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들려주는 놀라운 복음서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책이 바로 요한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기적'은 그냥 기적이 아니다. 다 표적들로서의 의미가 있는 기적들만 모아놓은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1장부터 선재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이 요한복음의 중심부에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책의 기록목적을 보게 된다. 자,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놀라운 혜안이 열려지기를 빈다.
2022-06-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3) 요한복음 대체 어떤 책인가?(03)(요1:1~5)_2022-06-01(수)
https://youtu.be/TUEAT5aM04Y [혹은 https://tv.naver.com/v/27141207 ]
1)요한복음의 저자(애제자)
2)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
3)요한복음구조 분석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네 번째로 기록된 복음서이다. 그런데 기록된 내용과 방식이 앞서 기록된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는 상당히 다르다. 내용으로만 본다면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약 92%가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에 비해 대부분 유대와 예루살렘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고스기독론과 선재기독론 그리고 7가지의 "에고 에이미(나는~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성이 매우 많이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내용의 기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날에 일어난 사건을 무려 5장(요한복음의 1/4정도)이나 기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 고별설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은 기적들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저자는 복음서의 기술목적을 뚜렷히 밝혀놓고 있으며 저자가 누군지도 정확히 밝혀놓고 있다. 또한 복음서의 기술방식이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이 아주 특별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이러한 특별 복음서로서 요한복음을 거시적으로 한 번 더 살펴볼텐데, 오늘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가 과연 누구이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 및 요한복음의 구조에 대해서 집중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는 과연 누구인가?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이 복음서를 누가 기록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21장 24절의 말씀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이는 이 일들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제자이다. 그리고 이 일들을 기록했던 [그 제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온 채 있다. 그런데 역시 예수께서 행하셨던 바, [같은 종류의] 다른 것들도 많은 것으로(많이) 있다. 만약 어떤 그것들이 하나씩을 따라 [계속] 기록된다면, 나는 세상이 책들로 기록되고 있는 것들을 수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다." 그렇다. "이이"가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인 것이다. 그럼, '이이'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사랑하고 있어온 제자이다(요21:20).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증거를 살펴보고 한다. 다음 주에는 헬라어 원문상으로 그것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성경 외의 기록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구라고 알려져 있는가? 성경 외의 기록 가운데 초기 기독교 교회사를 저술했던 교회 역사가가 있으니 그는 바로 '유세비유스(A.D.260~340)'라는 사람이다. 그는 팔레스틴 가이사랴 출신의 헬라 신학자이다. 그는 가이사랴의 감독을 지낸 바 있다(A.D.314~). 그는 가이사랴에서 감독으로 지내면서 A.D.324년까지 전10권의 방대한 교회사를 기록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요한복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또한 고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였던 이레네우스(A.D.130~202)의 진술도 기록해 놓고 있다. 먼저, 유세비우스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의 책 "교회사"의 제24장 "복음서의 순서"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논란이 없이 확실한 요한의 저서들을 제시하려 한다 .그의 저서들 중에서 복음서는 전 세계의 교회에 잘 알려져 있으며, 우선적으로 진정한 그의 저작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고대인들은 정당한 근거를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네 번째 위치에 놓았다... [중략]. 마태와 요한은 기록된 의견을 남겨주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필요에 의하여 그 일에 착수했다고 한다. 마태는 처음에는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복음을 모국어로 기록하여 자신이 없는 공백을 그 기록으로 보충해 주었다. 한편, 마가와 누가가 복음서를 펴낸 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복음 전파해온 요한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는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있었고 요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그 복음서들을 인정하였고 그것들의 진실성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최초에 행하신 몇 가지 일과 복음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것도 증언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복음서 기록에 착수하라는 요청을 받은 사도 요한은 앞의 세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지나쳐 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이레네우스가 쓴 "거짓 교리의 타도와 논박" 제3권에서 요한복음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써놓고 있다. "마태는 히브리인들과 함께 머물면서 히브리 방언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고,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떠난 뒤, 베드로의 제자와 통역관이었던 마가는 베드로가 전파했던 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었다(마가복음).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기록하였다(누가복음). 주님의 가슴에 기댔던 제자 요한도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복음서를 기록했다(요한복음)."
그렇다. 성경 외의 기록 중에 유세비우스와 이레네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서를 익히 알고 있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네 번째 복음서로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들과 그들이 지나쳐 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랑하고 있었던 제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이제는 내적인 증거로서, 요한복음서와 다른 복음서들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어떠할까? 요한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로, 애제자는 성만찬석에 참여했던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제자는 성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의지했던 자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요13:23, 21:20).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만찬 때에 함께 참여했던 제자들은 '사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고(눅22:14), 또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열 둘'이라고 나온다(마26:20, 막14:17).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의 한 명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만찬석에서 애제자에게 예수님에 물어보라고 시킨 자가 베드로였고, 떡을 받고 떠나가서 얼마 자살했던 가룟유다는 12명의 제자에게서 제외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애제자는 예수님의 10명의 제자들 가운데 있다. 둘째로, 애제자는 예수님 부활 이후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잡으로 갔던 7명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천사의 고지에 따라 제자들은 갈릴리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같이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때 갈릴리 바닷가에는 7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바돌로매), 세배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둘'이라고 나와 있다(요21:2). 그런데 베드로가 애제자의 미래에 대해 질문하고 있으니, 애제자는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4명의 제자가 누군지를 본문에 나오지만, 나머지 2명의 제자들은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제자 2명'이 누군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미쌍관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요한복음 1장에서 제자들이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의 이름은 '안드레와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한 사람,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이다. 더불어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6장에 '안드레와 빌립'이라는 이름이 나온다(요6:5,8,68), 또한 요한복음 14장에는 "도마와 빌립'이라는 제자의 이름이 나온다(요14:5,8).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12명 중에서 앞에서부터 7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나다나엘)"이라고 쓰여 있다(행1:12, 눅6:14). 그러니 다른 두 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 둘'이라는 문구에서 '다른'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같은 종류의 다른'을 의미하는 '알로스'라는 단어로서, 같은 벳세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애제자는 대제사장을 알고 있는 이로 있어온 자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6명의 제자들(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과 나다나엘, 도마) 중에서 과연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야고보의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인데, 그녀는 예수의 이모로서(막15:40, 요19:25, 마27:56), 제사장의 딸이거나 제사장의 딸의 딸(외손녀)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와 살로메는 자매지간으로서,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고지를 받은 후, 유대 산중('헤브론'으로 아론자손의 제사장들이 분배받은 성읍)에 있는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을 문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로서 그녀는 아론의 자손이라고 나온다. 엘리샤벳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과 엘리샤벳과 친족간이라는 말은 마리아 및 살로메의 어머니('안나')와 엘리샤벳은 서로 자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엘리샤벳이 제사장의 딸이라면 사도 요한의 외할머니도 역시 제사장의 딸일 것이고,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도 제사장과 결혼한 제사장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6명의 사도들 가운데 가장 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확률은 아무래도 야고보와 요한이 되는 것이다. 넷째로, 애제자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도 상당히 관련이 있는 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힐 때, 끝까지 따라갔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애제자인데(요19:26), 그때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자신의 애제자에게 그의 어머니로 모시라고 부탁했고, 어머니에게는 애제자를 그녀의 아들이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애제자에게 맡겼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제자가 애제자 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만약 애제자가 마리아의 외조카(자신의 여동생인 살로메의 둘째 아들)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에베소에 가보면 사도 요한의 무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 옆에 마리아의 교회의 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에서 말년에 요한복음을 저술했던 요한이 바로 끝까지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셨을 것이 예상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아주 가까운 사이인 어느 제자이다. 왜냐하면 성만찬 때에도 누가 예수를 팔 자인지 고개짓으로 애제자에게 물어보라고 시켰던 자가 베드로였기 때문이요(요13:23~26),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와서 전했을 때, 베드로와 애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요20:1~10). 그런데 애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어도 그는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베드로가 들어간 후에 애제자도 함께 들어간다. 그리고 부활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께 사명을 받은 베드로가 자신과 가까운 애제자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어보았기 때문이다(요21:20~23).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같은 동네 사람이자 같은 어부로서 동업자이며, 주님으로부터 첫 4명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함께 있었고,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같이 다녔기 때문에 베드로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3장과 8장을 읽오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도 같이 갔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할 때에도 같이 간 자가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견줄만한 제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애제자가 같이 나올 때에 애제자는 베드로의 "다른 제자"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다른'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알로스'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베드로와 같은 급의 제자라는 말이다. 이는 그가 베드로와 견줄만한 제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6명의 제자들(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도마, 야고보)가운데, 과연 베드로와 결줄만한 자는 누구이겠는가? 그는 사도요한일 것이다. 한편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가까이 두셨던 세 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다. 왜냐하면 이들 세 명은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예수께서 특별히 데리고 가신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에도 주님은 세 명의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갔었고(막5:37), 변화산에 올라가서 변형되실 때에도 그랬으며(마17: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세 명의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기 때문이다(막14:33). 고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기록시기가 A.D.70~95년 경이라면, 그는 요한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A.D.44년에 순교하게 되고, 베드로도 역시 A.D.68년경에 순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세기 하분까지 살아 남아있어서 요한복음을 기록할 자는 사도 요한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도 요한일 수밖에 없다고 정의할 수 있다.
3.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과연 누구라고 기술되어 있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전반부의 기록들 곧 요한복음 1~12장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7가지 표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므로 7가지 표적의 기술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7가지 표적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소개해주는 7가지 자기선언도 나온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시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를 7가지 자기선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선언(7가지)은 요한복음 6장에서 처음 나온다. "나는 생명이 떡이다(요6:35)" 그리고 15장에 마지막으로 나온다. "나는 포도나무다(요15;1,5)" 즉 예수님의 자기선언 7가지는 요한복음 전반부 곧 표적의 책에서 출발하여 거기에 5가지가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의 후반부 곧 영광의 책에서 2가지가 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의 그 위대한 자기선언은 어떤 것이며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처음으로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다(요6:35,51). 이는 예수께서 네번째 표적을 일으키신 후에 말씀하신 것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모세와 함께 있었을 때에 먹었던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반석의 생수'를 생각나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 떡과 생수를 먹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육신의 양식에 불과했으므로 먹고도 다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살과 피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므로 먹고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 그분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8:12). 이 말씀은 초막절 때에 들려주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어둔 세상을 밝혀주는 참된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8:12).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의 절기 가운에 초막절은 밤이 되면 엄청난 불을 밝히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 축제기간에 어떤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붙잡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초막절의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간음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 세상의 빛은 일시적인 것이기에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어둠을 진짜로 몰아내고 영원한 빛을 주심으로 빛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게 해주신다는 것을 이 선언은 강조한다.
셋째, 그분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0:7,9). 이 말씀은 양은 출입구인 문을 통하여 꼴(양식)을 먹기도 하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양들과 같은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위한 영원한 꼴(양식)을 얻을 수 없다. 결국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분만이 문이기에 그분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가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 안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꼴(양식)을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0:9~10).
넷째, 그분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0:11,14). 선한 목자는 돈 받고 일하는 삯군과도 아니며, 양들을 훔쳐서 파는 강도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삯군이란 대체 어떤 존제인가? 그것은 양도 자기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이리'는 사탄마귀을 지칭한다. 고로 양과 같은 인생들이 사탄마귀에게 농락당하지 않고 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 나아와야 한다. 그분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1:25~26). 이것은 마르다가 자신의 오라비였던 나사로 죽었을 때 예수께서 너무 늦게 도착하시자 그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자,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육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살게 될 것이요, 무릇 [육체가] 살아서 나는 믿게 된다면 그는 [영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분은 사람의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되, 육체가 죽어도 영혼을 다시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예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아시고, 일부러 늦게 오셔서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려내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요 부활생명의 수여자인 것을 가르쳐주신다.
여섯째,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4"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할 때가 되셨음을 아시고, 이제 자신이 떠나게 되면 남겨지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일러주시는 말씀 가운데 나오는 자기선언이다. 우리는 그때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모아서 예수님의 '고별설교(고별연설)'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이때 예수는 자신을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늘처소(천국)으로 안내해주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니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과 부딪히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잘 완수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오라는 격려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섯 번째 선언부터는 자기와 아버지의 관계를 같이 말씀하신다.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아버지에게로 제자들을 연결시켜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들을 알라고 말씀하신다.
일곱째, 그분은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5:1,5). 이는 예수께서는 참된 포도나무이고 우리 믿는 이들은 그 가지이기 때문에, 만약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포도나무에 잘 붙어있어야 한다고 하는 뜻에서 말씀하신 자기선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포도나무가 항상 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이 주님께 붙어있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분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믿음으로 포도나무에 접붙힘을 받았다고 해도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그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에게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느 가분 안에 있어야 함을 의미하며, 그래야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게 되고 그리하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더불어 열매를 맺게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4. 요한복음은 어떤 구조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이 어떤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수미쌍관형으로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서막이 1장이라면, 결론이 21장인 것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한복음의 1:1~18까지가 서론부분이라면 결론부분은 21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1:19~20장까지의 본론부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유대지역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공생애를 1~12장 전반부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부터 체포받으시고 심문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를 13~20장에 배치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전에도 살펴보았지만, 1~12장의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있엇던 7가지 표적들을 기록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저자가 7가지 표적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말해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6장부터 15장에 걸쳐서 예수께서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7가지로 선언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까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에 하셔야 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13~16장은 고별연설(고별설교)을 기록하고 있고, 17장은 그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가 나오며, 18~19장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과 죽음의 과정이 나온다. 그리고 20장은 그분의 부활기사가 나오고, 21장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제 육신을 벗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 곧 팔리고 고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는 과정을 가리켜 그분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과정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는 요1~12장을 "표적의 책"이라고 부른다면, 13~21장은 "영광의 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2장이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뎜, 13~21장까지는 예수께서 어떻게 영광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요한복음은 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사실 기독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이 없을 정도다. 물론 사도 요한이 쓴 또 다른 책 곧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 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도 요한복음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과연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요한복음을 꼭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유일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바로 이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땅에 사람으로 활동하신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태는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직무 중에서 왕직을 수행하시는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마가는 종으로 오셔서 섬기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는 족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그분이 아담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족보상으로도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인간으로 오셔서 활동하신 예수님을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과 말씀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쓰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없는 내용을 92%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로고스)으로서 선재하신 분이요 창조주이심과 더불어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며, 주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각 장에 나온 말씀과 사건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여 영생에 이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22년 06월 01일(수)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들려주는 놀라운 복음서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책이 바로 요한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기적'은 그냥 기적이 아니다. 다 표적들로서의 의미가 있는 기적들만 모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1장부터 선재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이 요한복음의 중심부에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책의 기록 목적을 보게 된다. 자,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 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놀라운 혜안이 열려지기를 빈다.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네 번째로 기록된 복음서이다. 그런데 기록된 내용과 방식이 앞서 기록된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와는 상당히 다르다. 내용으로만 본다면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약 92%가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에 비해 대부분 유대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고스 기독론과 선재 기독론 그리고 7가지의 "에고 에이미(나는~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성이 매우 많이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내용의 기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날에 일어난 사건을 무려 5장(요한복음의 1/4정도)이나 기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 고별 설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은 기적들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저자는 복음서의 기술 목적을 뚜렷이 밝혀 놓고 있으며 저자가 누군지도 정확히 밝혀 놓고 있다. 또한 복음서의 기술 방식이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이 아주 특별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이러한 특별 복음서로서 요한복음을 거시적으로 한 번 더 살펴볼텐데, 오늘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가 과연 누구이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 및 요한복음의 구조에 대해서 집중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는 과연 누구인가?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이 복음서를 누가 기록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21장 24절의 말씀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이는 이 일들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제자이다. 그리고 이 일들을 기록했던 [그 제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온 채 있다. 그런데 역시 예수께서 행하셨던 바, [같은 종류의] 다른 것들도 많은 것으로(많이) 있다. 만약 어떤 그것들이 하나씩을 따라 [계속] 기록된다면, 나는 세상이 책들로 기록되고 있는 것들을 수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다." 그렇다. '이이'가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인 것이다. 그럼, '이이'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사랑하고 있어 온 제자이다(요21:20).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증거를 살펴보고 한다. 다음주에는 헬라어 원문상으로 그것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성경 외의 기록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구라고 알려져 있는가? 성경 외의 기록 가운데 초기 기독교 교회사를 저술했던 교회 역사가가 있으니 그는 바로 '유세비우스(A.D.260~340)'라는 사람이다. 그는 팔레스틴 가이사랴 출신의 헬라 신학자이다. 그는 가이사랴의 감독을 지낸 바 있다(A.D.314~). 그는 가이사랴에서 감독으로 지내면서 A.D.324년까지 전10권의 방대한 교회사를 기록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요한복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또한 고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였던 이레네우스(A.D.130~202)의 진술도 기록해 놓고 있다. 먼저, 유세비우스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의 책 "교회사"의 제24장 "복음서의 순서"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논란이 없이 확실한 요한의 저서들을 제시하려 한다. 그의 저서들 중에서 복음서는 전 세계의 교회에 잘 알려져 있으며, 우선적으로 진정한 그의 저작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고대인들은 정당한 근거를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네 번째 위치에 놓았다... [중략]. 마태와 요한은 기록된 의견을 남겨 주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필요에 의하여 그 일에 착수했다고 한다. 마태는 처음에는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복음을 모국어로 기록하여 자신이 없는 공백을 그 기록으로 보충해 주었다. 한편, 마가와 누가가 복음서를 펴낸 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해 온 요한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는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있었고 요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그 복음서들을 인정하였고 그것들의 진실성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최초에 행하신 몇 가지 일과 복음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것도 증언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복음서 기록에 착수하라는 요청을 받은 사도 요한은 앞의 세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지나쳐 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이레네우스가 쓴 "거짓 교리의 타도와 논박" 제3권에서 요한복음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써 놓고 있다. "마태는 히브리인들과 함께 머물면서 히브리 방언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고,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떠난 뒤, 베드로의 제자와 통역관이었던 마가는 베드로가 전파했던 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마가복음).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기록하였다(누가복음). 주님의 가슴에 기댔던 제자 요한도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복음서를 기록했다(요한복음)."
그렇다. 성경 외의 기록 중에 유세비우스와 이레네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서를 익히 알고 있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네 번째 복음서로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들과 그들이 지나쳐 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랑하고 있었던 제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이제는 내적인 증거로서, 요한복음서와 다른 복음서들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어떨까? 요한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로, 애제자는 성만찬석에 참여했던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제자는 성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의지했던 자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요13:23, 21:20).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만찬 때에 함께 참여했던 제자들은 '사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고(눅22:14), 또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열 둘'이라고 나온다(마26:20, 막14:17).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의 한 명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만찬석에서 애제자에게 예수님께 물어보라고 시킨 자가 베드로였고, 떡을 받고 떠나가서 얼마 후 자살했던 가룟 유다는 12명의 제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애제자는 예수님의 10명의 제자들 가운데 있다. 둘째로, 애제자는 예수님 부활 이후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 잡으러 갔던 7명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천사의 고지에 따라 제자들은 갈릴리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같이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때 갈릴리 바닷가에는 7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바돌로매), 세배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둘'이라고 나와 있다(요21:2). 그런데 베드로가 애제자의 미래에 대해 질문하고 있으니, 애제자는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4명의 제자가 누군지를 본문에 나오지만, 나머지 2명의 제자들은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제자 2명'이 누군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미쌍관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요한복음 1장에서 제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의 이름은 '안드레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한 사람,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이다. 더불어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6장에 '안드레와 빌립'이라는 이름이 나온다(요6:5,8,68), 또한 요한복음 14장에는 '도마와 빌립'이라는 제자의 이름이 나온다(요14:5,8).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12명 중에서 앞에서부터 7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나다나엘)"이라고 쓰여 있다(행1:12, 눅6:14). 그러니 다른 두 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 둘'이라는 문구에서 '다른'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같은 종류의 다른'을 의미하는 '알로스'라는 단어로서, 같은 벳세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애제자는 대제사장을 알고 있는 이로 있어 온 자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6명의 제자들(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과 나다나엘, 도마) 중에서 과연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야고보의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인데, 그녀는 예수의 이모로서(막15:40, 요19:25, 마27:56), 제사장의 딸이거나 제사장의 딸의 딸(외손녀)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와 살로메는 자매지간으로서,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고지를 받은 후, 유대 산중('헤브론'으로 아론 자손의 제사장들이 분배받은 성읍)에 있는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을 문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로서 그녀는 아론의 자손이라고 나온다. 엘리샤벳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와 엘리샤벳이 친족 간이라는 말은 마리아 및 살로메의 어머니('안나')와 엘리샤벳은 서로 자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엘리샤벳이 제사장의 딸이라면 사도 요한의 외할머니도 역시 제사장의 딸일 것이고,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도 제사장과 결혼한 제사장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6명의 사도들 가운데 가장 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확률은 아무래도 야고보와 요한이 되는 것이다. 넷째로, 애제자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도 상당히 관련이 있는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끝까지 따라갔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애제자인데(요19:26), 그때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자신의 애제자에게 그의 어머니로 모시라고 부탁했고, 어머니에게는 애제자를 그녀의 아들이라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애제자에게 맡겼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제자가 애제자 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만약 애제자가 마리아의 외조카(자신의 여동생인 살로메의 둘째 아들)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에베소에 가 보면 사도 요한의 무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 옆에 마리아의 교회의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에서 말년에 요한복음을 저술했던 요한이 바로 끝까지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셨을 것이 예상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아주 가까운 사이인 어느 제자이다. 왜냐하면 성만찬 때에도 누가 예수를 팔 자인지 고갯짓으로 애제자에게 물어보라고 시켰던 자가 베드로였기 때문이요(요13:23~26),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와서 전했을 때, 베드로와 애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요20:1~10). 그런데 애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어도 그는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베드로가 들어간 후에 애제자도 함께 들어간다. 그리고 부활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께 사명을 받은 베드로가 자신과 가까운 애제자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어보았기 때문이다(요21:20~23).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같은 동네 사람이자 같은 어부로서 동업자이며, 주님으로부터 첫 4명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함께 있었고,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같이 다녔기 때문에 베드로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3장과 8장을 읽어 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도 같이 갔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할 때에도 같이 간 자가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견줄 만한 제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애제자가 같이 나올 때에 애제자는 베드로의 '다른 제자'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다른'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알로스'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베드로와 같은 급의 제자라는 말이다. 이는 그가 베드로와 견줄 만한 제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6명의 제자들(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도마, 야고보)가운데, 과연 베드로와 견줄 만한 자는 누구이겠는가? 그는 사도 요한일 것이다. 한편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가까이 두셨던 세 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다. 왜냐하면 이들 세 명은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예수께서 특별히 데리고 가신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에도 주님은 세 명의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갔었고(막5:37), 변화산에 올라가서 변형되실 때에도 그랬으며(마17: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세 명의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기 때문이다(막14:33). 고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가 A.D.70~95년경이라면, 그는 요한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A.D.44년에 순교하게 되고, 베드로도 역시 A.D.68년경에 순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세기 하반기까지 살아남아 있어서 요한복음을 기록할 자는 사도 요한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도 요한일 수밖에 없다고 정의할 수 있다.
3.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7가지 자기 선언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과연 누구라고 기술되어 있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전반부의 기록들 곧 요한복음 1~12장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7가지 표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므로 7가지 표적의 기술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7가지 표적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소개해 주는 7가지 자기 선언도 나온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시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를 7가지 자기 선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7가지)은 요한복음 6장에서 처음 나온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그리고 15장에 마지막으로 나온다. "나는 포도나무다(요15:1,5)" 즉 예수님의 자기 선언 7가지는 요한복음 전반부 곧 표적의 책에서 출발하여 거기에 5가지가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의 후반부 곧 영광의 책에서 2가지가 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의 그 위대한 자기 선언은 어떤 것이며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처음으로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다(요6:35,51). 이는 예수께서 네 번째 표적을 일으키신 후에 말씀하신 것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모세와 함께 있었을 때에 먹었던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반석의 생수'를 생각나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 떡과 생수를 먹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육신의 양식에 불과했으므로 먹고도 다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살과 피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므로 먹고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 그분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8:12). 이 말씀은 초막절 때에 들려주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어둔 세상을 밝혀 주는 참된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8:12).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의 절기 가운데 초막절은 밤이 되면 엄청난 불을 밝히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 축제 기간에 어떤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붙잡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초막절의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간음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 세상의 빛은 일시적인 것이기에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어둠을 진짜로 몰아내고 영원한 빛을 주심으로 빛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이 선언은 강조한다.
셋째, 그분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0:7,9). 이 말씀은 양은 출입구인 문을 통하여 꼴(양식)을 먹기도 하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양들과 같은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위한 영원한 꼴(양식)을 얻을 수 없다. 결국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분만이 문이기에 그분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가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 안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꼴(양식)을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0:9~10).
넷째, 그분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0:11,14). 선한 목자는 돈 받고 일하는 삯꾼도 아니며, 양들을 훔쳐서 파는 강도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삯꾼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양도 자기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이리'는 사탄 마귀를 지칭한다. 고로 양과 같은 인생들이 사탄 마귀에게 농락당하지 않고 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 나아와야 한다. 그분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1:25~26). 이것은 마르다가 자신의 오라비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너무 늦게 도착하셔서 그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자,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육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살게 될 것이요, 무릇 [육체가] 살아서 나를 믿게 된다면 그는 [영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분은 사람의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되,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다시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예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아시고, 일부러 늦게 오셔서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려내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요 부활 생명의 수여자인 것을 가르쳐 주신다.
여섯째,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4"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할 때가 되셨음을 아시고, 이제 자신이 떠나게 되면 남겨지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일러 주시는 말씀 가운데 나오는 자기 선언이다. 우리는 그때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모아서 예수님의 '고별 설교(고별 연설)'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이때 예수는 자신을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늘 처소(천국)로 안내해 주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니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잘 완수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오라는 격려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섯 번째 선언부터는 자기와 아버지의 관계를 같이 말씀하신다.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아버지에게로 제자들을 연결시켜 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을 알라고 말씀하신다.
일곱째, 그분은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5:1,5). 이는 예수께서는 참된 포도나무이고 우리 믿는 이들은 그 가지이기 때문에, 만약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 뜻에서 말씀하신 자기 선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포도나무가 항상 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깨끗하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분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믿음으로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해도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그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에게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분 안에 있어야 함을 의미하며, 그래야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게 되고 그리하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더불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4. 요한복음은 어떤 구조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이 어떤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수미쌍관형으로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서막이 1장이라면, 결론이 21장인 것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한복음의 1:1~18까지가 서론 부분이라면 결론 부분은 21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1:19~20장까지의 본론부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공생애를 1~12장 전반부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부터 체포되고 심문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를 13~20장에 배치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전에도 살펴보았지만, 1~12장의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있었던 7가지 표적들을 기록해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저자가 7가지 표적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말해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6장부터 15장에 걸쳐서 예수께서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7가지로 선언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까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에 하셔야 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하면, 13~16장은 고별 연설(고별 설교)을 기록하고 있고, 17장은 그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가 나오며, 18~19장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과 죽음의 과정이 나온다. 그리고 20장은 그분의 부활 기사가 나오고, 21장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제 육신을 벗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 곧 팔리고 고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는 과정을 가리켜 그분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과정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는 요1~12장을 "표적의 책"이라고 부른다면, 13~21장은 "영광의 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2장이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13~21장까지는 예수께서 어떻게 영광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요한복음은 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사실 기독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이 없을 정도다. 물론 사도 요한이 쓴 또 다른 책 곧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도 요한복음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과연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요한복음을 꼭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유일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바로 이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땅에 사람으로 활동하신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태는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직무 중에서 왕직을 수행하시는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마가는 종으로 오셔서 섬기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는 족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그분이 아담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족보상으로도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인간으로 오셔서 활동하신 예수님을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과 말씀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쓰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없는 내용을 92%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로고스)으로서 선재하신 분이요 창조주이심과 더불어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며, 주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각 장에 나온 말씀과 사건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여 영생에 이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22년 06월 01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