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무엇으로 받는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두고 믿음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이 신앙고백 때문에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들에 대한 삶의 실천까지 포함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믿음에 따른 순종까지 포함한 믿음을 믿음이라는 하는 것인가? 그런데 오늘 10명의 나병환자 치유사건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구원얻는 믿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고침을 받았지만 단 한 명의 나병환자만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주님께서 선언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술로만 딸삭거리는 믿음이나 지적 동의에 가까운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보자. 그리고 진정 구원얻는 믿음을 갖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까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받는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선행으로서는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함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여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믿음에 관하여 과거에 우리가 들어왔던 말씀이 과연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었는지를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접하게 될 나병환자의 치유사건과 더불어 일어나 사마리아 나병환자의 구원사건은 구원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대체 이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무엇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
2. 구원과 믿음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오늘날 보통 장로교의 신앙고백의 근간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다(1948년). 이 신앙고백은 1643년부터 1647년까지 약 5년간 영국의 웨스티민스터에서 개최된 회의기간 중 제정된 전문 33장의 칼빈주의적인 장로교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구원과 믿음에 관한 상관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먼저, 제14장 제1항을 살펴보자.
제14장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관하여]
제1항 믿음의 은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성령)의 역사이다(고후4:13, 엡1:17~19, 2:8). 그것(성령의 역사)으로 말미암아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믿을 수 있게 된다(히10:39).
그렇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려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다음 진술이 성경적인 구원론으로부터 잘못 빗나가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선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또한 성령의 선택함을 받은 자에게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갖는 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구원으로 초청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마칠 때에 구원으로 선택함을 받는다.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2:14). 그렇다. 이 세상 사람치고 처음 믿을 때에 선택함을 받는 자는 거의 없다. 죽을 때에, 인생을 마칠 때에 비로소 택함을 입는 것이다. 더욱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구원얻으려면 믿음도 성령께서 주셔야만이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해놓았다.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3항도 처음 시작은 올바르나, 마지막에 가서는 조건이 생략된 고백, 성경과 멀어진 고백을 하고 있다.
제3항 이 신앙은 약할 때도 있고 강할 때도 있다(히5:13~14, 롬4:19~20, 마6:30, 8:10). 때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공격을 당하여 약하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승리를 얻는다(눅 22:31~32, 엡6:16, 요일5:45).
그렇다. 사람은 신앙이 약할 때도 있고 강할 때도 있다. 때로는 사탄마귀와 귀신의 공격으로 인하여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승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나 승리를 얻는다"고 적시해 놓음으로 가만히 있어도 승리할 것처럼 묘사해놓았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구원얻으려면 죄와 마귀와 육신과 피비린내나는 처절한 싸움을 거쳐야 한다. 또한 이러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며 자신의 육체를 쳐복종시키며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승리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교리만을 듣는 자는 "그렇구나. 누구든지 신앙을 가진 자라도 넘어질 수는 있지만 어찌되었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시는구나"라고 여기면서 안일하게 영적 싸움을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하며, 얼마나 많이 인내해야 하며, 얼마나 많이 자신의 육신을 쳐복종시켜야 할 지 모른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칼빈주의 5대교리의 마지막 번째인 "성도의 견인"교리처럼,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선택해놓은 자는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극복하여 반드시 구원받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승리는 응당 주어진 것이 아니라,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3.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어떻게 되어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는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의 치유사건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노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다. 이 사건에는 열 명의 고침받은 나병환자들이 나온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대체 단 한 명의 그 사람 곧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어떻게 되어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배경은 이렇다. 예수께서 공생애 3년을 다 마치실 무렵, 예루살렘 근처인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서 그를 죽은 지 4일만에 살려내신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공격이 심상치 않자,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 경계지방까지 떠나가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난다. 그때였다. 그들은 멀리서 "예수, 주관자시여"하면서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소리높여 간청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의 음성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길을 가다가 자기들의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중에 단 한 사람,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돌아선 후 예수님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그리고 감사함을 온 마음으로 전한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였고 감사의 표시였다. 그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주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얻을 수 있도록 만드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17: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들]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이방인(다른 혈통을 가진 자)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자들이) 없느냐(발견되지 않았다) 하시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마리아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선포하셨다.
눅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사마리아 나병환자의 믿음"이란 그가 고침받은 후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동반한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병에 나았던 나병환자가 다시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을 간 만큼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며, 또한 어디로 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에게 어찌하든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마리아 문둥병자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답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9명의 나병환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이방인(혈통이 다른 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침받은 후에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병고침의 기적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인가? 물론 공생애 때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분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이유는 그것이 메시야적인 행동으로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야 오셨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분을 통해 고칠 수 없는 자신의 불치의 병이 고침받았음에도 불구하고 9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은 응당 표현했어야 할 그 어떤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4. 이 사건이 들려주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 사실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고침받은 사건은 기적 중의 기적에 속한다. 사실 오늘날 아무리 의학이 발달한 세상이 되었다고 하더라고 나병환자를 고칠 수는 방법은 아직까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나병을 고침받았으니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는가?
첫째,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께서 일부러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고, 그들을 고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이 아무리 종교지도자들을 찾아서 빌어보았자, 그들은 결코 불치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 예수님만이 나병도 치유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질병치유는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만약 그분이 이 세상에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이 전능자이신 주님께 자신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분께 기도를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도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전능자이신 그분에게 부탁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제사장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제사장에게서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도 병을 고침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9명의 나병환자와 1명의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지금부터 차이가 난다. 그것은 그들이 고침받고 난 이후의 일이다. 예수님을 "예수(구원자) 주관자(전능자)시여!"라고 부르며 그분에 대한 신앙고백과 청원으로 그들 모두는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선언까지 듣게 되었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했기 때문이다. 감사했던 것이다. 그는 주님께 되돌아가 그분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경배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의 표시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자신의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까지도 할 수 있는 것이다.
5. 오늘날 우리의 반응과 감사는 어떠한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또한 그분에게 어떤 감사를 표시했는가? 이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정말 자신의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를 했었다. 그는 그분의 발 앞에 자신이 얼굴을 대고 엎드렸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앞에서 땅바닦에 무릎을 꿇어보았는가? 그것도 여간 쉽지 않는 일이다. 한 번 직접 시험해보라.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주님의 발앞에 자신의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원문). 그는 주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그분께 절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주님께 표시하는 감사는 어떠한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감사인가?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다. 심지어 신이 피조물이 되기로 결정하셨고, 그리고 사람으로 오셔서 자신을 죽음에까지 넘기셨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신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한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정해진 규칙은 없다. 자기가 처한 삶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병환자는 돌아와 예수님의 발앞에 자신이 얼굴을 대고 경배했다. 눅19장의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나눠주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이도 있다. 그분이 행하신 일을 전하기 위해 자신이 애써 모아온 물질과 시간을 드린 자들도 적지 않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합당한 표시를 하고 있는가?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받기는 받았으나 9명의 나병환자처럼 그냥 아무런 반응없이 끝내버리려고 하는가? 그것은 꼭 물질이 아니어도 된다. 그러한 보답은 규정된 것이 없다.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의 출발이 완성단계에 들어갈 수 있다.
2018년 10월 28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