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복음을 믿는 종교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지 않다. 기독교인들도 불신자와 똑같이 자살하고 있고, 음행을 일삼고 있으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훈련시키지 못해서라도 말은 하지만 어디 훈련한다고 그것이 되어질 성질의 것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정말 자기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이제 구원을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왜 이 지경까지 내몰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이제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아니한다.
원래 '복음'은 성경에 등장하지만 종교개혁자들로 인해 새롭게 발견된 진리 중의 진리다. 중세 때만 해도 복음을 믿어서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신부들만 성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복음에 대해 잘 몰랐으며, 일반 평신도들은 신부들이 들려주는 것만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신부였던 루터와 칼빈이 성경을 읽다가 드디어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들려주기 시작했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히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 복음 때문에 오히려 교회는 지도자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들고 나온 복음은 놀라운 것이었다.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다보니 점차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소외시키기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다 만세전에 성부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은 것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예수님도 바로 성부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그들만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주장하게 이른다. 그러니 자신이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응당 자신은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설령 죄를 짓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으니 만약 구원에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 자신을 회개하시켜서 구원받게 하실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혹 죄를 지어도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위험한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죄가 자신의 구원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못한 채 지금도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그렇다. 이제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에 교회는 온갖 부패로 치닫고 있다. 그러다보니 장로들도 끄떡하면 자살하고 목사들도 음행을 저지르기 일쑤고 도둑질까지 일삼으며 전화사기피싱을 하는 일까지도 행하고 있다. 큰 일이다. 이러다가 교회가 지옥가는 사람을 양산해내는 산실이 될까 두렵다. 그래서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보고자 한다.
사도바울은 A.D.63~65년경 잠시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나와 있던 중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 그리고는 그들이 자기가 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복음전파에 힘썼음을 듣고는 그들을 격려한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권면한다(빌1:27).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는데 혹시 당신은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가? 그것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바울이 그들에게서 떠나 있는지 함께 있든지 하나의 영 안에서 목숨을 바쳐 복음을 믿는 일에 함께 분투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복음의 대적자들이 있더라도 결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받았으니 그분을 위해 고난도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곧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해 보면, 그것은 빌2:12의 말씀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 자신이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을 이뤄가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 병을 고치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들이 받았던 복음을 끝까지 붙들어 믿음에서 파선하지 않도록 고분분투하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 자신에게 죽음의 위협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켜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끄떡하면 믿음없는 자처럼, 복음을 모르는 세상사람들처럼 살고 있고, 세상사람들처럼 나약에 빠져있으며, 그들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죄들을 범하고 있다. 대체 왜 이 지경이 되어버렸을까? 그것은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믿는 자들이 자신은 믿음을 통해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살더라도 자신은 결코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성도들이여, 놀라지 말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성도라도 얼마든지 그 구원에서 떨어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딤전1:18~19). 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3일만에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방향을 틀은 것이다. 이것을 '회개'라고 한다. 바울은 이전에 추구하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는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오로지 복음전파에 힘쓰되 그것 때문에 죽음직전까지 갔으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냈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고전9:27)"는 마음가짐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갔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목숨을 다해 이루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구원에 감사하고 보답하며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바울이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결코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준비한 것을 우리 인간들이 수용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 목숨을 바쳐 주의 일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는 결코 없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없으신 그분만이 우리 죄인들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는 다 하나님이 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내 것이 되게 하는 수고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다. 누군가 전해준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들었다면 그것을 믿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우리가 이 복음이 아니고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시인해야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다. 뿐만 아니라 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으니 죄를 지었으면 마음 아파하며 회개해야 하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믿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회개해 줄 것이라고도 생각지 말라.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준비는 하나님이 다 해 주셨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켜내고 회개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 믿음을 가졌지만 믿음에서 파선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자들은 최소한 세 사람으로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빌레도가 있다고 하였다(딤전1:20,딤후2:17~18). 그렇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의 여정에 들어선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중간에 얼마든지 탈락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 죄를 회개시키는 데도 고의로 성령을 거부함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는 믿음에서 파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세상에 살 때에 이미 구원받았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구원의 시작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서 시작했지만 그 구원은 죽기전에 회개로서 마감할 때에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죽을 때에 구원을 받는 것이다. 비록 복음을 듣고 믿음생활을 시작해 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할지라도 믿음에서 파선하면 그 사람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계3:5). 복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수고를 결코 아끼지 말라. 고분분투하라. 그것은 하나님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피곤하지만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견고해져야 믿음에서 파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주일에 예배만 드리지 않고 오히려 남보다 더 일찍 나와서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주방에서 수고하고 차량으로 봉사하기도 한다. 내가 얻은 구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수고를 하고 있는가? 만약 구원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아마도 버리운 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날마다 회개하고 그리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