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얻는다고 믿고 있었을까? 오늘은 사도들의 기록이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바라본 구원론에 관한 살펴보려고 한다. 신약의 서신서들 중에서 평신도가 쓴 책이 딱 2권 있다. 하나는 야고보서요 또 하나는 유다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친동생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유다라는 인물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편지를 한 장 남기고 갔다(그는 A.D.70~80년에 순교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떤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때 성도들의 구원을 혼란시켰던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때 성도들의 구원을 흔들어놓았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옷만 바꿔입고 교회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어떤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가운데 활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유다는 평신도로서 그들의 가르침을 어떻게 경계했으며 또 어떻게 해야 영생에 이를 수 있는지를 말씀했던 것일까?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초대교회 성도들은 과연 어떤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을까? 오늘은 평소와는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주의 종의 입장이 아니라 평신도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평신도였던 한 인물을 통해서,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어떤 위험에 처해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들었던 사도들이 가르쳐준 원래의 구원관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일까?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어찌하든지 다 구원받는다"는데 이것이 사실일까? 초대교회는 과연 어떤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2. 유다서의 저자였던 유다, 그는 누구인가?
유다서의 저자였던 유다, 그는 누구인가? 유1:1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자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마13:55과 막6:3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여러명의 동생들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밑에 동생은 야고보였으며, 셋째 내지는 넷째 동생으로 유다가 있었던 것이다. 야고보는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의 장로였다. 초대교회는 그를 교회의 기둥의 하나로 여겼다. 하지만 유다는 달랐다. 그는 장로도 아니었던 것 같고, 지도자도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유다는 평신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서는 평신도였던 한 인물이 같은 입장에 놓여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해 쓴 편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쓴 내용은 다른 사도들 곧 사도바울이나 사도베드로, 사도요한이 쓴 편지와는 상당히 입장이 달랐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써 보낸 이 편지를 통해서 당시의 구원관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A.D.70~80년 당시 유다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초대교회 가운데에 2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당시 교회 가운데 구원론을 흔드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유1:18~19). 또 하나는 이미 사도들로부터 들었던 복음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그것을 견고히 붙잡고 있으라고 권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유1:20~21).
3. 초대교회 성도들의 구원을 흔들고 있던 자들에게 유다는 어떤 심판을 예고했을까?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구원론을 흔들고 있는 세력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유다는 말했다. 그들은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라고 말이다(유1:4).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다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떨어졌던 3종류의 사건과 대상을 언급했다. 첫째는, 주(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지만 후에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다는 것이다(유1:5). 그러므로 이들도 한 번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구원에서 멸망으로 떨어질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천사들의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거처를 떠남으로 영원한 쇠사슬에 묶인 채 현재 흑암에 갇혀있다는 것이다(유1:6). 그러므로 "가만히 들어온 자들"도 흑암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그 주변의 이웃도시들도 음란하며 다른 육체(동성애)를 따라감으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도 곧 불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대체 그들은 어떤 자들이며 무슨 가르침을 사람들을 미혹시켰길래, 그들에게 멸망과 흑암과 영원한 불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던 것일까?
4. 초대교회 성도들의 구원관을 흔들던 세력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렇다면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오늘날 성서신학자들은 한 마디로 그들을 "초기 영지주의자"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교회 가운데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던 자들이 약 20~30년 뒤에 교회 가운데에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때는 영지주의가 한참 성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이후 영지주의가 교회 가운데 꽃을 피웠을 때(A.D.90~95)에 사도요한은 그들은 어떤 자들이라고 명명했을까?
요일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그렇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유다도 이들에게는 성령이 없다고 했다(유1:20). 그들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믿지 아니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유다도 이들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다(유1:4). 이들은 예수님을 전부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육체를 입고 오셨음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거부하였던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철학적 사고 때문이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로고스(말씀)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단지 육신을 입은 것으로 보인 것이라고 주장했다(가현설). 또한 물질세계를 만들었던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저급한 신이라고 했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을 소유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했다. 영지를 얻으면 다시 말해 깨달음이 있으면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면 더이상 육체는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육체는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체의 방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5. 유다서에 나타난 영지주의자들의 특징은 어떤 것이었나?
이제는 유다서에 기록된 영지주의자들의 5가지 특징에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그들은 반율법적이었다는 것이다(유1:7,16,19). 그들은 도덕률 폐기론자였다. 깨달음만 있으면 간음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육체가 저지르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유1:20). 이미 깨달음으로 구원얻었는데 무슨 회개가 필요하느냐면서 자신이 저지른 간음죄들을 회개하지 않았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유1:4~7). 그들은 이미 깨달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다. 넷째,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과 범죄의 출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유1:8,11).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지를 거룩하고 선한 일에 사용하지 않고 죄짓는데 사용하였다. 다섯째, 그들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켰으며, 참된 신앙을 가지고 고군분투하고 달려가고 있는 성도들을 비웃었던 것이다(유1:18).
6.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가운데 뿌려놓은 거짓된 구원론은 어떤 것이었나?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은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구원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킬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며, 죄를 저질러도 구원에는 영향을 안 미친다고 하니 회개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며,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은혜 갚는 데에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7. 오늘날 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은 없을까?
문제는 유다서에 기록된 당시 영지주의 구원론자들이 오늘날 교회 가운데서도 옷만 달리 입었을 뿐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곧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는 구원론자들이다. 한 번 예수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만세전에 작정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른 것이 이제 성취된 것이며,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며, 또한 이미 구원받은 자신은 결코 영원토록 멸망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성경구절도 한 번 구원을 영원한 구원이라고 단정할 만한 구절이 사실상 없다. 다만, 그들이 주장하는 요5:24, 요6:37, 요10:28~29에 나오는 말씀들은 헬라어성경원문을 왜곡시켜 번역한 것이다(이 내용은 이곳에 있는 다른 메시지에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으니 꼭 찾아서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구원론은 오늘날 교회에서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 번 이러한 구원론을 들은 자들은 도무지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한 번 예수님을 믿었으면 설령 간음죄를 저질도 천국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회개하는 데에 집중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언젠가 회개시키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채 있으니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이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그러니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승천 후에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십계명을 어긴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경고하고 있지 아니한가?(계21:8). 하늘에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지 아니한가?(계3:5).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때에는 한쪽 면만 들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이들은 구원 이후의 삶을 거룩하게 건축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 예수 믿었드면 이 세상에서 형통의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거룩한 사역에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 한다. 그들은 "내가 이미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으면 그만이지 그딴 것 상급 안 받으면 좀 어때" 하면서 세상을 즐기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구원론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울그락불그락한다. 혈기를 부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말하는 즉시 그를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하고 복음을 훼손하는 자라고 몰아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지주의적 구원론이 문제는 문제인 것이다.
8. 유다는 어떻게 구원을 이뤄가라고 했는가?
그럼, 유다는 어떻게 구원을 이뤄가라고 했을까? 그는 예수님의 사도들로부터 들었던 복음을 견고히 붙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4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게속 건축하라고 했다(유1:20). 사도들은 믿음의 기초를 닦아주었으니 가만히 있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건축하라는 것이다. 둘째,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라고 했다(유1:20). 왜냐하면 기도없이 사탄마귀의 유혹과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책망에 귀기울일 때에 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받았지만 자신을 방종과 방탕에 내주지 말고 자기자신을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유1:21). 주님은 죄에 우리를 내주라고 구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다음 시대의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다시 오실 심판주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였다(유1:21). 한 마디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는 말이다(빌2:12).
9. 나오며
그렇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고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유다는 출애굽1세대들의 멸망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였다(유1:5). 구원은 좁은 길이다.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할 만큼 어려운 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아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지만, 광야로 나왔던 모든 자가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걸러졌던 것이다. 광야는 오늘날 교회생활을 의미한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이미 자신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도 걸러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날마다 원망불평하고,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신하면서 장차 들어갈 천국을 믿지 않는 자는 정녕 걸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의 간곡한 부탁처럼, 예수믿고 이미 구원받았으니 육체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영지주의적인 구원론을 절대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생각하고, 죄를 회개하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구원받았으니 지키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자유를 방탕과 방종에 내버려두지 말고 거룩한 사역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사실을 모르는 자를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바르게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고 지은 죄가 있다면 회개하고 또 회개한 후에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2019년 1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