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교회 신조들의 해석
서 론
여기서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325)와 니케아-콘스탄니노플 신조(381)를 다룬다.
사도신경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주로 서방교회와 개신교회에서 사용한다.
반면 나머지 두 신조는 동방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이단들을 대처하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정통성 시비의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정통 삼위일체론에 대한 현재적인 해석의 전형이라 생각되어 오늘 세계교회가 지향하는 에큐메니칼 해석에 해당한다.
A. 사도신경
1. 한국교회가 사용해온 본문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은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2. 해설
1) 저자
저자는 확실치 않다. 제목이 사도들의 신경인 것을 보아 어느 한 사도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사도들이 신앙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적 기원과 형성과정
170-180년 사이에 로마에서 사용되던 로마신경이 있었는데 이는 세례 후보자와 초신자를 교육하기 위해 사용하던 교리 문답서로 의문문으로 되어 있다. 로마신경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삼일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까?”
이 질문 형식이 4세기에는 긍정문으로 바뀌고, 죄의 용서라는 말이 첨가되었으며 그 후에 나머지 구절들이 계속 첨가되었고 마16:16의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와 결합하여 4세기경에 서방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 시기에 동방교회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음) 공동체를 위하여 사도신경이 구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사도신경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390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글에 나타나며 이 사도신경을 범교회적으로 나아가서 범로마제국 차원에서 사용하게 한 것은 샤를마뉴 황제(742-814)때였다.
3) 신학적인 해석
(1) 내용구조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도신경,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은 기독교 메시지의 근본에 해당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셋을 하나로 묶어서 자신의 신학을 펼치곤 하였다. 즉, 이 셋은 우리 기독교인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의 오랜 전통과 루터는 사도신경의 내용 구조를 셋으로 보았다.
첫째 성부 하나님이시고, 둘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셋째 성령에 대한 신앙 항목이다.
여기다 칼빈은 교회라는 항목을 크게 부각하여 넷으로 보았다.
(2) 각 신앙 항목들에 대한 해석
1. 나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
라틴어 본문에는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사오며) 된 것이 아니라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전능하신 아버지는)
이렇게 줄을 바꾸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와 상응하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이 첫 줄에 나오는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시고, 숨을 내쉬듯 성령을 내보내시는 바, 성자와 성령의 신적인 기원에 해당하는 성부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의 원리이시다.
전능하다는 말이 폭군을 연상하기도 하지만 그 형용사가 인간적이며 감성적인 단어인 아버지와 결합하여 전능하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전능을 행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과 우주만물에 대한 아버지로서 전능하심을 선포한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을 가리킨다. 니케아-콘스틴티노플 신조에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란 구절이 이 말과 동격이다.
2.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은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여기서 유일하신 아들이란 뜻은 요3:16 독생자란 뜻인데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독특하게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독특하게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다음에 “영원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신”이란 구절이 더 첨가되어 있다.
영원전의 탄생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성자는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탄생하시지만,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구속사의 역사적 자리를 말해주는 것으로 사형집행을 받으심은 그야말로 인류의 심판주께서 인간의 죄악 된 손을 빌려서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신 것이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는 완전한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나오지 않지만 라틴 본문에는 그 다음 ‘모든 죽은 자들의 세계(음부)에 내려 가셨다’라는 말이 나온다. 다른 동방 교회신조들에는 ‘그는 음부에 내려가시고’로 되어있다. 이 구절은 초기 사도신경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이 로마 신경에 삽입된 것은 제5세기 이후였다. 동방교회에서는 360년경 이전에 나타난다.
이것은 엡4:9에 근거한 것으로 음부란 Hades를 말하며 히브리어Sheol처럼 의인들이든 악인들이든 세상 떠난 모든 사람들의 거처인 불가시적인 세계를 말하며 지옥을 뜻하는 hell 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사이에 낙원에 계시겠다고 하는 신비로운 전승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샤프는 ‘음부에 내리셨다’는 말이 역사적으로 세가지 뜻을 가졌다고 한다.
(1) 이것은 “장사지낸바 되었고”와 동일한 의미로 예수께서 부활 때까지 계속해서 죽음의 상태와 사망 권세하에 계셨다는 것을 뜻한다.(웨스트 민스터 신학자들)
(2)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지옥 고통을 경험하신 바, 이 십자가 상에서의 그 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하기 위해서 첨가된 구절이다.(칼빈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실질적으로 모든 세상 떠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은 자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함이요 예수께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셨다가 부활, 승천, 승귀하시어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다.
“또한 그는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
이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부활의 첫 열매라는 뜻이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할 오실 것이다”
주님이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전권을 받아서 교회와 인류역사와 우주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뜻이며 심판 받으신 주님이 다시 심판주로 오실 것을 뜻한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은 결국 모든 인간을 뜻한다.
3.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성령의 신앙항목을 성부 및 성자의 그것으로부터 독립시키어 개별화 시킨 것은 참 중요하다.
서방교회는 586년 당시 스페인의 수도인 톨레도 공의회에서 독자적으로 “성령이 아들에게도”라고 하는 구절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삽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함으로 1054년에 서방교회와 분리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성령론이 종속론적이라고 비판하여 왔다.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어 아들 안에 머물러 계시다가 이 땅 위로 파송되신다.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 동방교회도 받아들이는 입장으로서, 성령의 독립적인 위격성 혹은 성령의 고유한 위격성을 확보하게 하는 좋은 입장이다.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도신경이 삼위일체 하나님 대한 신앙과 교회 및 그 나머지 항목들에 대한 신앙으로 나눈 것은 교회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로 나누어지는 것을 믿어야한다는 뜻이다.
성도의 교제를 믿는 것은 성도가 어떤 시대이든지 어떤 공간이든지 서로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죄를 사하는 것을 믿는 것은 우리의 어떤 죄도 그리스도의 크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은 육체의 부활을 믿는 것이며 영생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영원의 시간에서 사는 것을 믿는 것이다.
4)역사적, 신학적인 의의
170-250년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유대적인 유일신론,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니즘, 군주신론 등의 이단으로부터 도전을 받았을 때 사도신경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교회와 종말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대응하였을 것이다.
1961년 뉴델리 WCC는 그 교리헌장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삽입하였다.
루터는 1529년 저서인 “대,소교리문담”에서 사도신경의 내용이 복음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본다.
칼빈은 최종판 “기독교강요”(1559) 의 구조를 사도신경으로부터 가져왔다.
현대 신학자들 역시 사도신경을 재해석함으로 자신이 속해있는 신학전통을 표현하였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대체로 동방교회가 애용하는 니케아-콘스탄노플 신조(381)와 대동소이한 바,
서방교회는 그 동안 589년 스페인 톨레도 공의회에서 일방적으로 채택한 “성령이 아들에게도”(filioque)라는 구절을 첨가하여 사용해오다가 1991년부터는 필리오케 없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사용하기로 하였으니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교회와 신학이 통일성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조이다.
B. 니케아 신조(325)
1. 본문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ek tes ousias tou patros) 나신 홀로 나신 분(독생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 빛으로 부터 비롯된 빛, 참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poiethenta) 나셨으며(gennethenta)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homoousion to patri),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내려오셔서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 받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나시기 전에는 없었다' '그분은 무로부터 생겼다'라고 말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한 실체 혹은 본질로 이루어졌거나, 피조물이고 변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말하는 자들은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파문하노라.
2. 해설
1) 저 자
아리우스의 가르침으로 논쟁이 일어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최초의 에큐메니칼 공의를 325년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근처인 니케아에서 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당시 5대관구로부터 318명의 감독이 참석했는데 로마 대관구는 서방교회의 중심으로 6명만 파견하고, 동방교회의 중심인 알렉산드리아 대관구, 안티오키아 대관구, 콘스틴티노플 대관구, 예루살렘 대관구에서 나머지를 파송했다. 회의는 동방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져 니케아 신조가 탄생하게 된다.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진 후 동방교회는 이 신조를 사용했지만 서방교회는 사도신경과 후에 만들어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성령이 아들에게도”를 첨가하여 사용했다.
2) 논쟁점
아리우스 이단에 대한 응답이다. 그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는 우월하시지만 하나님 아버지 보다는 열등한 존재로서, 아버지께 종속하는 분이요, 결국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피조물처럼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요 성자는 시작이 있으나 성부는 시작이 없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도 아니요 인간도 아닌 제 3의 무엇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3)아타나시오스 신학의 공헌
그는 아리우스의 약점은 하나님이 인류구원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헬라 전통에서 신학적으로 확립하려는데 있었다고 한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말씀(아들)은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피조된 피조물이며, 그리스도는 덕행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우리도 덕행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구원이란 '하나님과 닮고 썩지 않을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가 피조물로서 인간이라면 어떻게 자기도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인간을 부패로부터 구원하며 하나님의 저주를 파기하고 인간에게 죄를 사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죽을 수 없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는 인간의 부패와 죽음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제물로 죽음에 내어주어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여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히 썩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지음을 받은 자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셔야 했다고 한다.
4)본 신조의 초점
니케아 신조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신조에 따르면 아들은 무로부터가 아니라 '아버지로 부터',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기원을 가진다.
또한 '나시다'라는 단어와 '지어지다'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아들의 기원과 만물의 기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다.
이 신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아리우스가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2명의 주교를 제외한 모든 주교가 이 신조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소수였다고 보이며, 대다수는 아리우스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는 않을 지라도 니케아 신조를 완전히 지지할 수 없었다. 이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아타나시우스가 350-351년 "니케아 공의의 규정"을 저술하고, 니케아 신조와 이 용어를 변호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C.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
1. 본문(밑줄친 것은 니케아 신조에 없던 것이다)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홀로 나신 분,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 빛으로부터 비롯된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부터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 고난 받으시고 묻히시고 성경대로 3일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으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
또한 우리는 성령, 주님이시며 살리시는 분, 아버지로부터 나오신(ekporeyomenon),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공변되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죄를 용서하는 하나의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올 세계의 삶(영생)을 고대한다. 아멘
2.해설
1) 저자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서 결정했고 수의 가정을 거쳐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신조가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전까지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2) 니케아 신조와의 공통점과 상이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들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로 부터'란 말이 빠졌지만 '동일 본질'이란 말을 분명히 했으며
'그 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란 것을 붙여 마르켈로스의 가르침을 경계했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로 끝나는 데 반하여 성령론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론’과 ‘하나의 세례’에 대한 고백까지 포함시켰다. 성령에 대해 성령을 '아버지로 부터 나오신 분'(발출)이라 하여 성령의 출처를 명시하여 성령의 신성을 보여주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 영광송에 포함시켰다. 성령에 대해 동일본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들을 끌어 들이려는 정통파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며, 4세기 신조에 많이 나타나는 ‘보혜사’란 말이 사용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3) 역사적인 의의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동방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해 오고 있으며, 서방교회는 586년 스페인의 톨레도 공의회(서방교회 단독 회의)를 통해서 ‘성령이 아들에게도’(filioque)
나오셨다고 하는 구절을 첨가하여 사용해 왔다. 이 구절이 동,서방 교회의 분열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으나(1054년에 분열), 19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1600년 축하기념 예배(제네바)이후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급진전되어, 1991년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라고 하는 문서가 WCC에서 받아들여졌다.
즉, 오늘날 세계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filioque’없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를 에큐메니칼 공예배시에 고백한다. 서방교회가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사도신경을 양보하는 이유는 본래 이 신조는 에큐메니칼 공의회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로마 교회들의 ‘세례신조’로 사용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4)교리의 발전과 7개 공의회의 의미
성서만으로 족하지, 무슨 교리인가?
카톨릭(동,서방교회)은 성서와 전통에 입각하지만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서 ‘오직 성서로만’이란 모토로 교회 전통을 무시한 것이 사실이다. 메노나이트의 요더는 “성서의 내러티브와 존재론적-형의상학적인 전제들”사이의 불연속을 주장하는 바 그에 다르면 ‘본질’이니 ‘존재’니 ‘본성’이니 하는 성서 밖의 개념은 결코 신학 함에 있어서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세계교회의 공의회가 결정한 교리들이나 신학사에 나타나는 모든 신학적인 작업들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통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상황이 있었고 이러한 상황이 성서 밖의 개념을 요청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서주의만으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은 신학활동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기독교 신학은 신약성서 시대와 고대 교부 시대로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왔기 때문에 신약성서의 내러티브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전제를 이분화할 필요가 없으며 이 둘은 상호 호환적으로 실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성서적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까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번역해도 좋은가?
그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고대 7개 공의회의 교리에다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는 20여 개의 공의회의 교리결정을 주장하고 여기에 교황의 교령들과 주교들을 위한 회람문서도 덧붙여진다.
교황의 베드로 승계 교리, 교황의 무오교리와 교도권의 교리, 마리아 몽소승천 교리, 연옥교리 등도 포함되는 그것들은 정말 신약성서로부터 발전된 것인가? 그것은 도토리에서 성장한 도토리나무요 그 열매인가? 아니면 달걀에서 나온 오리인가? 루터와 칼빈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 전통은 성서의 메세지를 복음으로 보았고 이것의 존재론적-형이상학적 틀거리는 정통 삼위체일론과 정통 기독론으로 보았다.
고대 공의회의 7에큐메니칼 신조가운데 대체로 개신교는 동방교회와 더불어 325년 니케아 신조, 381년 콘스타니노플 신노, 431년 에베소 신조, 451년 칼케돈 신조를 공유하고 나머지 둘은 반대할 필요가 없는 신조로 보며 제7차 공의회(787)의 아이콘(성화)에 대한 교리는 성서를 표준으로 볼 때 받아 들여질 수 없는 교리로 본다.
고대의 협의회는 주로 교리문제에 부심하였으나, 20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 선교와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보전 등 교회의 사회참여에 부심하고 있다.
5)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해석
(1) “우리는…….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말이나 행동의 근원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우리들의 믿는 바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공동체 안에 속해있다는 뜻이며 그 공동체 안에서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2)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은 유일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통일성을 말하여 본성이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뜻이다. 곧 하나의 본성이신 하나님을 말하고 그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임을 말한다.
(3) 우리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다.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것에 미치며 그 통치는 아버지로서 사랑을 가지고 통치하시는 분임을 믿는다.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서로 대비 대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4)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홀로 나신 분 ,모든 시간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빛으로부터 비롯된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어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 이 아들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이며 이 아들을 통하여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
(5)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과 처녀 마리아로부터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하늘로부터 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가운데 계셨음을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아버지로부터
나심이 독특한 것처럼 이 땅의 나심도 독특함을 말하고 있다.
(6)우리를 위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 받으시고 묻히시고 성서대로 3일만에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역사 가운데 일어난 실재의 사건이며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임을 말한다.
(7)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으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전권을 부여 받으셨으며 이는 그가 지상에서 받은 심판이 이제 다시 올 때는
심판주로 올 것을 말한다.
(8) 또한 우리는 성령,주님이시며 살리시는 분,
아버지로부터 나오신(ekporeyomenon),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을 믿는다
성령을 주님이란 고백함으로 성부와 성자와 다름이 없는 하나님임을 말하며 성령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신다고 말하여 성령의 출처가 아버지임을 말한다. (여기서 필리오케는 없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경배의 대상임을 말한다.
(9)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기다리며,선포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교회가 하나인 것을 믿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찢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거룩함을 믿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된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보편적인 것을 믿는 것은 교회는 모든 계층, 모든 민족, 모든 연령,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열려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도적이란 것을 믿는 것은 교회가 사도적 전통 가운데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10) 죄를 용서하는 한 세례를 고백하며
죄를 용서받는 구체적이고 외적인 표현은 세례를 받는 것이며 그것은 한번으로 족하다.
(11) 죽은 자의 부활과 올 세계의 삶(영생)을 고대한다.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인들의 최후의 소망이다.
(12) 아-멘
기독교인들은 ‘아-멘’ 이라고 말할 때 본 신조 안에 선포된 진리들을 확신 있게 확언하는 것이요.
이 진리들의 빛 안에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세 개의 신조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대동소이하다.
서방교회와 개신교회가 사도신경을 예배 중 고백하고,동방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하고 있다. 점차로 서방교회 역시 필리오케 없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하고 있다.
출처 : http://blog.naver.com/kaistq/150049129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