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우리는 지금 인류역사의 끝자락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성경에 기록된 말세의 징조들로서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신종바이러스와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바이러스는 전염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달 대구에 있는 신천지 다대오지파의 집회소에서 대거 확산됨에 따라 경북과 대구가 비상관리 체계에 들어갔으며, 교회도 여전히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과 이탈리아 등 전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업무를 중단하고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중에서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치는 3대재앙이 나오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전염병"이다. 고로 우리는 인류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전염병 다음을 우리는 예상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믿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만으로서도 미움을 받게 되고 핍박을 당하게 되는 상황에 곧 올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난의 상황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은 불안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 단비를 제공해주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 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왜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왜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직에 관해 언급하는가?
히브리서는 참으로 대단한 성경책이다. 이 책이 신약성경 가운데 그 저자가 누군지 모르는 단 하나의 책이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의 탁월함 때문이다. 특히 구약의 율법을 풀어내는 방식은 영락없이 사도바울의 그것을 닮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특히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계시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직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히브리서 기자는 아론을 가지고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표현해야 했는가? 대체 멜기세덱이 누구길래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정확한 예표는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아론이 대제사장이기는 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3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아론은 실제 사람 제물를 가지고 제사드린 것이 아니라 황소와 염소의 피로서 제사를 드렸으며, 참 장막이 아니라 하늘의 모형인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그의 제사로서는 인류의 죄들이 속함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론은 실제 공연에 서기 위해 구약시대에 예행연습(리허설)을 한 것이었지 실제 공연무대에는 서지 못했던 자였던 것이다. 둘째, 더욱이 그는 자신도 연약함에 쌓여 있어서 백성의 속죄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의 죄를 위한 속죄제사를 먼저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백성을 위한 속죄염소를 드리기 전에 자기죄를 속죄하기 위하 수송아지를 제물로 바쳐야 했던 것이다. 자기도 흠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마지막으로는 그도 죽음은 피해갈 수 없었으니 그는 자신의 죽음 때문에 대제사장직을 아들에게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넘겨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그 직분을 감당하기는 했으나 영원히 그 직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고로, 아론만으로는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에 관하여 설명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제사장직무의 수행은 아론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첫째, 황소와 염소의 피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피로서, 모형이 아니라 참 장막이신 자신의 육체 안에서 참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예수께서는 연약함이 쌓여 있지 않았기에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치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죄된 본성을 가지지 않은 둘째아담으로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된 자요, 그분은 원래가 죄가 없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었기에 그분은 자신을 위한 속제제물를 제물로 드려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은 리허설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실제 제물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는 부활하여 지금도 하늘에서 여전히 하늘에서 대제사장이 직무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아론의 대제사장직만으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꺼낸 카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직이다.
3. 멜기세덱은 대체 누구이며, 그의 대제사장직은 아론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실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는 잠깐 출현했다가 그만 흔적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잠깐 나타나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기는 했지만 그가 감당했던 대제사장의 직무는 예수께서 지금 하늘에서 담당하시고 있는 직무와 거의 비슷하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구약성경에 딱 두 번 나온다. 창세기 14장에 딱 한 번 나오고, 시편110편에 한 번 더 나온다. 앞에서는 3구절에 등장하고, 뒤에서는 1구절에서만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멜기세덱은 놀라우리만치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왜 그런가?
우선 멜기세덱이 처음 등장했던 창14장의 말씀을 살펴보자(창14:18~20). 거기에 보면 그는 살렘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마중나오되 떡과 포도주를 공궤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자다. 또한 그는 아브라함을 만나 이렇게 축복하였다.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이 붙히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19b~20). 그래서 창세기 저자인 모세는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14:18b).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첫째, 그는 제사장이 아니라 왕이었던 존재였는데 그날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서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론은 왕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그는 아론이 속해 있는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서 별다른 제사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예수께서 유다지파에서 나온 분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레위지파와 유다지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레위지파는 제사집례를 위해 세워진 지파요, 유다지파는 왕이 나왔던 지파이기 때문이다. 유다지파에서는 20명의 왕들이 나왔는데,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왕은 다윗왕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다윗왕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대제사장직을 감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왕같은 제사장"의 모형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위해 그날 나온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나왔다. 그것도 떡과 포도주를 주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그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세금받으러, 십일조를 받으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그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자기를 위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고 자기를 축복해 주었기에 감사함으로 바친 것이었다. 여기서 "떡과 포도주"는 적들과 전쟁하면서 허기지고 배고픈 아브라함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기 위해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 그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셋째, 그날 멜기세덱은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위해 나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축복하는 일이 대제사장의 직무였는데, 그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의 잘못한 점을 용서받을 수 있도록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그날 그간 수고한 것을 알고 그것을 치하면서 복주기 위해 나온 것이다. 고로 지금 하늘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는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서 그 직무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인가 복을 주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멜기세덱이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예표가 되는 것은 그도 예수님처럼 똑같이 시작도 끝도 없는 자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히7:2~3). 이 세상 사람치고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시작도 끝도 없는 자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자다. 더욱의 그에 대한 명칭이 심상치 않다. 왜냐하면 그는 "살렘왕"이었기 때문이다. "살렘왕"이란 "평화(평강)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명칭은 영락없이, 아들이면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으나 기묘자인 보혜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였던 예수님에 대한 구약명칭으로서 "평강의 왕"이기 때문이다(사9:6). 고로 우리는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멜기세덱이 장차 출현하게 될 메시야의 예표로 보내어진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대제사장직에 관하여 멜기세덱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4. 예수께서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되심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는 않았다. 다만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던 속죄제사를 통해서 예수께서 어떻게 속죄제사를 드릴 것인지에 관하여 미리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아론의 직무수행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일부였던 것이다. 사실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예수께서 아론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 될 것이라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심에 관한 예언이 구약성경에 나온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고 거기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다윗왕이 쓴 시편에 나온다. 시편110:1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내 주(그리스도)에게 말씀하시를 내가 네 원수들로 내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으 있으라 하셨도다"고 했으며, 또한 그 시편에서 한 번 더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로다.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110:4)"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앞의 말씀은 다윗이 본 환상을 쓴 것이고, 뒤의 말씀은 하나님의 맹세의 약속을 기록한 것이다. 실로 다윗은 예수님보다 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다윗의 재위기간=B.C.1010~970), 그는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것임을 미리 환상으로 내다보았으며, 또한 예수께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왕같은 제사장으로 오시되,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있을 것임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존재나 행동이나 말은 100%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직무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하늘에서 감당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무는 멜기세덱의 경우를 닮았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5. 대제사장으로서 아론은 어떤 직무를 수행했는가?
그렇다면, 이 땅에 처음 대제사장으로 세워졌던 아론은 어떤 직무를 감당했을까? 그런데 그와 그리고 그의 후손이 일평생 감당했던 일을 조사해보면,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딱 7가지 직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첫째, 대제사장은 백성의 속죄를 위한 대속죄일 제사를 집례했다는 것이다(레16:34, 히1:2). 둘째,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시99:6, 삼상7:9). 셋째, 그는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레10:11,신33:8,10, 스7:10~11). 넷째, 백성을 축복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민6:27, 레9:22). 다섯째,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레10:10, 겔44:23). 여섯째, 우림과 둠밈으로 재판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출28:30). 일곱째, 위기상황에서는 종교적인 리더십을 발취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삼상7:3, 스8:15).
그렇다면 대제사장의 직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속죄일제사 때에 일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대속죄일제사를 집례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대제사장이 그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피만 뿌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속죄의 피를 뿌리기 전에 먼저 향로를 들어가서 향을 살라 지성소를 가리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레16:12~13). 그리고 나서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의 피를 지성소의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렸고 이어서, 이스라엘 온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의 피를 똑같이 뿌렸던 것이다(레16:14~15). 고로 우리는 대제사장이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가 기도하는 일과 속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계5:8과 8:3~5의 말씀을 보면, 향을 사르는 것이 곧 중보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론도 속죄제사만을 드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주된 임무가 속죄제사였지만 그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지성소에서 향을 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지상의 사역도 찬찬히 살펴보면, 오직 속죄제사만을 위해 달려가신 것이 아니라, 늘 중보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새벽미명이 되면 한적한 곳에 늘 기도하셨다. 하루의 일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날 만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12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죽음을 앞둔 마지막의 상황에서도 그는 제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셨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말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6.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승천후에 하늘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고 말씀한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한다(막16:19, 롬8:34, 골3:1). 히브리서 기자도 무려 3번씩이나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8:1)",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그것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요일2:1, 딤전2:5).
그럼, 중보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께서는 무슨 일을 수행하시는가? 그것은 딱 2가지다. 첫째,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에게 성령을 보내어 거듭나게 하시고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을 우리가 회개하고 고백할 때에 그 죄들을 용서해주시고 깨끗케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요일2:1~2,1:9).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도와주시는 이)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게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그렇다. 예수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하실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나 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 번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는 것도 아니다. 그럴려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2천년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했으니 우리의 모든 죄들 그러니까 과거에 지었던 죄와 현재에 짓고 있는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보통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과거에 지었던 죄와 현재의 죄까지는 회개하고 믿기 때문에 다 용서가 된다. 하지만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개할 때 용서된다. 눅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라.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 전부터 그의 죄를 용서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이킬 때 비로소 용서가 그에게 적용되었다. 이는 마치 민21장에서 모세가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놓았을 때에, 놋뱀을 달아놓은 그 사실 자체가 불뱀(독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뒤 살기 위해 장막 밖으로 나와서 그 놋뱀을 쳐다볼 때에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놓은 사실 자체가 개개인의 독을 제거해주지 못하며, 개개인이 직접 나와서 놋뱀을 쳐다볼 때에 적용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그냥 구원이 완료되었으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과연 소아시아 일곱교회중 5교회에게 왜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그렇게 명령하셨겠는가? 예수믿고도 회개하지 않는 죄 때문에 결국 본인이 죽는 날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계3:5).
그리고 둘째로, 예수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시기 위해 중보자가 되시어 아버지에게 간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소개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그렇다. 예수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와 장기두시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같은 큰 나라의 왕과 전쟁할 때에 멜기세덱이 그것을 지켜 보면서 부족한 아브라함이 강한 그돌라오멜 왕을 이길 수 있도록 중보기도드린 것과 같은 이치다. 멜기세덱은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아브라함에게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라. 그는 아브라함이 그간 어떻게 행했는지를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마치 르비딤에서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보낼 때에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보이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그를 보면서 두 손을 들고 기도했던 것과 같다(출17:8~16). 그러니 우리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 전쟁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이유도 별로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 다 천국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마귀가 주인인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사실 영적 전쟁터다. 그리고 우리 힘만으로는 마귀를 대적할 수 없다. 중과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를 도와달라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고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시는 것이지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를 도와주시지 아니한다. 고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부르짖어 기도하라. 그래야 중보자이신 예수께서도 그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대제사장으로 오시어 속죄제사만 드린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부활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만) 중보의 일을 하고 계신다. 이는 그분이 여전히 하늘의 왕으로서, 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나 떡과 포도주로 공궤하고 그를 축복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분이 결코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라.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고 또한 믿을 때,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또한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그 자리에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움을 간청할 때 중보자로서 우리의 기도를 아버지께 전달하기 위해 그 자리에 계신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라.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우리도 히브리서기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히3;1)"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믿고 있고 그분께 간구하고 있는 한 우리는 전능자와 늘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순절이후 믿는 이들의 영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멀리 부를 필요가 없다. "오 주여!"라고 부르는 즉시 그분은 우리의 지성소 곧 하늘의 지성소의 분점인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께서 중보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3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