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정말 처음부터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을가? 그래서 갈대아우르를 떠나 하나님을 따라나선 것인가? 만약 그것이 맞는 것이었다면 그에게는 실수가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커다른 실수들을 범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실수는 그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매우 약했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그렇다면 그의 두번째 실수는 대체 무엇이며 거기서 그는 무엇을 깨닫게 되었던 것인가? 그 속에는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직접적인 열쇠가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처음부터 온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 일컬었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실수를 통해서 배웠다. 아니 실수가 그의 신앙의 교재가 된 것이다. 그만큼 온전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렵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할 때가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몇 번에 걸쳐 실수했는가? 성경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3번은 실수했던 것 같다. 그중에서 첫번째의 것은 그가 부름받은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있었는데 그것은 지난 주일에 다루었다(설교제목: 창세기강해(78) 실수를 통해 배워가는 아브라함). 오늘은 그가 부름받은지 10년째 되던 해에 있었던 사건을 다룰 것이다. 그는 왜 또다시 실수한 것인가? 그리고 어떤 실수를 한 것인가? 그리고 이번 실수는 그의 첫번째 실수와는 어떻게 다르며, 우리가 이번 실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는 무엇이며 언제 일어났는가?
그럼,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란 무엇이며, 그것은 언제 일어난 것인가? 아브라함의 두번째 실수는 그의 나이 85세 되던 해에 일어났다. 그 때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지 10년 되던 해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간에 4번이나 나타나셔서 그에게 그의 씨(자손)에 대한 약속을 해 주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했다(창12:2), 그런데 그것은 한 명의 아브라함의 씨(자손)에게서 시작될 것이며(창12:7), 그 씨는 땅의 티끌같이 많아질 것이고(창13:16),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창15:5)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10년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브라함의 처였던 사래가 말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내 여종에게 들어가 가문의 대를 잇도록 합시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아내의 말을 듣고 애굽사람 사래의 여종 하갈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아브라함은 매우 기뻐했고 그의 이름도 천사가 하갈에게 가르쳐준대로 "이스마엘(하나님께 들으심)"이라고 지었다. 아브라함은 이제 상속자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3.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데 대를 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데 대를 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담부터 예수님께서 72대손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자식을 낳지 못해 양자를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아담의 10대손이었던 아브라함 대에 이르러서 불임의 저주가 아브라함의 집에 임했다. 사래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적 발견을 토대로 살펴보니, 고대 근동에 있었던 사회생활제도가 바벨론왕 함무라비 법전에도 들어 있었다. 이 법전은 총 282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 취첩에 관한 조항이 총 5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나와 있으니 그것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면 아내는 자기를 대신하여 첩을 얻어주게 되어 있었다. 만약 아내가 첩을 얻어주지 않으면 남편은 스스로 첩을 둘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첩을 얻어주어 남편이 자식을 낳았는데도 남편이 다른 여자를 또 첩으로 얻으려하면 그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첩을 주어 자식을 낳게 한 것은 자기 집안에서 자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많은 아량을 베푼 것이다. 그리고 그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잇게 한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후 그를 떠나셨다.
4.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것이었나?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첩을 얻어 아들을 얻은 것은 과연 잘못된 것이었을까? 좀 전에서 살펴보았지만 이방인의 풍습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건 아주 잘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본부인이었던 사래의 이러한 결정은 상당히 박수를 받을만한 행동이었다. 자신만이 남편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기꺼이 대를 이을 후손을 얻는 것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셈의 가문이 끊겨질 위험 가운데서 있었는데 첩을 통해서 가문을 이을 사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크나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뒤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떠난 사건을 통해서 확인이 되며, 13년만 다시 나타난 말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때 주신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크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내 얼굴 앞에서 걸어가라) 완전하라(흠이 없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잘못은 첫째로,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꾸중하기 시작하면서 그에게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기 때문이다(창17:1a). 사실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를 떠나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아내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녀가 시집오면서부터 알려진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우르를 떠나왔지만 아브라함의 뇌리 속에서 사래는 항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것은 그때도 그랬고 하란을 떠난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랬다.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아브라함은 자식의 처가 자식을 낳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창17:17~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내뱉으신 첫 마디는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못할 것이 없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라고 그를 꾸중하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의 아들 이삭은 달랐다. 이삭은 40세에 결혼을 했는데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 그가 한 일은 하나님께 자신의 아내가 임신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는 것이다(창25:21).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식을 허락하셨으니 쌍둥이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자기 아내는 임신하지 못한다고 결정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그간 단 한 번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창17:1b).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과 상의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도 않았으며 자기가 스스로 결정하여 이방인의 풍습을 좇아 둘째부인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갈을 "첩"이라고 번역해놓았지만 히브리어성경에서는 '부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갈은 둘째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첫째부인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했었던 말을 살펴보면, 자신의 종을 첩으로 남편에게 주었을 경우 그 첩에 대한 모든 결정권이 본부인이었던 사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사래나 아브라함이나 본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했을 때에 할 수 있는 우회적인 방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후처를 들여서 자식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라. 메시야의 조상치고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식을 낳지 못해 후처를 통하여 메시야의 조상을 낳았는지를 말이다. 한 사람도 없었다. 후처를 통하여 낳은 자식을 통해 경건한 신앙이 물려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왜 행하지 않느냐? 문제가 생겼으면 나하고 상의해서 해결해야지 왜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가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흠을 가지고 있었다(창17:1c).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어서 그녀를 통해서 자식을 얻으려 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자기로부터 자식을 낳아줄 여인이 함의 자손으로서 애굽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메시야의 조상이 되려면 혈통적인 순수성과 신앙적인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자기에게 자식을 낳아주었던 여인은 함의 자손이 아닌가? 자식은 모름지기 엄마의 품속에 자라나는 것이니, 하갈의 손에서 자라난 아이는 반드시 엄마의 신앙을 따라갈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인데, 왜 셈의 자손을 통하여 자식을 얻지 않고 이방여인을 취하여 자식을 얻으려 했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나중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녀가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가서 동방에서 살았는데 그후손이 바로 아랍족속이 되었고 그 족속 중에 무함마드가 나와서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후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첨예한 대립이 수천년간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결정은 흠이 있는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로, 첩을 통해서 자식을 낳았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가문의 저주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첩을 취하여 자식을 얻었다. 그러니 얼핏 보기에는 자신이 불임의 저주로부터 빠져나온듯 보이지만, 실제로 불임의 저주에는 사래에게 있었으니 저주의 실체를 내버려두고 자기만 저주에서 쏙 빠져나올 꼴이 되고 만다. 비록 자신을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았지만 자신의 아내 사래는 여전히 저주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조카 롯은 포로의 저주에서 건져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자신의 아내를 위해서는 왜 그렇게 행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자신의 아내에게 내려온 불임의 저주는 사실 자기 아버지의 우상숭배의 죄와 살인과 폭력의 죄 때문에 내려온 것인데 왜 그 저주는 가만 두고 우회하여 편법을 써서 자식을 얻으려고 하였는가? 더욱이 자신의 아내 사래는 자신의 진짜 누이동생이 아니었는가? 물론 배다른 엄마의 딸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버지 데라의 저주를 옴팍 쓰고 있는 이가 바로 사래인데 왜 사래의 저주는 그냥 놔두고 자신만 저주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방법을 사용하려 했던 것인가? 그것은 이 아브라함이 사래를 통해 자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첩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으려 한 것은 온당하지 않는 행동이었언 것이다. 그녀를 아버지의 저주로부터 풀어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아브라함 집의 불임의 저주는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어 자식을 얻었던 일은 어찌 보면 참 잘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것은 믿음없는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여전히 자기의 아내만큼은 절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고 계속 믿고 있었음을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어디 그의 잘못이 이뿐이겠는가? 그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을 믿고 따라가야 할 신앙의 집안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방법과 인간적인 방법을 끌어들여 자식을 얻으려 했었다. 그것도 함의 자손인 이방여인을 취하여 자식을 얻는 일임에도 불구하고는 그에게는 아무 꺼리낌도 없었다. 더욱이 자신은 편법을 써서 우상숭배의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모양을 취했지만, 그의 아내는 영영 우상숭배의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데도 그냥 두고 보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다면 큰 일 날 뻔 했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강하게 책망하셨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놀랍게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곧바로 엎드렸다.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모든 행동들에 문제가 있었음을 즉각 인정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즉 할례를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간 저지른 그의 행동들이 불신앙적인 것이었고 편법이었으며 세상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의미로 할례를 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다시 한번 부각된다. 왜나하면 실수한 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의 시간이 끝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래를 불임의 저주로부터 벗겨주기 시작하셨다. 사라에게 없던 생리가 시작되었고 그리고 곧이어 임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말 1년 뒤에 사래가 아들을 낳아 자기 무릎에 두게 된다.
6. 나오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문제는 실수한 후에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발전적 방향으로 가지고 가는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구차하게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집행함으로써 자신이 행동에 문제가 있었음을 정확히 시인하고 회개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안에 흘러 들어온 저주를 마침내 끝낼 수가 있었다. 그렇다. 아브라함 자신의 가문에 드리운 저주가 정말 끝나는 날이 그에게 온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믿고 따라가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저주를 끝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회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시인한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도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기에 그는 모든 저주를 끝낼 수 있었고 축복의 사람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오후 찬양예배 시간에는 아브라함에게 할례가 정말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를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해 볼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