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의 본향은 어디인가?(히11:8~16) [일시] 2019년 09월 15일 주일낮예배설교안 [찬송] 찬37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찬438장 내 영혼이 은총입어, 찬486장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PW: 믿음, MIW: 본향 T.S: 믿음이란 더 나은 본향을 위해 사는 것이다. |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고향”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제일 처음 떠오르는 것은 동요입니다. “고향의 봄”, “오빠생각”, “섬김아기” 등의 동요입니다. 그중에서도 이원수작사, 홍난파작곡의 “고향의 봄”은 압권입니다.
1.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향”하면 동구밖, 어머니, 소꿉놀이, 진달래꽃, 푸근함, 정겨움, 그리움, 설레임 등이 떠오릅니다. 저와 같은 386세대의 남자들은 자치기, 말타기, 나이따먹기, 가이생 등이 떠오를 것이며,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 깨끔발 딛고 선을 건너갔다가 건너오기 등이 있을 입니다. 왜 그런가요? 동심의 세계에서 고향은 우리가 처음으로 접한 이웃이었고 친구였으며, 무엇보다도 따듯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흔적이 가득 배어있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고향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1장의 “본향 찾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족장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고향은 과연 어디인지, 그리고 우리가 진정 가져야 할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기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동했지만, 그곳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다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기자식에게 전해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왜 아브라함은 자기의 고향이 있었지만 한 번도 자기의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도착했어도, 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지도 않았고, 그곳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자들 혹은 체류자들이라는 이름을 들으며 살았던 것일까요?
2)청중적 접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의식 속에 과연 고향은 어디일까요?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이게 하는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요?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작자미상으로 알려져있는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A.D.64~67년 사이에 아마도 로마에서 쓰여진 편지 중에서 “믿음장”이라고 일컫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4)문제발생원인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줄 땅이 어딘지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려준 말씀만을 믿고 따라나서서 결국에 가나안 땅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땅과 사람들을 결코 정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불림을 받고, 텐트에 거주하다가 자식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주고 눈을 감았다는 말씀입니다.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의 것들을 취하는 데에만 몰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남을 해치더라도 내 것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진정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만 놓쳐버립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늘의 것들에 대한 샘플에 제공해준 이 땅의 것을 진짜로 알고 이 땅의 것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늘에 준비된 약속의 도성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늘에 준비된 새 유업의 땅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늘에 준비된 유업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만 믿음이 식어버립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식들에게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물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식들에게 하늘에 속한 기업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른채 살다가 눈을 감게 됩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과 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준비해놓으신 도성을 바라보고 그 도성의 주인공이 되도록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 본향(本鄕,Homeland)과 고향(故鄕,Hometown)의 차이점은?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히브리서 11:14에 보면, “본향”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15절에도, 16절에도 나오지만 헬라어원문에 보면, 히11:14에 단 한 번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말로 ‘본향’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본향’은 ‘본래의 고향’의 준말로서, ‘고향’이라는 단어오ㅘ 동일한 단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고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국어사전에 보면, ‘고향’은 보통 4가지 의미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을 가리킵니니다. 둘째,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셋째,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넷째, 미자막으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마음 아프게도 이러한 고향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요, 부모의 직장에 따라 초등학교도 여러 번 옮겨 다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0~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에서 살았기에 마음에 고향이 있었습니다.
나. 아브라함의 생애에 나타난 고향(본향)은 어디였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고향’은 대체 어디였을까요?
창11:27-28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의 고향은 사실 “갈대아 우르”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70세에 첫째아들 하란을 낳았고, 120세에 둘째아들 나홀을 낳았으며, 130세에 셋째아들 아브람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첫째아들 하란은 아들 롯과 딸 둘을 낳았는데, 첫째 딸은 밀가이며, 둘째 딸은 이스가입니다. 데라의 둘째아들은 밀가와 결혼하였고, 셋째아들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사래와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가 태어난 곳은 “갈대인의 우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우르’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야살의 책에 의하면, ‘우르’는 함의 손자, 구스의 아들은 니므롯의 도시였습니다. 니므롯을 함의 손자로서 당시 최초의 강한 자가 되어 사람들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이때 사람의 아들들이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하고 반역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가죽옷이 함이 훔쳐내어 그의 아들 구스에게 주고, 구스는 자신의 여섯째 아들 니므롯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입자 그가 강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니므롯은 데라를 자신이 군대의 통치자로 세웠고, 그가 그를 위엄있게 하고는 그를 그의 모든 통치자들 위에 높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24:2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말하기를 우리의 조상 데라가 유브라데강 저편에서 우상을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고향은 분명히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을 ‘갈대아 우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곳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긴 하지만, 그는 그곳을 결코 그리워하지 않았으며 일평생 한 번도 가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본 이삭의 배필을 구하러 자기집의 모든 소유를 맡고 있는 늙은 종을 메소보다미아의 하란에 보내는데, 가서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때 늙은 종이 말합니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 곧 갈대아 우르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늙은 종에게 말합니다.
창24:6-7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갈대아 우르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에게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고향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장래에 유업으로 받을 땅을 향하여 나아가기는 했지만, 거기에서도 여전히 낯선 자와 체류자로서 살았다고 본인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절).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취하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낯선 사람들)과 나그네(체류자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이 땅에 있는 어떤 곳을 자신의 고향 곧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고향은 어디였을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이 돌아갈 고향을 이 땅에 있는 어떤 지역으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시어 주신 땅에 들어갔어도 그 땅에서 자신을 “낯선 자들”이요, “체류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고향은 어디였습니까? 놀랍게도 그의 고향은 하늘에 있는 도성 곧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히11:9-10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체류)하여, 동일한(바로 그)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주]하였으니(나그네로 살았으니) 10 이는(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런데 9~10절을 헬라어원문으로 읽어보면, 그가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고향이 어디였는지 좀 더 실감이 납니다.
히11:9[원문] 그는 믿음으로, 바로 그(동일한) 약속을 함께 상속받은 자들인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 안에 거주한 후에, 외국 사람처럼 약속의 땅 안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히11:10[원문] 왜냐하면 그(아브라함)가 설계자이시고 건축가이신 하나님의 도성을 가지고 있는 터(기초)를 기대하고(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 안이 바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도 이 땅은 임시장막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름받은 즉시 하늘을 바라보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 자신을 위하여 준비해놓으신 도시 곧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의 터를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설계하시는 설계자이시며, 그분이 지을 짓는 건축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0절). 그는 이 땅에 있는 집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자를 생각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그분이 하늘에 준비하고 계시는 그 성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본향’이라는 헬라어단어를 통해서도 우리는 ‘본향’ 혹은 ‘고향’이라는 단어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본향’은 ‘파트리스(patri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파트로스(아버지, 조상)’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파트로스’는 ‘아버지 혹은 조상, 선조’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실 “본향”혹은 “고향”이라는 말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의 땅(나라, 고을)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다. 누가 하늘의 본향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본향은 우리가 원래 있다가 나온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 온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어가야 할 땅을 육적인 고향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늘의 계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처소 곧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은 영적으로 볼 때, “아버지의 나라”이자 “아버지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아버지의 나라이자 아버지의 땅을 사모하는 자가 저 하늘에 있는 본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내가 나고 자란 나라가 아니며, 내가 나로 자란 땅이 아닙니다. 내게 하늘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2)청중의 문제와 해결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이 땅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복
가. 헌신자가 받는 복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갈대아 우르도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손대대로 주시겠다고 약속한 가나안땅도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더 좋은 본향을 열망하니, 그에게 2가지를 복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둘째, 그들을 위하여 한 도성을 예비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나. 청중의 더 큰 복
2)결단
고로, 만약 우리가 진정 들어가야 할 곳을 이 땅의 처소가 아니라 하늘의 본향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취하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것을 많이 취한다고 해서 하늘의 것을 많이 취하는 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것을 나눠주는 자가 하늘의 것을 더 많이 취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걸어간 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땅에서 자신을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아내가 죽자, 아내를 위해 매장한 땅이 필요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는 가나안 땅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헷 족속의 에브론에게 은400세겔을 주고, 막벨라의 굴을 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먼저 죽은 아내 사라를 파묻어줄 매장지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가 사용할 매장지 정도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 세상은 잠시 다녀갈 거류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왜 권력을 쟁취하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그리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왜 그토록 파렴치한 일들을 자행합니까? 왜 남을 짓밟고 그 위에 올라가려 합니까?
그는 지금 진정한 자신의 본향이 어딘지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우리가 장차 이사가야할 본향은 여기가 아닙니다. 이 땅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아닙니다. 그곳은 아버지의 나라요 아버지의 땅입니다. 그곳은 “파트리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땅에 대해 큰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실 그곳의 집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땅이나 이 육신은 잠시 빌려쓰는 임시처소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아웅다웅해서 아니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을 잠시 다녀가는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가.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저 영원한 곳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았다면, 이제는 이 땅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잠잘 곳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 결단의 축복
고로, 이제 우리 모든 성도들은 다 하늘 아버지가 계신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이 땅에 고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께 살아계실 때에 찾는 곳입니다.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점차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느날 집이 무너지면 더더욱 그 흔적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명절 때만 되면 그 머나먼 길을 떠나 고향땅을 밟으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곳에 아직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내가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던 추억이 깃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가족개념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함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날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살았듯이 우리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가서 살게 될 집의 설계자이시며, 건축가이신 우리 주님을 향하여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에 천국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있으며, 그것을 주님께서 물려주기를 원하신다고 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본향을 찾는 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우리의 아버지의 나라”이며, “우리의 아버지의 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생명으로 영접한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양장의 영을 넣어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아버지 마귀의 자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무엇을 가지지 못해 안달입니까? 무엇을 쟁취하지 못해 안달입니까?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막벨라굴 정도만 있으면 족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너무 취하려 하다가 남을 해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도 있습니다. 베푸십시오. 하늘에 올려두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복음성가 가운데서도 제일 좋아하는 찬송의 하나는 “노래하는 순례자”입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우리가 사모해야 할 본향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 땅은 우리의 육신의 고향일 뿐, 우리의 생명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의 본향은 우리의 아버지의 나라, 우리 아버지의 땅인 천국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 땅에서 믿는 자는 낯선 자요 체류자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늘 위에 준비된 도성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그동안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더 열렬히 사모하지 못했나이다. 용서해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하늘의 본향을 열렬히 사모합니다.
주여, 이제는 이 세상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립니다.
주여, 이제는 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립니다.
주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도성을 열렬히 사모합니다.
주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유업을 열렬히 사모합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늘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지금 당장 내려놓을지어다. 하늘에 있는 본향의 것들을 사모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믿는 우리가 사모해야 할 본향은 이 세상에 있는 고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본향이로구나.
2.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자는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구나.
3. 우리의 본향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나라이자 우리 아버지의 땅이었구나.
4. 아버지의 나라와 땅을 늘 사모하는 자가 결국 저 하늘에 있는 본향에 들어가는구나.
5.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 새 예루살렘 성을 준비하고 계시는구나.
6. 이 땅에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만이 저 하늘에 있는 본향에 들어가는구나.
히브리서11:8~16[헬라어직역]
(08)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가 계속해서 받으려고 하는 밤, 그곳 안으로 (단번에) 나가는 것을 순종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고 있는 곳을 알지 못하면서 나갔다.
(09) 그는 믿음으로, 바로 그(동일한) 약속을 함께 상속받은 자들인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 안에 거주한 후에, 외국 사람처럼 약속의 땅 안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10) 왜냐하면 그(아브라함)가 설계자이시고 건축가이신 하나님의 도성을 가지고 있는 터(기초)를 기대하고(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역시 믿음으로 임신못하는 사라 자신도, 나이의 시간을 넘었으나, 씨의 창설을 위한 능력을 받았다. 왜냐하면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2) 그러므로 죽게 된 채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하늘의 허다한 별들과 그리고 바다의 해변을 따라서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
(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죽었고.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는(취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것들을 멀리서 본 후에 그리고 환영한 후에 그리고 땅 위에서는 낯선 자들(외국인들)과 체류자들(나그네들)인 것을 고백한 후에.
(14)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고향을 열심히 찾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15) 그리고 만일 참으로 그들이 나왔던 저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면, 그들은 [단번에] 돌아갈 결정적인 시간(기회)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16)그런데 그들은 이제 더 좋은 곳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곳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계속해서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한 도성을 준비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