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어디에 드려야 하는가?(약2:1) [일시] 2017년 9월 3일 주일낮예배설교안 [찬송] 찬30장 전능하고 놀라우신, 찬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찬215장 내 죄 속해주신 주께 PW: 믿음, MIW: 주님 T.S: 믿음이란 예수님을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동안 9월 특별새벽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기도와 간청기도에 있어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인 일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자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자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는데 그냥 왔다가 그냥 가셨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전능자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는데 몇 명의 알게 사역하다가 가셨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닌데, 전능자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 흔적을 남기고 가시지 않았겠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그러한 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들이 있을 것입니다.
전능자께서 오셨다가 가셨다는 증거들은 첫째, 그때 당시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 그 증거입니다. 소경들과 못 듣는 자들이 실제로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중풍병과 문둥병에서 나은 자들이 증거입니다. 특히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증거입니다. 그리고 둘째, 주님께서 행하신 것들을 직접 목격했고 경험했던 제자들이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자기도 붙잡히면 예수님처럼 붙들려가서 죽임당하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사건이 있고 나서 그들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에게 2가지를 깨우쳐주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구나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 예수께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구나를 깨우쳐 주었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그때부터 담대히 세상으로 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널리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부활은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만약에 그때 제자들이 실제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나가서 증거하고 다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는 그들을 산헤드린공회가 가만 놔두었습니까? 그들을 붙들어다가 거짓증거죄로 재판을 받게하고 감옥에 쳐넣거나 신성모독죄로 아마 죽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산헤드린공회에서는 단 한 번도 제자들을 거짓고소죄를 고소했다거나 재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뒤저보아도 산헤드린공회의 기록 속에는 제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교는 없어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기독교만 전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도바울 말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된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의 장로들의 대표로서 예루살렘교회의 의장격이었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흩어진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이제는 주님이요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외모로서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목수의 일을 감당했던 형에게 어떻게 영광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과 함께 수십년을 동고동락했던 형인데 어떻게 그분을 약속된 메시야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과 함께 똑같이 밥먹고 일하고 안식일이면 회당에 다니던 형을 어떻게 되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2)청중적 접근
오늘날 만약 누가 자신이 함께 살았던 형을 갑자기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A.D.62년경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언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전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4)문제발생원인
이때 야고보는 자기민족이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는 예수님의 종이며, 예수님이야말로 영광의 주님이시오, 메시야이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구약에 약속되었던 메시야라고 간증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장차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할 수 없습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과 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이제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며, 약속된 메시야요 장차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 증거하다가 산헤드린공회에 붙들려가 심문받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육신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서는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인가요?
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소개하고 있는 야고보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우리는 앞에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라고 소개해왔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인물이 최소한 4명 이상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직접 제자로 뽑았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 그리고 가룟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의 아버지인 야고보,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를 예수님의 친동생이라고 볼만한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요?
첫째, 야고보서를 보면, 그는 회당예배에 익숙한 사람이고(약2:2), 하나님을 만군의 주이자(약5:4) 한 분으로 알고 있으며(약2:19),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으로 둔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약2:21). 둘째, 적어도 이 편지가 쓰여질 A.D.62년 당시 그는 예루살렘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욥기서와 잠언 및 구약의 율법에 대해 해박한 자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말씀도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영광의 예수그리스도이자 주님이라는 분명한 깨달음과 변화를 경험한 자요(약2:1), 자신은 예수님의 종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약1:1)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시에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구별할 때에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자라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영광의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자라야 합니ᅟᅡᆮ.
결국 신학자들은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3가지 조건을 다 갖춘 자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세베대의 아들이자 사도요한의 형이었던 야고보는 이미 A.D.44년경에 헤롯 아그립바왕에 의해 순교당하고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A.D.62년까지 살아있는 분명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더욱이 행15장을 읽어보면, A.D.49년경 예루살렘공회의 때에 이방인들의 율법준수문제를 논의하고자 모인 자리에서 회의의 의장격을 맡고 있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였기에 더욱 확실합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 능통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율법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잘 알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 중에서 주께 돌아온 이들에 대해서는 4가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만을 주의하도록 조치하면 좋겠다고 말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입니다.
또한 그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갈1:18-19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갈2:8-9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나. 야고보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했나?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주의 친동생 야고보가 자신의 형인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요, 자기자신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고백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야고보서에 나온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약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약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첫째, 약1:1에 의하면, 야고보는 예수님을 주님이요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고, 자신을 종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하나님이자 메시야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째, 약2:1에 의하면,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요,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여호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이라고 칭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주님’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칭하고 있는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본문은 야고보서에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야고보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
약1:5-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잠언과 같은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깨달으려면 지혜가 구할 것을 이야기하면서, 지혜를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며, 그분이 곧 주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또한 예수님도 동일하게 ‘주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2:1에서도 야고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또 있습니다.
약5:7-9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여기서 야고보가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는데, 이때 주님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재림하실 때의 예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엄한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심판주가 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적어도 25년이상을 형과 함께 살았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대체 어떻게 되어서, 자신의 형을 메시야요, 주님이자 주인이요,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사실 예수께서 나이 서른살이 되었을 때 집을 떠나 요단강으로 나아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부터 어느정도 이상한 낌세를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줄곧 자신의 형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날에 드디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열리더니 성령께서 눈에 보이는 비둘기 형태로 내려오셨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광야에 가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돌아와서는 귀신들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치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더니 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율법을 가르쳐주시고 그들에게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3대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왔는데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려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7:3-5 그의 형제들이 말하기를 "여기를 떠나서 유대로 가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제자들도 당신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하소서.4 자신이 드러나게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비밀리에 무엇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이런 일들을 하실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소서."라고 하더라.5 이는 그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더라.[개인번역]
이 본문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형이 뭔가를 하고 있는 것에는 분명하지만 그를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25년이상을 형과 함께 살아왔던 야고보는 설마 자신의 형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그동안 사람인 형으로써 25년이상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안수하여 병자 몇 명만을 고치셨을 뿐 능력을 전혀 행할 수 없던 지역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께서 태어나고 자라나신 나사렛이었습니다.
막6:2-6 안식일이 되어 [그가]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그렇습니다. 나사렛동네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수님은 마리아의 큰 아들이요 청년인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자기 동네를 찾아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사9장에 나오듯이 갈릴리를 거점으로 사역하실 것이라는 메시야이신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들 동네에서 자라난 청년이며 목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 세상 사람 중에서 누가 가장 예수님의 메시야되심과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고향사람인 나사렛사람들보다 더 예수님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자들 곧 그의 동생들일 것입니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예수님의 여동생들일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의 친동생들마저 예수님이 메시야요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나이 서른살이 되기까지는 자신을 철저히 제한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인간으로서 부여된 권한과 지혜만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부어지는 순간, 그때부터 주님은 자신의 제한을 어느 정도 푸셨고, 세상 앞에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다. 야고보는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나?
하지만 야고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니 완전히 돌변하다시피 변했습니다. 당시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이자 만군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체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요? 그것은 그가 자신의 형이 메시야요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3년반이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형님이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3년째 되는 유월절에 형님께서 아무런 저항없이 붙잡혀 가시더니, 그만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의 형을 메시야요 하나님으로 믿지는 아니했지만 그래도 뭔가를 하고 있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무심하게도 그냥 저주스러운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형이 말했던 것을 기억해내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어느 초기교회 역사가의 기록에 의한 본문을 인용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형님께서는 분명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약속했었지. 그럼, 나는 형님이 다시 살아나서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으리라”고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3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열한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야고보 자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계속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어느날에 정말 주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여, 보라, 이제 내가 부활했으니 자 나를 보고 떡을 먹도록 하여라.” 예수께서 일부러 자신의 친동생 야고보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은 성경도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15:7).
고전15:4-8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들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바울에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야고보 앞에 나타난 사건은 실로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혹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절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스스로 살아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께서 사망의 음부의 열쇠까지 가지고 계시는 전능자인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그동안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것도 다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순간 그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것을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첫째, “절대 의심하지 않아야겠구나” 결단했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곁 같기 때문입니다(약1:6). 그리고 둘째, “사람을 절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아니 되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약2:1의 말씀입니다. 자, 약2:1의 말씀을 직역해보겠습니다.
약2:1 내 형제들이여, 너희는 우리의 주님 곧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외모로 취함 안에서 가지지 말라.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형을 외형적인 모습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형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셔서 감춘 다음, 때가 차매 그의 일을 이룬 것을 몰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이전에 예수님을 목수인 형님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렇게 형님을 통해서 일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마가다락방에 돌아와서 열흘동안 기도할 때에 어머니의 간증도 야고보를 변화시키는데 한 몫 했습니다(행1:13~14). 그것은 어머니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던 분이라고 비로소 처음으로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마가다락방은 온통 회개하고 통회자복하는 눈물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열흘만에 약속대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죽기살기로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들의 시대에 일하셨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야고보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시간적으로는 하루차이지만, 그의 시각은 완전히 변해있었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메시야요, 주님이요 하나님이라는 것이 믿어졌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오셔서 정말 하시고자 했던 소원을 자신이 이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셔서 인류구속을 성취한 사건을 들어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라. 그렇다면 오늘날이라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발견하는 자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첫째,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무엇을 먼저 추구해야 하는지 선명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준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둘째, 주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일에 자기자신도 내어드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말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목수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요 메시야이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복
가. 헌신자가 받는 복
결국 야고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경륜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폭적으로 그 은혜가 자기의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예수께서 인류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에 자신도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내어드렸습니다.
그는 훗날 너무나도 많은 유대인들을 개종시키자, 산헤드린공회에 불려갔고, 거기서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그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세상의 심판자요, 메시야이십니다”고 고백함으로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하늘에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나. 청중의 더 큰 복
우리도 부활이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역사적인 증거임을 믿고 전폭적으로 주님을 붙들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통해서 죽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전능자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전능자가 오셨다가 가셨는데 그냥 가시지 않고 증거를 남기고 가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전능자가 남기고 간 가장 큰 증거는 부활이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를 바꾼 사건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이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예수님은 메시야요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주님을 만난 자는 그때부터 인생을 달리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나이다.
주여, 이제는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을 믿나이다.
주여,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신 것을 믿나이다.
주여, 전능자가 왔다가 갔다는 것을 믿나이다.
주여, 전능자께서 부활을 증거로 남기고 가셨음을 믿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지 못하게 한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예수님이 누군지를 발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예수님이 누군지가 깨달아질지어다. 그분께 내 자신을 드릴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전능자가 오셨다가 가셨는데 증거를 남기셨구나.
2. 부활의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명백한 증거였구나.
3.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저자로구나.
4.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놀랍도록 변화되는구나.
5.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구나.
6. 지금은 하나님도 주님이시오, 예수님도 주님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