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마4:18~22) [일시] 2023년 07월 09일(주일) 오전9시, 11시 [찬송] 찬 30장 전능하고 놀라우신, 찬 285장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찬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PW: 믿음, MIW: 따라가는 T.S: 믿음이란 주님의 부르심의 때가 있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알고 주께서 부르실 때에 즉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부르셨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사역을 이해하고, 자신을 도와서 천국복음을 전하며, 이 땅에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을 계속적으로 계승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일까요?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을 따라 걸어다니시다가 4명의 첫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자, 그들이 곧 자신의 모든 생업과 혈연적 관계마저 내려놓고 주님을 뒤따라갔다는 말씀입니다.
왜 주님은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자를 부르시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바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인가요?
첫 4명의 제자는 왜 주님이 부르시자마자 자신의 모든 생업도 포기하고 부친마저도 놔 둔 채 주님을 따라간 것인가요?
베드로는 결혼하여 아내도 있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인가요?
야고보와 요한은 어찌 늙은 아버지만 남긴 채 주님을 따라갔던 것인가요? 그것은 불효를 저지르는 행위는 아닌가요?
2)청중적 접근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A.D.27년경 예수님의 공생애의 초기에 있었던 일로서,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네 명을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4)문제발생원인
이때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따라서 걸어다니시다가, 첫 네 명의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먼저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마4:18-19 갈릴리 해변에(을 따라 나란히) [걸어]다니시다가, [그분은] 두 형제[들][을] [주목하여] [보셨다.] 곧 베드로라[고] 하는(말해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안으로) [투망]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니>, [왜냐하면] 그들은 어부라(어부로 있어왔기 때문이다) 19 [이에 그분이] 말씀하시되(하신다) [너희는] 나[의 뒤]를 따라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사람들의) 어부가 [장차] 되게 하리라(만들 것이다)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갈릴리 해변으로 가시다가 우연히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시고는 그를 불러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신 후에 자주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서 천국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떠나고 난 후에는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도할 사람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즉 주님은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우연히 베드로 등 네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즉흥적으로 그들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장차 교회의 주춧돌이 될 사도들을 그처럼 아무 생각없이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셨다’는 동사가 ‘호라오’라는 동사로서, 이는 그것을 “주목하여 보다. 유심히 보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일부러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안드레가 사는 곳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누구십니까? 그분은 이땅에 보내져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존재하는 그러한 아들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우연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만세전에 세우신 경륜을 따라,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복음을 전파하라고 이 땅에 보낸 사람들을 찾아서 가버나움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원래는 고향이 가버나움이 아니었습니다. 가버나움 옆 마을에 위치한 ‘벳새다’였습니다. 거기서 살다가 좀 더 잘 갖춰진 가버나움으로 이사온 것입니다. [그림]
요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여러분이 이곳에 이사를 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코로나로 인하여 회개와 천국복음을 접하게 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는 누가 예수님 자신을 계승하여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복음을 전파할 것인지를 생각하시고 그의 영혼을 이 땅에 내려보내셨는데, 바로 그를 찾아서 가버나움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큰 투망그물을 던지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내셨습니다. “나의 뒤를 따라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사람들의 어부들로 장차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즉시 그물을 그대로 놔둔 채 주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사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자기 집안의 가장으로서 결혼하여 아내도 있고 장모님과도 함께 살고 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한 것입니다.
막1:29-30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그리고 이어서 주님께서는 좀 더 앞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세베대가 두 아들들과 함께 그리고 마가복음에 보면 여러 삯군들과 함께(막1:20) 배 안에서 그물을 채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세베대’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그가 갈릴리 지방에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자, 그는 예수님의 이모부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베대는 예루살렘에 따로 그의 집을 갖고 있었고(요19:27), 휘하에 고용된 일꾼들로서 여러 삯꾼들도 갖고 있었던 부자였기 때문입니다(막1:20).
막1:20 [그리고 그분이] 곧(즉시) [그들을] 부르시니 [그러자]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고용된 일꾼들)과 함께 배[안]에 버려 두고(버려둔 후에), 예수[의 뒤]를 따라가니라
특히 세베대의 아내인 살로메와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서로 자매지간이기 때문에, 사실 세베대는 이모부인 셈이고, 살모메는 이모인 셈입니다. 그러니 요한과 안드레는 이종 사촌동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의 뒤를 따라 오너라”
그런데 안드레와 요한은 자신의 아버지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삯군들과 함께 놔둔 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부르시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을 것이지, 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사람을 부르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만세전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이 모른 채 그냥 일상적인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자신이 베새다에 살다가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것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예수님과 자신이 친척으로 연결된 것이 우연이라고 넘어갈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결혼하여 아내도 있고 장모님과도 함께 살고 있는 상황에서, 가정을 내팽개친 채 예수님을 따라가면 과연 누가 자신의 가정은 돌보나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주저주저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나이많이 힘이 약해져가는 아버지는 누가 도와주나 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머뭇머뭇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모르면, 지금이 바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를 것입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때가 지금이 아닌가를 알아차려, 하나님께 귀중하게 쓰임받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일꾼으로 어떤 사람을 부르시는가?
예수께서는 어렸을 적부터 목수였습니다.
마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고기를 잡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도 열심히 어부로서 한 팀이 되어서 고기를 잡고 있고, 그물을 수선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는 그들을 자신의 제자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자를 부르시지 않고, 왜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앞으로 교회를 세우고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람은 열심을 품고 충성되이 그 직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결코 게으르고 악한 자를 당신의 사역자로 불러내지 않으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고, 충성되이 맡겨진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왜 네 명의 첫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했는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목적으로 이미 주님께서 정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특히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기가 그러한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어떠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보내어졌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가 되면 그를 깨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을 주의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관심은 늘 영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지금 천국에서 144,000석의 보좌 가운데 베드로는 1번 보좌에 앉아있고 나머지도 3~4번 보좌에 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이 참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불러내셨는지 그 순서를 말하는데, 형제라고 해도 그 이름의 순서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마4:18 갈릴리 해변에(을 따라 나란히) [걸어]다니시다가, [그분은] 두 형제[들][을] [주목하여] [보셨다.] 곧 베드로라[고] 하는(말해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안으로) [투망]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니>, [왜냐하면] 그들은 어부라(어부로 있어왔기 때문이다)
마4:21 [그리고] 거기서[부터] 더 [앞으로]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들]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안]에서 [자기들의] 그물[들을] 깁는(채비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다른 형제보다 앞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 그 집안의 장자입니다. 가정의 책임을 지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결혼하여 장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안드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도 매우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차마 자신의 일을 내려놓고 그 일을 찾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 중에서 상대적으로 생활에 덜 책임을 갖고 있던 동생들이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드레와 요한은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두루두루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메시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가보았지만, 그는 메시야는 아니었고 메시야를 소개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선구자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쓰시고 있는 사람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곧바로 세례요한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요1:35-36 또 이튿날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40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러자 안드레는 곧바로 갈릴리에 있는 자신의 형인 베드로를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있는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
둘째,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실 자는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는 사람을 더 갈망하게 되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은 자신의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장차 이 세상에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자, 곧바로 예수님에게 다가갔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으로는 영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1:33-3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러나 이때는 아직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지 않는 상황인지라,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그런데 때가 되자 어느날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찾아와서는 자신의 제자라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기를 많이 낚아올려도 베드로와 안드레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고기를 많이 잡아서 예루살렘에 내다 팔아도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도 야고보와 요한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들어 이 땅에 보내실 때에 고기잡는 사람들로 이 땅에 내려보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는 풀을 뜯어먹어야 행복하고, 거미는 거미줄을 쳐야 행복한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장차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을 만들어야 할 사람으로서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들은 결단코 이 세상 일에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을 잘 벌고,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남들이 이야기를 해도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어딘가에 허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그 사람들은 고기잡이로 평생 살라고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국복음을 깨닫고 천국복을 전하라고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이모부 동네에 여럿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들을 그리로 창조주 예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중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옆 동네인 벳세다에 살다가 이사왔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예 그 동네여서 처음부터 살고 있었고, 부자여서 예루살렘에도 집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장차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에 그들이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세리였던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도 이 동네에서 세리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벳세다에서 살 때 한 동네에 살면서 알고 지냈던 빌립도 그 근방에 있었고, 늘 성경공부에 집중하면서 언제 메시야가 오나 무화과나무 밑에서 공부하던 나다나엘(바돌로매)는 빌립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연결되어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려 7명(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마태, 빌립, 나다나엘)이나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서로 형제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형제와 부모자식 그리고 부부의 안배를 허락하시기도 하십니다. 예를 들어, 수 억 명의 사람들 중에서 24장로에 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윗과 솔로몬은 부모와 자식 사이입니다. 그리고 유다와 요셉,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서로 형제간입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사라, 다윗와 밧세바는 서로 부부지간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받다가 천국에 들어가서는 위대한 지위를 얻고서 영광스럽게 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다. 주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주께서 나를 부르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 현재 어떠한 풍족한 삶이 내게 주어졌다고 할지라도 천국에 관한 영적인 일이 아니라면 삶에 만족이 없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는 만족함이 없고 늘 영적인 갈급함이 있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보내실 때에 세상 일에 성공하라고 이 땅에 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나이도 애가 아닙니다. 나이가 작아도 말에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벌써 다릅니다. 영적인 일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일지라도 영적인 나이가 높기에, 자신을 지도해줄 영적인 리더를 만나면 그렇게 행복해 합니다. 거기에 모든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주님이 부르신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지금 당장 내려놓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미련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런데 그중에는 하나님께서 시대에 쓰시는 사람으로서, 특별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사역자로 내려 보내신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은 개인적으로 특별히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는 희귀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도바울을 도와서 함께 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실라, 디모데와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도와서 복음전파에 매진했습니다. 그들도 천국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변화되어 예루살렘 교회에 합류했던 자들로서, 스데반이 있었는데, 그도 베드로처럼 여러 군중들을 향해 설교할 수 있는 달란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명의 헬라파 유대인이었지만 7명의 집사에 뽑혔으며, 나중에는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여, 천국에서 순교자로서는 최고의 지위를 갖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쓰시는 사역자를 돕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3)청중의 문제와 해결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주님의 부르심의 때가 있고 나를 이 땅에 보낸 목적을 알고 주께서 어떤 목적으로 자신을 부르시던지 그 부르심에 목적에 따라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복
가. 헌신자가 받는 복
나. 청중의 더 큰 복
2)결단
모든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처럼, 사도바울처럼 쓰임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쓰임받느냐 하는 그릇의 크기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한 달란트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다섯 달란트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할 분량만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일에 충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많은 것으로 내게 맡겨주실 것입니다.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마25:22-23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받아들이는) 자는 선지자의 [보]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받아들이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보]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큰 교회 목회하다가 성도들을 성밖으로 보내고 지옥에 떨어뜨린 목회자가 혹시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매우 초라할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개척교회라도 주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는 자는 천국에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나. 결단의 축복
이 땅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기잡이로서 30년 가까이를 살아왔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과감히 주님의 뒤를 따라갔던 네 명의 첫 제자들은 지금 저 하늘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위해 오늘도 회개와 천국복음을 힘차게 전합시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1. 주여, 주께서 불러내어 쓰시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 주여, 주께서 쓰시는 사람은 영적인 일에 매우 관심이 있는 사람이요, 또한 영적인 갈급함이 더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3. 주여, 주께서 하늘나라를 위해 쓰시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귀한 지위와 신분이라도, 그리고 어떠한 직업이라도 과감히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4. 주여, 하늘나라의 사역자들의 모든 경험은 결코 우연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5. 주여, 사역자들 중에는 형제와 부모자식 그리고 부부의 안배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6. 주여,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사명에 눈을 뜨지 못했나이다. 용서해 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1. 주여, 이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2. 주여, 이제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가겠습니다.
3. 주여, 이제는 모든 것이라도 내려놓겠습니다.
4. 주여, 이제는 하늘나라를 위해 살겠습니다.
5. 주여, 이제는 주님이 쓰시는 사역자를 돕겠습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1.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거룩한 부르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2.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를 향한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환경을 통해 막고 있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3.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4.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의 분량을 감당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연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구나.
2. 내가 어디로 이사하는 것도, 하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도 거룩한 일을 위한 하나님의 안배 그 자체였구나.
3. 주께서 쓰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이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며, 영적인 갈급함에 늘 목말라 있구나.
4. 주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구나.
5. 하나님의 사역에는 형제와 부모자식 그리고 부부의 안배도 들어있구나.
6. 하나님의 사역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 많은 복을 안겨 주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