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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ASF6nzfFics
날짜 2020-05-31
본문말씀 요3:5~9(신약 14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거듭남,중생,중생의뜻,중생의방법,중생의결과,중생과칭의,중생과회심,중생과성화,중생의특징

1. 들어가며

  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 중에는 자꾸 믿음에 있어서 의심이 들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가? 교회에 출석한지 오래 되었지만 왜 자신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일주일에 하루를 시간을 내어 주일성수를 하는데도 그것을 지키기가 왜 그렇게도 어려운가? 주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기기도하고 주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왜 그리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이 거듭났는지에 관한 믿음이 불투명하고 확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거듭남(중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며, 사람은 어떻게할 때 중생할 수 있으며,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신이 중생한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은 자신이 중생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을 뭐라고 딱불어지게 말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사람이 중생하는 그 순간을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중생 이후의 증상 내지는 중생의 결과를 통해서 자신이 중생했는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중생에 관한 질문지를 만들어보았다. 다음의 10가지 질문을 통해서 자신은 과연 중생했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아무런 부담이나 장애가 없는가? 둘째,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가? 특히 언젠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뼈속 깊이 느낄 때가 있었는가? 셋째, 주님을 부인하라고 해도 부인할 수가 없는가? 혹 주님을 시인함으로 인하여 죽어야 한다고 죽어야 한다면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넷째, 하나님과 예수님,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싶은가? 특히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보면 매우 부러운가? 다섯째, 세상의 돈과 권력과 명예라 할지라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여섯째,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주님께 물질을 바치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일곱째, 내 입술이 짜증내고 불평하던 것에서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었는가? 여덟째,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내적인 강한 확신이 드는가? 아홉째,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내적인 생명도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열째, 필수는 아니더라도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3. 중생(거듭남)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중생" 곧 "거듭태어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루터교회에서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에 거듭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니까 유아들도 유아세례를 받는 순간 중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게 사실인가? 아쉽게도 그것은 잘못된 교리다. 왜냐하면 세례받는다고 사람이 중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생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요1:13). 중생은 수동태인 것이지 결코 능동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종교개혁자들도 중생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보자. 17세기에는 중생을 '회심'과 같은 개념으로 보았다. 하지만 '회심'은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신앙에 눈을 뜨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회심은 회개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지 중생에 가까운 개념이 아니다. 또한 중생은 사람의 존재 깊은 곳에 존재하는 영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는 회심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회심은 사람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중생은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참여하시는 어떤 것이므로, 회심을 중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중생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중생이 아닌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중생은 자기자신을 개선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개선하여 좋은 방향으로 행동을 고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쳐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라고 마할 수는 없다. 중생하지 않아도 좋은 방향으로 자신을 개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중생은 칭의와도 다르다. 칭의는 믿음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그러나 중생은 내면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내면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셋째, 중생은 성화와도 다르다. 성화란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중생은 계속되며 반복적인 과정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단회적인 것으로 순간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일생을 통해 변화되는 과정을 일컫는 성화는 중생과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중생이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가리키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해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중생(거듭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중생에 관하여 맨 처음 사용되는 예는 예수님에 의해서였다. 예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필요성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율법에 능통한다고 할지라도, 중생은 그것과 별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중생이란 어떤 뜻이었을까? 그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은 육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지만 영으로 나야 영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활동으로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셋째, 예수께서는 중생이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3:15~16). 다시 말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지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사람의 영 속에 성령께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눠주심으로서 새로운 생명이 그에게 더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4. 중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중생(거듭태어남)은 어떻게 할 때 일어나는 것인가?

  첫째, 주님께서는 중생이란 물과 영으로부터 거듭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3:5). 여기서 '물'이란 무엇을 가리키며, '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이를 해석하는 이마다 조금씩 다르다. 중요한 것은 육으로 태어난 사람이 다시 영으로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하기 때문에, 사람의 영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어지도록 하는 일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태어나는 것이라는 의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럴려면 사실 죄인인 사람에게는 2가지의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하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하며, 또 하나는 생명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한다.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한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과거에 출애굽2세대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일들을 비유적으로 말씀해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짐으로 중생이 실현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의 독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달려 죽는 것이 중생에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건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생이란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수여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어디선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사람 속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셔야 그 사람이 거듭태어나는 것이다. 고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태어난다는 것은 사람이 죄에 대한 용서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명공급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 주님께서는 중생은 그 사람이 믿을 때에 일어난다고 하셨다(요3:15~16). 고로 사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믿어야 하고, 성령을 자기의 마음 속에 모셔들여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다 믿음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사람이 자기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또한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롬10:9~10). 그래서 속죄와 중생이라는 일이 그 사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령은 보혜사로서 예수님의 또다른 오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자기 마음 속에 영접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것이다(요14:16~17).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생은 우리가 행하는 일이 아니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활동이기에게 하나님께서 보시에게 우리의 믿음이 합당하다고 여기실 때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요1:13). 그래서 중생이란 항상 수동태로 쓰이고 있다. 그분이 행하시는 일인 것이지, 내가 능동적으로 행한다고 해서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5.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중생한 자 곧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진 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가지다. 첫째로, 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했다. 둘째, 그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진다. 셋째, 회개하기만 한다면 어떤 죄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다. 넷째,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중생을 받은 자가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중생을 얻은 자라도 죄를 짓다가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그가 죽을 때에 성령이 그를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이미 자신이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지금도 그 신앙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누구라도 자신이 중생한 싯점을 잘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한 변화나 체험이 자신에게 동반되지 않았다면, 자신은 중생하지 아니했다고 쉽게 판단해버리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미 중생했음에도 죄된 본성을 따라가는 자신을 보고 자기는 중생하지 않았다고 쉽게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다. 죄된 본성은 우리가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를 죄짓도록 계속해서 유혹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중생했다면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이미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이 자꾸 미혹하고 속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죄지을 때마다 귀신들은 우리의 양심에 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속이려든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사람이 중생했다고 해서 그 뒤로 그가 죄를 전혀 짓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귀신을 그 순간부터 우리를 영원히 떠나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귀신은 택하신 자들도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여 지옥으로 끌어가려고 지금도 갖가지 묘책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미 거듭난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죄된 본성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어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된 본성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으려면, 자기 속에 들어와 계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그분이 우리를 책망하시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다면 보면 어느새 우리도 죄된 본성에서 점차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사탄마귀의 미혹까지 극복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5월 3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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