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B.C.600년경 과연 천상의 모습 특히 하나님의 보좌 주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구약시대에는 사실 부활체를 입은 성도가 아직은 한 명도 없던 시대였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수께서 처음으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어 천국에 들어가셨으니, 에스겔이 사역하던 시대(B.C.593~571)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직은 없었다. 그때는 오직 하나님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시대다. 하지만 이때도 지금처럼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네 생명체들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그 보좌에 앉아서 이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때 천상의 특이한 존재는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 있는 "네 생물들"이다. 네 생물들은 겉으로 보기는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다 천사들에게 속한다. 하지만 그들을 천사라고 지칭하기보다는 피조물의 원형이라고 해야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네 생물들과 더불어 네 생물들 옆에 있는 바퀴의 환상 그리고 궁창과 더불어 하나님의 보좌의 형상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 대한 환상을 다루고자 한다. 특히 이것이 A.D.95~96년경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천상의 모습과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네 생물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특징과 보좌의 기능과 보좌에 앉으신 이가 누군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에스겔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던 날에 보았던 천상의 네 생물들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에스겔이 부름받던 때는 에스겔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였다(B.C.593). 그는 이미 25세 때에 남유왕 여호야긴왕과 함께 바벨론에 2차로 포로로 끌려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포로였기에 성전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환상이 임했다. 그가 환상 중에 보았던 것은 네 생물들의 모습, 바퀴와 궁창의 형상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였다. 그 중에서 네 생물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첫째로, 네 생물의 모습은 크게 보기에는 날개를 지닌 독수리와 같았으나 얼굴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이 생물들은 각기 사면에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이들의 얼굴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사람, 들짐승의 왕으로서 사자, 집짐승의 왕으로서 소 그리고 날아근 새들의 왕으로서 독수리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이 생물들이 지혜와 용기와 힘과 민첩함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보좌하여 행정을 집행할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러한 네 생물들의 날개는 두 쌍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 쌍으로는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었고, 한 쌍으로는 날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몸을 가린 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이 날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일을 신속히 집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로, 이들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들의 발은 광낸 구리같은 송아지 발바닥 같았다. 이것은 이 생물이 민첩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묵묵히 순종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고 하면 돌이키지 아니하고 곧장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순식간에 이동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에는 돌이킴이나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로, 이들 생물들의 수는 총 넷이었다. 이 생물들의 수가 넷인 것은 이 생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된 생명체들을 대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숫자가 "4"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동서남북,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사람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표현되었으니, 이 생물은 피조물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네 생물 곁에 있는 바퀴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런데 네 생물곁에는 땅 위에 바퀴와 같은 것들이 네 생물 곁에 4개가 있었는데, 바퀴 안에는 또 다른 바퀴가 있었다. 그리고 바퀴에는 수많은 눈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 바퀴의 가운데에는 "영(spirit)"이 있었는데, 이 영은 네 생물들의 영이었다. 그렇다면,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이 바퀴에 눈들이 가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들의 바퀴가 4개가 있었고 그 안에 영이 있었으며 이 바퀴에 눈이 가득하였다는 것은 이 바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네 생물들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 이 세상에 보내어져 이 세상에서 돌아가고 있는 일들을 감찰한 후에 하나님께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네 생물 곁에 있는 바퀴는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4. 네 생물 위에 있는 궁창은 어떤 모습을 가졌고 궁창 아래 있는 생물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네 생물들의 머리 위에는 수정같이 맑은 궁창(넓은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보기에 심히 두려웠다. 왜냐하면 궁창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심판주되신 하나님께서 앉아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겔이 궁창 아래에 있는 네 생물이 날개짓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날개짓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았고,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았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았다. 이러한 소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 생물들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군대의 움직임으로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모습이 이런 것임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럼, 이 생물들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에 그 명령을 신속히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더불어 항상 이 세상을 감찰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날 때에 이 생물들은 자신들의 날개를 고이 접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자세를 즉시 취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은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하옵소서"라는 자세를 항상 취하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5. 궁창 위의 하나님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는 누구신가?
궁창 위에는 한 개의 하나님의 보좌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어떤 분이 앉아계셨다.
먼저,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부터 살펴보자. 하나님의 보좌는 그 모양이 남보석(사파이어)으로서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는 그분이 생명의 주관자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둘째로, 보좌 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분은 허리 위로는 단 쇠처럼 빛나고 있어서 그분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여기서 "단 쇠"란 불에 달아있는 쇠같다는 뜻인데, 불에 달아있는 모습은 빨간색은 아니었고 금과 은을 합친 흰 빛의 색깔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빛에 둘러싸여 있는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허리 아래는 불같이 보였는데, 그 불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은 마치 비오는 날에 구름이 빛나는 무지개와 같았다. 총천연색을 지닌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으로서,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곳에 좌정하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겔은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하셨다(겔2:1).
6.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는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으며,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던 구약의 인물들이 종종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사야 선지자가 있고(사6:1), 미가야 선지자도 있으며(왕상22:19),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 선지자도 있다. 하지만 시편기자들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그 용도가 어떤 용도인지까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 용도는 크게 3가지였다(구약에는 2가지만 나온다).
첫째,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해 보좌를 베풀었도다(시9:7)", "주께서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시9:4)" 그리고 시97:2에서는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라고 말하였으며, 잠16:12에서는 "그의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서 있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의 첫번째 용도가 심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보좌는 "통치의 보좌"다. 두번째 하나님의 보좌의 용도는 통치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앉아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것이다. 시103:19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도다"라고 했다.
셋째,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서 "경배받는 보좌"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가서 비로소 공개된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만 해도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후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시작했으니, 지금도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 곧 천사와 구원받은 성도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계신다. 하나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들 주위에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계7:11)",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경배하고(계4:10)"
7. 구약의 보좌의 모습과 요한계시록의 보좌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
그런데 구약시대는 아직 구속사역이 이뤄지지 아니한 상태이므로, 구약시대에 천국의 모습을 보고 온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구속사역이 완성된 후 벌써 60년이 지난 A.D.95년경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의 모습은 두려운 모습이라기보다는 매우 평온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주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보좌의 모습과 신약의 보좌의 모습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첫째, 보좌에 앉으신 이에 있어서 변화가 생겼다. 구약시대에는 그 위에 오직 홀로 여호와께서 앉아계셨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오직 한 개 밖에 없는 하나님의 보좌 위에 예수게서 앉아계신다(계3:21, 7:17, 20:11, 마25:3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불린다(계22:1,3). 둘째, 통치와 심판의 보좌가 1개에서 25개로 늘어났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보좌는 1개의 보좌로서 통치와 심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순절성령강림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는 1개에서 24개의 장로들의 보좌가 더해져서, 25개의 보좌가 되었다(계4:2~4,20:4). 그리고 예수께서는 24명의 장로들에게 통치와 심판의 일부를 맡기신다(눅22:30, 마19:28).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간 것만 해도 황송한 일인데 주께서는 믿는 이들 중 이기는 자들에게 천국에 있는 24개의 보좌에 앉게해주시고, 거기에서 심판하며 왕노릇하게 해 주시는 것이다.
8. 나오며
B.C.593년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그의 영이 하늘에 이끌려가서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의 모습은 심히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때 하나님께는 높이 들린 보좌 위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는 넓은 궁창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궁창 아래에는 날개를 펴고 서로 끝이 닿아있는 네 생물이 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네 생물 곁에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생물의 영이 들어있었다. 가장 위엄스러운 것은 네 생물들이 날개짓을 할 때 나는 소리였다. 그것은 전능자의 음성같기도 하였고, 많은 물소리 같기도 하였으며, 많은 군대의 소리 같기도 했다. 에스겔은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시며 심판하시고 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능자께서 보좌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가 소명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런데 오순절성령강림 이후 하나님의 보좌는 이제 위엄의 보좌에서 은혜의 보좌로 바뀌었다(히4:16). 이미 2천년전에 예수께서 사람(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하늘에 올라가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선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지켜보면서 감격하고 또 감격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다 그곳에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9년 6월 26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