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버이주일로 돌아온 탕자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구약적인(율법적인) 방식에 따르면 누가 효자인가? 아마도 첫째 아들이 효자인 것 같다. 하지만 신약적인 방식에 따르면 오히려 둘째 아들이 더 효자인 것 같다. 그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어떻게 하여야 효자라 불릴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으며, 두번째 방식에 따라 주님이 바라시는 효자상을 찾아낼 수 있다.
1. 들어가며
오늘은 어버이주일이다. 이 세상의 어버이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희생'이라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버이날을 맞아 우리의 영적인 부모이신 저 유일하신 하나님께, 과연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을 대하셨으며, 신약시대에는 과연 어떻게 당신의 자녀들을 대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는 지금 우리가 영적인 부모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잃은 아들의 비유는 누구에게 하는 비유인가?
어느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오자,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것을 보며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어떤 비유로서, 누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들인지를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말씀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잃었다가 되찾은 것에 대한 3가지 비유를 연거푸 말씀하셨다. 하나는 어떤 목자가 양 백마리 중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다시 되찾아 기뻐한다는 비유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떤 여인이 열 드라크마에서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다시 되찾아 기뻐한다는 비유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 중에 둘째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그가 다시 돌아와 기뻐한다는 비유다. 그런데 세번째 비유는 잃어버렸는데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의 비유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첫째 아들의 상태까지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는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첫째 아들과 같으니 듣고 회개하라는 뜻이다. 대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길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첫째 아들의 상태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가?
3. 첫째 아들은 왜 아버지에게 화를 내었는가?
첫째 아들은 그날도 밭에서 일하다가 늦게 집에 막 도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풍류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펴보니 자기 아버지의 집이 아닌가? 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집나간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오게 됨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소를 잡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첫째 아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집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이에 아버지가 밖에까지 나와 아들더러 들어가자고 타일렀지만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맏아들은 아버지께 불평의 말을 토해 낸다.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처럼 열심히 섬겨왔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염소새끼 한 마리라도 자신에게는 친구들과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일이 없는데, 어째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둘째를 위해서는 소를 잡고 잔치를 벌이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첫째 아들의 이러한 불평은 부당한 것인가 아니면 합당한 것인가? 어찌 보면 합당하다고 여길만하기도 하다.
4. 첫째 아들은 왜 그토록 힘들게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첫째 아들은 왜 그렇게 힘들게 아버지를 종처럼 섬기고 있었던 것인가? 정말 아버지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대답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 그렇다.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맏아들에게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몇 년 전에 두 아들들에게 자신을 나눠주기는 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아버지의 재산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 집에 종들이 몇 명인가? 이미 재산의 일부가 첫째 아들에게 넘어간 상태이지만, 아직까지 그 집의 모든 경영권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첫째 아들이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해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랬다. 아직 넘겨받지 못한 재산과 종들 그리고 경영권을 넘겨받기 위해 맏아들은 그날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여나 아버지의 마음에서 벗어나,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넘겨받지 못할까봐 그날도 힘들게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꾹 참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그에게 인내의 한계를 폭발케 하는 일이 발생해 버렸다. 동생이 돌아온 것 때문이었다. 동생의 돌아옴은 앞으로 자신이 받게 될 재산을 축내는 일이 되는 것이었고, 자신이 넘겨받을 재산을 못받을 수도 있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에 맏아들은 그렇게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던 것이다.
5.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어디에 있었으며, 누가 과연 진정한 효자인가?
그렇지만 당시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둘째 아들에게 가 있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이 몇 년전에 자신의 분깃을 달라고 하더니 그것을 팔아 돈을 바꾼 다음 먼 나라로 곧 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첫째 아들의 관심은 언제나 아버지의 재산과 경영권에만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것을 넘겨줄 때까지 조금만 참고기다리자면서 자신에게 훈계하고 또 훈계하며 종처럼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다 자기 집에서 사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큰 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효자이고 누가 과연 불효자인가? 먼저 둘째 아들은 확실히 불효자였던 자였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살아서 그것도 건강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간 집을 나가서 고생을 하다보니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 둘째아들은 잘 알고 있었고, 자기에 나아와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째 아들도 실제로는 불효자였다. 집을 떠나가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도 모르고 있었고, 오직 자기의 이익(실속)을 챙기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것일 뿐 결코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버지를 집밖에까지 나오게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6. 이 비유는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어떤 변화를 말해주는 것인가?
사실 이 비유는 신구약시대에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두 아들들을 대하는 방식을 달라졌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전까지 아버지는 구약시대 곧 율법시대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식들을 대해왔었다. 즉 잘못한 자에게는 벌(징계와 형벌)을 주고 잘한 자에게는 상(칭찬과 보상)을 주는 방식을 취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곧 구약시대의 방식이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율법의 규정을 주고 그것에 순종하는 자에는 축복을,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이 결국 인간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듣고도 자신의 삶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뭔가를 잘못했을 때에 책망하고 징계하고 고난을 허락하신 구약의 방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했을 때,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것은 2가지 반응이었다. 하나는, 율법조항에 걸리지만 않게금 행동하는 아주 가증스러운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율법조항에만 걸리지 않도록 행동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율법을 잘 준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속으로는 많은 죄를 짓고 있었다. 주님은 그것을 외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당시의 첫째 아들의 모습일테고, 또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또 하나는, 자신이 잘못해서 징계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겉으로 회개하는 시늉만 할 뿐 결코 회개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말씀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징계로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내려보냈지만 그것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대하시는 방법을 전환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것은 징계와 채찍의 방법이 아닌, 사랑과 용서의 방법이었다. 인간이 잘못하여 죄를 범하더라도 그 죄값을 하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주님께서는 인류에게 "너는 내가 너를 위해 행하는 속죄의 사건에 감사하면서 회개하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의 방식은 사람을 외식하는 자로 만들 뿐이지 진정 변화된 사람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인간에게 더이상 죄값을 묻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이번 변화된 새로운 방식으로 대하는 하나님을 잠시 잠깐 이용해먹으려고 애쓰지 말고 언제까지 주님만 믿고 따라오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기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첫째 아들은 당시 위태위태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몇 년을 참아왔지만 그날 분노를 폭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할 줄 알았고 아버지에게 죄용서를 빌려고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은 용납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기뻐했지만,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 나오며 - 오늘날은 무엇이 진정 효도인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영적인 부모인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 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가?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는 것이 효도요, 떨어져나갔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집에 함께 있는 것이 효도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효도인 것이다. 주께서는 왜 이 비유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현재 아버지의 집에 있으나 결국에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는 첫째 아들의 상태를 보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비록 아버지의 곁을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돌이켜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값은 당신이 피조물이 되심으로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살 때에 부패한 본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어찌 죄짓지 않고 살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죄지었다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되면 그것이 불효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 효도인 것이다. 왜냐하면 맨처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에게 물려주려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우리가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효도라는 것을 명심하자.
2020년 05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