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어떤 결산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죽기 전에 그 결산이 어떻게 될지를 평가받은 사람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세례요한이다. 그는 선지자보다 뛰어난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만약 자신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로 평가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대체 그는 마지막에 가서 어떤 실수를 저지른 것인가? 2019년 한 해를 보내면서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엄청난 각오와 결단을 가져다줄 것이다.
1. 들어가며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큰 칭찬을 들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세례요한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보니,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였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그의 과거에 대한 것이었고 당시 그에 평가는 전혀 달랐다. 만약 그 순간에 그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그보다는 더 큰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렇다면 대체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최고의 칭찬으로부터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께서 행하신 세례요한의 평가를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지금 나의 현주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나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도 떠오르게 될 것이다.
2. 세례요한 그는 누구였는가?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 그는 아비야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0세쯤 되었을 때 그는 선지자로서 부르심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고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물로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신 이유는 그로 하여금 세례를 주게 함이 아니었다.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인 것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요12:31). 사실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분은 자기보다 앞선 자라고 말했고, 자신을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했으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였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3. 세례요한은 어떻게 되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인 자가 될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떻게 되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 평가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는가? 우리는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2가지 평가에 주목해보아야 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를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마11:9). 그는 구약 경륜 안에 있는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은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선지자 이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제사장의 직분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셨다. 이는 그가 모든 인류 가운데 가장 큰 자라는 의미다. 그것은 그가 선지자 이상으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일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하여 그에게 넘긴 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면서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므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하라고 하셨다. 이는 제사장이자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을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세례를 받으시고 난 이튿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러므로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이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던 것이다.
4. 왜 천국에서는 세례요한은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너무나 충격적인 평가를 더 듣게 된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b)"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왜 그토록 극찬을 받았던 세례요한이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무엇 때문에 부름을 받았는가? 그는 메시야를 세상에 소개할 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의로운 행동 때문에 헤롯안디바에 의해 감옥에 갇힌 바 되었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을 구해주지 아니한 것에 대한 섭섭함 때문에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오실 그이를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이런 말을 과연 그가 할 수 있는 소리며 또한 해야 할 소리인가? 그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소개했고,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도 풀기도 감당지 못할 자라고 했으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신을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데 돌아보지 않는다고 할 소리 안할 소리 구분조차 하지 못한 채 주님께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서야 되겠는가! 그가 감옥에 갇히자 그만 그는 자신의 사명에 흔들렸던 것이다. 혹시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세례요한 만큼은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그는 자신을 감옥에서 구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제자를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니이까?"라고 물은 것은 그가 예수님이 누군지를 진정 몰라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소개하는 일은 그의 존재목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자신을 감옥에서 구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실족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1:16). 그리고 그가 만약 지금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날 바로 죽지 않아서 감사한 일이지 만약 그가 그때 죽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었을 것이다.
5. 천국에서의 평가원리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기서 알아야 한다. 어떤 말 한 마디는 우리가 일구어놓았던 모든 공력을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사실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가?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겼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로서 메시야를 직접 보았고, 그 메시야를 세상에 드러난 인물이 아니었던가! 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회개할 것을 외침으로서, 천국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회개"인 것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니이까?"라고 질문을 던짐으로서 그는, 자신이 쌓아두었던 모든 하늘의 상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만약 감옥에 갇힌 자신을 구해주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들더라고 그는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되었다. 사람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은 끝까지 예수님이 메시야심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살았는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사도바울은 자신이 1차 2차 3차 전도여행 때에 세운 교회 중에 한 곳에 머물면서 안락한 노후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였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죽음도 무릎쓰고 또 다른 선교여행을 시작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어떠했는가? 지금 형편이 조금 힘들다고 그만 자신이 전에 했던 말을 뒤집어버리는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되겠는가? 왜 그는 지금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전에 헤롯 안디바에게 한 말 때문이었다. 그것은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음하는 행위이니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랬으면 잘 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감옥에 갇혔다면 그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서 그만 실족해버렸다. 자신이 주님을 세상에 드러나도록 소개한 장본인이었는데, 그만 자신을 찾아서 심방하지 않는다고, 주님이 진정 메시야인 것은 맞는 것이냐며 불평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정 주님이 찾아오지 않을지라도, 그는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다. 만약 그가 예수님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면 그때 감옥에서 목이 잘려 죽지도 않았을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 자신의 입술을 함부로 놀리는 바람에 그는 자신이 그간 쌓아두었던 모든 상을 다 잃어버렸으며,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때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마지막 순간에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다. 마지막은 인내로 결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눅8:15). 우리의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눅21:19).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히10:36). 인내를 이룰 때에 온전하고 구비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약1:4).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순간을 인내하지 못했다. 그것을 참지 못했다. 서운함을 그만 토해내버린 것이다.
5. 나오며
살다 보면 자신이 바라던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불평을 쏟아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바로 우리의 인내가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때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만 너무 빨리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표출하고 말았다. 그는 그때야말로 자신이 인내해야 할 가장 중요한 때인지를 잘 몰랐던 것 같다. 그것이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마지막으로 인치는 순간인지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뭐든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인쳐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밥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밥을 할 때 밥맛이 드는 순간은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오르는 순간이 아니다. 이제 불이 서서히 잦아든 후 약 5분 정도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때 밥맛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뚜껑을 열어버리면 밥맛은 사라지고 만다. 그냥 죽같은 쌀밥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곧 있으면 2020년도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올 한 해 수고했던 것을 완전히 뒤집어엎어버린 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쌓아놓았던 공력에 또 다른 상을 쌓아갈 것인가는 우리의 입술에 달려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무릇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우리의 마음과 입술을 지켜야 할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12월 29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