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식을 행할 때 우리는 예배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절하고 경의를 표하면 그것이 예배인가? 그러나 그것은 존경의 표시일 수도 있도 감사의 표시일 수도 있다. 엎드려 절하는 것을 가지고 예배라고 정의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또한 예배의 요소는 무엇인가? 어떤 것이 들어가야 그것을 예배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거기에는 찬양과 기도가 들어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높이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를 찬양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기도하지도 않는다. 고로 예배란 예배를 받은 대상이 신적인 존재라는 전제하에 행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네 생물과 24장로들과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어린양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있고, 그분께 찬양을 드리며 기도를 드린다. 왜 그들은 보좌 위에 앉으신 이,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엎드려 경배하거나 찬양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어린양에게 하고 있는가? 계5장은 완전한 천상의 예배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예배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예배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인가? 오늘은 그것을 찾아보자.
1. 들어가며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실까? 어떤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이것은 예배의 태도에 관한 문제이지, 예배의 내용이나 방법에 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헌금을 내지 않으면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교회나 목회자도 있다. 정말 예배시간에 헌금을 바치지 않으면 예배드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토요일에 늦게 잠을 자다보니, 주일에 와서 그만 설교시간에 졸다가 갔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예배를 드린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예배인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배가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야할 요소는 또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함께 드리는 천상의 예배 안으로 한 번 들어가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예배는 이 지상에서 드리는 예배와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일까를 찾아보자.
2. 오늘날의 예배형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금 전 세계 교회들에서 드리는 예배는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일까? 누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것인가?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금처럼 예배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해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인간의 자연발로적인 반응과 참여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예배는 우리 개혁교회의 작품이 아니며, 로마카톨릭의 작품도 더더욱 아니다.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모임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예배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B.C.586년에 남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B.C.1010년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이 탄생하셨고, B.C.946년경에서는 통일 이스라엘의 3대왕이었던 솔로몬에 의해 성전도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 대에 가서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북쪽 이스라엘은 속히 우상에 물들어버렸으며, B.C.722년 제19대 호세아 왕 때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하지만 남유다도 이와 거의 비슷한 경로를 밟았으니,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때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B.C.586년 제20대 시드기야왕 때에 남유다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때 남유다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고, 솔로몬성전은 완전파괴되었으며, 남은 왕족과 귀족들 약 5만명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거기서 그들에게 안식일이 찾아왔다. 이전에는 안식일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는 성전이 없다.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의 유브라데 강가에 나와서 그 옛날 안식일을 지키며 노래하던 그날을 기억하며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에게만큼은 이러한 비참한 것을 물려주지 않으리라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포로생활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만큼은 율법(토라)와 선지서(느비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그만한 집(회당)을 마련하고는 안식일에 되면 거기에 모여, 쉐마를 낭독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선지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회당장의 축도로 모임 마쳤다. 그것은 매안식일마다 지속되었고, 그러자 그것이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회당예배"라고 불렀다. 즉 희생제물을 잡아 바치던 제사의 형태에서 기도와 말씀중심의 예배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 회당예배인 것이다. 결국 회당예배의 핵심은 신앙고백과 기도와 성경낭독과 해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가 회당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기원의 순서까지 들어가니, 회당예배는 첫째, 예배의 기원. 둘째, 쉐마낭독(신6:4~9). 셋째, 테필라(기도). 넷째, 성경낭독과 해설. 다섯째, 회당장의 축도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찬찬히 이것들을 살펴보라. 이것은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배형태와 유사하지 아니한가? 바벨론 포로시절부터 시작되었던 회당예배를 드리던 초대교회 유대인 성도들이 유대교의 회당예배를 기독교예배에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3. 예배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을 두고 예배라고 말할 수 있는가? 뒤에 가서 배우겠지만, 그냥 어떤 대상에게 절을 하면 즉 경배한다면 그것이 예배인가? 절을 하는 것이 예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절을 했다고 해서 예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하거나, 존경이나 복종의 표시할 때에 절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에는 나라의 통치자들과 고위관원들이 있고, 부모나 그리고 호의나 자비를 베풀어준 분들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절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예배드렸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떤 대상에게 경의나 존경의 표시를 행하는 것이로되, 그 대상이 신적 존재여야 하는 것이다. 경배를 받을 대상이 신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것은 예배행위가 아닌 것이다. 자기 생각할 때에 신적 존재임에 분명하다고 믿는 대상에게 경의나 존경의 표시를 할 때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예배인가를 규정하려면, 예배를 받을 대상이 신적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예배를 드리는 자가 그에게 경의와 존경과 표시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되는 것이다.
4. 천상예배는 어떤 요소로 구성되었을까?
그렇다면, 사람이 누군가에게 예배를 드릴 때에 경의나 존경의 표시로서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일까? 이것은 천국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어떻게 예배드리는가를 관찰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세 존재가 행하고 있는 경배행위들이 나온다. 세 존재로는 첫째로,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있었고, 둘째로, 구원받은 신구약성도들을 대표하는 24장로들이 있었으며, 셋째,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세 존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행위를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딱 3가지였다. 이 3가지가 있고, 경배받을 대상이 신적 존재였을 때, 그것은 "예배"라고 말하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엎드려 절했다는 것이다(계4:10, 5:8). 세 존재는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엎드려 경배를 드렸다. 이것이 예배의 첫번째 요소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예배의 요소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상에서는 달랐다. 그곳에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배받을 대상이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는 경배받을 대상을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가짐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그 대상을 존경하고 경외한다는 표시다. 둘째는 그분의 명령이라면 무슨 명령이라도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분의 말씀이라면 무슨 말씀이든지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는 자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새 노래로 찬양했다는 것이다(계5:9~10).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찬양을 올려드리되 새 노래로 그분의 영예를 높여드렸다. 그분이 하신 일을 높여 찬양한 것이다. 이것을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어린양으로 오신 것과 그분이 죽으시고 사람들을 자신의 핏값으로 사신 뒤에, 그들을 천국에서 왕국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을 높여 찬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 신적 대상이 아닌지를 구분하려면 그 대상에게 찬양을 올려드리는가를 보면 된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있다. 하지만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 인물을 높이어 찬양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만약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대상을 신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높여 찬양한다. 이는 그를 인민들로부터 신적 대상으로까지 높이려는 수작인 것이다. 아니다. 피조물은 결코 찬양받을 수 없다. 피조물은 신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신적인 존재에게만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인 것이다.
셋째, 그들은 그분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계5:8). 왜냐하면 24장로들의 손에는 찬양하기 위해 준비된 거문고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가 들려있었으니 그것은 향이 가득히 담겨있는 금대접이었다. 그리고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었다. 결국 어떤 대상이 신적 대상이 되려면 그에게 누군가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신적 대상은 전능하기에 그 기도를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을 재림예수니 보혜사 성령이니 하는 자들일지라도 자기에게 기도하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 그들은 결코 신적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다른 분이다. 비록 사람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전능자이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분은 계시며, 사람들이 비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5. 천상예배에서 예배를 받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천상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에서 과연 누가 경배와 찬양과 기도를 받고 있었는가? 놀랍게도 그분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었다. 요한계시록 4:10에서는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에게 면류관을 벗어드릴 것이라고 말했다(세 동사가 전부 미래형이다). 그런데 5장에 가보니, 24장로들이 어린양에게 경배를 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어린양에게 7가지 송영을 올려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렸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어린양에게 높여드린 것은 7가지 송영이었다. "일곱"이란 이 땅에서의 완전수이므로, 어린양은 이 땅에서 완전하게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말해준다. 또한 요한계시록 7장에 가면,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이번에는 하나님에게 7가지 송영을 올려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계7:11~12).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린양이 바로 찬양과 경배와 기도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영국의 대 신약학자인 리차드 보컴 교수(현재 72세)는 자신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쓰면서 놀라운 말을 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오직 한 분 하나님에게 돌려드려야 할 영광과 찬송을 어떻게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 돌릴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어린양이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결코 그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찬양과 경배를 받고 있는 어린양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사칭하는 사깃꾼이든지가 맞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옛날부터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엎드려 절했으며, 그분만을 찬양했으며, 그분에게만 기도를 바쳤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들은 사자밥이 되기도 했고, 불구덩속이 속에도 들어갔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에게 천상의 존재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초기교회 성도들에게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두번째 신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체현이었던 것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속죄사역을 마치고 이제는 천국에서 모든 피조무들에게 찬양과 경배를 받고 계신 것이다.
6. 과연 예수님은 성도들로부터 정말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가? 아니면 두번째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그분이 두번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의 체현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딤전3:16에서, 그분(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하늘로 올려지신 바 되었다고 언급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말했다(요1:18). 그렇다. 예수님은 리차드 보캄 교수가 언급했듯이 믿는 이들에게 두번째 신이 아니다. 그분은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남이다.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결코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신 바 되었으니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천국에 들어간다면, 거기서 우리는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행하신 일을 영원토록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이 세상이 끝나는 그 시간까지 기도를 쉬지 아니할 것이다. 한 생명이라도 예수께서 하신 일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것이니 말이다.
7. 나오며
1978년에 유행했던, 전 세계의 10대 팝송 가운데 한 곡이 있다. 그것은 "Rivers of Babylon(바벨론의 강가에서)"이라는 곡이다. 자메이카 출신의 혼성그룹이 불렀던 노래다. 1970~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곡이 유대인 슬픔(애통)의 노래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음악이 경쾌하니 디스코춤을 추는 곡으로 알고 있던 자들은 사뭇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 곡은 시편137:1~3의 말씀을 그대로 노래화한 것이다. 내용인즉 그들이 바빌론의 강가에 앉아서 슬피 울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가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에게, 자기들이 믿는 신의 노래를 한 번 해보라고 명령하는데,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정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을 하여 포로로 끌려와 있는데, 그렇다고 바벨론신을 섬기는 바벨론왕 앞에서 어찌 흥겹게 노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죄를 짓고 실패한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이 불못 곧 지옥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최고이며 그분만이 신들의 중의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또한 거기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다. 그렇다. 우리가 찬양하려면 지금 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면 지금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실패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면 결코 거기에서 찬양할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가서 슬피 울지 말고, 지금 찬양할 수 있을 때 그분이 행하신 일을 높여 찬양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부르짓기만 하면 들어주시는 이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적 대상에게 드리는 예배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동영상] "바벨론의 강가에서(영문, 한글번역)" https://youtu.be/UB4OKEYqCCc
2019년 6월 2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