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오늘날 구원을 위해 교회들이 목숨처럼 지켜내야 할 것은?(막6:10~13)_2022-07-10(주일)
https://youtu.be/gSYeRk8HDHc [혹은 https://tv.naver.com/v/28024586 ]
1. 들어가며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항상 우리는 물으며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교회가 사회 기관 또는 친교 모임 기관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음부의 권세가 해하지 못하는 튼튼한 교회를 세우고, 교회생활하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게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18~19). 그러므로 겉으로 아무리 멋있게 보이고 건물이 화려해 보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퍼센트가 적은 교회라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친교 모임이 될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주와 다음주는 교회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만들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꾸준히 천국에 들어가도록 돕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우리가 과연 목숨처럼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가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가 대체로 타락하거나 세상이 부하게 되면 교회는 천국과 회개를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는 교회가 타락한 시대였고 오늘날은 세상이 부하게 된 시대다. 그러니 중세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을 잘 전하지 않는다. 중세 시대에는 약 천 년 혹은 약 오백 년 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천국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을 것인지와 죽어서 이미 연옥에 빠져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지를 전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현대 교회도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전해 왔다. 그 방법으로서 셀모임을 어떻게 잘 하는지, 제자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를 전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회개의 중요성을 빠뜨리며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회개와 천국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과연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잘못 가르쳐 주거나 혹은 너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방법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럼 중세 교회는 어떠했을까? 그때는 오직 교회의 사제 계급 곧 신부들의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전하였다. 그럼 왜 이렇게 천주교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3. 천주교회는 어떻게 천국복음을 전하지 않고 연옥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왜 천주교회는 참된 진리의 천국복음과 회개를 전해 주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천주교회의 타락과 그리고 세상과의 혼합주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D.378년 로마의 다마수스(Damasus)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틴어: Pontifex Maximus) 곧 고대 로마의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에 속한 최고 사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A.D.590년 제63대 로마의 감독 그레고리 1세가 자신의 직함을 '교황'이라고 사용하면서, 기독교는 로마의 이교도인 태양신 종교와 혼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는 갖가지 이방 종교의 의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수많은 교리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한다. 그중의 으뜸은 바로 '연옥'이라는 교리다. '연옥'이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기는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임시 감옥으로서,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구원에 대해 보장은 받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때부터 어떻게 하면 연옥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자 천주교회가 가르쳐 준 것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에에게 기도를 바치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미 자신의 선행과 공로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은 잉여 공로가 있는 성인들에게 기도를 바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품들도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교회마다 앞다투어 성물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숭배하고 찾았으니,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에도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는 평소의 3배가 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 성당 안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속옷과 십자가의 녹슨 못 1개 그리고 마리아의 머리카락 3개 그리고 불가타역 성경을 만들었던 제롬의 이빨 3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드디어 A.D.1091년도부터다. 교회가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 하고 재정 축재를 하기 위해 재정을 모으려다 보니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의 도장이 찍힌 면죄부를 사게 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사실이다. 사실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그때부터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리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못하게 했다. A.D.1123년부터 5차에 걸친 라테란 종교회의 결과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게 되면 종교 재판에 넘겨 온갖 고문을 하고 죽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녀사냥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죽인 성도들의 수가 무려 6천만 명이었다고 한다.
4. 천주교가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준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런데 이러한 천주교회의 연옥복음에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신부가 한 사람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A.D.1483~1546년). 그도 죄로부터 해방되어 살기를 원했으나 온갖 고행과 선행 그리고 거지 성지순례, 성인 숭배 등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거스틴 수도원의 원장인 스타우핏츠 신부의 도움으로 성경을 접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루터는 사람이 구원얻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오직 의인은 믿음과 회개로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롬1:17, 합2:4, 시32:5). 그리고 드디어 만성절(모든 성인 대축일) 하루 전날에 비텐베르크 성당에 자신의 생각을 함께 토론해 보고자 95개 반박문을 게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중세의 구원관이 성경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그는 중세의 구원관 3가지 중에서 2가지를 거부한다. 하나는 교회의 사제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성도가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과 구원에 달려있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5. 루터가 성당문에 게제한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은 무엇인가?
루터가 만성절 하루 전날에 나무로 된 성당문에 붙였던 95개조 반박문을 읽어 보면 우리는 그가 대체적으로(학자마다 다르겠지만) 3가지 주제로 항의를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렇다.
첫째는 진정한 계속된 회개없이는 사제의 어떤 고해성사도 죄용서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95개 조항의 첫 번째부터 4번째 조항이다. 그 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4:17), 그분은 신자들의 전 생애에서 회개가 지속되기를 원하셨다.
제2항 이 ‘회개하라’는 말씀은 고해성사 곧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어지는 고백과 속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3항,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마음 속에서의 참회만 국한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참회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들을 죽이는 외적인 표지들을 낳지 않는다면 그 참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4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존재하는 한(즉 진정한 내적인 참회가 없는 한), 죄의 형벌은 [계속] 존재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죄의 형벌은]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 루터는 사람이 죄용서를 받는 것은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직접 하나님에게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고할 수 있으며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제직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만인제사장설).
그리고 둘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은 실제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아무런 효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교황이 가지고 있다는 사죄권(천국 열쇠)은 합당한 것이 아니며, 돈을 받고 면죄부를 발행하는 권한이 교황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주장 중 핵심적인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5항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제6항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을 가지지 않는다.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제10항 죽은 자에 대하여 연옥을 교회법적 형벌로 유지하려는 사제들의 행위는 무지하고 사악한 짓이다.
제22항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26항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서 사죄를 허락할 수는 없다(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은 당치도 않다).
제27항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빠져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제28항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32항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36항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데, 이는 면죄부 없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제52항 면죄부로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람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 성지순례와 같은 고행, 성자 유품과 유물 숭배를 통한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나 자신이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루터는 중세 시대에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진정한 회개만이 죄용서를 받게 해 준다는 것을 찾아낸 놀라운 중세 신학자였던 것이다.
6. 루터의 공헌에 맞물려 그가 가졌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루터의 모든 주장들은 다 들어맞는 것인가? 아니다. 그가 외쳤던 회개에 관한 부분과 연옥교리 및 교황 수위권에 있어서는 옳은 주장을 했지만 그가 주장한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로 행하는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의 실수는 여기서부터 발견된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게 되는지까지는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것이 면류관이 되고 상급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우리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직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 의지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라고 했으며, 인간이 자유 의지를 사용한다면 구원을 얻는데 적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구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책임이 없다면 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다 정해 놓고 하는 일을 가지고 말이다. 또한 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명하셨겠는가? 왜 우리의 시인과 부인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강조하며 말했겠는가? 그리고 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님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셨겠는가?(마5:39~40) 그렇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반응함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나아오고 결단을 할 수 있는 의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했다(마12:18~21).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꺾여지고 말 것이며, 우리의 심지는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꺾여진 갈대라도 다시 바로 세워지고, 꺼져가는 등불도 다시 타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는 주님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 의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천국에서 상급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믿었으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천국을 위해 살고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도 있고 주님 보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 교회와 싸우느라고 미처 이런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죄용서받는 것이 회개라는 것까지만 생각했던 것이다. 회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상황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지 아니했을까...
둘째, 위와 맞물려서 또 한가지는 신약 성경 중에서 믿음으로서의 행위 곧 회개의 열매로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나 유다서를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는 사실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강조한 책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에 어긋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했으며, 이는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야보고서 강해 서문에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쓴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이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 필요한 의가 어떻게 믿는 이들에게 전가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인생의 결말에 갔을 때에 자신을 되돌아보건대 믿음에 따른 행위가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각도가 다르다. 그리고 그는 야고보서가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난했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이 무려 21가지가 거의 인용되다시피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심판주(5:9), 재림주(5:8), 생명의 면류관의 수여자(1:12), 치유자(5:14~15)로서 묘사하고 있으며, 비록 자신이 예수님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주님이요 자신은 종이라고 칭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칭한 것이 무려 10번 이상이나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그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놀라운 발견 곧 회개의 중요성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잃어버렸으며, 결국에는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절대예정와 절대작정에 따른 구원을 주장하는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배턴을 그만 넘겨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회개의 중요성을 외쳤어야 했다. 그리고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잘못된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원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으면, 그것을 바로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한 채 쉽게 배턴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줌으로서 결국 올바른 구원관의 퇴보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주에 한 번 더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루터가 중세의 500년간 잃어버린 회개를 되찾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정말 기뻐 춤을 추어야 한다. 비록 그가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연옥의 실상에 대해서 분명한 관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이 땅에서 수고하는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밝히 드러내 주었다. 또한 참회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현재 살고 있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가 되었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히 사함을 받는다는 것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상관없이 죄용서가 일어난다는 것도 밝히 드러내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는 사람이 죄용서받는 것까지는 잘 말했으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무시해 버렸고 그것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회개만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죄용서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사탄에게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사수해야 할 진리는 바로 진정한 회개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며, 이 땅에서도 벌을 면죄해 준다는 사실이다.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래서 이 시대에 주님께서 알려 주신 회개 이후의 삶에 관한 말씀들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회개되어진 자유 의지로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는 날,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 얻고 보좌 자리를 차지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 가까이에 서서 주님께 찬양하고 감격하며 예배할 그날을 위하여...
2022년 07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