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말을 두고 그것이 "영이명 생명"이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그분이 누구시며, 그분이 이 땅에 무엇하러 오셨는지를 알았을 때에,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뚱딴지와 같은 말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에는 얼마나 귀하고 보석같은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과 가르침은 대체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3가지 면에서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알고 성경을 읽게 된다면, 그처럼 어렵게 보이는 성경이 확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왜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두고 그것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 들어가며
어느날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을 두고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곧 영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두고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교훈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사실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이다. 고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그분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으로 대해야 한다. 그분은 사람이 무슨 말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꿰뚫고 계셨기 때문이다(요6:61).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단순히 성인군자나 철학자들이 한 말처럼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나 가르침이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과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정녕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고 주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에는 어떤 면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과 가르침도 뛰어나지만 이 세상을 살다간 여러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도 사실 우리 인생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사실 멀리 가서 찾을 필요도 없다. 동이족의 대선배였던 공자(B.C.551~479)의 말 속에도 있으니 말이다. 공자는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 석가모니(B.C.563~483)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요, 서양의 소크라테스(B.C.470~399)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공자가 태어났을 때 중국은 매우 어지러웠다. 춘추전국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노나라에서 태어났지만 늘 전쟁을 나가야 했던 아버지를 그만 3살 때에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썩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과거제도가 없으므로, 그는 자신의 나이가 51세를 먹도록 작은 관직하나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쓴 논어 학이편 제1장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자왈,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는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어도 그것을 두고 부모를 탓하거나 세상을 탓한 것이 아니라,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쳤던 우리 주님과 비교해 본다면(영적인 말씀으로 읽지 못한 채), 얼핏 보기에는 공자가 훨씬 더 군자같아 보이고 예수님은 고통 하나 제대로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가르침은 여러 성현들의 말과 가르침과는 어떤 차이가 나는 것인가?
3.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여타의 다른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종합해보면, 다른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과 구별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크게 3가지 정도다.
첫째, 다른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은 사람의 혼을 위한 좋은 교훈과 지침을 제공해 준 것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사람의 영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사람의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요6:63).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육체가 배부르게 해주고, 육체가 잘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로지 사람의 영을 살리고 그 영을 건강하게 하며, 그 영이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기 위한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에 직접 작용하여 그 영을 살리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가르침을 이 관점으로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는까? 인도에 위대한 성녀가 한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그네스"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통 "테레사 수녀"라 불렀다. 그녀는 1910년에 태어나 1997년에 인생을 마감한 가녀린 여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은 우오늘날 이 말을 듣고 있는 우리의 가슴을 희망으로 부풀게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연필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몽당연필로 좋아하는 것을 그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십니다." 그렇다. 그녀는 빈자들과 못 배운 자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고귀한 여인이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몸을 가장 낮은 데로 낮추어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있었기에 20세기의 혼란과 살륙의 인간역사 이면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다고까지 말했다. 왠만한 남자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그녀는 곧장 해냈고, 끝없는 자기희생으로 각박한 인류 현대사에 빛나는 흔적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마더 테레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부터 놀라지 말라. 그녀는 88세의 일기로 인생을 마감할 때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신부의 말을 따라 그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바를 그대로 글로 써내려갔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썼다. "주여,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공허함과 어둠만이 보일 뿐입니다" 대체 그토록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다간 그녀가, 정말 죽어가면서 왜 그리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녀가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자로서, 남을 섬기는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영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신부과 교황가 칭찬듣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 자신의 영에게는 예수께서 주시려는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죽을 때에 그만 그녀의 생명의 작은 불마저 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에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자기더러 가난한 자를 돌보며 희생하는 것을 하라는 것으로만 알았지, 자신의 영을 살려주시려 예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둘째, 다른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위로의 말씀과 세워주는 말씀이 들어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인생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지금도 창출해내고 있는 사탄마귀 자체를 이기는 방법이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고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귀신들의 왕이었던 사탄마귀를 쳐서 이기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죽으실 때에는 직접 십자가에게까지 찾아온 이 세상임금의 머리를 박살내는 일을 하셨다. 그리고 불법을 행했던 사탄마귀를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궈버렸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탄마귀와 귀신을 드러내는 말씀이요, 그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탄마귀는 매우 지혜로운 자였고 간교한 자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난다고 하더라도 마귀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동서양의 고금의 철학자들의 인생여정과 모든 사상들을 다 다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국 이 세상 임금인 마귀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마지막으로 다른 성인군자들은 죽음 앞에서 인생의 한계인 죽음에 직면한 채 그대로 끝났으나, 예수께서는 속죄의 죽음을 대신 죽으신 뒤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당신을 대신하여 지금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자신이 죄를 지었던 아담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신 분이었기에,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셨을 뿐, 죽음을 이기고 3일 뒤에 부활하시어 인류의 속죄제사는 완벽히 치러졌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셨고, 그뒤 승천하시어 보혜사 성령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고 계신다. 고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죽음 이후에 있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4. 예수님은 진정 누구신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당시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요셉의 아들"이었는가?(요6:42)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가계상으로 볼 때에 요셉의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요셉과 정혼만 했을 예수님을 낳았던 마리아는 처녀로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님은 요셉의 피와 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을 빌려 사람으로 태어나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또 다른 하나님이자, 하늘에서 사람들의 영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생명의 떡"이었다(요6:58,51). 고로 그분은 다른 여타의 성인군자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러므로 다른 성인군자들은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물어오는 제자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 코치해줄 수는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실 수가 있었다. 그분 앞에는 인생의 어떤 문제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어떤 성인군자가 자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고쳐주었던 일이 있었으며, 어떤 성인군자가 죽은 자를 살려낸 일이 있었던가? 고로 예수께서는 그 어떤 성인군자도 하지 못했던 말씀들을 말씀하셨다. 아무도 천국에 이르는 길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이라고 말씀하시었다. 또한 어떤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면서 죽은 자를 살려내셨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 때 한국을 휩쓸었던 책이 하나 있었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이 그 책이다. 그러나 어떤 논문에서도 그 책의 내용을 인용하지는 않는다. 그 책의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두 명인데,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는 고대 이교도들의 신화를 짜깁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책 내용을 들여다보면 터무니 없는 거짓말에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인류의 역사를 거의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거짓말을 도배를 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들조차 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더러, 이전에 살았던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을 카피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말했던 성인군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 코치하거나 교훈을 주었을 망정 직접 해결해준 성인군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5.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뜻은 무엇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말이 사람들에게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인가? 그것은 죽었던 사람들의 영을 살리려 오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진술이라고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으로부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먹어서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이 땅에 죽은 자들의 영에게 하늘의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 오신 분이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분의 영인 성령께서 하늘의 생명을 가지고 그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사람의 영을 살리기 위한 영의 말씀이요, 사람의 영을 살려주는 생명의 말씀이었다. 그러니 줄여서 그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성인군자가 아니셨다. 그분은 인생을 훌륭하게 살아가는 팁을 가르쳐주시려 오신 분이 아니었다. 또한사람에게 처세술을 가르쳐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의 죽었던 영을 소생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아무도 이겨보지 못했던 사탄마귀를 이기신 유일한 사람이셨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사탄마귀와 귀신들을 이길 수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손수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지금도 하늘의 생명을 공급하여 사망을 이기게 해주시고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은 여타의 성인군자들의 말과 가르침과는 전혀 달르다. 사실 우리는 성인군자들의 글과 가르침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영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는 없다. 사탄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죽음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이셨기에, 사람의 영을 살려낼 수 있었고, 사탄마귀를 이길 수 있었으며, 사망권세를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죽어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살아서 그분을 믿는 자는 오늘도 그분의 살아숨쉬는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다. 건투를 빈다.
2019년 8월 18일(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