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와 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가 사용하는 성경해석방법은 사실 초기교부 오리겐이 썼던 알레고리성경해석법이었다. 이 해석방법은 실로 엄청났다. 헬라철학에 빠진 자들을 성경으로 돌아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치고 이단이나 사이비교주가 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성경해석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바르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사용했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
1. 들어가며
작년말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전염병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의 마음에서 성전(현장)예배를 중지하고 집과 자기처소에서 인터넷과 SNS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지난 주부터 2주동안 유튜브로 인터넷생방송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의 감염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상태이기에 아마 이번주가 고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성도들은 아마 성전예배가 그리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대량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신천지 다대오지파 증거장막성전에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가 대구와 경북을 휩쓸었고 이제는 우리나라 전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외국에서는 벌써 우리나라사람에 대한 입국제한조치이나 입국거부이 현실화되어 벌써 100여개국이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원인이 밀교적 포교형태와 밀착한 예배를 드리는 신천지가 그 원인이 되었음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신천지에 대한 모든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비유풀이"와 "짝풀이"로 성경을 해석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유풀이와 짝풀이를 조사한 끝에 우리는 그것은 초기교부들이 사용했던 "알레고리성경해석"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알레고리성경해석방법의 위험성을 지난주부터 한주동안 살펴보았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보아야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지지 않는 올바른 성경해석을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메시지를 통하여 성경을 읽는데 놀라운 시야가 성령으로부터 열리게 되기를 기원한다.
2. 성경을 해석하는 3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날에 전세계 국가 중에서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성경을 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성경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신천지에서는 이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신천지에 사람들이 빠지는 것이다.
그럼, 성경은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해야 바른 해석이 될 수 있는가? 성경해석에 관한 신학자들 가운데 최고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오리겐(A.D.185~254)"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3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그는 그것을 "몸적인 해석", "혼적인 해석", "영적인 해석"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몸적인 해석"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가리키며, "혼적인 해석"이란 문자나 문장에 담긴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인 교훈을 찾아주는 해석을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영적인 해석"이란 그 배후에 숨겨져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아주는 해석을 가리킨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어느날 표적을 보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것이다. 46년동안 짓고 있었고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던 헤롯의 성전을 어떻게 3일만에 일으켜 세우겠다고 하는 소린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여기에 나오는 "성전"은 예수님의 성전된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로 해석해주었다(요2:21).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에는 반드시 어떤 해석을 해야지 해석을 하지 않으면 미친 사람취급받을 수 있는 말씀들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창2:24의 말씀을 가지고 오리겐의 3가지의 해석방법으로 해석해보자. "이러므로 남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것을 "문자적인 의미"부터 해석해보자. 이 말씀은 남자가 자신의 부모를 떠나서 자신의 아내될 사람과 합하여 하나를 이루라"는 결혼명령으로 볼 수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려면 결혼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몸적인 의미"(문자적인 의미)만으로도 톡톡히 그 역할을 해낸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결혼하려고하고,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결혼하려고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2차적으로 "혼적인 의미"(도덕적이고도 윤리적이며 교훈적인 의미)도 많이 들어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 의하면 남자가 결혼하려면 자신의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독립은 의지적 정서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독립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은 둘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어야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결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결혼하면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들어있다. 그러므로 오리겐은 여기까지만 설교해도 많은 사람들이 감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리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3차적인 의미 곧 "영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창2:24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 말씀이 1차적으로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에 관한 말씀이지만, 2차적으로 부부간에 지켜야 할 윤리에 관한 말씀이라고 했고(엡5:22~25), 3차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말씀이라고 했다(엡5:3~32).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예표라고 해석한 것이다.
3. 성경말씀에 대한 영적인 해석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성경말씀에 대하여 영적인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에 관하여는 지금까지 크게 2가지 해석방법이 있다. 하나는 알레고리적 성경해석방법이요, 또 하나는 예표론적(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이 있다. 이중에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방법은 그동안 이단이나 사이비교주들이 사용해온 방법이라는 것을 지난 몇 주동안 살펴보았다. 그런데 초기교부 오리겐은 이 둘 다를 사용하다가 그만 알레고리를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이단으로 낙인찍혀 사장되고 말았다. 오리겐이 기록한 책이 당시에 무려 6,000권 이상이 되었고, 성경주해도 성경66권 중에서 다만 몇 권을 제외하고는 다 주해했다고 하는데, 이단이 되는 바람에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어떤 것이었길래 이 해석을 시도하는 자는 거의 다가 이단이 되었거나 사이비교주가 된 것인가?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비유말씀을 성경을 해석하려는 자가 자신의 입맛대로 여기저기에 있는 성경구절을 끌어다가 해석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해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때 듣는 사람은 "이 성경말씀에 이러한 심오한 뜻이 들어있었다니..."하면 감탄해마지 않는다. 그러한 해석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성경을 해석하는 자는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그래서 이만희는 자신을 보혜사성령으로까지 말했다) 착각하다가, 자신을 통해서만이 감추어진 비유가 해석될 수 있고 요한계시록이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창2:24의 말씀을 알레고리적으로 한 번 해석해보자. 이 말씀에 등장하는 "남자"는 마24:40에 의하면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는 고전4:15에 따르면 "영적인 스승"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으니, 하와는 자신의 내면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라고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한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자기의 스승의 가르침에서 떠나 자신의 내면의 본질을 찾아줄 수 있는 가르침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씀이 된다. 곧 내가 누군지를 정확히 알려면, 기존교회에서 목사님이 던져주는 성경해석이나 받아먹으려 하지 말고 이제는 자기가 정말 누군지를 정확히 알게해주고 스스로 성경해석을 할 수 있는 데로 가서 그와 합해야 신일합일에 이를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누가 그것을 도와줄 것인가? 당연히 무료로 성경을 가르쳐주되 영적인 의미를 깨우쳐주는 무료성경신학원에 와서 공부하라고 한다. 거기에 가면 오직 신천지 교주 이만희의 성경해석을 따르게 되고 그를 이 시대의 보혜사, 이긴 자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법은 매우 위험한 해석법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4. 왜 우리는 모형론적(예표론적)인 성경해석방법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하고도 올바른 성경해석방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을 신학자들은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방법"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모형론적 성경해석 방법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왜 그 방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
먼저,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이란 구약에 나오는 사건이나사람,사물, 제도 등이 다 그것들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요 예표로 그림자라고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인물들이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설명해주기 위해 모형이요 그림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된다는 비유로서 민21장에 나오는 하나의 사건을 비유로 가져다 쓰셨다. 그것은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3:14)"의 말씀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하면서 힘들다고 원망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불뱀(독뱀)을 보내서 물어죽게 했다.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장대 높이 놋뱀을 달아놓으라고 했다.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 것(해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에 그것을 보고 믿는 자도 있었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도 있었다. 믿는 자는 장막 밖으로 나와 놋뱀을 쳐다보았고 그러한 사람들을 정말 살아났다. 하지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가진 자는 하나도 낫지 못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죄없는 육신의 모양(놋뱀)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달리게 될 사건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즉 구약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인물이나 제도 등은 다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설명해주는 예화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곧 "예표론적 성경해석방법"인 것이다.
한편,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을 떠올릴 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가지 있다. 그것은 구약의 사건들은 실재하는 사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이 역사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구약성경이 모형이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성막이나 제물이나 제사장은 이 땅에서는 모세 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모세도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증거장막을 본대로 지은 것이기에, 그것이 오히려 모형이라는 것이다(출25:8~9,40,26:30). 그러므로 성막(성전)이나 제사장 등은 이미 천국에 존재하고 있던 실체에 대한 그림자였던 것이다. 다만 모세시대에 그것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렇다면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요, 영생이요, 천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님의 몸에 대한 예표에 불과한 것이며, 아론과 같은 제사장은 영원한 하늘의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5.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은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므로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을 사용하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유익한 점이 있을 것이다. 첫째, 성경의 중심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주는 해설서이자 예화라는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성도를 율법주의와 기복주의 신앙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율법말씀은 행위언약이기 때문에 이미 버려진 패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러면 다 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 나머지, 구약의 말씀들은 관심갖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가지고 있다. 특히 구약의 율법말씀은 순종하면 복이 되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된다는 것에 민감하여 구약성경을 잘 읽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몽학선생으로서 그 임기를 마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주는 몽학교사(초등교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어떤 일을 수행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더 풍성히 누리게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을 예표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예표론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풍성하게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훨씬 더 흥미진지하고 재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예표론적인 성경해석을 사용하여 성경을 읽으면, 우리가 받아야 할 궁극적인 복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며,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영적인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복을 복으로 여겨지 않고 하늘의 복을 찾아 꾸준히 순례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예표론적 해석에 눈이 뜨이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을 볼 때에 문자적인 해석과 윤리적이고도 도덕적인 교훈적이 해석에만 늘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셋째, 성경의 어떤 부분은 문자적인 의미나 교훈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해석을 할 수 있게 되고, 반대로 알레고리적 해석하려는 위험한 시도로부터 지켜준다는 것이다.
6. 어떻게 알레고리적 성경해석방법과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알레고리적 성경해석방법과 모형론적 성경해석방법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이 둘의 공통점은 사실 성경말씀의 표면적이고도 문자적인 뜻 속에 감추어있는 영적인 의미를 발견케 도와준다. 하지만 이 둘의 쓰임은 천양지파다. 왜냐하면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은 2가지 면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방법과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은 전부다 구약에 이미 실재했던 사건이나 인물이나 제도 등을 그대로 가져와서 신약의 말씀을 해석하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레고리적 성경해석방법은 구약에 실재했던 사건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려는 자가 자기의 입맛에 맞추어 만들어낸 픽션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짝풀이를 통하여 짜깁기를 해내어 자기만의 독특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해석이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과 뜻과 의도에 맞는다면 어느 정도 수용은 가능하지만,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처럼 이단의 사상이나 이단의 교주를 그리스도를 믿게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게 된다면 치명적인 독을 뿜는 해석방법이 되는 것이다. 둘째, 모형론적인 성경해석방법은 성경을 해석할 때 그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드러내어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성경해석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단사상전파 내지는 이단교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해괴망측한 성경해석법으로 전락할 수가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가 성경을 잘 풀어준다고 해서 그리고 갈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해석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주의깊게 살폈어야 했다. 이미 초기교부 오리겐 때부터 알레고리성경해석은 위험한 성경해석방법이라고 도마에 올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시대에 그것을 도로 끄집어내어 성경해석법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해석방법을 따라 오직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실체이고 오히려 구약성경이 예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설명해주시려고 구약시대에 여러가지 사건을 일으켰고 경험하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여기서도 그리스도, 저기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바른 성경독법이요 올바른 성경해석법이다. 오직 한 분, 모든 것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누리도록 돕지 못하는 성경해석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알라! 위험한 해석법으로 사람을 호리는 신천지를 분별하라! 그래서 오직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0년 03월 08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