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핵심>
1.서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가?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질문 가운데 한 가지다. 어거스틴 및 루터는 우리 인간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의지만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어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빠졌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예정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구원받을 수 있는 의지는 인간에게 전혀 없는가?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도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가?
2. 말씀요약 및 문제제기
오늘 말씀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께서 피곤해 지쳐있으며 이미 짐이 지워져 있는 채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자기에게로 나오기를 초청하시지만,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분에게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피곤해지쳐 있고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사람들을 그냥 건저주시지 아니하시고 왜 당신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셨을까?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해 있고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다 해주셔야 하지 아니 한가?
3. 문제해결
가. 왜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향해 당신에게로 나오라고 하는가?
왜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당신을 향해 나오라고 그리고 와서 먹고 마시라고 초청하시는가? 천국은 잔치집과 같다 하셨는데, 왜 사람들로 하여금 잔치집에 와서 먹고 마시라고 부르시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옛 주인은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죄된 본성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은총을 베풀어주실 때에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나. 인간은 정말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인가?
칼빈은 어거스틴과 루터의 영향을 받아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기에, 구원의 문제를 사람에게 맡겨두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죄를 지어 지옥에 들어갈 가능성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전적타락과 전적무능교리로 선택하기 위해 사용된 본문은 모든 사람이 죄아래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 하나님을 찾거나 선행을 하는 이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롬3:9~12).
다. 자유의지를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이 완성된 후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구약 때까지는 율법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있다. 새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었다. 하지만 죄인인 인간은 또다시 꾀를 내었고, 성령을 선택하지 않은 채 오히려 죄된 본성 안에 머무르기를 좋아했다. 결국 자율적인 순종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방종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보니 믿음이 약한 형제가 먼저 믿은 자들에 잘못된 자유의지를 사용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잘못된 모습을 본받기도 하고 그 모습으로 인해 실족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지만 그것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방종케 하는 자유의지로 인해 믿음 약한 형제가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안에서 자유의지의 자율적인 사용권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맘대로 쓰는 것이 자유의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약2:12)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자유를 방종에 드리지 않고 자신의 육신을 쳐 복종시키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믿음 약한 형제를 살리고 옳은 대로 인도하는 것이다.
5. 복과 결단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속박에서 모든 사람을 풀어 자유롭게 해 주었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또 다시 꾀를 내어 겉으로는 성령을 따라가지 않고 육신을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의 결국은 불못행이다. 고로 우리는 자유의 율법을 자신에게는 엄하게 사용해야 한다.
<명령과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