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기도란 무엇이며 방언의 은사의 유익은 무엇이며 또한 방언기도의 단점은 무엇인가?
먼저, 방언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방언이란 일종의 언어의 은사인데 우리의 이성적인 감각기관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이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단어를 헬라어로 '글로싸'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총 46번 등장하고 있는데, '입'이란 뜻으로 1번(빌2:11), '민족이나 종족'이라는 뜻으로 요한계시록에 6번(계5:9,7:9,10:11,11:9,13:7,14:6), 말하는 '혀'라는 뜻으로 15번(막11:33,35, 눅1:64,16:24, 행2:4,26, 롬3:13,14:11, 고전14:9, 약1:26,3:5,6,8, 벧전3:10, 요일3:18),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사람의 영의 언어라는 뜻으로 24번 나온다(막16:17, 행2:4,11,10:46,19:6, 고전12:10,28,13:1,8,14:3,4,6,13,14,18,22,23,27,39).
첫째, 방언기도란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보자. 방언기도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사람의 영의 언어로 드리는 기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영이 드리는 그 기도소리는 사람의 다른 지문만큼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그 영의 언어가 단순하다 하여 영의 기도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치는 않다. 이것은 영의 언어 곧 방언기도를 통역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방언기도를 어떻게 정의했을까? 그는 방언기도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고전12:10,28,300. 그리고 이 은사는 거듭난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고, 영이 드리는 기도라고 했다(고전14:2,14). 쉽게 말해 이 기도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음가를 지닌 언어 곧 영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의 기도 곧 방언기도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방언기도는 아주 신령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는 오해요, 또 하나는 방언기도가 구원의 표라고 생각하는 오해다. 둘 다 아니다. 방언기도는 아주 신령한 사람만하는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이 거듭나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었을 때 그 영이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사람만이 한다는 것은 오해의 소치다. 영이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 방언기도이다. 뿐만 아니라 방언기도는 구원의 증표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도 오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를 하는 자가 구원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회개와 믿음(행20:21)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방언기도로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혹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해서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자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둘째, 방언기도의 유익은 무엇인가? 사람이 거듭나 자신의 영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방언기도는 성도에게 상당한 유익이 있다. 첫째로, 방언은 자신이 거듭났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방언는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됨에 따라 말하는 기도로서, 자신이 영의 거듭났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하지만 거듭난 영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님을 알라. 둘째로, 개인의 영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거듭나기 전 사람의 영은 죽은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이 거듭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채널이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말로 교제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하면 죽어있었던 자신의 영이 활동을 시작하게 됨으로 자신의 영을 깨우고 각성시키고 강화하는데에 매우 유용하다. 특히 이성으로 드리는 기도에 덧붙혀 기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게 된 것이다. 기도의 또 하나의 방편을 얻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4:4,2,14). 셋째, 악한 영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이 기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알아듣기 때문에 무슨 내용을 기도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귀신들은 방언기도를 많이 하는 자들을 두렵게 여긴다. 넷째, 이성적인 기도의 한계를 극복해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말로 기도를 하다보면 기도가 막힐 때가 있다. 그리고 기도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기도를 계속해서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때에 어떻떻게 해야 할까? 그때에 방언기도를 이성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보완할 수가 있다. 특히 이성적으로 드리는 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길게 잡고 기도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말해 방언기도는 이성적인 기도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방언기도의 단점은 무엇일까? 방언기도는 만능이 아니다. 방언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방언기도가 이성으로 드리는 기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고전14:14~17). 방언기도가 영적인 기도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이성이 드리는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방언기도가 자신의 영을 강화시켜주기는 한더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이성적인 말로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성으로 드리는 기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런 것으로는 요청하는 기도, 찬송하는 기도, 축복하는 기도, 감사하는 기도 등이 있을 것이다(고전14:14~17). 둘째,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가 회개와 믿음의 고백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과 지은 죄를 고백하는 일이나 예수님이 누군지를 고백하는 것을 영으로 말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귀신들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고백함으로 구원받아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육체를 가진 자가 자신의 마음와 입술로 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고백할 때에라야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롬10:9~10). 셋째, 방언기도가 인격이나 성품을 성숙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 변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에 어떤 부족함이 있는지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것을 바꿔달라는 청원기도와 더불와 강력한 회개가 동반될 때에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어떤 이는 방언기도를 많이하면 신령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인격도 변화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아무리 방언기도를 많이 한다하더라도 그 사람의 성품이 달라지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방언기도 그 사람을 천국보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방언기도는 이성적으로 드리는 기도에 덧붙혀 자신의 기도를 보완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금상첨화가 되는 기도다.
넷째, 이제는 마지막으로 성도의 기도생활에 어떻게 방언기도를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방언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이성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한 후에 그것을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즉 기도할 때에는 가장 먼저 통성으로 드리는 기도를 하라. 그리고 난 뒤에 방언기도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방언기도는 개인의 영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어떤 요청 용도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거나 필요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에 방언기도를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로, 가끔식 방언통역을 해보라는 것이다. 내가 드리는 방언기도가 어떤 내용인지를 전혀 모른채 기도할 때에는 "내가 혹시 쓸데 없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정도는 방언통역을 해보라. 그래서 자신의 영이 지금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라. 셋째,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결코 쉬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방언기도가 A.D.55년경 고린도교회를 끝으로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니다. 방언의 은사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오시게 되면 더 이상 필요없는 은사가 방언의 은사다(고전13:8~12).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해야 할 기도인 것을 알고 기도하기를 바란다.