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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lnmBHbrY8tU
날짜 2020-08-19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2:1~21(신약 30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바울의사도권,바나바와디도방문,예루살렘총회,유명한자들,베드로와요한과야고보,거짓형제들,복음의진리,무할례자의사도,할례자의사도,안디옥,율법의행위,이신칭의

1. 들어가며

  바울에게 있어서 아킬레스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린양의 12사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은 끊임없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가 전한 복음까지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호도하였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얼마나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도직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변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이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고 성령받아 구원받은 이들을 지켜낼 수 있었고, 미혹받은 성도들을 건져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지난 시간에 이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더불어 그가 받았던 복음진리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갈라디아서 2장은 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가?

  갈라디아서 2장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 부분(갈2:1~10)에는 바울의 예루살렘 총회 참석과 디도에 대한 할례요구 거부 및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에 대한 공식입장이 들어 있다. 그리고 둘째 부분(갈2:11~14)에서 베드로의 책망사건을 통한 율법주의적 잔재에 대한 지적을 다루며, 셋째 부분에서는 이신득의의 절대성과 확실성 및 율법회귀로의 부당성(갈2:15~21)에 대해 언급한다. 

 

3. 바울은 왜 예루살렘총회에 왜 가야만 했는가?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방문은 총 5차례 있었다. 그중에 첫번째 방문은 지난 번에 살펴 보았듯이 그가 회심한 후 3년만에 있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는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 자신의 회심과정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장로들과 사도들이 바울을 접촉하기를 꺼렸지만, 이내 바나바의 중재로 인하여 베드로와 야고보가 바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5일간 함께 있으면서 자초지종을 함께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방문은 구제헌금 전달 이유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제1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바울은 자기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간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헬라인(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한다(행11:19~20).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의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족이었던 요셉이라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던 바나바(행4:36~37)를 그곳의 교역자로 파송한다.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행11:24). 그런데 더욱 사람이 많이 몰려오자 과거에 바울을 만난 적이 있던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바울을 데려다가 같이 사역을 한다. 그러던 중 로마황제 글라우디오 때에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대로 천하가 큰 흉년이 들었는데, 그 때 예루살렘교회에도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바울과 바나바는 구제헌금을 마련하여, A.D.46년경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두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세번째 방문은 복음의 진리를 파괴하고 있는 "거짓형제들" 때문이었다(갈2:4). 안디옥교회와 그리고 바울이 개척한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가만히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유대율법주의자들이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라도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 한 분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유대인들처럼 할례도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때 바울은 충분히 복음의 진리로 그들을 훈계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도권까지 문제삼고 있는 그들에게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이 전한 복음이 합당하다는 것을 알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자 바울은 그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로 가지고 가서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바울은 바나바와 헬라인 디도 및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방인에게도 자기들처럼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도들의 대표자였던 베드로가 일어나, 자기가 일전에 보았던 보자기환상과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고넬료가정에 말씀을 전했을 때, 말씀듣는 중에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상관없이 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행15:7~11). 그러자 예루살렘회의 장로들의 대표이며, 예루살렘 총회의 대표격이었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보고가 일어나 말하기를, 이방인이 주께 돌아온다면, 그들에게 자기들처럼 율법의 멍에를 두어 그들을 괴롭게 하지는 말고, 다만 그들이 사는 지역에도 율법을 전하는 자가 있고 율법말씀을 아는 자가 있으니, 이방인들에게는 4가지 정도만 주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것었다. 결국 온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 모두는 야고보 안을 채택하고는, 그 소식을 예루살렘교회의 선지자였던 유다와 실라를 바울 편에 딸려보내 안디옥교회에 파송한다. 이것이 바울의 3차 예루살렘 방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잠깐 예루살렘에 들렀으며(4차방문),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는 일부러 예루살렘에 들르게 되는데(5차방문), 이것이 바울의 4차방문(A.D.52년)(행18:22)이며, 5차방문(A.D.58년)(행21:17~26)이다. 

 

4. 바울은 왜 예루살렘 총회 때에 헬라인이었던 디도를 굳이 대동하려 했는가?

  그런데 바울은 왜 예루살렘 총회에 방문할 때에, 굳이 헬라인이었던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일까? 그런데 "디도"는 바울이 자신의 아들같이 여긴던 동역자였다. 바울은 훗날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그 이전에는 디도를 자신의 참 아들이라고 불렀다(딛1:4). 이때 바울이 예루살렘에 데리고 간 디도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디도서"의 저자다. 그는 헬라인 곧 이방인으로서 안디옥교회에서 사역자가 된 사람인데, 먼저는 고린도교회에 파송을 받고 사역한 자였으며, 그후에는 그레데 교회에서 사역하였고(딛1:5), 마지막으로 달마디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한 사역자다(딤후4:10). 이때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디도를 고린도교회의 훌륭한 사역자로서 소개하는데, 그때 바울은 "그는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고후8:23)"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이방 헬라인이었다. 그는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고로 바울이 그를 예루살렘총회에 데려간 이유는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있는 곳이 비록 예루살렘일지라도 디도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게 함이었다. 그때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 은 따로 불러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실은 아무도 디도의 할례문제를 지적하지 않았으며 그를 억지로 할례받게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바울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될 수 있음이 확증될 수 있었던 것이다. 

 

5. 유대율법주의자들인 거짓형제들은 왜 이방인 교회들에게 침투하려고 했는가?

  유대율법주의자들이면서 믿는 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 중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게 되자, 이방인들이 너무 쉽게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서 미움과 질투심이 일어난다. 이방인들이 너무나 쉽게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갈2:4). 그러자 율법주의자였던 거짓 형제들은 이방인일지라도 자기들처럼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갈1:6~9). 그때 그들이 사람들을 쉽게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과연 사도로서 합당한가 하는 질문이었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과연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으로 속여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어린양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는 다르며, 바울의 사도직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자 바울은 일부러 믿는 이들의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2가지 문제 곧 할례행함과 모세율법 준수 문제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확답을 받아오려고 하였다. 

 

6. 바울이 왜 예루살렘 총회에 가서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이 합당한 것인지를 검증받으려 했는가?

  사실 바울은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나 자신이 받은 사도직은 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므로, 꼭 누구의 동의나 인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이 참되고 순수한 진짜 복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복음전파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들이라고 했다(갈2:6a). 하나님은 사람을은 결코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을 불러내어 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유력한 자들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더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한 일이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갈2:6b). 그 이유는 양쪽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예루살렘교회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받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같이, 안디옥교회의 대표격인 바울 자신도 역시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받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갈2:7~8).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같은 자들인 야고보와 베드로(게바)와 요한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와 사역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서로 따뜻한 친교의 악수를 하면서 바울의 이방선교사역을 인준해 준 것이다(갈2:9). 다만 예루살렘교회의 유력한 자들이 바울에게 부탁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바울도 기꺼이 동의해주었고 또한 열심히 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갈라디아서에서 써놓았다(갈2:10). 

 

7. 바울의 사도권이 모든 교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사실 바울이 ''사도'인 것과 그가 전한 복음이 진짜라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먼저는 결과물인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던 자들이 결국에는 성령을 받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준수와 할례문제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총회에서, 오직 은혜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받는 것이 결정됨으로 인하여 또한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권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제 누구든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바울의 사도권 및 바울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것임을 드러내주는 사건이 하나 터진다. 그것은 바울이 베드로를 그의 면전에서 책망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갈2:11~14). 그런데 이러한 일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잔혹하게 핍박하였기 때문이다(고전15:8~9). 그런데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만 베드로 사도를 책망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복음진리에서 그만 현저히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A.D.49년 예루살렘총회 이후, 약 A.D.52년경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출발 직전에 하나 사건 때문에 발생했다. 그것은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때 할례파였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이 안디옥교회에 도착하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베드로가 슬금슬금 그 자리를 피해서 물러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의 외식에 물들어 그 자리를 피해버렸고, 심지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였던 바나바도 역시 베드로의 행동을 따라 함깨 행동하고 말았다. 그러자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의 면전에서 즉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그를 책망해버린 것이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방인과 함께 지냈으면서, 이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을 떠나 멀리 하려고 하느냐"고 한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한 형제와 자매된 것을 깨뜨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때 베드로는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취해야 했다. 예루살렘 총회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관한 계시를 분명하게 제시하기 시작한다. 

 

8.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목숨걸고 전하려 하였고, 위대한 어린양의 수석사도였던 베드로를 책망하면서까지 전하려했던 "복음의 진리"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하면 갈2:16의 말씀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이 말씀 때문에 중세의 잘못된 구원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렇다. 사람이 의롭게 되어지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결과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따진다면 이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도 어느 조항 하나만 지키지 못해도 그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약2:10~11). 고로 바울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라고 했다(갈2:21). 왜냐하면 지킬 수 있는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다면, 굳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으며, 그분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율법의 저주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기억할 것은 "믿음"이라는 단어가 단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지적인 동의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다음주에 더 자세히 공부해보기로 하자.

 

9. 나오며

  우리는 바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특히 어린양의 수석 사도였던 베드로 앞에서도 바울이 굽히지 않고 복음의 순수성을 변호하는 장면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성령의 사람이었고 순전한 복음의 사람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되어서 의롭게 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에 대해서는 이랬다 혹은 저랬다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던 참된 복음의 계시를 초지일관 그대로 붙들고 살았으며, 그것과 씨름했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던 위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예루살렘교회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안디옥교회는 유럽과 미국을 거쳐 한국에까지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오로지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역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것이 한국에까지 복음을 전해주었던 하나님의 뜻이자,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명이 아닐까 한다. 

 

2020년 08월 1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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