전통의 잠재력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메살리나와의 결혼생활은 48년 그녀가 그에게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고 그녀의 애인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공개 결혼식을 함으로써 파국을 맞이했다. 메살리나와 실리우스는 살해당했으며 클라우디우스는 조카딸인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이 행위는 로마 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그는 법을 개정했다. 아그리피나의 권력욕을 채워주기 위해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아들 브리탄니쿠스에게 손해가 가는 것을 무릅쓰고 그녀의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뒤의 네로 황제)를 양자로 맞아들여야 했다. 그뿐 아니라 새로 임명한 근위대장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도 아그리피나의 보호를 받는 인물이었다.
로마의 전설은 하나같이 클라우디우스가 54년 10월 13일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당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독버섯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 자리에 오를 때 추방당했다가 나중에 아그리피나의 권유로 다시 불려와 네로의 교육을 맡았던 정치가이며 풍자문학가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신성한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만들기 Apocolocyntosis divi Claudii〉(이 제목과 그 정확한 의미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음)라는 풍자문에서 죽은 황제와 그를 신격화(원료원이 정식 선포함)하는 것에 대해 조롱을 퍼부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클라우디우스의 모습은 후기 로마 사가들이 클라우디우스의 정치에서 인기 없는 측면을 상세히 부각시켜 설명한 것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신성한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만들기〉는 그의 신체적 특징과 말솜씨를 풍자하고 재판관으로서의 자질을 비방하면서 그가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멋대로 법적 판결을 내리는가 하면 친척들, 원로원 의원들, 기사들에 대해 즉석에서 처형 명령을 내리는 독단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그리고 후대의 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잘못을 그의 유약한 성품과 부인들 및 해방노예들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들은 말과 달리 상류계급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했던 황제에 대해 상류계급이 품은 적개심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의 평가가 일면적이라는 것은 클라우디우스가 얼마나 권위 있게 정력적으로 수행했는가를 보여주는 현존하는 문헌들에서 알 수 있다.
< 클라우디우스 황제 -출처: [Daum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