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 종종 성도들 중에 성령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산다는 말하는 이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을 때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나는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경우가 없는데, 저분은 어떻게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말하는 것일까?"하고 말이다. 정말 오늘날 성도들은 성령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인가? 본인이 그렇게 듣고 산다는데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진짜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과연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지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위장한 귀신의 음성은 어떤 것이며, 이 둘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은 혹시 귀신의 음성에 노예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오직 올바른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1. 들어가며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어떤 성도는 지금도 매일마다 성령께서 자기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보통 성도들의 경우, 이러한 간증을 들어보면 그것이 진짜 사실일까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면 나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할텐데, 혹시 나는 성령의 음성도 듣지 못하고 사는 엉터리 바보 신자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성도들은 자기 안에 성전 삼고 거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과연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내 안에 들려오는 음성이 과연 성령이 음성인지 아니면 아니면 성령을 빙자한 귀신의 음성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2. 예수님의 음성이 곧 성령의 음성인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다. 사도요한은 기도하다가 자신의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흰 세마포옷을 입고 가슴을 금 띠를 띠고 계시는 한 분이 서 계셨다. 그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사도요한에게 자신이 들려준 말씀을 편지에 써서 일곱교회에게 보내라고 하셨다. 그중에 다섯번째 교회가 사데교회인데, 거기에 보내라고 한 편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영들과 일곱별들을 가지신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계3:1).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경고의 말씀을 하셨는데, 거기에는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6)"이라고 하셨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곱영들과 일곱별들을 붙잡고 있는 이라고 소개하셨는데, 왜 마지막에 가서는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냥, "내 말을 잘 들으라"고 하시지 않고 말이다. 왜 예수님은 당신의 음성을 성령의 음성이라고 굳이 언급하신 것일까?
3. 성령님은 누구신가?
성령이 과연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령님이 누구신지부터 잠시 살펴보자. 왜냐하면 성령이 누군지도 모른데 성령의 음성을 언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제34장)에 의하면 성령님은 "삼위일체 신의 제 삼위로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으나 동일한 실체를 가지시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님께] 예배드렸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성령님께 예배드렸다는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삼위일체 신의 세번째 위격"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천국에서 세 분 하나님이 좌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보좌 좌편에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럼,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창1:2)" 혹은 "여호와의 영(삼삼10:6)"이라고 불렸던 바로 그분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잉태하실 때에 역사하셨고, 세례받으실 때에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신 분이 바로 그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칠 무렵,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성령님은 구약시대에는 없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무슨 약속을 하신 것인가? 그것은 요14~16장을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구약시대나 예수님 시대에 성령은 사람 위에만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내주실 성령은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그이후 성령님은 오늘날까지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인치시고 보증하는 일을 하시고, 여러가지 다양한 은사들을 선물로 나눠주고 계신다.
4. 요한계시록에서 성령님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최종적인 계시의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는 과연 성령님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 요한계시록에서 성령님은 "성령"이라는 명칭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 영"을 개역성경에서 "성령"이라고 번역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령을 지칭하는 독특한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 표현들이다. 첫째, "하나님의 보좌앞에 있는 일곱 영들(계1:4)". 둘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들(계4:5)". 셋째, 온 땅[안]으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계5:6)". 여기까지 종합해 보면, 성령님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분은 이 땅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성령님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계5:6)"이다. 그런데 어린양은 불꽃같은 일곱 눈들을 통해서 온 땅과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을 감찰하고 계신다(계2:18,23).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표현의 독특한 특징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첫째로, "일곱"이라는 표현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7)"이라는 숫자는 이 땅에서의 완전수를 가리킨다(참고로 하늘에서의 완전수는 "12"다).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숫자들은 대부분 "12"인데, 남달리 성령님에 대해서는 하늘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12영들"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성령님은 하늘에 계시나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하늘에 있으나 이 땅에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그것은 어린양의 눈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은 성령님을 언급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내지는 "어린양의..."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어린양과 불과분의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제3의 단독적인 신이지만 하나님으로서 같은 신이 아니라, 성령님은 이 땅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3:1에 의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곧 예수님이 오신 것이며, 계3:6에서 어린양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성령의 음성"이라고 하심은 이 땅에서의 성령의 음성은 곧 하늘에서의 예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음성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오늘날 오순절이후 이 세상에 보내어진 성령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답은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의 사복서에서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장면은 몇 번 나오지 않는다. "성령"이라는 칭호로서 등장하면서 성령께서 말씀하신 경우는 단지 3번 밖에 없다.
그런데 성령께서 음성으로 말씀하고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모두가 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를 통하여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행13:2에 나온다. 여기에서 성령께서 금식하고 있는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따로 분별하라고 말씀하셨다. 둘째는 행20:23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성령님은 사도바울에게 앞으로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전해졌음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행21:11에 나오는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와서 바울에게 말하기를, 성령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을 들었던 자는 선지자(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행20:23에서도 각 성에서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들려졌던 성령의 음성을 바울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행13:2에서도 예언의 은사로 주어진 성령의 음성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행13:2에 나오는 말씀이 헬라어성경원문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한글성경에는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성령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미 부른 채 있는 바의 일 안으로 바나바와 사울을 '나를 위하여' 구별하라"라고 되어 있다. 즉 한글개역성경에는 "나를 위하여(for me)"라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서 "나"는 대체 누구인가? 성령인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성부 하나님의 음성인가?
6. 성령의 음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제는 우리는 성령의 음성이 나타나 있는 사도행전의 세 번의 기록을 통해서 성령의 음성이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우선적으로 성령의 음성은 누구나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들어서 알려준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음성 중에 "나를 위하여"는 문구가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2가지 증거가 여기에 있다. 그것 중의 하나는 성경의 증거요 또 하나는 방언통역과 예언사역에서 나타난 증거다.
먼저, 성경의 증거를 살펴보자.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있었을 때 그는 분명히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고 그는 뒤를 돌아보아 예수께서 거기에 서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또한 그것을 기록하였다. 경륜적으로 볼 때, 사도요한에게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야 옳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오순절이후에는 성령님께서 말씀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오순절이후라도 성령님만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셨고(행10:14), 사도바울에게도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행18:9). 다시 말해, 사도행전에는 성령님의 음성도 있고 예수님의 음성도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3장에 의하면, 사도요한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이 말한 것을 두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곧 이 땅에서 우리 믿는 이들이 성령의 음성을 듣지만, 사실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행13:2에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실 때에 "나"는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복음전파는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이지 성령님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도 성령님은 스스로 말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에게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6:13~14). 고로, 성령의 음성은 곧 예수님의 음성인 것이다.
둘째, 방언통역과 예언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증거들을 살펴보자. 좀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님의 음성은 전부가 실은 다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나타난 성령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예언이나 방언통역 가운데 말씀하시는 분은 대체 누구이신가?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예수님이신가? 아니면 성령님이신가? 오늘날에 예언을 한다든지 방언통역을 한다는 분들이 종종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암암리에 이뤄지는 것이 오히려 많다. 이것이 진짜 예언이요 방언통역인지는 검증해 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수십만명의 방언통역을 통해서 검증을 받은 분의 기록을 살펴보면, 방언통역 가운데 들리는 음성은 여호와의 음성도 아니요 성령님의 음성도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사도요한이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다시 말해, 방언통역이나 예언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인 것이다. 고로, 우리는 오늘날 교회 가운데서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음성이 성령의 음성이지만 실은 예수님의 음성인 것이다.
7. 성령의 음성과 귀신의 음성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령의 음성이 실은 예수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귀신의 음성과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는 핵심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접 들을 수 있는 성령님의 음성이란 사실 예수님의 음성이며, 이것은 예언이나 방언통역같은 은사를 받은 자를 통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기준을 갖춘다면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성령의 음성인지 귀신의 음성인지를 구부할 수 있다.
첫째, 이미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비추어볼 때 단 한 가지라도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귀신의 음성이다. 사실 성령의 음성은 성령자신의 음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이다. 사실 예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영이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영이기에, 성령의 음성은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과 결코 다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존에 이미 사복음서에 기록된 말씀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음성이 내면에서 들려온다면 그것은 귀신의 음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 자기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이가 만약 예언의 은사 내지는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아서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이가 아니라면 그가 들은 음성은 귀신의 음성이 틀림없다. 사실 오순절 이후에 성령께서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신 일은 몇 안 된다. 그런데 성령께서도 얼마든지 음성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령의 음성은 대부분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은사를 갖춘 이에게 하나님께서 듣게 하실 때에 들려지는 것이지 그냥 아무나 어느때든지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 지금 자기 안에서 이렇게 하라고 저렇게 하라고 매번 지시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귀신이라고 보면 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삶을 사사건건 간섭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정말 존중해 주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요한계시록 3:20을 보라.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노크를 듣고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아니한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간섭하여, 이것은 이렇게 하라.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성령을 가장한 귀신으로 보면 된다. 성령을 결코 무당의 영처럼 지금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시시콜콜 지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귀신은 처음에는 살금살금 성령으로 위장에서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말하기 시작하는데 나중에는 욕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시킨다. 누구에게 전화하고 누구를 만나지 말라고 것까지 다 지시한다. 만약 그러한 존재가 내 안에 있다면 거의 귀신이라고 보면 된다. 귀신에게 절대 속지 말라.
8. 나오며
여러분은 참된 방언통역이나 예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참된 방언통역이나 예언을 받아보면 우리의 영이 드리는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영이 드리는 방언기도는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정상이다(고전14:2). 그러나 우리가 그냥 듣기에는 "랄랄랄랄'으로 들릴지 모르나, 그 방언을 통역해보면 그것은 전혀 다른 내용들로 가득채워져 있다. 다만 그것이 음성으로 표출되어 나올 때 스 사람에게서 세련되게 나오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방언은 하나도 나쁜 기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즉 "이번에는 꼭 진급하게 해 도와주시옵소서. 이번에는 꼭 합격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이지 않는가! 그러나 자신의 영이 드리는 기도에는 이런 기도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아니 하나도 없다. 내 영은 결코 나쁜 기도나 이기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방언으로 기도했던 내용을 들어보면, 내 영이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는 약 20%밖에 안 된다. 나머지 약80%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때 말씀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 내용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과 책망하는 말씀들이다. 오히려 책망하는 말씀이 훨씬 더 많다. 이것은 꼭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 패턴이 그대로 일치한다. 고로, 우리는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 땅에 살고 있는 믿는 이들은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므로, 그 음성을 성령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성령의 음성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보좌에서 말씀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듣는 것은 성령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가 귀신이 성령을 가장하여 어떤 음성을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것은 들어야 하겠지만 굳이 들으려고 했다가 귀신의 장난에 속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해주셨던 예수님의 음성(말씀)만을 진리로 알고 그 음성대로 순종하면 그것이 성령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예수께서 이미 말씀해주셨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을 때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실 때도 있다. 그때 깨달음을 주셔서 얻게 된 말씀은 성령의 음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무쪼록 성령을 가장한 귀신의 음성을 성령으로 음성으로 알고 따라가지 말 것이며, 내 안에서 1%라도 틀린 주문이나 명령이나 가르침의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귀신의 음성으로 알고 귀신을 쫓아버리라. 날마다 회개하고 진리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굳이 방언통역이나 예언을 받아보지 않아도 우리의 영의 기도와 내 마음의 기도가 일치한다는 것도 알라. 그러므로 성령이 내 마음 속에서 나를 깨우칠 때에 즉시 순종하라. 특히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할 때 즉시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 그러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받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6월 9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