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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Ea5ip0wmV_s
날짜 2019-04-21
본문말씀 요한복음 2:19~22(신약 14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부활의역사성,부활의의의,죄사함의표,사망권세박멸,예수의하나님표,빈무덤,예수의나타남,예수의신성,예수와하나님,하나님이신예수

예수께서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실 때에 어떻게 살아나신 것일까?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 것일까 아니면 그분 스스로가 살아나신 것일까?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다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고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예수님이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다고 언급하고 있으며(요2:19), 또한 스스로가 살아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계2:8). 특히 사도 베드로는 한 번도 예수께서 스스로 살아나셨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웠다고만 언급할 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처럼 가까이 곁에서 예수님을 지켜보았고 또한 그분의 행위들과 말들을 들었을텐데 그는 왜 몰랐을까? 그것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앙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유일신을 언급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무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서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바톤을 이어받은 사도바울은 베드로와 달랐으며, 훗날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사도요한에게도 그것은 달랐다. 예수께서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알아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고 믿고 또한 남들에게 소개해야 하는 것일까?

 

1. 들어가며

  오늘은 부활절이다.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교회의 가장 큰 절기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도 만약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죽은 즉시 살아나는 것이지, 죽은 지 며칠 지나서 몸이 썩어 부패가 진행된 상태에서 살아나는 경우는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죽으신 후 3일3야를 꼬박 지난 후에 살아나셨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난 사건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인지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났다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예수께서 다시 살아난 것이 그분의 하나님되심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2. 예수는 스스로 살아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일으키심을 받으셨는가?

  예수께서는 과연 스스로 살아나셨는가(능동태) 아니면 일으키심을 받았는가?(수동태) 그런데 성경은 2가지를 공히 증거하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성도라도 거의가 다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성경의 기록들은 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일으켜세우셨다)고 언급하고 있든지 아니면, 예수께서 일으키심을 받았다(수동태)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베드로와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베드로의 경우는 항상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를 테면, 성령강림사건 이후 방언을 듣고 몰려온 자들에게 그렇게 말했으며(행2:31~32), 또한 이방인이었언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도 그렇게 증거하였다(행10:39~40).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스스로 일어나셨다고 증거하지 않고 꼭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셨다고 증거했던 것일까? 그것은 첫째로,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증거한 것이며 또한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곧 예수님의 하나님이심과 많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했을까?

 이 세상에 맨 처음 생겨난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교회였다. 최초의 예루살렘교회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거기에는 사실 단 한 명의 이방인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스스로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그분은 자신의 몸을 드러내셨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전과는 다른 상태에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승천 직전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다. 죽은 사람은 결코 어디든 항상 함께 할 수가 없다. 여기 있으면 저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도 계시면서 동시에 저기에도 계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상태를 무소부재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강력한 표적이 바로 부활후의 나타나심이다. 하지만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유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시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상적부터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이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지만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두 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사도바울의 등장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그런데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오직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대속제물로서 오시었고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유대인의 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복음을 받은 것에 감사할 뿐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을 허락하사 그들을 뿔뿔히 흩어버리셨다. 핍박을 허락하여 12사도 이외에 모든 성도들이 흩어지게 하신 것이다. 그러자 헬라파유대인들이 이방지역으로 가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으니, 그중에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해주었고, 어떤 헬라파 유대인들은 안디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소식을 듣고 바나바라고 하는 헬라파 유대인을 안디옥에 파송해준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안디옥교회를 목양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사울(나중에 바울이 됨)의 다메섹체험이 있었다. 그가 예수믿는 자들을 찾아내어 옥에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후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빛이 그에게 비추고 들려오는 음성으로 인하여 사울은 눈이 멀게 되었고 매우 커다락 충격을 받게 된다. 이전까지 예수믿는 사람들을 다 미친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스승이 죽고 없어졌는데 그분이 어찌 부활할 수 있느냐면서 그들이 헛된 망상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이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그는 3일간 식음을 전폐한 후, 자기가 그동안 잘못 안 상태에서,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일들을 회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요, 그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노라고 증거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변화에 놀란다.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그가 사람들을 속이려고 일부러 그런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진짜 본심이었다. 하지만 사도바울도 다메섹도상의 체험은 가히 충격적이었기에 그에게도 정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3년동안 깊은 묵상에 잠긴다. 그리고 율법에 예언된 메시야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자세히 공부한 끝에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야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받은 자였기에 그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증거할 때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고 증언하기 시작한다(딤후3:16). 그리고 그분은 세세에 찬양 받으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롬9:1).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두 분이라고 해도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두 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런데 A.D.95년경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가 있었을 때에 그는 천상으로 불려올라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분은 발에 끌리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셨다. 그런데 그분은 너무나 영광스러웠기에 요한은 두려워떨고 있었다. 그때 그분이 요한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를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 그렇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소개하셨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놀랄 말씀들이 등장할 것이다. 첫째, 계22:13에 보면, 자신더러 "나 예수"라고 말씀하신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문구 중에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말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은 같은 문구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째로, 계1:8에 보면, 주 하나님이요 자신을 전능자라고 말씀하시는 분께서 당신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요 전능자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당신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자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셋째로, 계21:5~6의 말씀이다. 거기에는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한 분이 나오는데, 그분은 "보좌에 앉아계신 이"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고 그의 오른편에 예수께서 앉아 계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보좌에는 예수께서 앉아계신다. 아버지의 보좌에 아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또한 넷째로, 구약성경에 보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나오는데, 그분은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요 자기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그분이시다. 그분은 이사야서 선지자를 통해서, 무려 3번씩이나 자기더러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고 말씀하셨다(계41:4, 44:6,48:12). 결국 구약에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셨던 그분은 바로 신약의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가,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다시 원래 있는 하늘로 돌아가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의 또 다른 의의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왜 부활하셨는가? 아니 예수님의 부활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의 편에서 보면 2가지 놀라운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그분이 자기의 죄로 죽지 않고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만약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죽었는지 인류의 죄로 죽었는지 판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분이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그분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며, 그가 죽은 것은 자신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님을 드러난다. 그럼, 왜 죽으셨는가? 그것은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고로 그분이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면 우리 인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확실히 열려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가 깨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사망권세는 마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귀가 사망으로서 예수님을 음부에 가두어놓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오직 죄지은 자만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그 권한을 죄없는 예수님에게 적용하여 불법을 저질렀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사망권세를 빼앗아 예수님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에 "나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1:18)"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언 것이다. 결국 죄를 지은 모든 인류가 마귀와 귀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사탄마귀의 억압과 사슬에서 풀려나오게 된다. 예수 이름을 사용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2가지 의의는 우리 인간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부활에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측면이다. 예수님의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은 예수께서 인간의 제한받으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부활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원래 있던 권세와 능력을 다시 회복하고 원래 있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제 예수께서 무소부재한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나타나실 수 있고 시공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원래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유대인의 입장에서 설명하려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주셨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입장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죽은 자들로부터 스스로 일으켜 세운 것이 부활이다. 놀라운 사실은 요한복음 2:19을 보니, 예수께서 첫번째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실 때부터 벌써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요한이 들려주는 놀라운 간증이요 계시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의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부활의 진실이 요한복음에는 나타나 있는 것이다. 초기 유대인들은 언급하기가 곤란했던 예수님의 실체 곧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사도요한을 통해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생애 초기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으셨을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유대인들이 성전된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죽음에 넘긴다고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다시 그 몸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비록 인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으로 내려왔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몸을 얼마든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간접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은 우리에게도 엄청난 사실을 알려주지만, 예수님에게 부활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다시 원래 있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영역으로 되돌아가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과연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야 살아날 수 있는 종속된 존재였을까? 아니었다. 다만 유대인들을 생각하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어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한 분이신데,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 동시에 존재하실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꼭 두 분으로 나누려고만 해서는 아니 된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 분 혹은 세 분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예수님으로 오셨다고 하면 될 일인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그러면 양태론에 빠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아들의 신분으로 오실 때에는 신성만을 가지신 하나님은 아버지라 불리웠고, 신성에 인성을 취하셨던 예수님은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했다.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어 오셨기에 자신을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아들이 아니었는데 부활로 말미암아 아들로 승격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람을 아들로 양자삼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가 속죄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다. 다만 유대인들에게는 두 분 하나님으로 오해할까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처음부터 하나님을 섬겨도 되는 것이다. A.D.90`95년경에는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이 교회들마다 다 알려져 있었다. 이제는 초기교회의 신앙고백을 우리도 회복할 때가 온 것 같다. 건투를 빈다.

 

2019년 4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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