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교부들의 삼위일체
서 론
325년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르기까지 치열한 공방을 거쳐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4-5세기 위대한 동방 교부들이 핵심역활을 했다.
여기서는 아타나시오스와 카파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를 보려고 한다.
A. 아타나시오스(295-373)
1. 그의 생애
그는 29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공부했다.
319년 알렉산드로스 주교에 의해 보제로 임명되어 알렉산드로스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에 참석했다.
3년 후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다. 그는 새로운 신학체계나 용어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지만
니케아 신앙을 고수하는 것을 절대절명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5번이나 면직을 당했으며 17년 이상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니케아 신조를 지킨 것은 절대적으로
그의 공이 크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그를 "교회의 기둥"이라 불렀으며 오늘날 동방교회는 그를 "
정통교회의 아버지"로 서방 교회는 동방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4명중 한 사람으로 기린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나 그의 신학에는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 종속론을 극복하였다.
둘째는 로고스 뿐 아니라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진정한 삼위일체를 완성했다.
세째는 그의 삼위일체는 사변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구원론적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2. 그의 삼위일체론
1) 삼위의 하나됨과 고유성
먼저 구원론적 관점에서 마28:19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는데 성자와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하나의 세례가 창조주와 피조물로 나누어 지는데 그것이 유효한 세례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동등하며 완전한 하나님이며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어떤 종속적
관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 이후 한편으로는 앙키라의 바실리오스와 같은 유사본질파를
인정했다. 그는 유사파들이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셨고 그 본질은 아버지와 비슷하다'면 유사본질이란 말이
불만족스럽지만 결국 동일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교회화합 차원에서 그것을 인정했다고 볼수 있다. 그는 삼위가 서로 내주하면서 모든 행위가 하나라는 것도 강조했다. "삼위는 항상 동일하며 본성으로 나뉠수 없고 그 행위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그러면서도 삼위의 하나 됨을 강조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단순히 이름에 불과하지 않고 실재적이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오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성을 나타나기 위해 '위격'이나 '인격'등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하나의 본질과 세 위격'이라는 표현은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위격과 본질을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2) 말씀과 구원
아리오스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말씀(아들)은 하나님에 의해 무로부터 피조된 피조물이며 그리스도는 덕행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우리도 덕행과 순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수 있다.
아타나시오스에게 구원이란 '하나님과 닮고 썩지 않을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그리스도가 피조물로 인간이라면 어떻게 자기도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인간을 부패로부터 구원하며 하나님의 저주를 파기하고 인간에게 죄를 사할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죽을 수 없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는 인간의 부패와 죽음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제물로 죽음에 내어주어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여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히 썩지 않게 하셨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말씀이 피조물이란 것을 그토록 반대하게 만든 것이다.
3) 성령의 신성
350년경 이집트에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아타나시오스는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성령의 신성을
신앙의 조항으로 넣었다. 아타나시오스는 성령의 고유성을 샘과 시내, 빛과 광채의 유비로 설명했다.
"아버지가 빛이시고 아들이 그 광채라면 성령은 우리를 조명하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는 성령안에서 드러내신다.
아버지가 샘이며 아들이 시내로 불리면 우리는 성령을 마신다고 할 수있다." "성령은 아들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적인 물이며,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명이다." 우리를 거룩하게하고 하나님처럼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면 성령이 피조물이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성령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성부,성자,성령으로 준 세례가 유효하지 않으며 하나의 세례를 창
조주와 피조물로 나누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다. 아타나시오스는 성령에 대해 "아버지께로 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요15:26)이란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와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빛을 빛추고 보내지며 주어진다.
4) 영향
그의 삼위일체 신학은 구원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들과성령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며 니케아 신조 안에 '동일본질'과 '아버지의 본질로부터'라는 말이 구원신앙의 핵심적 내용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신학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카파도기아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서방 삼위일체 신학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었다.
B. 바실리오스(329-379)
1. 그의 생애
바실리오스는 세명의 카파도기아 교부중에 유일하게'위대한,대(大)'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교회정치가이자 조직자,신학자이면서 동방 수도운동의 기초를 마련하여 『수도생활을 위한 긴 회칙서』들을 작성해 후대 수도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카파도기아 카이사리아의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아테네에서
고등교육을 받다 365년경 고향으로 돌아와 수도생할에 전념한다. 카이사리아의 주교인 유세비오스는 바실리오스를
설득하여 사제로 만들고 370년 유세비오스가 죽자 그를 이어 카이사리아 주교가 된다.
그는 종합적인 사회복지사역을 시행하여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전염병환자와 여행자와 나그네를 위한 사역에도 힘썼다.
그는 유사파 신앙을 강요하는 발렌스 황제에 맞서 니케아 신앙을 수호했으며 박해받는 니케아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래서 카파도기아에서는 심한 박해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일치에 혼신의 힘을 썼지만 안티오키아의 교회분열문제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그의 삼의일체의 중요한 것은 본질과 위격의 구별과 성령론에 관한 것이다.
2. 그의 삼위일체
1) 본질과 위격의 구별
그가 삼위일체에 가장 큰 공헌을 한것은 본질과 위격을 구분하여
'한 본질과 세 위격'(mia ousia, tres hypostaseis)이 유일하게 인정될 수 있는 올바른 신앙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본질과 위격이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아타나시오스도 '한 본질과 세 위격들'이란 표현을 썼지만 그는 본질과 위격을 동의어로 이해했다. 바실리오스는 니케아 신조의 어구를 고수해야할 뿐 아니라 이를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본질과 위격을 구분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은(니케아 공의회 교부들) 위격과 본질이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단어들이 동일한 한 뜻을 표현했다면 왜 두 단어가 모두 필요했겠는가?
그들은(니케아 공의회 교부들) 자신들의 견해를 펼칠때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비롯된다고 선언하면서,
'위격으로부터'라는 단어를 덧 붙이지 않은 것은 본질과 위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본질로부터'라는 말은 아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정죄하는 것이고 '위격으로부터'라는 말은 구원의 교리를
서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지만, 그들이 명백히 가르친대로 아버지는 자기고유한
인격안에 있고 아들도 그러하며 성령도 그러하다고 분명히 고백해야 한다". 그는 본질과 위격을 '공통된 것'과 '고유한 것'의 관점으로 정의한다. 본질은 선함과 신성과 같이 공통적이라면, 위격은 아버지됨, 아들됨, 성령됨과 같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을 활용하여 베드로와 바울은 각 각 다른 이름으로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인간이라는
종으로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공통적인 것'(to koinon)과 '개별적인 것 '(to kath)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공통적인 것"은
본질,신성을 말하며,'개별적인 것'은 위격 곧 아버지,아들 그리고 성령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본질이란 것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본질로서, 구체적이며 실체적인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는 "본질과 위격을 함께 결합해서 아버지,아들,성령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신적인 성령 이라고 고백해야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위격이 단수로 사용할 때는 본질과 같은 뜻이며 복수로 사용할 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한다고 했다. 바실리오스는 세 위격을 인정하는 것은 단일통치원리를 무너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들은 아버지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안에 있다. 아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요,
아버지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들을 통해 이루기 때문이다. 인격의 고유성에 의하면 하나와 하나이다.
하지만 공유에 따르면 둘은 하나이다." 바실리오스는 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문제를 다루면서 단일통치원리를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알려지고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가 알수 있다.
"신 인식의 길은 한 성령으로부터 한 아들을 통해 한 아버지에게로 이른다."
2) 성령론
그의 삼위일체는 성령론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니케아 신조가 작성될 당시 성령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단지 '성령을 믿는다'는 언급만 있을뿐이다.
그러나 350년경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고 성령을 섬기는 영이나 피조물로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에 바실리오스는 성령은 성화하는 힘이지 성화되는 분이 아니라 하면서 피조물이나 섬기는 영이란 자들을 정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순서를 바꾸는 것도 정죄했다.
그는 저서"성령론"을 통해 성령의 신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실리오스의 삼위일체 시작은 세례와 신앙과 영광송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이것은 세례에 의해서 되는데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나누어 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바실리오스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라고 말하지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게 영광을 돌린다고 하여
우회적으로 성령의 신성을 강조했다. 본질의 공유와 사역의 공유는 영광의 공유로 나타나야 한다.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사역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며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본질에서 같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령을 영광송에 온전히 포함시키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나님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바실리오스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수도사들에게 공격을 당했지만 당시 상황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를 계기로 아타나시오스와 힐라리우스, 교황 리베리우스등 니케아 파가 유사본질파와
연합전선을 펼치던 상황에서 바실리오스도 유사본질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대신에, 바실리오스는 '성령의 위대함과 위엄과 작용'을 통해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성령은 창조 때에 창조주로서 생명을 주는 사역에 동참했으며 구속사 전체에서 치유하고
거룩하게 하는 일을 했다. 지어진 모든 만물이 으뜸가는 원리는 아버지요, 만드는 원인은 아들이며 마감하는 원인은 성령이다. 명령하는 주님, 지으시는 말씀, 견고하게 하시는 성령이 하나의 창조행위를 이룬다. 성령을 섬기는 영이라 주장하는
자들에게 섬기는 영은 천사들이며 천사들은 아버지의뜻에 따라 실존하며 아들의 작용으로 존재하게 되며 성령이 임재로
완성된다고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모든 일에 성령도 함깨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바실리오스는 '본성의 공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뗄 수 없는 관계와 공동의 사역뿐만 아니라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다는 사실에서 증명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아들처럼 나시지 않고 하나님의 숨(호흡)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시며 이런 점에서 아들과 구별된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만 아들이 성령의 유일한 근원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영화롭게 되듯이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를 통해 영화롭게
된다. 행위가 하나라면 본성도 하나일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증명했다. 성령이라는 이름이 아들처럼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나타나지 않는 다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행위의 동일성은 본성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본성의 공유는 이러한 호칭(신적 성령)이 매우 적절히 부합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C.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329-389)
1.그의 생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리오스와 마찬가지로 카파도기아의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실리오스와 동년배로 함께 공부했지만 전혀 다른 성격과 은사를 가지고 있다.
고요한 관상과 수도생활과 교양적 문화를 좋아했고 유약하고 민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외부압력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그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도피와 세상으로 복귀로 특징지어진다. 그가 신학적 작업을 하고 교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활을
했던 시기는 379-381 여름까지 2년동안 이었다. 37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나지안조스의 교회를 맡았으며 379년 니케아
소수파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5개의 신학적 설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설교가 여기서 이루어졌다.
380년 11월 24일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었으며 381년 5월에 개최된 공의회 의장이 되어 회의를 주도했다.
공의회의 중요한 문제중 하나가 안티오키아의 교회분열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사임하고 나지안조스로 돌아가 주교로 봉사하다 그의 사촌 유랄리오스를 나지안 조스 주교로 세우고 가족 영지인
아라안줌으로 돌아가 문예생활과 수도생활에 전념하다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2.그의 삼위일체
1)구원론적이고 영광송론적인 맥락
그는 바실리오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바실리오스를 "삶의 인도자요 교리의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신학적 용어와 표현을 정리하고 신학의 정의, 성격, 방법론을 세워 바실리오스를 넘어섰다.
그는 하나님의 하나됨과 셋 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용어를 제시했으며, 삼위일체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레고리오스는 삼위일체 신앙이 사벨리오스주의와 아리오스주의의 이중적
도전사이에 있다고 보았다. 전자는 하나님의 셋됨을 하나로 혼합시켰으며 후자는 다신론을 가르친다.
그는 삼위일체의 신앙이 추상적인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 관점에서 세례신앙을 삼위일체의 기초라 보았다.
"그리스도는 우리때문에 인간이 되셨으니 이는 우리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세례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성령은 세례를 통해 인간을 신화시키는 분이며, 우리를 거듭나게하며 아들과 함께 다시 살리시는 분이다. 세례안에 표현된 삼위일체 신앙은 영광송으로 연결된다.
나를 세례로 신화시키는 분이 성령이라면 그분이 예배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분이 예배된다면 마땅히 경배되어야 한다.
그분이 경배된다면 왜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구원의 황금사슬이다."
2)내재적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그레고리오스의 가장 뛰어난 공헌 중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한 특성과 기원과 상호관계를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정의했다는 점이다. 바실리오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고유한 특성을 밝혔지만 성령의 고유성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며 지복직관에서나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스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성을 "비출생, 출생,파송"으로 말하거나 "나시지 않은 분 과 나신 분 과 나오시는 분 (발출하신 분), 한 하나님과 세 고유하신 분"이라 불렀다. 그는 아들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아담과 하와와 셋을 유비로 제시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화와는 아담에게서 나왔고 셋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출생했지만 이 모두는 동일본질이다.
하와와 셋은 아담에게서 구별된 방식으로 나왔다.
하와가 떼낸것 이라면 셋은 낳아진 것으로 이는 성령과 아들의 기원방식의 차이를 어느 정도 보여 줄수있다.
바실리오스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주저했다. 이는 당시 상황에 비쳐 충분히 공감할수 있고 그
레고리오스도 공감을 표했지만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뚜렷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바실리오스와 구별된다. "등불을 말아래 감추지 말고 등경위에 두어 모두에게 비추듯이 이제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은유나 지적인 개요가
아니라 온 누리에 분명한 선언으로 비추게 해야 한다". 그는 성령이 하나님이며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이는 계시의 진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구약은 아버지를 분명히 선언했지만 아들은 희미하게 선포했다. 신약은 아들을 분명히 드러냈지만 성령의 신성은 암시만 했다. 아버지의 신성이 아직 고백되지 않았을 때에 아들의 신성을 드러내게 선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아들의 신성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에 성령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신성이 확정되었다면 성령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바실리오스는 인격이라는 개념이 존재론적으로 공허한 개념으로 존재론적 성격을 가진 위격이라는 말이 함께 결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인격이란 말이 원래 가면을 뜻했기에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고리오스는 위격과 인격을 같은 개념으로 이해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교서는 이러한 그레고리오스의 입장을 따라 위격과 인격을 같은
의미로 이해했으며 삼위일체론의 인격 개념안에 주체성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진보로 생각할 수 있다.
3) 삼위의 상호관계와 단일통치원리
그레고리오스는 삼위의 하나 됨과 고유한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최초로 관계 개념을 사용했으며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정점을 이루는 라틴 교회 삼위일체론을 예비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셨으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것에서만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된다.
곧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 자체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구별된다.
아들과 성령도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게된 차이 곧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셧고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발출된다는 차이가 이름의 차이를 만들었다. 아들이 뭔가 부족해서 아버지가 아닌 것이 아니며 성령은 뭔가 부족해서
아들이 아닌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것이며 성령은 아들의 모든것이다.
어떤 본질적 차이도 없으며 오직 관계의 차이만 있을뿐이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은 원인만 제외하곤 아들의 것이며,
아들의 모든 것은 아들됨만 제외하고 성령의 것이다.
또한 그레고리오스는 하나님의 하나됨과 단일통치원리를 강조했다. 셋에게 본성은 하나,즉 하나님이다.
하나됨은 아버지로 이루어지는데, 나머지는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그분에게로 돌아가 시간,의,권능의 분리 없이 혼합이
아니라 결합된다. 삼위의 기원이 하나이며 본질이 동일하며,뜻,의지,권능,행위가 하나라면 세위격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버지에게 기원이 없다는 점에서 아들보다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들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기원의 관계를 제외하곤 삼위안에는 완전한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D. 닛사의 그레고리우스(332-395)
1. 그의 생애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 사상적으로 위대한 인물인데도 흔히 간과 되어 왔다.
한때 그는 '교부중의 교부' '온 교회를 받치는 기둥' '우주적 박사'라고 찬사를 받았다.
바실리오스의 동생으로 더 철학적이고 더 심오하다는 점에서 카파도기아의 다른 두 교부를 능가한다.
독창적인 신비가로서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형 바실리오스에게 수사학과 신학훈련을 받았으며 372년
바실리오스에 의해 작은 도시 닛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바실리오스가 사망한 후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하며 수 많은
저작을 남겼다. 381년 5월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지도적인 역활을 담담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공의회 이후 공의회의 결정을 시행하기 위해 만든 법률에서 모든 주교들은 그와 일치해야하는 "규범적인 주교"로 불렸다.
2. 그의 삼위일체론
1) 세례와 영광송과 삼위일체론
다른 카파도기아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도 삼위일체 신앙이 예수의 세례명령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것이 구원의 기초라 하였다. 삼위가 모두 창조되지 않은 것이라 믿고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하는 길이 되지만, 삼위중 어느 하나라도 창조물이라고 고백하면 이에 참여할 수없고 삼위 중 어느 한 이름이라도
빠진다면 세례의 은총은 불완전하다.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이고 아들은 생명의 창시자요 성령은 살리시는 영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믿음으로 영생의 은총이 주어진다.
"삼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우리의 생명은 만물의 하나님으로 부터 흘러나오고 아들은 통해 흐르며 성령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온전한 확신을 지니고 명령받은 대로 세례를 받고 세례받은 대로 믿고 믿은 대로 영광을
돌린다. 이로써 우리의 세례, 우리의 믿음, 우리의 영광송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로 드려진다"
그는 삼위일체 신앙이 유대교의 유일신론과 헬라의 다신론 사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위격의 구별을
본성의 하나 됨 안에서 보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신론과 유대교의 일신론의 잘못에 빠지지 않을수 있다"
2) 성령론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며 성령의 위격과 활동을 삼위일체적 삶과 온전히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카파도기아의 교부와 일치한다. 성령은 신성의 모든 속성을 공유하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하다.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삼위의 구별을 기원이라는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아버지는 기원이 없고 나시지 않고 영원한 아버지로 생각되며, 그분으로 부터 나신 아들이 있다고 이해되며, 아들로
말미암아 성령이 존재한다"
성령의 기원을 말하면서 '아들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한다.
그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비롯되며 성령은 아버지로 부터 아들의 중재를 통해 비롯된다고 한다.
그에게서 '필리오케'가 발견되지는 않지만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성령은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바실리오스는 성령의 출현이 성부의 숨으로 나오셨다고 하며 성령이 존재하게 된 방식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성령의 기원을 성부로부터 '발출'한다고 하였다.
이는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데 아리오스파는 성부가 두 아들을 두셨다고 조롱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그래서 카파도기아 교부들은 성자의 기원 양식과 성령의 기원 양식을 구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특히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중 발현설을 주장하였다. 성령은 중보자인 성자로 통하여 존재한다.
그는 이것을 햇불의 비유로 설명했다. 첫번 햇불이 다음 햇불에게다가 빛을 전하여주고 그 다음에 둘째 햇불을 통해서
세째에다가 빛을 나누어 준다. 그는 성령이 아들의 영으로서 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의 교리는 분명히
성자가 의심할 나위없이 삼위의 원천이신 성부에 종속되어 성령을 산출하는데 있어서 대행자로서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이후에 동방교회의 정규적인 가르침은 성령의 발현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된다는 것이다.
3) 단일통치원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하나의 신적 원리가 있을 뿐이다.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떨어지지 않으며 항상 서로를 따르며 서로 연합한다.
성령안에서 예수를 주라하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갈 수 없다.
이런 내재적 상호작용은 창조사역과 구원사역 같은 경륜적 활동에서도 표현된다.
창조사역은 아버지에의해 시작되고 아들을 통해 진행되며 성령안에서 완성된다.
어떤 행위도 아버지나 아들이나 성령의 단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죄인을정결하게하고 거룩하게 한다.
어느 한분이 각각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시작되고 아들을 통하여 실현되고 성령에의해 완성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경배를 드리는 것은 삼위로부터 하나님의 동일한 은총을 받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무슨 이유로 그대는 모두로부터 하나의 동일한 은총을 받으면서도 세 위격을 다른 본성으로 가르고, 서로 다른
세 신으로 만드느가?" 그레고리우스는 마치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 성장한다. 단 하나의 은총을 받는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따진다면 그 빛안에는 여러가지 다른 빛이 있다.
그 빛들은 연합하여 한 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 론
아타나시오스는 삼위일체의 기본적인 원리와 틀을 세웠고, 카파도기아 교부들은 이를 개념적으로 다듬고 논리적으로
발전시켜 고전적인 삼위일체를 완성했다. 그들의 삼위일체는 내재적인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삼위의 하나됨과 셋됨을 설명하기위해 노력했지만, 이론적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 관점에서 특히 세례와 영광송과 연관시켜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본질과 위격을 구별하고 삼위의 기원에 있어서만 다르며 다른 모든 점은 동일하며 삼위의 하나님이 본질,
의지, 행위를 가진다는 교부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오늘날에도 타당성을 얻지만 그들이 전개했던 형이상학적인 전제와 틀은 오늘날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고전적인 삼위일체 신학은 현대의 삼위일체 신학이 필히 참조해야하고 대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