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부패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빠져나왔으며, 거대한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고,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발견하기 어려운 광야에서도 만나와 생수를 먹어가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올라간지 며칠이 되었다고 그들은 벌서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하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명명하고는 그것에게 제사드리고 먹고 마시고 광란을 춤을 추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여 죽여 없애버리려고 작정하셨다. 하지만 모세의 중보기도 덕분에 그들은 죽지 않았다. 또한 송아지우상을 직접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던 아론도 죽지 않았다. 대체 모세는 어떤 중보기도를 드렸던 것일까? 어떤 기도를 드렸길래 끓어오르는 하나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민족의 금송아지 우상숭배사건은 우상숭배가 얼마나 큰 심판과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대체 어떤 중보기도가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잘 대변해주고 있다. 이제 그것을 알아보자.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자손이 시내산에 이르자 모세를 불러올려서 그에게 도덕법인 십계명과 아울러 재판법 및 절기법 등을 들려주셨다. 그리고 내려가서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올라오게 한 후 그들과 언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세만 다시 올라오게 했다. 이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그에게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올라갔고 여호수아는 시내산 중턱에 머무르게 한 뒤, 모세 혼자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번에는 성막법을 들려주셨다. 이는 도덕법인 십계명법에 의해 죄인이 된 자들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모세에게 주셨다. 그러자 그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이스라엘 진영에서 사단이 났다. 그래서 오늘은 모세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내려오면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의 민족 공동체의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덕목과 자세 그리고 지도자의 중보기도의 헌신 및 우상숭배 죄의 심각성을 다룰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와 심판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들에게 그리도 분노하셨는가?
모세가 이제 두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 아래로 내려오기 직전이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새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의 분노를 가져오게 할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에게 경배하면서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고 제사를 드린 뒤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시려고 준비하고 있었을까?
먼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속히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그들은 말했다. "우리를 애굽땅에서 인도한 낸 모세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이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고 있는 모세가 그들과 함께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충만한 지도자의 부재가 공동체를 타락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보이는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어보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그 문제를 모세를 대신하고 있는 지도자 아론에게 가지고 갔다. 그런데 이때 아론은 그들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우상숭배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그들로부터 자기들의 금붙이를 빼내어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녹여서 금송아지를 주조하여 만들어 단 위에 세웠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엘로힘)이로다(출32:4)" 혼이 없는 중간지도자의 역할은 이처럼 스라엘의 타락을 더 부추겼다.
- 이집트의 아피스 부조벽화 -
그렇다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를 인도할 신(엘로힘)을 만든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된 행위인지를 살펴보자.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신"은 "엘로힘"이란 단어로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지금까지 그들을 이끌어 시내산까지 오게 한 자기들의 신을 이제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그 신이 자기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행위가 된다는 사실은 그들을 몰랐다. 왜냐하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거기에는 결코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이며 그것에게 절하지도 말고 섬기기도 말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출20:4~6). 그런데 그들은 버젓이 자기들을 인도할 신이라고 하면서 송아지우상을 만들어 경배한 것이다. 그들은 그 신에게 번제를 드렸고 화목제를 드렸다. 어찌보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식이었고 절차로서 하자가 없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우상숭배행위였다. 왜냐하면 금송아지는 지금까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내시고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그 하나님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던 존재는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그들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그것은 우상숭배행위였다. 그러한 사실은 사도바울에 의해 고스란히 고린도전서에 언급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그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논다 함께 같으리라(고전10:7)" 그랬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을 만들어 섬긴 것이다.
금송아지 숭배 - 푸생(A.D.1594~1665)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엄연한 우상숭배행위였다.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지 않았고 오히려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했기 때문이다.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한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에서는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예배라고 하면서 드린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받으시는 예배인가 아니면 우상숭배행위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성도들은 우리가 고안한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위해서는 어떤 예배행위를 하도록 말씀하지 않았다. 죽은 시체는 사망이 임한 것이므로 이미 저주를 받은 것이며, 시체는 죽은 즉시 귀신이 접수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시체를 갖다놓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가증스런 행위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내용은 죽은 자를 위한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추도예배도 마찬가지다. 이미 고인된 자의 죽은 날을 기념하여, 불신자들이 행하는 제사를 대신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어떤 것을 두고 "예배"라는 이름을 붙히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이집트의 아피스의 그림벽화 -
3.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그러자 하나님의 분노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리도 빨리 떠나 우상숭배의 길로 빠질 줄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자 즉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했다. "이제 이들은 더이상 내 백성이 아니다. 너는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라. 내가 이들에게 진노하여 이들을 끝장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너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겠다(출32:7~10"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기의 민족이 비록 범죄했지만 그대로 다 죽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중보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기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뜻을 돌이켜 그들을 진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체 모세는 어떤 기도를 드린 것일까? 그때 모세는 2가지의 말씀을 아룀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잠잠하게 하였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버리신다면 주변 민족들이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일 악한 의도를 가지고 인도해 낸 것이 아니랴고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출32:12).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면, 하나님께서 500년전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많게 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빈 말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출32:1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금새 뜻을 돌이키셨고 말씀하신 화를 내리지 아니하셨다. 이처럼 한 사람의 중보기도는 한 민족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중보기도는 대체 어떤 기도였길래 죽을 사람을 살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점(?)을 이용한 중보기도였다는 점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지만 약점이 있으시다. 그것은 당신이 하신 말씀은 당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지키셔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뢴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약속의 신실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당신이 내리리라고 결정하셨던 화를 그들에게 내리지 않으셨다.
4. 모세가 십계명의 두 돌판을 깨뜨린 것은 왜 죄가 되지 아니했는가?
그러나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상황은 심각했다. 진중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전가도 아니라 노래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데도 우상을 바위 위에 세워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기뻐하면서 뛰놀고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모세는 분노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두 돌판을 산 아래 던져서 그만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 송아지를 끌어내려 그것을 녹여 가루로 만들어 진중에 흐르는 물에 타서 온 백성으로 하여금 마시게 하였다.
성경에 보면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분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며(엡4:26), 해가 지도록 분노를 품지 말라고도 하신다(약1:20). 그런데 모세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깨뜨려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로 모세를 책망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그들 자신이이 우상을 섬김으로 깨뜨려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언약을 상징하는 돌비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즉 돌피의 파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의 파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둘째로,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를 내서는 안 되겠지만, 죄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귀신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가 그렇게 행한 것이다.
5. 중간지도자였던 아론은 자기 민족의 우상숭배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했는가?
이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 책임지고 있는 아론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때 아론은 어떻게 대답했어야 했을까? 간단하다. 자기에게 맡겨둔 이스라엘 백성을 잘못 인도한 책임을 자신에게 물어달라고 하면서, 그래서 자신을 벌해달라고 그러므로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론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악했기에 그들이 요청한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실은 자기가 금송아지를 직접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는 백성들이 가져온 금붙이들을 모아서 불속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오더라고 대답했다. 그는 참으로 파렴치한 지도자요,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이런 자는 결코 믿음의 공동체를 인도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는 공동체를 인도할 책임자로서 한참 미달된 신앙과 인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모세는 아론을 책망하지 않았다. 아니 시내산 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었다(신9:20). 이것은 중간지도자의 판단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나아갈 앞 길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중간지도자의 그릇된 행위가 자기공동체의 구원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6.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도록 레위자손들이 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아론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을 물으라고 하였다. 그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춤을 추며 먹고 마시고 있는 자들을 다 칼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러자 모세가 속해있던 지파 사람들은 레위자손들이 일어나가 각기 자신의 형제와 친구 그리고 이웃을 죽였다. 심지어 자기의 자식까지도 죽였다. 그날 칼에 찔러 사망한 자가 무려 3,000명이나 되었다. 이런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는 없는 일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론자손들을 축복해 주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함으로써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을 살려낼 수 있는 동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레위자손들이 살륙을 그치고 난 후에 많이 울었을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형제와 이웃과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 전민족이 다 죽게 생겼으니, 레위자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의 가족을 죽였던 것이다. 이처럼 범죄는 반드시 책임이 뒤따라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범죄는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7.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잠재우게 했던 모세의 마지막 중보기도는 어떤 것이었는가?
이튿날 모세는 이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최종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더이상 죽어나가지 않도록 목숨을 담보한 2차 기도에 들어간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형이자 중간지도자였던 아론이 보여준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다. 아론은 자신의 잘못을 들었을 때에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는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모세를 달랐다.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기 민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건 중보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다. "이 백성들이 자기를 위해 금신을 만들어 큰 죄를 범했으나 할 수만 있으면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저를 벌하여서 주께서 생명책에 기록해 둔 나의 이름을 지워주옵소서(출32:31~32)". 이러한 모세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눅23:34)와 스데반의 기도(행7:60)를 연상케 한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기를 간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모세의 기도는 바울의 기도(롬9:1~2)와 다윗의 기도(삼하24:17)를 연상케 한다. 왜나하면 자신이 죽더라도 자기민족과 공동체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죄값을 자신에게 물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의 기도를 지금도 듣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려야 할 심판을 일시적으로 멈추셨다. 그리고 범죄한 공동체였지만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또 주셨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놀라운 능력이다.
8. 나오며
그런데 놀라지 말라. 범죄는 분명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는데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모세의 중보기도 덕분에 죽었어야 했던 아론도 죽지 않았으며, 이스라엘 민족도 다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이 일을 행한 당사자들 중에 단 한 사람도 회개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잠시 뒤로 연기된 것일 뿐 하나님의 진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 죄를 벌하시게 되는 것이다. 사실 출애굽한 1세대들은 그후 다 광야에 엎드려져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범죄했는데도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 덕분에 대신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멈추어 버리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심판의 멈춤이기 때문이다. 즉시 회개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회개 없이는 결국 죄값으로 인하여 범죄자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죄라고 깨닫게 되었다면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회개해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아무리 무참히 사람을 살해했던 극악무도한 강도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을 때, 예수께서도 그를 용서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러한 와중에서도 한 편 강도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이다. 그렇다.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는 과거에 지은 죄를 깨끗히 무의 상태로 포맷하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또 회개하라. 회개만이 살 길이다.
2019년 5월 1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